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빌 체임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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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제60대 총리. 당대엔 신흥 정치가문의 당주, 성공한 기업인, 유능한 재무관료 등으로 나름 잘나가던 정치인이었으나, 훗날의 역사에서는 '''대독 유화정책'''이라는 오판을 저지른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나마 21세기 들어선 후술되어있듯 일각의 재평가론도 있긴 하다.
2. 생애
조지프 체임벌린의 차남으로 1869년 버밍엄에서 태어났다. 부친 조지프 체임벌린은 버밍엄 출신의 자유당 계열 정치인으로 이후 보수당으로 전향했다. 이는 그의 두 아들[3] 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1889년, 당시 아버지가 운영하던 도제 기업에서 회계사로 일하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2년 뒤 바하마와 앤틸러스 제도 등 카리브 해의 영국 식민지에서 플랜테이션 농장을 경영하였으나 £50,000, 현재가치로는 대략 £4,000,000(한화로 대략 61억)를 손해보고 실패했다. 영국으로 돌아와 가족의 도움으로 Elliot's Metal Company의 임원으로 있으면서 사업적 수완을 키웠고 금속 선박 제조회사인 Hoskins & Company를 사들여 17년동안 Hoskins 상무이사로 있으면 회사를 번창시켜 사업적으로 성공한다. 네빌 체임벌린의 사업적 성공은 아버지도 놀라게 했다. 자기 친구에게 자기보다 사업적 통찰력이 뛰어나고, 아직 정치에 관심이 없지만 총리가 될 수 있도록 지지하겠다고 말했다.
1911년, 고향 버밍엄의 시장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로이드 조지 내각의 전시 군수지원 부분의 실무책임자로 기용되었으나 방향성의 차이로 중도에 사퇴했다.
1918년부터 버밍엄 지역구 하원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3년 재무장관으로 입각하며 처음으로 내각에 진출했다. 1924년에 보건장관으로 재입각, 29년까지 직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중에 1926년의 전국적 총파업에 대한 대응과정에서 노동당과 돌이킬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된다.
그가 정치적으로 가장 빛난 시기는 1931 – 37년이었다. 세계 대공황으로 경제가 붕괴하던 와중에 램지 맥도널드 내각에서 재무장관으로 기용되어, 6년여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펼치며 긴축재정과 재정 및 금융개혁을 단행하고 열강간 공조를 통한 위기극복 등을 추진, 영국 경제를 다시 서서히 회복세로 이끌어 주목받았다. 오죽했으면 소련을 방문한 낸시 아스터가 스탈린과 면담했을 때 차세대의 지도자로 이 사람을 골랐을 정도였다.[4]
3. 총리 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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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스탠리 볼드윈의 뒤를 이어 대영제국의 총리로 취임하였다.
총리로 취임한 그의 당면과제는 역시나 독일이었다. 독일은 무서운 기세로 주변국을 위협하고 있었고, 체임벌린은 독일 문제에 대해 외교적 해결책을 추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독일-이탈리아 연대의 파기 시도였다.
두 파시스트 국가의 연합을 막기 위해 체임벌린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병합을 사실상 묵인했으며, 스페인 내전에 대한 간섭도 막았다.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이었기에 체임벌린의 생각이 크게 틀린 건 아니었다.[5]
체임벌린이 이런 외교적 유화책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영국의 경제상황에 기인한다. 대공황 여파로 대대적 군축을 한 상황에서 무력을 통한 대독일 정책은 불가능했다고 본 것이다. 영국의 군사력은 재무장관으로서 군축을 주도한 체임벌린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35년경부터 본격적 재무장을 시작했지만 아직 군사력의 재건이 이뤄진 건 아니었다. 그리고 1차대전때의 막대한 인구 손실을 기억하고 있던 전간기 영국과 프랑스는 어떻게 해서든 전쟁가능성을 피하려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고 정치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독일의 군사력에 대한 과대평가에서 나온 오판이었다. 당시 독일은 영국 이상으로 군사력 재건이 안 되어 있었고, 히틀러의 허풍과는 달리 영국이 강경하게 나올 경우 군사적으로 맞설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6] 게다가 결과적으로 히틀러의 신뢰성에 대해서도 치명적인 오판을 한 셈이었다. 이같은 정보부서의 독일 군사력 오판은 영국만이 아니라 당대 대부분의 국가가 다 범했던 실수로, 프랑스의 경우 라인란트 재무장 당시 겨우 1~2만에 불과한 독일군 병력을 20만 이상으로 오판하여 군사대응을 포기하기도 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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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문제는 1938년에 터지고 말았다. 아돌프 히틀러의 주테텐란드 요구에, 체임벌린은 외교적 해결을 시도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뮌헨 협정'''이었다. 체임벌린은 뮌헨 협정을 통해 당분간 히틀러와 독일 파시즘의 팽창의욕을 꺾었다고 생각했고, 여기에서 그 유명한 '''우리 시대의 평화''' 선언이 나왔다.[8]'''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임을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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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뮌헨 협정 뒤
그러나 히틀러는 6개월만에 뮌헨 협정을 파기했고, 다시 6개월 후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그리고 뮌헨 협정은 히틀러의 국내정치적 기반을 튼튼하게 해준 외교성과였으며, 독일 군부는 나치 정부를 탐탁치 않게 여겨 쿠데타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히틀러가 강대국을 상대로 오스트리아-주데텐란트-체코 삼연타석 외교 홈런을 치면서 지켜보자는 쪽으로 돌아섰고 이것이 폴란드 침공까지 갔다.
뮌헨 협정 파기 직후 체임벌린은 외교적 유화책을 포기하고 뒤늦게 강경책으로 전환했으나, 폴란드가 망하는 와중에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독일에 맞서기 위한 전시내각을 수립하고 대독 강경파 윈스턴 처칠을 기용하였으나 노동당은 과거의 원한으로 전시내각 참여를 거부했고, 개전 이후 급격히 위세가 높아진 처칠 등의 강경파도 좀 더 강경한 대응을 요구하여 국내정치적으로도 고립되었다.
결국 처칠 등의 요구에 따라 '''강력한 행동'''으로 시작한 노르웨이 전역이 1달여 만에 패배로 끝나감에 따라 전시내각은 붕괴 위기를 맞이했다. 처칠은 패배를 모조리 체임벌린 탓으로 돌리며 사임을 요구했고, 노동당도 체임벌린이 이끄는 전시내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결국 정치적으로 고립된 체임벌린은 1940년 5월 10일 사임했다. 그리고 그 날,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었다.[9] 웃긴 건 노르웨이 전역의 작전 입안자는 당시 전쟁장관이던 '''윈스턴 처칠이었다'''. 전쟁장관이던 처칠이 입안한 노르웨이 침공작전에 대해 당시 수상이던 체임벌린은 "작전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표하다가 독일이 노르웨이 침공한다는 정보에 어쩔 수 없이 승인했다. 그런데 처칠은 자기가 전쟁을 말아먹어 놓고 체임벌린한테 책임을 뒤집어씌워서 체임벌린을 사퇴시키고는, '''처칠 본인이 수상직에 올랐다.'''
이후 전시내각의 자문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나, 급격한 건강악화로 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덕분에 자신에 대한 변명도 제대로 남기지 못해, 오늘날까지도 비판을 받으며 미친 듯이 까이고 있다. BBC 히스토리 매거진에서 평가한 20세기의 총리들 중에서 앤서니 이든과 함께 0점을 받으면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총리가 된 것도 이러한 평가의 증거가 된다.
4. 옹호론
시일이 꽤 많이 흐르면서 체임벌린에 대한 재평가 내지 옹호론도 하나 둘 일어난 바 있다.내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히틀러는 1938년 9월에 자기 기회를 놓쳤다. 그 때였다면 프랑스와 우리에게 가공할, 어쩌면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도 있었을텐데. 이제 그런 기회는 없다.
1939년 12월 30일,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일례로 체임벌린은 집권 후 기존 내각이 추진하던 재군비 정책을 보다 가속화했다. 이는 독일의 팽창에 대한 대응책으로 '''군사적 옵션'''이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다만 재군비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보니 시간을 벌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를 팔아먹은 것에 동의한 것이고 이것이 그의 평가에 늘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것이다. 체임벌린의 재군비 강화 방침이 아니었다면, 영국은 보다 더 암울한 상태로 세계대전을 맞이하거나, 아예 군사력 부족을 이유로 폴란드 침공을 묵인했을 수도 있었다. 물론 독일 또한 군비를 키웠지만, 영국 공군은 여기서 확실히 이득을 봤다. 1937, 38년에 영국의 군용기 생산량은 연간 5000대 이상 생산하는 독일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였으나 그 다음 해인 1939년에는 8000대가 조금 안되는 수준으로 끌어올려 8000대를 조금 넘게 생산하는 독일을 거의 따라 잡았다. 단순히 수량만 늘린 것이 아니라 항공기 생산에 필요한 경금속 생산량을 늘리는 계획도 수립하였다.
체임벌린이 단순히 대독 유화론자였다면 1939년 3월 체코 병합 이후 대독정책의 기조를 변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일방적 협정 파기와 체코 병합에 격분하여 아직 재군비가 충분히 되지 않았다는 보고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함께 대독 강경노선 및 폴란드에 대한 안전 보장을 천명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체임벌린은 1939년 9월의 폴란드 침공과 함께 실각했어야 했으나 실제로는 1940년 4월까지 정상적으로 총리직을 수행하며 전쟁을 지도했다. 노동당이 그의 전시내각에 불참한 건 어디까지나 체임벌린 개인에 대한 사적 불만이었지 그의 대독정책과는 무관했다. 그리고 체임벌린이 실각한 이유는 노르웨이 전역의 패전 때문이었는데, '''노르웨이 전역은 처칠이 주도하였고, 그 패배 책임을 모두 체임벌린 탓으로 돌린 것'''이다(...).[10]
그리고 처참하고 처절했던 1차대전이 끝난지 얼마 안되었고 작위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희생을 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또 전쟁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기성세대는 적지 않은 이들이 지옥같은 전쟁터에서 살아돌아온 사람들이었는데 자신의 아들들을 다시 전쟁터로 밀어넣는 결정은 더욱 지지를 받기 힘든 상황이었다.[11] 국내 여론 뿐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공격에 소극적이었던 프랑스를 어떻게 설득하느냐는 문제도 남아있었다.
5. 매체에서
5.1. 출판물
-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탬버린을 치는 걸로 나온다(...).[추정] 나중에 본격 시사인 만화에서는 체임벌린이 히틀러에게 통수 맞은 것에 빗대 북한과 대화를 해도 어차피 반드시 전쟁은 터진다의 줄임말인 어반전터파들이 탬버린을 흔든다.어반전터파
-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인 《일찍 일어난 전쟁》에서는 뮌헨에서 히틀러의 강압과 여론 때문에 협정을 파기하고[12] 초기에 독일에 선전포고하는 수상으로 나온다. 물론 서부전선에서의 여러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역사처럼 처칠에게 자리를 물려준 뒤 퇴임. 이 소설에서는 1차 세계대전 초반 + 낫질작전으로 프랑스 대부분이 독일에게 넘어간다. 진격은 파리 근방에서 간신히 멈추게 되는 상황이다. 처칠은 암살당한다.
5.2. 영상물
- 브렌던 글리슨이 처칠을 맡았던 처칠의 전기영화 <폭풍 속으로>에서는 영국 배우 잭 셰퍼드가 체임벌린을 맡았다.
-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는 히틀러의 프랑스 침공으로 체임벌린이 사퇴하고 윈스턴 처칠이 집권하여 영국이 독일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린다. 영국 배우 로널드 픽업이 체임벌린으로 분했으며 작중에서는 고집불통에 안하무인스러운 성격을 지닌 주인공 처칠과는 반대로 신중하고 침착한 분위기의 인물로 묘사된다. 초반부부터 실은 자신이 암으로 시한부가 되어 있음을 담담히 밝히는 부분 등을 보더라도 제법 온정적인 시각으로 그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왕인 조지 6세 등의 주변인물들도 하나같이 처칠보다는 체임벌린을 두둔하는 분위기이다.
5.3. 게임
- Paradox Interactive의 게임 Victoria에서 컴퓨터가 그 어떤 제안[13] 도 다 들어주게 만드는 치트키가 네빌의 이름에서 따왔다. 게임 중에 F12를 누르고 Neville을 입력하면 사용할 수 있다.
- Hearts of Iron IV에서 스탠리 볼드윈의 뒤를 이어 영국 국가원수로 등장한다. 유화론자와 재무장론자 특성이 달려있다.
[1] 총리 본인에 대한 경칭[2] 당시에는 메이슨 대학교.[3] 배다른 형제이다. 그래도 사이는 친했던듯 하다.[4] 여담으로 낸시 아스터는 처칠에 대해 질문받았을 때 ''그는 이미 끝났다''라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처칠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둘의 사이는 아스터가 처칠에게 자신이 처칠의 부인이라면 처칠의 차에 독을 탔을거라고 하자, 반대로 처칠은 (낸시의 남편으로 살 바에야) 그 차를 마셨을거라고 응수한 일화도 있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단순히 악감정 때문에 나온 평가는 아닌 것이 저 시기 처칠은 실제 한물 간 정치인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2차 대전이 아니었으면 오늘날 처칠은 그냥 평범한 옛 정치인 정도로 기억되거나 갈리폴리의 참사를 불러온 해군 장관이란 오명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5] 실제 이탈리아는 2차대전 발발 직후, 영국에 연합국으로 참전할 수 있다는 의사를 타진한 적도 있다. 다만 그 전제조건이 이탈리아 지상군 전부를 현대화할 정도의 장비 요구(...)여서 현실성이 없었다. 같은 파시즘 국가라서 추축국이 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다른 이념을 가진 나치와 소련도 일시적으로 동맹에 준하는 협력관계였다는 점에서 보이듯 이념은 원인 중 하나일 수는 있어도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탈리아는 전범국인 독일을 시종일관 방해했고 실제로 1934년 오스트리아 병합을 저지하기도 했다.(물론 히틀러는 나중에 한번 더 병합을 시도해 성공했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반복적인 명분 없는 식민전쟁으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당하자 손을 잡을 곳이 독일밖에 없어졌을 뿐이다.[6] 실제로 독일은 1939년 세계대전을 개전할 당시에도 군 재건이 완료되지 않았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가장 기본적인 군복과 보병화기조차 부족해 징집된 청년들에게 군인신분임을 증명하는 완장 하나만 준 채로 집에서 들고 온 삽 하나 메고 있는 병사들도 꽤 있었을 정도로 재군비가 아직 한창 진행중이었다. 애초에 해군 재건속도에 맞춰 충분한 시간을 들여 각 군의 재무장을 완료하고 개전하기로 한 초기구상에선 개전 날짜가 1945년이었다. 우리가 알고있는 역사는 히틀러의 벼랑 끝 외교가 양날검이 되어 애초 계획보다 무려 5년이나 당겨진 결과다.[7] 레니 리펜슈탈 같은 나치의 선전을 담당한 인물들이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이유. 의지의 승리나 괴벨스의 연설, 과시용 군사 퍼레이드 같은 행동을 통해 대전 발발 직전 나치는 실제론 자기들 꼴도 말이 아니없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주변국들은 물론, 현대인들에게까지 "기계화 된 정예 독일군"이란 강렬하게 남아 있는 인상을 각인 시키는데 성공했다[8] 몬티 파이선의 '세계에서 가장 웃긴 농담'에서는 나레이터가 '신형 농담은 영국의 전쟁 전 농담보다 6만배는 더 강력했다.'라고 설명할 때 이걸 보여주면서 은근히 깠다.[9] 체임벌린으로서는 매우 운이 없었던 게, 아무리 노동당이 체임벌린을 싫어한들, 전 유럽에서 독일에 맞설 나라가 영국 하나뿐인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면 절대 비토하지 못했을 것이다. 체임벌린 내각 시기에는 아직 '''프랑스가 건재'''했기에 노동당도 체임벌린 밑에서는 전시 내각 참여안한다고 뻗댔던 거다. 실제 총리가 누구냐를 떠나 전시내각 참여 자체를 계속 반대하던 소수파들은 프랑스가 항복한 후 일제히 버로우했다.[10] 사실 처칠이 이런게 처음이 아니어서 1차 대전 당시 다르다넬스 해전과 갈리폴리 상륙작전의 패배를 해군참모총장이었던 존 피셔 제독에게 떠넘기고 해임시킨 전적이 있다. 정작 피셔는 여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이런 책임 떠넘기기로도 책임 회피에 실패해서 해군장관에서 물러나야 했다. 2차 대전 시점에서도 이런 책임전가하는 버릇을 못버리고 체임벌린에게 떠넘겼던 것. 그리고 독일이 노르웨이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독일 해군은 이 때 큰 타격을 받아 이후 대전 내내 소극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 해군의 재군비 계획을 몇 년 앞서 히틀러가 개전하는 바람에, 레더 제독이 "우린 이제 명예롭게 죽는 길만 남았다"고 했다는데 그 얼마 안 되는 전력을 여기서 많이 손실했다.[11] 연합국과 추축국을 막론하고 2차 대전기의 정치인/관료/장군들은 1차 대전에서 병사나 초급 장교로 참전한 이들이 많았고 아들이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사례도 제법 있다. 그리고 일반 가정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추정] 체임벌린→쳄벌린→탬버린. 실제로 과거에 쓴 기사들을 보면 "네빌 챔벌린"이라 쓴 기사들이 몇몇 있다.1, 2[12] 사실 체코 민족주의자에게 독일 고위 외교관이 암살되는 바람에 히틀러가 협정 파기 후 체코 침공을 결의한 이유가 더 크다.[13] 가진 돈이나 식민지를 다 내놓으라는 식의 정상적인 플레이에선 절대 이뤄질 수 없는 무리한 요구까지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