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일본 국경분쟁
1. 개요
소련-몽골 인민 공화국과 일본 제국-만주국이 1932년부터 1939년까지 국경 지방에서 충돌한 사건이다. 소련과 몽골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 사건 이후 소련과 일본은 소련-일본 중립 조약을 체결한다.
2. 배경
사건은 1932년, 만주국 성립시 일본 관동군이 만주국과 몽골 사이의 국경을 할하 강[1] 으로 정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대해 전통적으로 할하 강 동쪽 16km 지점에 있는 노몬한[2] 언덕을 경계선으로 간주하던 몽골이 반발하면서 갈등이 빚어졌다. 일본의 주장대로 국경선을 정하면 기존의 국경선에서 뾰족하게 튀어나온 돌출부를 형성하는데 그것이 몽골에게는 잠재적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해당 지역 자체는 모래와 잡초 투성이인 황무지여서 가치가 없었다. 또 만주국(일본)과 몽골(소련)이 주장하는 국경선의 차이는 약 10-20km 정도의 사소한 거리에 불과했다. 한 줌에 불과한 황무지를 놓고 굳이 무익한 싸움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으므로 협상으로 잠정적 국경선을 정하려는 움직임도 초기에는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 육군은 소련을 제1의 가상 적국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소련 또한 러일전쟁에서 겪은 패배의 경험을 기억하고 있었던 데다가 적백내전 당시 개입했던[3] 일본의 야욕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므로 이 부근을 매우 중시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군 육군은 만주사변[4] 이나 중일전쟁에서 보듯이 중앙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모험주의적인 충돌을 일삼았으므로,[5] 소련은 이런 망나니같은 일본군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동안 일본의 군사적 야욕은 관동군을 확장하면서 점점 노골화되었다. 소련은 관동군이 극동에서 어떤 깽판을 칠지 알 수 없었으므로 군비를 계속해서 증강해 나갔고, 관동군도 마찬가지로 소련의 군비 확장을 근거로 병력을 늘려 나갔다.
- 1931년~1939년 양 군의 군비 확장 통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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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월에는 할하먀오 사건, 1935년 12월에는 오라호도가 사건, 1936년 1월 말엽에는 금창구 사건, 같은 해 3월에는 타우란 사건이 발생했는데 해당 사건들 모두 양측에서 몇십 명 정도의 피해만 입었을 뿐 그다지 주목할 만한 사건들은 아니었다.[7] 이때까지는 그냥저냥 흔한 국경분쟁 수준이었다.
그러나 1937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대숙청을 시작하여 미하일 투하쳅스키 등 유능한 장성들을 대거 사형시킴에 따라 일본은 소련의 군세를 과소평가했다.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의 부관으로 유럽을 방문 중이던 일본군 참모본부 소속 혼마 마사하루(1888~1946)[8] 소장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귀국하여 "소련군의 고위 지휘관이 숙청당했으며 이런 결과로 인해 소련군은 일본군에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림에 따라 일본은 소련과 비교적 큰 규모의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는 것 또한 주저하지 않았다. 이후 비교적 큰 규모였던 2번의 무력 충돌이 연달아 터졌다.
3. 전투
3.1. 하산 호 전투
'''하산 호 전투(러시아어: Хасанские бои, 영어: Battle of Lake Khasan)''' 또는 '''장고봉 사건(張鼓峰事件, ちょうこほうじけん)'''은 1938년 7월 29일부터 8월 11일까지 일본 제국의 식민지인 조선, 만주국, 소련의 국경인 두만강의 하산에서 벌어진 국경분쟁으로 일어난 전투이다. 소련이 승리하였다.
일본군의 공격이 발단이 된 이 전투에서, 소련군은 7월 29일에 일본군의 공격을 막는 데에 성공했으나 7월 31일에는 일본군의 공격에 후퇴했다. 그러나 이후 소련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을 이용하여 일본군에게 반격했다. 8월 2일부터 8월 9일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은 결국 소련군에게 대패했다. 10월에 일본 수상은 미국 정부에 평화 협상 중재를 요청했다. 11월에 소련과 일본, 쌍방은 서로에 대한 군사적 적대 행위를 중지했고, 이후 1939년 5월-9월의 할힌골 전투때까지 양국의 전투는 없었다.
3.2. 할힌골 전투
4. 이후
하산 호 전투 및 할힌골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일본은 극동 지방으로의 진출을 다시 고려해야 했다. 이 무렵 일본은 중국과 전쟁 상태에 있었고, 독일 및 이탈리아와 방공 협정을 맺어 국제적으로도 고립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40년 일본은 소련과 소련-일본 중립 조약을 체결했다. 1941년부터 실제로 두 국가는 전쟁을 거의 벌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일본의 경우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미국 및 연합국과의 전쟁에 휘말렸기 때문이고, 소련의 경우에는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독일과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후 얄타 회담에서 소련의 일본 침공안이 협의되기 전까지 두 나라 사이에 직접적인 전투가 없었다. 실제로 나치 독일은 일본에게 소련 침공을 요구했고, 관동군이 소련 침공을 생각하여 무력시위를 벌인 적도 있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은 이유는 할힌골 전투의 패배 이후 소련-일본 중립 조약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1] 몽골어로 할힌 골(Khalkhyn Gol)이라고 부른다. 할하(Khalkha)의 강(Gol)이라는 뜻. 그리고 지금 몽골인의 주류인 할하 몽골족이 바로 이 강 유역에서 일어났다.[2] 몽골어로 "불법(佛法)의 왕"이라는 뜻이다.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은 이름으로 보인다.[3] 시베리아에 무려 7만여 명을 파병했다. 사할린 북부, 연해주부터 바이칼 호수 뒤까지 점령했다.[4] 만주사변 당시 소련은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고, 외무장관 막심 리트비노프는 분쟁을 일으키기 않기 위해 1931년 12월 일본에 상호 불가침조약을 맺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일본은 그것을 거부했고, 소련이 겁을 먹었다고 오판하였다(출처: Nomonhan, 1939: The Red Army's Victory That Shaped World War II).[5] Nomonhan, 1939: The Red Army's Victory That Shaped World War II에서는 하극상(Gekokujo)이 관동군의 두드러진 특징이었고, 일본 육군 교육 체계 자체가 소대, 중대 같은 소규모 단위 부대를 지휘하는 능력보다는 사단 같은 대규모 부대를 운용하는 능력을 배양하는데 치중했으며, 이러한 교육 하에 양성된 일본 육군 장교들은 중대장, 대대장 수준에 불과한 인물이어도 병력을 대규모로 운용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착각한 나머지 경거망동하는 경향이 심했다고 기술했다. 이러한 경향은 군에서 실질적인 방향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는 좌관급 장교단에서 특히 강했다고 한다. 츠지 마사노부가 일개 소좌였을 때도 관동군 참모단 내에서 깽판칠 수 있었던 이유.[6] 출처: Nomonhan, 1939: The Red Army's Victory That Shaped World War II 해당 서적에 따르면 소련군이 양적으로 관동군을 한참 압도하기는 했으나 일본이 본토에서 관동으로 병력을 비교적 신속하게 충원할 수 있었고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에는 중국 북부에서 차출이 가능했던데 반해 소련은 "극동"이란 지역이 워낙 넓은데다 산업 인프라, 인구가 밀집해 있던 러시아의 유럽 영토에서 극동 지방까지 병력을 충원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힘들었다고 한다. 주요 운송 수단인 시베리아 횡단철도 또한 만주국-소련 국경에 굉장히 가까워서 일본군이 얼마든지 파괴하는 것이 가능했기에 소련은 극동 주둔 소련군에게 중앙에서 조달되는 지원에 의존하기보다는 주둔지에서 자급자족하도록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7] 심지어 오라호도가 사건에서 일본군의 피해는 전사 8명, 부상 4명에 불과했다.[8] 1936년 12월부터 유럽을 방문 중이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필리핀 침공을 주도했으며 바탄 죽음의 행진을 일으킨 전범으로 기소되어 도쿄 전범 재판에서 사형당했다.[9] 그러나 일본 정부가 이를 소련에 통보하면서 관동군의 계획은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