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드 에드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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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sel'''
1957년부터 1959년까지 포드 자동차 회사에서 포드와 머큐리의 중간급 브랜드로 운영했던 브랜드이다. 이름의 유래는 창립자 헨리 포드의 아들 에드셀 포드. 하지만 이름이 무색하게 '''자동차계의 타이타닉'''으로 불릴 만큼 엄청난 실패를 거두고 말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소비자들의 경제력이 성장하는 모습을 본 포드는, 기존의 포드와 머큐리 브랜드 사이에 위치시킬 고급화 브랜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홍보 방법에 있어서도 신차의 모습을 공개하지 않고 부분적인 모습을 서서히 공개하다가 전체적인 모습을 나중에 공개함으로서 고객들의 기대와 반응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서 큰 공을 들였을 정도였다.
이름의 경우는 소비자들로부터 무려 6천개 가량의 후보명을 받아들었으나[1] , 당시 포드 회장은 '''그 많은 후보명 중에서 뽑기가 번거롭다는 이유로 "에드셀"을 홧김에 제시했다.'''[2] 당시 홍보회장이 프레첼(Pretzel)이나 족제비(Weasel)이 연상된다는 이유로 신차 이름으로는 부적합하다고 반대했음에도 회사에서는 에드셀이라는 이름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디자인의 경우, 포드의 디자인 팀에서는 당대 미국차들과 차별화될수 있는 디자인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러한 디자인 연구의 결과물들 중 하나로 나온 것이 기존의 일자형 크롬 범퍼의 중앙을 뚫고 지나가는 세로 형상의 "임팩트 링" 그릴로, 에드셀에게 강해 보이는 인상을 주려는 의도였다. 그 결과는 나중에 밝히겠지만, 디자이너들의 생각과는 달리 비평가들과 소비자들의 반발이 심했다.
사실 개발과정에서는 이름 선정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요소들이 고위직들의 즉흥적인 생각들로 진행되었으며, 이전에는 '''형식적으로나마 진행하던 외부 컨설팅조차 무시한 채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실패를 미리 예고하고 있었다. 심지어 에드셀이 출시된 때도 1957년 9월로, 다음 년식 차를 11월에 출시하는 관행을 무시한 결과는 처참했다. 그 시기는 다른 업체들이 57년식 차들을 재고처리 차원으로 싸게 팔아치우던 시기라 고가차였던 에드셀에게는 힘든 시기가 예상되었다.
그렇게 해서 1957년 9월 3일. 낙관으로 일관된 주먹구구식 계획의 결과물로서 에드셀이 소비자들에게 그 모습을 공개했다. 에드셀은 차체 라인업 4가지[3] 를 갖춘 것은 물론, 온갖 상태에 대비한 경고등을 갖춘 속도계와 핸들 중앙에 장착된 버튼식 변속기, 스튜드베이커 이후로 최초로 적용되는 자동조절식 브레이크와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된 조작 설계 등의 "혁신"들이 있었으며, 당시에는 돈 주고 사야 달려나오던 안전벨트가 기본으로 달려나왔으며 열쇠 없이 열리지 않는 아동 보호가 가능한 뒷문 도어 락도 설치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보자면 나름 성공할 수도 있을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매우 처참했다. 우선 디자인[4] 부터가 소비자들과 비평가들이 하나같이 비난하는 부분이였고, 이름 역시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심지어는 생산 공정도 포드와 머큐리 공정 7곳을 왔다갔다하는 상황이라 품질이 균일하지 못해서 품질에 대한 비아낭까지 생겨났다. 더군다나 이때는 미국에서 불황이 시작되는 시기라, 에드셀같이 비싸고 호화스러운 차는 제대로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시기가 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에드셀은 “못생긴데다 비싸고 기계장치만 쓸데없이 많다“는 혹평 속에서 예상 생산대수 20만대 중 6만대 정도를 판매하는 엄청난 흥행실패로 첫 해를 마감했으며 1959년식과 1960년식은 더 처참한 실적을 거두고 1959년에 에드셀 브랜드와 같이 사라졌다. 1958년식 에드셀을 홍보하고자 빙 크로스비, 프랭크 시나트라, 루이 암스트롱 등의 유명인사들을 출연시킨 CBS와의 합작 방송인 “The Edsel Show“를 방영하는 등의 엄청난 홍보를 하고, 심지어 1959년식에서는 불필요한 장비들을 떨쳐 버리고 가격을 쉐보레와 플리머스 수준으로 낮추었으며 1960년식에서는 에드셀의 오랜(?) 아이덴티티이자 혹평의 이유 중 하나였던 임팩트 링 그릴을 없애버리고도 실패한 것을 보면, 브랜드 자체의 이미지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을지를 예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 포드 측에서는 엄청난 손해를 보았고 적잖은 대리점들이 문을 닫았지만, 포드 측에서는 좋은 경험이라고 평가했다고 하며, 1960년대에 포드 선더버드와 팰컨, 머스탱 등의 성공으로 이러한 손해를 매꿀 수 있었다.
'''Edsel'''
1. 개요
1957년부터 1959년까지 포드 자동차 회사에서 포드와 머큐리의 중간급 브랜드로 운영했던 브랜드이다. 이름의 유래는 창립자 헨리 포드의 아들 에드셀 포드. 하지만 이름이 무색하게 '''자동차계의 타이타닉'''으로 불릴 만큼 엄청난 실패를 거두고 말았다.
2.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소비자들의 경제력이 성장하는 모습을 본 포드는, 기존의 포드와 머큐리 브랜드 사이에 위치시킬 고급화 브랜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홍보 방법에 있어서도 신차의 모습을 공개하지 않고 부분적인 모습을 서서히 공개하다가 전체적인 모습을 나중에 공개함으로서 고객들의 기대와 반응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서 큰 공을 들였을 정도였다.
이름의 경우는 소비자들로부터 무려 6천개 가량의 후보명을 받아들었으나[1] , 당시 포드 회장은 '''그 많은 후보명 중에서 뽑기가 번거롭다는 이유로 "에드셀"을 홧김에 제시했다.'''[2] 당시 홍보회장이 프레첼(Pretzel)이나 족제비(Weasel)이 연상된다는 이유로 신차 이름으로는 부적합하다고 반대했음에도 회사에서는 에드셀이라는 이름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디자인의 경우, 포드의 디자인 팀에서는 당대 미국차들과 차별화될수 있는 디자인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러한 디자인 연구의 결과물들 중 하나로 나온 것이 기존의 일자형 크롬 범퍼의 중앙을 뚫고 지나가는 세로 형상의 "임팩트 링" 그릴로, 에드셀에게 강해 보이는 인상을 주려는 의도였다. 그 결과는 나중에 밝히겠지만, 디자이너들의 생각과는 달리 비평가들과 소비자들의 반발이 심했다.
사실 개발과정에서는 이름 선정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요소들이 고위직들의 즉흥적인 생각들로 진행되었으며, 이전에는 '''형식적으로나마 진행하던 외부 컨설팅조차 무시한 채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실패를 미리 예고하고 있었다. 심지어 에드셀이 출시된 때도 1957년 9월로, 다음 년식 차를 11월에 출시하는 관행을 무시한 결과는 처참했다. 그 시기는 다른 업체들이 57년식 차들을 재고처리 차원으로 싸게 팔아치우던 시기라 고가차였던 에드셀에게는 힘든 시기가 예상되었다.
3. 출시 및 판매
그렇게 해서 1957년 9월 3일. 낙관으로 일관된 주먹구구식 계획의 결과물로서 에드셀이 소비자들에게 그 모습을 공개했다. 에드셀은 차체 라인업 4가지[3] 를 갖춘 것은 물론, 온갖 상태에 대비한 경고등을 갖춘 속도계와 핸들 중앙에 장착된 버튼식 변속기, 스튜드베이커 이후로 최초로 적용되는 자동조절식 브레이크와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된 조작 설계 등의 "혁신"들이 있었으며, 당시에는 돈 주고 사야 달려나오던 안전벨트가 기본으로 달려나왔으며 열쇠 없이 열리지 않는 아동 보호가 가능한 뒷문 도어 락도 설치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보자면 나름 성공할 수도 있을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매우 처참했다. 우선 디자인[4] 부터가 소비자들과 비평가들이 하나같이 비난하는 부분이였고, 이름 역시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심지어는 생산 공정도 포드와 머큐리 공정 7곳을 왔다갔다하는 상황이라 품질이 균일하지 못해서 품질에 대한 비아낭까지 생겨났다. 더군다나 이때는 미국에서 불황이 시작되는 시기라, 에드셀같이 비싸고 호화스러운 차는 제대로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시기가 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에드셀은 “못생긴데다 비싸고 기계장치만 쓸데없이 많다“는 혹평 속에서 예상 생산대수 20만대 중 6만대 정도를 판매하는 엄청난 흥행실패로 첫 해를 마감했으며 1959년식과 1960년식은 더 처참한 실적을 거두고 1959년에 에드셀 브랜드와 같이 사라졌다. 1958년식 에드셀을 홍보하고자 빙 크로스비, 프랭크 시나트라, 루이 암스트롱 등의 유명인사들을 출연시킨 CBS와의 합작 방송인 “The Edsel Show“를 방영하는 등의 엄청난 홍보를 하고, 심지어 1959년식에서는 불필요한 장비들을 떨쳐 버리고 가격을 쉐보레와 플리머스 수준으로 낮추었으며 1960년식에서는 에드셀의 오랜(?) 아이덴티티이자 혹평의 이유 중 하나였던 임팩트 링 그릴을 없애버리고도 실패한 것을 보면, 브랜드 자체의 이미지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을지를 예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 포드 측에서는 엄청난 손해를 보았고 적잖은 대리점들이 문을 닫았지만, 포드 측에서는 좋은 경험이라고 평가했다고 하며, 1960년대에 포드 선더버드와 팰컨, 머스탱 등의 성공으로 이러한 손해를 매꿀 수 있었다.
3.1. 생산된 차종
- 에드셀 레인저: 포드 기반의 최저가 라인업으로, 2도어 쿠페와 하드탑 쿠페, 4도어 세단과 하드탑 세단으로 구성되었다.
- 에드셀 페이서: 포드 기반. 1958년 한해 동안만 생산되었으며, 4도어 세단, 하드탑 세단, 하드탑 쿠페, 컨버터블로 구성되었다.
- 에드셀 코세어: 머큐리 기반으로, 1958~1959년 사이에 2도어와 4도어 하드탑만 제공되었다.
- 에드셀 사이테이션: 머큐리 기반이며, 1958년 한 해 동안 컨버터블과 2도어 하드탑, 4도어 하드탑이 제공되었다. 에드셀 중 가장 고가 사양이다.
- 에드셀 라운드업: 포드 기반의 2도어 왜건이며, 1958년 한 해 동안 기본형으로 제공되었다.
- 에드셀 빌리저: 4도어 왜건 중 기본 사양. 포드 기반 플랫폼에, 1960년까지 생산되었다.
- 에드셀 버뮤다: 1958년 한 해 동안만 생산된 고급형 왜건으로, 포드 기반의 4도어 왜건이다.
4. 여담
- 고전게임인 매니악 맨션을 플레이하는 도중, 차고에서 빨간색 58년식 에드셀을 발견할 수 있다. 잘 알려진 명칭은 "이상한 에드셀(Weird Edsel)"로, 발견되었을 때부터 개조되어 있는 상태라서 우주선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 카트라이더의 카트 바디 중, 로디 클래식이 1958년식 에드셀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 총알탄 사나이 2편에서 주인공인 프랭크 드레빈 경감(레슬리 닐슨)이 1편때 사귀게 된 제인(프리실라 프레슬리)가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는 것을 알게 된 후 실의에 빠져 앉아 있는 바의 벽에 에드셀의 사진이 다른 실패의 상징들과 함께 걸려 있다.(...)
5. 둘러보기
[1] 검증을 거치고 거쳐 코르세어(Corsair), 사이테이션(Citation), 페이서(Pacer), 레인저(Ranger) 4개의 이름이 최종 후보로 선정되었었다고 한다.[2] 이당시 포드 회장은 창업자 헨리 포드의 손자이자 에드셀의 장남이었던 헨리 포드 2세. 헨리 포드는 아들이라고는 에드셀 포드밖에 없었는데, 이 아들이 2차대전 기간 중 과로와 브루셀라증으로 인한 위암으로 1943년에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맏손자이자 에셀 포드의 장남인 헨리 포드 2세 한테 경영권이 넘어가게 되었다. 헨리 포드는 아들이 죽은지 4년 뒤인 1947년에 세상을 떠났다.[3] 포드차 기반의 2종과 머큐리 기반의 2종으로 구성되어 "큰 차"와 "더 큰차"로 구분되는 것과 다름없었다. 세단, 왜건, 쿠페, 컨버터블과 같은 형식의 차체 구분은 이 4가지 내에 들어 있었다.[4] 당장 에드셀에 대한 유명한 코멘트 하나가 "레몬 빨아먹는 올즈모빌"이었고, 심지어 소비자들 중에서는 가시 달린 음문에 비유한 사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