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이트 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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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uitt-Igoe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던 아파트 단지다. 프루이트 아이고라고 서술할 때도 있지만 프루이트 이고라고 서술될 때도 있다. 건축가 야마자키 미노루(1912~1986)가 설계하였다. 수많은 건축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모더니즘 건축의 상징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이후 여러 사정이 겹치고 겹친 끝에 흑역사로 남고 말았다.
세인트루이스의 도시화가 가속되고 인구 유입이 늘면서 남부지방에서 세인트루이스로 올라온 이주민들에게는 직장에서 가까운 도심지의 거주지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런 거주지는 고급주택 외에는 슬럼가밖에 없는 상태였고, 주정부는 새로운 주택단지를 짓기로 결심한다. 슬럼가를 밀어버리고 그 위에.
1951년의 현상설계에서 일본계 미국 건축가인 야마자키 미노루의 안이 당선되고, 1954년에 완공되었다. 33개동의 11층 공공아파트에 2,762세대, 12,000여 명의 주민이 이주하기로 계획되었다.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철학의 연장선으로, 이 단지는 '''모더니즘의 정상이자 주택단지 설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을 받았다. 사회학자와 심리학자의 자문을 받아가며 설계한 이 단지는 미국건축가 협회의 상을 받으며 그 화려한 역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프루이트 아이고의 주요 거주자는 극빈층, 그리고 대부분 흑인이었다. 이들의 삶은 기본적으로 집 앞의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그러한 삶의 방식을 무시하고 고층단지로 지어졌으니 이 건물은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이렇게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상황에서 주 정부는 한 술 더 떴다. 정부는 복지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거주자의 삶을 제한했는데, 성인 남자는 가족과 함께 살 수 없었고 텔레비전과 전화 사용도 금지되었다. 사실상 밥먹고 자는것 외엔 아무 의미가 없는 공간이 돼버린 것.
그리고 예측과는 달리 세인트루이스의 인구는 이후 감소추세를 보였기 때문에 중산층, 백인들은 이런 불편한 단지를 나가 다른 곳으로 이주해버렸고 이 때문에 거주자 중 흑인 비율은 98%가 되었다.[1]
정치가들의 삽질 또한 비범했다. 제 몫을 챙기려고 단지 건설을 지지했던 이들은 이후 세금으로 단지를 관리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당연히 주거민들 대다수는 여유가 없었기때문에 '''당연히 상황은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한다.''' 벽에 금이 가고, 유리창은 깨진 채로 방치되었으며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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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지의 입주율은 60%를 넘은 적이 없었으며, 1970년에 이르러서는 전체 건물 33개동 중 27개동이 빈집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빈 곳들에서는 범죄 및 사회의 어두운 손길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외부인들이 침입하여 강간, 약탈 등 범죄를 저질렀지만 외부에서 볼 때는 거주민들을 범죄자로 인식하여 차별대우를 받았다. 1969년 이들은 집세 지불 거부 운동을 벌였지만 반응은 어디에다 대고 신성한 집세를 안내는거야.
거주자 중 한 명이 단지 내에서 형이 괴한의 습격으로 사망했다고 밝히는 당시의 상황은 망했어요. 거주자들의 커뮤니티 공간이라고 지은 실내의 홀은 마약거래를 하는 데 안성맞춤이었고, 미디어는 단지의 실패와 공공기물 파손 등의 반달리즘 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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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지방정부에 의해 '''1972년 7월 15일 오후 3시 22분''', 단지는 발파되어 완전히 철거되었다. 후에 건축역사가 찰스 젱크스에 의해 이 순간은 "모더니즘이 끝난 순간"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시작이기도 했다.
하나의 사상을 끝내고, 다른 사상을 탄생시킨 건축으로서 프루이트 이고 단지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어떤 의미로는 불멸의 건축물이 되었다. 건축가인 야마자키 미노루는 이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영 탐탁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철거 이후 해당 부지는 공원화되어 숲이 조성되었다.
프루이트 아이고의 건축적 가치는 필요 이상으로 많이 평가절하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단지가 몰락한 이유는 건축가가 저소득층 거주민에 대해 고려가 부족했던 점도 있지만 정부와 정치가들의 무능이 훨씬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또한 폭파라는 너무나 극적인 결말은 미디어의 집중포화 때문이었다라는 의견도 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주 저소득층이 워낙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한국 같은 경우에도 많은 저소득층용 아파트(임대아파트 등)가 지어졌지만 저것과 같은 문제가 도출된 적은 없다.
지나치게 서방 위주의 시각이라는 비판도 있다. 사실 북미, 서유럽과, 나머지 대한민국, 중국 등의 지역에서 주택을 생각하는 방식은 '''완전히 정반대'''이다. [2] 서구권은 아파트 단지를 영구임대용으로 주로 공급했고, 중산층은 대도시 지역에 사는게 아니라면 목조 2층 단독주택을 고집했기 때문에 아파트 단지 자체가 곧 빈곤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한국인들이 단독주택에서 감천문화마을같은 저소득층 이미지[3] 를 떠올리는 것과 완벽하게 대비된다. 물론 서구권이라도 대도시 지역은 얘기가 달라서 아파트에서 사는것은 무진장 비싸기는 하지만말이다.
한국도 1970년대 초반 시민아파트가 지어지던 시절에는 아파트가 저소득층 주거로 통용되었다. 물론 당대에도 고급아파트들이 있기는 했지만 부실공사와 사고로 인해 이미지가 추락하여 기피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필두로 한 중산층 대상 대단지가 등장하고 기존의 슬럼가가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되었으며, 반대로 단독주택 지역은 주택공급 드라이브 하에 대부분이 다세대주택으로 대체되면서 인식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이는 비슷한 도시 개발 양상이 나타난 중국 등 신흥국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한편 미국의 경우에도 1963년 입주한 시카고의 마리나 시티를 대표로 하는 도심부 고층 분양 주택은 오히려 상류층의 주거로 자리매김하였으나, 여전히 중산층의 주거 지향은 교외의 단독주택을 선호하고 있다. (심지어 실리콘 밸리처럼 땅값이 맨하탄 못잖게 올랐다고 하는 지역조차 저밀도 개발이 일어난다) 이는 개활지가 많고 기본 정서가 개인주의적이어서 주변 사람들과 얽히기를 기피하는 미국 문화에 맞지 않은 탓일 수 있다.
이 건물이 대중문화 속에 자리 잡게 해 준 일등공신은 컬트 클래식으로 꼽히는 다큐멘터리중 하나인 코야니스카시인데, 영화 중반에 프루이트-아이고의 발파 철거 장면이 10분 동안 등장한다. 사운드 트랙은 필립 글라스가 작곡했는데, 영화가 개봉하고 20년이 좀 지나서 GTA 4의 첫번째 티저 트레일러에 해당 음악이 쓰이고 영화 워치맨의 닥터 맨해튼 소개장면에도 다시 사용되면서 영화와 건물의 존재를 다시 알리는 데에 크게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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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세를 몰아 2011년에는 The Pruitt-Igoe myth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이 건물의 역사를 다루기도 했다. 이 영화는 서울건축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
이 건물을 지은 야마자키 미노루의 또다른 대표작인 세계무역센터 또한 9.11 테러로 붕괴된 것으로 인해 비운의 건축가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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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uitt-Igoe
1. 개요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던 아파트 단지다. 프루이트 아이고라고 서술할 때도 있지만 프루이트 이고라고 서술될 때도 있다. 건축가 야마자키 미노루(1912~1986)가 설계하였다. 수많은 건축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모더니즘 건축의 상징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이후 여러 사정이 겹치고 겹친 끝에 흑역사로 남고 말았다.
2. 시작
세인트루이스의 도시화가 가속되고 인구 유입이 늘면서 남부지방에서 세인트루이스로 올라온 이주민들에게는 직장에서 가까운 도심지의 거주지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런 거주지는 고급주택 외에는 슬럼가밖에 없는 상태였고, 주정부는 새로운 주택단지를 짓기로 결심한다. 슬럼가를 밀어버리고 그 위에.
1951년의 현상설계에서 일본계 미국 건축가인 야마자키 미노루의 안이 당선되고, 1954년에 완공되었다. 33개동의 11층 공공아파트에 2,762세대, 12,000여 명의 주민이 이주하기로 계획되었다.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철학의 연장선으로, 이 단지는 '''모더니즘의 정상이자 주택단지 설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을 받았다. 사회학자와 심리학자의 자문을 받아가며 설계한 이 단지는 미국건축가 협회의 상을 받으며 그 화려한 역사를 시작했다.
3. 몰락
하지만 프루이트 아이고의 주요 거주자는 극빈층, 그리고 대부분 흑인이었다. 이들의 삶은 기본적으로 집 앞의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그러한 삶의 방식을 무시하고 고층단지로 지어졌으니 이 건물은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이렇게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상황에서 주 정부는 한 술 더 떴다. 정부는 복지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거주자의 삶을 제한했는데, 성인 남자는 가족과 함께 살 수 없었고 텔레비전과 전화 사용도 금지되었다. 사실상 밥먹고 자는것 외엔 아무 의미가 없는 공간이 돼버린 것.
그리고 예측과는 달리 세인트루이스의 인구는 이후 감소추세를 보였기 때문에 중산층, 백인들은 이런 불편한 단지를 나가 다른 곳으로 이주해버렸고 이 때문에 거주자 중 흑인 비율은 98%가 되었다.[1]
정치가들의 삽질 또한 비범했다. 제 몫을 챙기려고 단지 건설을 지지했던 이들은 이후 세금으로 단지를 관리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당연히 주거민들 대다수는 여유가 없었기때문에 '''당연히 상황은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한다.''' 벽에 금이 가고, 유리창은 깨진 채로 방치되었으며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 않았다.
4. 폐건물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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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지의 입주율은 60%를 넘은 적이 없었으며, 1970년에 이르러서는 전체 건물 33개동 중 27개동이 빈집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빈 곳들에서는 범죄 및 사회의 어두운 손길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외부인들이 침입하여 강간, 약탈 등 범죄를 저질렀지만 외부에서 볼 때는 거주민들을 범죄자로 인식하여 차별대우를 받았다. 1969년 이들은 집세 지불 거부 운동을 벌였지만 반응은 어디에다 대고 신성한 집세를 안내는거야.
거주자 중 한 명이 단지 내에서 형이 괴한의 습격으로 사망했다고 밝히는 당시의 상황은 망했어요. 거주자들의 커뮤니티 공간이라고 지은 실내의 홀은 마약거래를 하는 데 안성맞춤이었고, 미디어는 단지의 실패와 공공기물 파손 등의 반달리즘 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였다.
5.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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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지방정부에 의해 '''1972년 7월 15일 오후 3시 22분''', 단지는 발파되어 완전히 철거되었다. 후에 건축역사가 찰스 젱크스에 의해 이 순간은 "모더니즘이 끝난 순간"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시작이기도 했다.
하나의 사상을 끝내고, 다른 사상을 탄생시킨 건축으로서 프루이트 이고 단지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어떤 의미로는 불멸의 건축물이 되었다. 건축가인 야마자키 미노루는 이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영 탐탁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철거 이후 해당 부지는 공원화되어 숲이 조성되었다.
6. 건축학적 반론
프루이트 아이고의 건축적 가치는 필요 이상으로 많이 평가절하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단지가 몰락한 이유는 건축가가 저소득층 거주민에 대해 고려가 부족했던 점도 있지만 정부와 정치가들의 무능이 훨씬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또한 폭파라는 너무나 극적인 결말은 미디어의 집중포화 때문이었다라는 의견도 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주 저소득층이 워낙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한국 같은 경우에도 많은 저소득층용 아파트(임대아파트 등)가 지어졌지만 저것과 같은 문제가 도출된 적은 없다.
지나치게 서방 위주의 시각이라는 비판도 있다. 사실 북미, 서유럽과, 나머지 대한민국, 중국 등의 지역에서 주택을 생각하는 방식은 '''완전히 정반대'''이다. [2] 서구권은 아파트 단지를 영구임대용으로 주로 공급했고, 중산층은 대도시 지역에 사는게 아니라면 목조 2층 단독주택을 고집했기 때문에 아파트 단지 자체가 곧 빈곤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한국인들이 단독주택에서 감천문화마을같은 저소득층 이미지[3] 를 떠올리는 것과 완벽하게 대비된다. 물론 서구권이라도 대도시 지역은 얘기가 달라서 아파트에서 사는것은 무진장 비싸기는 하지만말이다.
한국도 1970년대 초반 시민아파트가 지어지던 시절에는 아파트가 저소득층 주거로 통용되었다. 물론 당대에도 고급아파트들이 있기는 했지만 부실공사와 사고로 인해 이미지가 추락하여 기피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필두로 한 중산층 대상 대단지가 등장하고 기존의 슬럼가가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되었으며, 반대로 단독주택 지역은 주택공급 드라이브 하에 대부분이 다세대주택으로 대체되면서 인식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이는 비슷한 도시 개발 양상이 나타난 중국 등 신흥국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한편 미국의 경우에도 1963년 입주한 시카고의 마리나 시티를 대표로 하는 도심부 고층 분양 주택은 오히려 상류층의 주거로 자리매김하였으나, 여전히 중산층의 주거 지향은 교외의 단독주택을 선호하고 있다. (심지어 실리콘 밸리처럼 땅값이 맨하탄 못잖게 올랐다고 하는 지역조차 저밀도 개발이 일어난다) 이는 개활지가 많고 기본 정서가 개인주의적이어서 주변 사람들과 얽히기를 기피하는 미국 문화에 맞지 않은 탓일 수 있다.
7. 이야깃거리
이 건물이 대중문화 속에 자리 잡게 해 준 일등공신은 컬트 클래식으로 꼽히는 다큐멘터리중 하나인 코야니스카시인데, 영화 중반에 프루이트-아이고의 발파 철거 장면이 10분 동안 등장한다. 사운드 트랙은 필립 글라스가 작곡했는데, 영화가 개봉하고 20년이 좀 지나서 GTA 4의 첫번째 티저 트레일러에 해당 음악이 쓰이고 영화 워치맨의 닥터 맨해튼 소개장면에도 다시 사용되면서 영화와 건물의 존재를 다시 알리는 데에 크게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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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세를 몰아 2011년에는 The Pruitt-Igoe myth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이 건물의 역사를 다루기도 했다. 이 영화는 서울건축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
이 건물을 지은 야마자키 미노루의 또다른 대표작인 세계무역센터 또한 9.11 테러로 붕괴된 것으로 인해 비운의 건축가로 불린다.
8. 관련 문서
[1] 지금도 세인트루이스는 이러한 문제로 인해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2] 다만 동유럽권에서 이 정도로 이미지가 극악하게 나쁜것 까지는 아니다. 물론 공산주의 시절에 지어졌던 아파트들은 외형이 허름하고 주택 대량공급의 이유로 똑같은 모양의 아파트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양새때문에 아파트를 공산주의의 상징이라며 그리 좋지 못하게 보는 경우도 적지않기는 한데 그래도 도심지에 위치해있다는 점때문에 수요가 여전히 남아잇는것이다.[3] 달동네와 벽화, 무당집 깃발, 폐지 줍는 할아버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