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 호 전투
1. 개요
1. 개요
일명 '''장고봉 사건(張鼓峰事件).''' 주로 영어권에서는 '하산 호 전투(Battle of Lake Khasan)', 일본에서는 '장고봉 사건'이라고 부른다.
1938년 7월 29일부터 동년 8월 11일까지 약 2주 간 소련군과 일본군(조선군, 관동군)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로, 소-일 국경분쟁 중 할힌골 전투 다음으로 컸던 전투였다.
장고봉(張鼓峰, 러시아명 сопка Заозёрная/Zaozyornaya)은 두만강 근처에 있는 해발고도 약 150m의 언덕으로, 그 자체로는 흔해빠진 언덕이어서 별다른 쓸모가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 위치가 지도에 보이다시피 만주, 조선, 소련 사이에 절묘하게 걸친 탓에 소유권을 두고 분쟁이 시작되었다. 분쟁이 있던 장고봉의 정상 부분을 소련, 만주국 양국은 서로 점령하지 않고 그냥 무주공산으로 방치하고 있었다.
당시 이쪽의 국경선에 대해서 소련과 만주국 간 의견이 엇갈렸다. 소련은 베이징 조약에 근거하여 국경선은 장고봉 정상을 통과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일본은 장고봉 정상 일대는 만주국에 속한다고 보고 있었다. 소련은 일본이 국경선을 왜곡하고 있으며 만주국에 설치된 국경 표지판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허나 어쨌든 해당 구역의 방위를 담당했던 조선군 제19사단은 이곳을 국경 불확정 지대로 보고 무력 충돌을 막기 위해 장고봉 정상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그런데 7월 12일 소련군이 파견되어 장고봉 정상에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발견되었다.[2] 다음날 13일에는 일본군 감시병이 소련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이에 놀란 일본은 대사관을 통해 항의했으나 소련은 시크하게 씹었다. 이로써 건차자도 사건이 끝난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 가던 때 또 다른 무력 충돌이 예고되었다.
일본은 장고봉에 정찰대를 파견했는데 이들은 소련군에게 사격을 받고 도망치다가 인솔하던 하사가 죽는 등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관동군은 중국 전선에서 공세를 준비하느라 비교적 중요도가 떨어지는 장고봉에서의 사태를 악화시키기 싫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려 했지만, 관동군 작전참모들이 '좁은 곳이라 전투가 확대되지도 않을 것이고 소련군이 전차까지 끌고 오지도 않을 듯'이라고 하여 제19사단을 동원해서 소련군을 격퇴하기로 했다. 조선군 사령관 고이소 구니아키는 제19사단의 출동을 명령했다.
7월 29일 확인 결과 소련군은 장고봉 북쪽에 위치한 사초봉(沙草峰, 러시아명 сопка Безымянная/Bezymyannaya)에도 진지 공사를 하고 있었다. 이를 본 제19사단이 공격을 가했지만 이미 대규모로 증강된 소련군을 격퇴하지는 못했는데, 7월 31일 19사단 휘하 제75연대[3] 가 야습을 가해 소련군 제40사단을 격퇴하였다. 덕분에 제19사단은 장고봉과 사초봉을 탈환할 수 있었다. 이후 8월까지 소련군이 여러 번 반격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은 의외로 선전해서 이를 막아냈다.[4]
그런데 그 이후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8월 1일 소련군 항공대가 나타나 두만강 인근 지역에 폭격을 가한 것이다.[5] 8월 2일에는 당시 극동 군관구 사령관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가 참전했다. 그리고 소련군은 슬금슬금 병력을 증강시켜 나갔다. 반면 일본군은 장고봉 일대의 19사단에 이렇다할 중장비나 추가병력 지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일이 크게 터지는데...
건차자도 사건 이후 제대로 열받은 소련이 '''1개 군단과 1개 기계화여단, 연해주 항공대'''를 동원해서 8월 6일 대반격을 가해왔다![6] 무장이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19사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장고봉에서 간신히 버티고는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전멸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19사단 장병들은 분투하여 장고봉과 사초봉을 빼앗기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고, 소련군 측도 상당한 사상자가 나왔다.[7]
그러나 소련, 일본 모두 확전을 원하지 않았고, 결국 일본의 시게미츠 마모루 대사와 소련의 막심 리트비노프 외무인민위원 간 회담으로 8월 11일, 모스크바에서 정전 합의가 이루어졌다. 합의 내용은 11일 정오로 전투를 중지하고 소련의 주장대로 국경선을 확정한다는 것. 19사단은 두 고지를 점령했지만 이를 소련측에 내줘야 했다. 이에 일본군의 조 이사무(長勇)[8] 대좌와 소련 극동군 참모장인 그레고리 슈테른 대장이 회견하여 정전이 발효되었다. 8월 12일 양 군은 문서를 통해 장고봉 이북의 국경선 문제를 매듭지었고 160m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표에서 확인되다시피 소련군의 피해가 더 컸으며, 격분한 이오시프 스탈린은 책임을 물어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를 숙청했다. 블류헤르 원수는 모스크바로 압송되어 수감된 후 '''한쪽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심한 고문을 당한 뒤 사형에 처해졌다.
[1] 영토는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조선, 만주, 소련이며, 강 이름인 도문강(圖門江)은 두만강, 봉우리 3개는 위에서부터 사초봉(沙草峰), 장군봉(將軍峰), 장고봉(張鼓峰)이다. 봉우리 근처에 위치한 호수인 합상호(哈桑湖)가 바로 하산 호(Lake Khasan)이다.[2] 소련군이 장고봉을 점거한 이유는 장고봉 이남의 일본군을 압박해 만주 북부의 영역권을 넓혀 일본을 견제하려 했던 것이라 추정된다.[3] 당시 연대장은 사토 고토쿠 대좌. 임팔 작전에서 그 분에게 대놓고 항명한 그 사람 맞다.[4] 심지어 장고봉을 점령했던 19사단에게는 중포마저 없었다. 거의 순수 알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5] 이때 함경북도 경흥군, 평안남도 증산군 등이 폭격을 당했다.[6] 이때 전투 명령을 내린 사람이 바로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였다.[7] 일본군이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에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던 것은 일본군이 방어자의 입장이었던 데다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지형적 이점에 힘입은 바가 컸다. 러일전쟁 당시 방어하는 러시아군보다 공격하는 일본군의 피해가 더 컸음을 생각하면 된다. 또한 전투가 벌어진 하산 호 인근 지역은 습지와 진창이 많아 전차의 효율적인 기동이 어려웠으며, 당시 소련군의 주력 전차였던 T-26은 경장갑 기동 전차로 아직까지는 국제 평균 수준을 유지하던 일본군의 대전차 공격에 취약했다. 더불어 대숙청의 여파로 극동지역 일선 부대의 기존 지휘관들 상당수가 숙청되고 그 자리를 신임 지휘관들이 막 이어받은 상황이었는데 이것이 소련군 부대들의 심각한 작전능력 저하를 야기했다.[8]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와 함께 난징 대학살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고 추정되는 인물이다. 하나야 타다시 못지않게 부하를 구타하는 악행으로 유명했으며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 자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