장검의 밤

 


1. 개요
2. 배경
3. 장검의 밤
4. 피해자
5. 결과
6. 어록


1. 개요


독: Nacht der langen Messer
영: Night of the Long Knives
긴 칼의 밤이라고도 불린다. 독일어의 Messer의 뜻은 나이프이며 langen Messer는 메서를 확대시킨 것처럼 생긴 장검이다. 독일에선 룀의 반란(Röhm-Putsch)으로도 부른다.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돌격대국방군 내 반항 세력, 그 밖의 반 나치 세력[1]을 1934년 6월 30일 ~ 7월 2일에 걸쳐 숙청친위 쿠데타 사건. 히틀러 뿐 아니라 친위대가 새로운 권력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숙청은 매우 복잡한 이유로 벌어졌으며, 당시에는 몰랐지만[2] 히틀러가 절대 권력을 얻게 되어 제2차 세계 대전의 단초를 제공했다.
당시 일제 치하 조선의 신문에서도 장검의 밤을 헤드라인으로 장식했다. 1934년 7월 2일자 동아일보

2. 배경


아돌프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가 되자 나치당 이외의 모든 정당들을 해산시켰고, 자신의 반대 세력들을 탄압하면서 독재 권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살아있을 때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영웅이었던 대통령이 헌법과 국민들의 지지를 통해서 히틀러와 맞설 수 있었기 때문에 제 아무리 히틀러라도 아직까지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국방군은 아직까지도 바이마르 공화국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고 히틀러는 그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던 상황이였기 때문에 히틀러의 권력 기반은 아직 불안정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에른스트 룀이 이끄는 돌격대가 집권까지의 공적을 내세우며 마음대로 날뛰는 것은 가장 부담되는 일이였다.
1933년 여러 보수 자본가 세력의 도움으로 히틀러가 집권하고, SA는 법적으로 경찰에 준하는 지위에 올랐다. 나치가 힘을 얻은 만큼 SA도 기고만장해져, 지방 관청에 들이닥쳐 행정을 나치에 넘길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룀과 돌격대는 이제까지 해오던 대로 독일을 더 크게 변화시킬 작정을 하고 있었지만, 히틀러는 룀의 생각대로 독일을 바꿀 생각이 없었을 뿐더러 돌격대를 쓸 데 없어진 사냥개 취급을 했다. 그 이유는 에른스트 룀의 사상에 있었다.
그는 나치당의 사회주의 분파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었으며, '''사회주의적인'''(Sozialistische), '''노동자'''(Arbeiter) 등 사회주의적인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이 분파의 성향은 대체로 유대인 자본가들이 지배하는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산업의 국유화와 노동자 지배를 선호했다. 특히 제2제국 시대부터 내려오는 귀족들의 자산을 몰수하여 재분배하기를 원했고, 룀은 '''반동세력'''에 맞선 '''제2의 혁명'''을 주구장창 부르짖었다.
히틀러의 집권을 도운 자본가 세력은 이를 큰 위협으로 여겼다. 히틀러는 자본가들에게 '''제2의 혁명은 없다'''라고 말하며 안심시키려 했지만, 돌격대의 출신 성분조차 바꿀 수는 없었다. 상당수가 노동계급 출신인데다 전직 공산주의자가 득실거리는 상황으로 비유하자면 '''레어로 익힌 스테이크'''와 같은 상태(겉보기에는 나치당 제복의 색깔처럼 '''갈색'''이었지만, 그 속은 공산주의자들처럼 '''붉었다'''는 의미)로, 집권한 히틀러가 사회주의적 정책을 시행하지 않고, 자신의 집권에 지대한 공헌을 한 SA에 보답하지 않자 매우 실망하였다. 심지어 룀은 돌격대 지도자 모임에서 공개적으로 히틀러의 정책을 비난하기도 하였다.[3]
더더욱 위험한 것은 독일 국군(Reichswehr)을 바라보는 300만 SA의 시선이었다. 에른스트 룀과 SA 수뇌부는 구 프로이센 귀족들이 주름잡는 국군을 아주 싫어했으며, '''혁명정신이 떨어지고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 취급했다. 때문에 룀은 국방장관이 되고, 군대를 SA에 합병하여 '''진짜배기 인민군'''[4]을 창설하려 했다.[5] 당시 돌격대는 5개의 돌격대 상급 집단(군단에 해당)과 18개의 돌격대 집단(사단에 해당)으로 구성되어 독일 정규군의 5배에 달하고, 지휘관들도 전직 군인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하려고 하면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룀의 이러한 의중은 프리드리히 대왕 이래의 깊은 역사를 가진 군 수뇌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이들도 역시 '''거리에서 쌈박질이나 하며, 수뇌부라는 작자들은 동성애나 저지르는 오합지졸들'''로 구성된 집단 따위에게 국군을 들어다 바칠 의사 또한 전혀 없었다. 때문에 군과 SA의 갈등은 깊어져 갔으며, 히틀러 역시도 융커들로 구성되어 있는 전통적인 군부에 대해서 적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권력의 안정화를 위해서는 군부에 필요성을 느꼈기에 룀의 노선과는 갈라서게 되었다.
또, 돌격대에서 히틀러 개인숭배 대신 룀의 개인숭배가 강해지고 있다는 것도 나치당과 히틀러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룀과 돌격대가 군권까지 장악한다면 군대가 국가의 위에 있던 독일의 전통상 룀이 히틀러를 꼭두각시로 만들 가능성이 농후했다.
게다가 히틀러와 협력하여 그를 총리로 만든 독일 보수파는 돌격대와 나치당의 대립이 격화되자, 돌격대를 이용하여 히틀러를 격하시켜 정국을 바꾸려 하였다. 이러한 독일 보수파의 생각이 드러난 행동이 '마르부르크 대학교 연설'이다. 1934년 6월 17일 프란츠 폰 파펜기독교를 들먹이며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나치 정책에 반발하는 연설을 했다.

역사 앞에 바로 서기를 원하는 어떤 민족도 아래쪽으로부터의 영원한 봉기를 견디어낼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당 운동이 끝나야 합니다. 언젠가는 영향받지 않는 사법기관과 논란의 여지가 없는 국권에 뒷받침된 확고한 사회적 구조가 생겨나야 합니다. 영원한 역동성만으로는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독일은 허공으로 가는 행렬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부는 도이치 혁명이라는 구실 아래 사리사욕, 나약함, 진실하지 못함, 기사적이지 못함, 불손함 따위를 퍼뜨리고 있는 실체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정부는 독일 국민이 선물해준 믿음이라는 풍성한 보물이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국민에게 가깝고 국민과 결합되기를 바란다면 국민의 지혜를 모자란 것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 믿음을 키우면서 끝없이 후견인 노릇을 하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특히 젊은이를 자극하거나, 어찌할 바 모르는 국민의 엘리트를 위협해서가 아니라, 오직 국민과의 믿음에 찬 토의를 통해서만 자신감과 일하는 즐거움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지요.... 비판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악의에서 나온 것이라 해석되지 않고 약한 소리를 하는 애국자들이 나라의 적이라고 낙인찍히지 않는다면 말입니다.[6]

이 연설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는데도 큰 영향을 일으켰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황급히 이 연설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여러 해외 방송에 알려진 후였다. 결국 이 연설 후에 히틀러는 파펜과 만나 파펜의 '마르부르크 대학교 연설' 내용을 정책에 반영할 것이고, 특히 돌격대 문제를 해결할 것이며 괴벨스가 행한 파펜 연설의 언론보도 금지를 해제하겠다고 약속했다. 파펜에게 굴욕적일 정도로 양보해야 했을 만큼 히틀러는 좋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당시 독일 대통령인 86세 고령의 육군 원수,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히틀러가 계승하기 위해서는 군부를 휘어잡을 필요가 있었고, 때문에 어떻게든 SA의 영향력을 줄여야 했다. 이 때문에 룀은 히틀러에게 강하게 항의했고, 막무가내로 SA의 무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이는 반란 기도처럼 보일 소지가 충분했으며, SA의 군부에 대한 타협 시도도 계속 결렬되고 있었다.
1934년 4월 11일, 나치와 군부는 힌덴부르크 사망 이후의 방안을 논의하였다. 히틀러는 SA 축소와 룀의 영향력 억제, 국방군의 지위 보장과 군비 확장을 대가로 차기 대통령직 승계에 대한 지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국방군과 자본가들은 여전히 SA를 싫어했다. 다른 유럽의 국가들도 돌격대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군비제한을 피해서 군대가 아닌 돌격대를 키우는 방법으로 돌격대가 독일 군대가 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돌격대의 막무가내식 폭력행위로 독일 내에 있는 자국민들에게까지 공격과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강하게 문제삼았고 이것은 커다란 외교 문제로까지 번질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6월 21일, 나이가 많이 들어서 계속 건강이 악화되고 있던 힌덴부르크는 대통령 관저 대신 노이데크 성에서 요양 중이였는데 힌덴부르크는 국방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상급대장을 통해 히틀러에게 SA와 국방군 간의 갈등이 지속될 경우 계엄령을 선포할 가능성을 알리면서 군대가 정권을 이끌게 될 수도 있다는 최후 통첩까지 했다. 히틀러는 한낱 아첨꾼에 불과해 보이던 블롬베르크까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하며, 힌덴부르크 대통령 또한 이 경고를 확실히 밝히자 히틀러는 결국 룀의 처단을 결심했다.
루돌프 헤스는 6월 25일 라디오 연설에서 "혁명 게임을 하는 자들에게 위대한 혁명의 전략가인 아돌프 히틀러를 잘못 판단하지 말라" 고 경고했고 충성심을 버리는 자는 화를 입을 것이라면서 공개적으로 돌격대가 주장하는 제2의 혁명은 배신이라며 비난하였다. 그 사이 하인리히 힘러와 친위대는 군부에게 친위대의 규모를 설명하면서 이 정도 규모는 돌격대와는 달리 군부에 위협이 못 된다고 주장하면서 군부를 설득하였고 군부는 이를 수락하여 친위대에 무기와 차량을 지원받아 돌격대를 날려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힘러가 군부를 협상하고 있던 시각에 히틀러와 블룸베르크가 만난 자리에서 히틀러는 돌격대의 핵심 지도자들을 한방에 체포할 것이라고 말하며 구체적인 계획을 알려주었고 이에 블룸베르크와 군부는 협조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6월 27일 친위대 대원인 요제프 디트리히는 군부로부터 돌격대를 제압하는데 필요한 지원을 받기로 약속받았다.

3. 장검의 밤


히틀러는 룀을 처단하기를 매우 주저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돌격대를 기반으로 당내 2인자로 급부상한 룀을 견제하기 원했던 헤르만 괴링, 하인리히 힘러, 파울 요제프 괴벨스 등은 에른스트 룀의 처단을 벼르고 있었다. 괴링은 게슈타포를 힘러 휘하로 전속시켜 SA의 반역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캐내게 하였다. 힘러의 SS와 그 휘하의 보안대(SD) 사령관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룀이 프랑스에게 2000만 마르크를 받아 6월 24일 SA를 동원하여 히틀러 정권을 전복하려 했다는 거짓 증거를 만들었다. 이를 받아든 히틀러는 결국 룀을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괴링, 힘러, 하이드리히 등은 이 동안 계속 '''살생부'''를 작성하였고, SS에 동원명령을 내렸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동안 룀과 동료들은 바트비제로 휴가를 떠나 있었다. 6월 28일 히틀러는 룀에게 전화를 걸어 회의를 위해 6월 30일까지 모든 SA지휘관을 뭔헨의 바트비제 온천에 소집할 것을 요구했고, 룀은 별다른 의심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운명의 30일이 밝자, 히틀러는 직접 바트비제에 도착하여 힘러 휘하의 SS를 동원, 룀과 SA 지휘관들을 일망타진하였다. 요제프 디트리히는 친위대 2개 중대를 이끌고 뮌헨에 도착했고 뒤이어 히틀러도 합류했다. 그 직후 히틀러는 마중나온 뮌헨 돌격대 지휘관 2명을 보고 계급장을 떼어버리더니 "이놈들부터 일단 총살시켜"라며 말했고 그 2명은 영문도 모른채 체포된 후 다음날 총살당했다. 이유는 6월 29일 뮌헨에서 수천 명의 돌격대가 가두시위를 벌이면서 돌격대를 버렸다고 히틀러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일이 있었던 것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그 뒤에 직접 친위대 및 경찰 병력을 대동하고 바트비제 온천 인근 돌격대가 투숙하고 있던 호텔을 급습, 아직도 자고 있었던 에른스트 룀을 비롯한 돌격대 지도부를 전원 체포했고 이들을 뮌헨의 교도소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같은 날 정오경, 히틀러는 뮌헨의 나치 당사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룀이 쿠데타를 하려 했다'''고 폭로하였고 에른스트 룀과 그 동조자들을 처단하겠다고 선포했다. 이 선포로 인해 돌격대 지휘부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그리고 룀이 쿠데타를 하려 했다는 선포와 함께 베를린에서 나치 친위대와 독일 경찰들이 숙청 작업을 개시하여, 나치 돌격대와 함께 독일 내에 반나치 세력들을 숙청했다. 헤르만 괴링이 주도한 이 숙청은 베를린만이 아니라 뮌헨 등 독일의 주요 도시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돌격대뿐만 아니라 히틀러에게 도전하던 쿠르트 폰 슐라이허 등의 보수파 인사들, 그리고 히틀러의 정적들이 모두 숙청 대상이었으며 이 정적들에게는 룀의 쿠데타 기도에 가세했다는 누명을 뒤집어 씌웠다.
룀에 대해서는 히틀러가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처형이 아니라 자결할 기회를 주라고 지시했으며 룀이 자살을 거부할 때만 처형하라고 했다. 하지만 룀은 자결하라는 의미로 감방에 권총이 들어왔음에도 자결을 거부하다가 친위대 장교이자 다하우 강제수용소 소장인 테오도어 아이케에게 사살당했다. SA 숙청의 표면적인 이유로는 반란음모 혐의가 씌워졌지만, 이는 처형 며칠 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6월 30일에 일어난 이 일련의 사건으로 나치당 내의 좌익 계열은 일소되었으며, 이를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이라고 부른다.

4. 피해자


돌격대를 이용해서 히틀러의 집권을 도왔고 그에 따른 보답을 받기도 했으나, 국방장관이 되려는 지나친 행동과 자신의 세력을 믿고 여러 집단들을 적으로 돌리는 무리수를 두었다. 결국 숙청 대상자 1순위에 놓여 숙청당했다.
군 출신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 히틀러 집권 이후에도 주요 보수 정치인 중 한 명으로 히틀러를 견제했고, 아직도 군 내부에 어느정도의 지지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슈트라서가 정말로 여러 보수 세력과 위협을 가해오기 시작하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였고 결국 6월 30일 결혼한지 고작 2년밖에 안 된 신혼집에서 아내와 함께 총을 맞고 사망했다. 똥별의 아이콘이며 정치꾼이었기 때문에 국방군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슐라이허의 숙청을 반기는 후배들이 많았다고 한다.
나치당 초기부터 활동했으며 당 내 좌파를 대변했다.[7] 당권과 노선을 놓고 히틀러와 대립하다 힘을 잃었고, 결국 이른바 슈트라서 사태로 인해서 나치당이 거의 파멸될 뻔한 일을 제공했던 인물이다. 이 때문에 희생되었다. 슈트라서가 폭행당하고 고문당하고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을 때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와서 "그 돼지가 아직도 안 죽었나? 그 돼지가 죽도록 가만히 놔둬." 라고 했으며 그 때문에 슈트라서는 고통스럽게 죽었다고 한다.
그나마 파펜은 슐라이허나 자신의 비서들처럼 부부 동반으로 살해당하지는 않았다. 파펜은 전직 총리이자 히틀러 집권에 기여한 업적이 있었고, 무엇보다 힌덴부르크의 신임을 받고 있어서 히틀러가 함부로 제거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마르부르크 연설로 서방 국가의 주목까지 받고 있었기에 섣불리 파펜을 제거했다간 외교 문제로도 번질 수 있었다. 장검의 밤 당일 파펜이 찾아가서 항의하려 했던 바로 그 괴링이 파펜을 보호했다고 한다. 장검의 밤 5주 후에 힌덴부르크가 노환으로 사망한 것을 보면 운은 아직 남아 있었던 셈. 그래도 파펜에게 경고한다는 목적으로 측근들을 쏴 죽이고, 몇몇은 개울에 던져버렸다. 이후 모든 공직에서 사퇴당하고 가택연금되었으며 전쟁기간에는 터키 대사로 사실상 쫓겨났다.
  • 구스타프 리터 폰 카르(Gustav Ritter von Kahr)
뮌헨 폭동 당시 바이에른 주지사. 쿠데타 당시 히틀러에게 협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일을 잊지 않고 있던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피살되었다.
  • 에드가르 융(Edgar Jung)
파펜의 측근 중 한 명으로 문제의 마르부르크 대학 연설의 원고를 쓴 사람이었다. 역시 돌격대와 아무 관계 없음에도 파펜을 못 죽이니 꿩 대신 닭이라고 파펜에게 경고한다는 목적으로 죽여버렸다.
  • 헤르베르트 폰 보세(Herbert von Bose)
파펜의 공보비서. 역시 꿩 대신 닭이라고 파펜에게 경고하는 차원에서 파펜의 공보비서였던 보세를 죽였다.
  • 빌헬름 슈미트(Willi Schmid)
평범한 음악 평론가였음에도 살해당했는데, 사실 원래 나치가 죽이려 했던 대상은 루트비히 슈미트였다. 루트비히 슈미트는 당시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있던 오토 슈트라서[8]의 측근인데 해외로 망명해 있던 오토 슈트라서 대신에 그 측근을 제거하려던 것이다. 그런데 이름이 오류가 생겨서 엉뚱하게도 빌헬름 슈미트가 살해된 것이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슈미트의 유가족에게 개인적인 배상을 지불하였다.
나의 투쟁 편집에 참여했던 가톨릭 신부였다. 히틀러의 과거와 개인사를 지나치게 자세히 알고 있었고 특히 히틀러의 조카의 석연찮은 죽음의 진상까지 알고 있었던 이유로 살해당한다. 여담으로 살해된 곳이 매춘굴(..)
그 밖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는데 이 숫자가 약 500명이 넘는다는 보고도 있다. 뮌헨 폭동 당시에 도와주지 않고 내뺐던 사람들 그리고 옛날에 돌격대에 두들겨 맞은 후 히틀러를 고소해서 히틀러가 처음으로 감옥에 가게 만들었던 사람도 죽였는데 총으로 쏴 죽인 사람뿐만 아니라 '''칼로 찔러''' 죽인 사람도 있었다. 흠좀무.

5. 결과


[image]
'''이제는 두손들어 하일 히틀러!''' 영국의 만화가 데이비드 로우의 만평.
해외에서는 이 전대미문의 숙청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이건 조직폭력배나 할 일이지 총리가 할 짓은 아니였다"고 생각했으며 "이 사건은 명백히 히틀러가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이였으며 법적인 절차도 없이 이루어진 불법이였다"라며 히틀러를 맹렬히 비난했다.
나치당원 사이에서조차 히틀러에 대한 불만이 있었으며, 나치당 내부에서조차 에른스트 룀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자 히틀러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1934년 7월 13일 의회에서 연설을 하여 불만을 가라앉혔다.

"인간은 영원히 똑같은 강철의 법칙에 따라 반역을 파괴합니다. 누군가 어째서 정상적인 재판을 열어서 판결을 내리지 않았느냐고 우리를 비난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이 순간에 나는 도이치 국민의 운명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있었고, 따라서 도이치 민족의 최고 재판관이었노라고 말입니다!..... 나는 이 반역죄의 주동자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우리 내면의 우물을 오염시킨 종양을 빨간 살이 보일 때까지 잘라내고 소독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아무도 국민의 존재를 - 이것은 내면의 질서와 안전을 통해서만 확보되는 것입니다 - 위태롭게 만들고도 벌을 받지 않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누구라도 국가를 향하여 한방 먹이려고 손을 쳐들었다가는 더욱 확실한 죽음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9]

이 연설이 끝난 직후 국회에서는 히틀러에게 박수 갈채가 쏟아졌으며 시민들도 기뻐했다고 한다. 돌격대의 계속된 폭력 행위에 지긋지긋했던 시민들은 단호하고 과감한 결단으로 돌격대를 제거한 아돌프 히틀러의 결단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선전장관 괴벨스가 에른스트 룀이 쿠데타를 기도했으며 국가를 뒤엎으려고 한 반역자였기 때문에 룀을 숙청한 것은 정당한 행위였다며 선전을 하며 독일 내의 불만은 무마되었다. 나치에 반대하던 보수파는 한때 총리까지 지냈던 슐라이허와 파펜의 측근들까지 죽은 것을 보자 자신들도 언제든지 제거될 수 있음을 깨닫고는 겁을 잔뜩 집어먹었고, 자신의 측근들이 제거당한 파펜 본인조차도 겁을 잔뜩 집어먹고서 히틀러에게 불만을 제기하지 못했다.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장검의 밤 사건때 자신의 충복이였던 슐라이허 장군까지 참살됐는데도 감사를 표하며 '''"단호한 행동과 용감한 개인적 개입으로 반역의 씨를 미연에 제거하고 독일 국민을 커다란 위험으로부터 구하였다"'''라며 칭송할 정도였고, 계엄령을 선포하겠다며 히틀러를 위협했던 군부도 히틀러에게 만족하여 블롬베르크를 비롯한 군부 수뇌부가 히틀러에 충성을 맹세했다.
돌격대의 숙청 과정 중에서 합법적인 수단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독일 공법학회 권위자집단 학자들도 '''"총통은 최고의 인민재판관으로 실정법에 구애받지 않는다!!"'''라는 실드를 쳤을 정도였다. 또한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문제를 제대로 지적하기 어려울 정도로 폭압적인 상황이였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
이후 아돌프 히틀러의 권력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고, 뒤이어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의 권력은 이제 독일 내에서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돌격대 숙청의 1등 공신이었던 친위대는 돌격대가 이루지 못한 진정한 인민군의 꿈을 무장 친위대라는 형태로 실현했다. 돌격대 참모장은 빅토르 루체에게 계승되었다. 히틀러는 공식적으로 돌격대 최고지도자의 위치를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
장검의 밤 사건에도 불구하고 SA는 해체되지 않았으나, 정치적 영향력이 떨어진다. 다만 400만에 달하는 조직을 갑자기 해체하기도 어렵고 이용하지 않는 것도 아까웠기 때문에 조직 자체는 계속 유지되었다. 그리고 나치당에 가입하지 못하는 기회주의자들이 대거 가입하면서 조직은 개나 소나 가입하는 보편적인 나치 조직이 되었으며 나치당 입당 전에 가입해서 공을 인정받아야 입당하는 테크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정치깡패 노릇만 했던 이전과는 달리 조직원들에게 고급 교육을 받게 하고, 자체 군사 조직인 펠트헤른할레를 창설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시키고 조직원들을 차출하여 국방군 공군과 육군 부대로 전속시켜 싸우게 하였다. 이는 룀의 뒤를 이어서 돌격대 참모장이 된 빅토르 루체가 장검의 밤 이후 땅에 떨어져버린 SA의 지위를 되찾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장검의 밤 이전의 지위를 되찾기 위한 노력은 1943년 빅토르 루체가 휴가 도중 아우토반에서 교통사고로 죽자 물거품이 되었다. 돌격대는 1934년에 숙청 때처럼 서서히 몰락하여 친위대에 지원 조직이나, 예식용 부대로 전락했다. 즉, SS에 완전히 흡수되버린 것. 하지만 펠트헤른할레 자체는 1945년 부다페스트에서 종전을 맞기 직전에 와해될 때까지 활동했다.
독일 동성애자들에게는 헬게이트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룀의 동성애 성향을 알고 있었던 언론이 이를 이유로 갈궈댈 때에는 다른 이도 아닌 히틀러 본인이 1930년 룀의 동성애 비판에 대해 "돌격대는 군인이지 도덕집단이 아니다." "개인의 사생활이 관심없다"라는 시대를 앞서간 동성애 옹호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동성애자들의 보호막이었던 에른스트 룀이 제거되자 동성애자들은 다하우 수용소로 잡혀 들어갔다.
장검의 밤은 히틀러와 SS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지만 한동안 독일의 길거리에는 긴장감이 맴돌게 되었다. 비록 상층부는 손쓰지도 못하고 날라가버렸지만 여전히 하급 돌격대원들은 다수 존재하였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본 사건에 불만을 품은 일부 돌격대원들에 의해서 친위대원들이 뒷골목 등에서 살해당하거나 린치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들은 대세를 뒤집을 정도로 파급력이 크지도 못하였거니와 룀의 사망 직후부터 2인자 자리를 둘러싼 내부 투쟁[10]으로 바쁘기도 해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된다.

6. 어록


"룀 사건 이후 대통령과 법무장관, 장성들로 대표되는 우파가 히틀러 지지로 돌아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반유대주의를 경멸했던 그들은 히틀러가 주장하는 과격한 반유대주의를 거의 신경조차 쓰지도 않았다. 즉 당시의 독일 보수주의는 인종주의라는 망상과는 아무런 교집합도 없었다. 1934년 6월 30일의 피의 숙청 이후, 돌격대가 이끄는 나치당 내부의 강력한 좌파들이 제거되었다. 이들 좌파들은 혁명의 성과들에서 소외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도 이유가 있었다. 1933년 혁명 이전에 양성된 돌격대원 대다수는 히틀러의 이른바 사회주의적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실천했다. 이들은 당의 가장 밑바닥에서 나치 운동을 위해 헌신을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자, 분노와 불만들이 형성되었다. "

- 알베르트 슈페어 출처

그 날 있던 '장검의 밤' 동안, 히틀러는 독일의 전 지휘권을 얻으면서 그의 남은 경쟁자 상당수를 처치했다.

수천명의 일반 독일인들은 히틀러의 독재와 학살에 반발했다.

'''그들은 목숨을 걸었다.'''

하지만 수천만명은 그를 끝까지 따랐다.

'''그들은 영혼을 걸었다.'''

- RED SKULL: INCARNATE #5[11]

'''"대단한 친구야! 정말 멋지게 해냈군!"'''

-'''이오시프 스탈린''', 아나스타스 미코얀에게 장검의 밤을 평가하길.

[1] 사실 나치 소속인 사람들 중에서 히틀러 권력에 조금이라도 반대하거나 위협이 되던 사람들도 죽였다. 소속을 떠나 그냥 반 히틀러 세력은 다 죽였다고 봐도 되는 수준.[2] 전부 다 몰랐던 것은 아니다. 수권법을 만들때부터 히틀러를 경계한 유럽 각계의 시선들이 있었고, 장검의 밤 이후에는 '이제 히틀러가 정권을 노골적으로 잡겠다고 야만스럽게 공개 폭력까지 쓰는구나'하고 공포에 떨며 머지 않은 세월의 유럽 내 전쟁까지 예측한 세력들도 있었다. 단지 영국, 프랑스 등의 유럽 주류가 '설마 독일이 또?'했을 뿐이다.[3] 이 때 룀이 히틀러를 공개비판했다고 알려준 빅토르 루체는 장검의 밤 이후 돌격대 참모장이 되는 것으로 보답받았다.[4] 사실상 나치 '''당에게 충성하는 당군(黨軍)'''[5] 재미있게도 이러한 군조직 관념은 19세기 독일내 진보진영이 이상시하던 민병대의 관념을 받아들인 것이며, 무장 친위대 또한 이러한 사상적 영향 아래에서 형성될 수 있었다. 실제 나치 독일 중기 이후에는 일정정도 친위대 국가로의 이행을 보여주기도 하였다.[6] 요아힘 c. 페스트 히틀러 평전2 829P[7] 그러나 외형적인 면에서 확실하게 좌파적 색채를 차용하려 했던 사람은 그레고어가 아닌 동생 오토였으며, 현대적인 정치 스펙트럼 기준으로 보면 이 두 사람도 그냥 나치일 뿐이다.[8] 장검의 밤 희생자 중 한 명인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동생이다. 역시 형과 함께 나치당 초기 히틀러와 대립했다. 형과 달리 오토 슈트라서는 해외로 도피하여 전후까지 목숨을 부지하였다. 그는 전후에 민족우월주의를 배제하고 좌파적 이념을 강화한 슈트라서주의를 주창한다.[9] 요아힘 c. 페스트, 히틀러 평전2 845P[10] 히틀러의 공언도 있고해서 흔히 헤르만 괴링이 제국의 2인자였다는 인식이 있고 실제로 어느정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괴링의 입지는 압도적이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집권부터 종전에 이르기까지 나치 독일의 핵심세력들은 끊임없이 내부 투쟁으로 홍역을 앓게 된다.[11] 레드 스컬이 맥주홀 폭동부터 장검의 밤까지 그 사이에서 독일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을 보면서 성장해(안좋은 의미로)나가는 이야기다. 그야말로 독일판 꺼삐딴 리라고 볼 정도로 여러 조직을 전전하다가 마지막에 히틀러와 대면하고 나치의 일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