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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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당시의 야스히코
朝香宮鳩彦王
1887년 10월 2일 ~ 1981년 4월 12일(만 93세)
1. 개요
2. 초기 생애
5. 전후
6. 가족
7. 미디어에서


1. 개요


일본의 황족이며 중일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이자 난징 대학살의 실질적인 원흉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우리나라 식으로 촌수를 따지면 쇼와 덴노(히로히토)에게는 36촌 고조할아버지뻘인 인물이며, 쇼와의 아내인 고준 황후(나가코)의 숙부 중 하나. 이방자 비에게도 숙부가 된다.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園祥子)의 8녀인 후미노미야 노부코(富美宮允子) 내친왕과 결혼했기 때문에, 쇼와 덴노의 고모부가 되기도 한다.
즉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는 고준 황후의 작은아버지이자 시고모부인 셈.

2. 초기 생애


1887년 10월 2일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과 측실 츠노다 스가코(角田須賀子)의 8남으로 출생했다. 일본의 4대 세습친왕가인 후시미노미야의 방계 후손.
일본 황족 남자는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군인이 되었다. 어릴 때는 황족과 화족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인 가쿠슈인에서 공부하다가 육군유년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유학하여 프랑스 육군사관학교[1]에서 공부했다. 그러다 프랑스 유학 당시 교통사고를 당하여 다리를 절게 되었다.
이후 일본에 돌아온 후에는 1926년 대좌로 승진했다. 1930년에는 육군대학의 교관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소장으로 승진하여 제1근위사단장이 되었다. 1935년에는 군사참의관이 되었는데, 이 자리는 쇼와 덴노에게 영향력 있는 조언을 할 수 있는 자리였다.
황도파의 과격 장교들에 의한 쿠데타2.26 사건이 벌어지자, 아사카는 이를 지지하여 쇼와 덴노에게 쿠데타를 승인할 것을 권고했으나, 쇼와 덴노는 이를 거부하고 쿠데타 부대에게 원대복귀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때문에 쇼와 덴노와 아사카노미야는 사이가 벌어졌고, 이후 1937년 아사카는 야전직으로 전출되어 상하이 파견군을 맡고 있던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사령관 아래에서 근무하였다.
여기까지라면 그냥 한 황족 장교이자 부마의 인생 이야기일 수 있다.

3. 난징 대학살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른 일본군상하이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대본영은 상하이 이상의 영토를 점령하는 데 관심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진격하지 말 것을 지시했지만, 중지나파견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는 '반성하지 않는' 장제스를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중국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하는 것이 필수라고 여겨서 독단적인 난징 공격을 실시했다. 이 때 야스히코도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으로 참여하여 난징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37년 12월, 마쓰이가 결핵에 걸려 몸져눕자 아사카가 사령관 대리로서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였던 난징 공략을 지휘하였다. 마쓰이는 일본군이 처음으로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군대의 군기를 엄정히 유지할 것이며, 난징 시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난징에 일장기도 게양하지 말라고 지시하는 등''' 대민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정상적인 방침을 세웠으나, 아사카는 즉시 "대 일본 제국의 황군에게 지켜야 할 최저한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껄이며 병사들의 폭주를 부추겼다. 난징 함락 후 아사카는 "'''난징에 살고 있는 잠재적인 적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결과 '''4개월 동안 난징인외마경이 되어 버렸다.'''[2]
이 명령은 아사카가 직접 내렸다는 설도 있고, 조 이사무(長勇) 소장이 내렸다는 설도 있다. 조 이사무가 오키나와 전투에서 패한 뒤 할복 자살하여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사령관 대리인 아사카는 그 이후에도 그런 잔혹 행위들을 그만두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고 묵인했으므로 전범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또한 1937년 8월 5일, 중국군 포로 대우에 대한 국제법상의 의무 준수 폐지를 승인한 쇼와 덴노도 포로 학대에 관해서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

4. 태평양 전쟁


1938년, 아사카는 본토로 돌아와 대본영에서 근무하게 된다. 그 후 군사 지휘는 맡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 일본필리핀 해 해전사이판 전투에서 연이어 패하자, 제2차 세계대전과 삼국동맹을 주장했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는 츠노다 도모시게를 중심으로 하여 아랫동생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3], 쇼와 덴노의 동생인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그리고 전 총리인 고노에 후미마로와 함께 도조 히데키를 암살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군부 정권을 엎어버리는 쿠데타에 참여했다.
하지만 쿠데타의 과격성에 놀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가 실행하기 전에 자수해서 실패했다. 그러나 물증이 딱히 없었고, 완전히 발각된 게 아니라 의혹이 있는 정도였기 때문에 쿠데타 참여자 중에서 처벌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거기다 책임자가 대충 묻어버린 탓에 상부에 알려지지도 않아 쇼와 덴노는 그 사실을 몰랐으며 전후에야 밝혀지게 된다.
웃긴 건 저기 쿠데타 암살 명단 중에 '''자신과 고노에 후미마로포함되어 있었다.'''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친왕은 황족이고 고노에 후미마로는 유명한 후지와라 씨족의 당대 당주라[4] 대놓고 죽이지는 않았겠지만, 진짜 쿠데타가 성공했으면 자신과 고노에 또한 '''숙청 확정이다.''' 오히려 그 덕분에 자기 목이 붙은 셈. 이쯤 되면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가 자수한 게 본인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다.
1945년 일본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패하고 미군몰락 작전을 계획할 때 또 사고를 친다. 무언가 하니 '''결호작전'''과 육해군의 통합. 그러나 아사카의 뜻은 다행히도 이루어지지 않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미국에게 무조건 항복하고 일제는 결국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다.'''
이 자가 이런 개드립을 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이 자가 황도파라는 것이고, 내면적으로는 '''미군이 일본을 점령하면 난징 대학살을 주도한 것에 의해 반인륜 범죄의 죄목으로 처형당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자는 난징 대학살 때문에 곱게 죽지도 못하고 교수대에 끌려들어가서 목이 매달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런데 항복을 하지 않고 미군의 인명 피해를 계속 내 미군을 협상의 테이블로 끌고 간다면, 일본은 미국에게 점령당하지 않고 자기는 죽지 않을 수 있다. 즉 지 목숨 구하려고 자기 백성들을 전쟁터에 개 몰듯 몰아대서 포화에 갈아넣겠다는 것. 그야말로 자기만 아는 놈이었던 셈이다.
문제는 이랬다고 하더라도 미국은 1945년 9월, '''일본이라는 나라를 아예 멸망시켜버리는, 일명 몰락 작전을 실행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소용 없는 최후의 발악이었다. 실제로 몰락 작전이 취소된 이유는 '''단순히 일본이 예상보다 일찍 항복해서''' 그런 거였다.[5]
사실 당시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을 지휘하고 여러 인체 실험과 학살을 방관했던 쇼와 덴노 또한 다른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잘 되어도 폐위되거나, 나아가서는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불안해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망한 왕정 국가들이 매우 많았는 데다,[6] 러시아 제국이나 프랑스 혁명 일화를 보면 알다시피 까딱했으면 쇼와만 폐위될 뿐만 아니라 수천 년을 내려온 일본 황실이 완전히 몰살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7] 하지만 우려했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은 채 쇼와 덴노는 황위를 유지하고 더 해먹었으며 황실도 무사했다.[8]

5. 전후


일본의 항복 이후, 중국난징 대학살에 관한 전쟁 범죄 혐의로 연합국 점령군 최고사령부에 기소를 한 것 때문에 아사카는 GHQ로부터 조사를 받기도 하였으나,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부의 일본 황족 전범재판 불기소 방침에 따라 기소되지 않았다. 일본 황족을 기소할 경우 그들을 신격화한 일본 사회가 반발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 이러한 일본의 전범들 처벌 문제 때문에 미국중국의 사이가 크게 악화된 적도 있었다. 결국 난징 대학살의 책임은 그 당시 결핵으로 실제로 지휘하지도 못하던 상황이었던 당시 상하이 방면 일본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에게 덮어씌워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 둔 것은 아니다. 1947년 8월 14일, 아사카의 가족들은 연합국 점령군 최고사령부의 방침에 따라 황족의 지위를 잃고 평민으로 강등당하였다. 아사카의 가족들은 모든 공직에서 추방당하였고, 그동안 살고 있던 자택 또한 일본 정부에게 압류당하였다. 법적인 처벌은 면했지만 그래도 모든 명예와 재산을 잃어버렸다.
이후 아타미의 자택에서 93세까지 살다가 죽었다.

6. 가족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의 8녀인 후미노미야 노부코 내친왕과 결혼, 2남 2녀를 낳았다.
  • 장남 아사카 타카히코(朝香孚彦、1912년 10월 8일 ~ 1994년 5월 6일): 일본 육군 중좌. 아내 치카코(千賀子)가 결핵으로 와병 중이던 1950년 가톨릭으로 개종하자 1951년에 자신도 온 가족과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이 사례는 신적강하된 사람을 포함해서 일본 황족 중 최초의 개종 사례였다.[9] 의친왕의 차남 이우와 동갑이었기에 의외로 잘 어울렸다고 한다. 이 사람의 아들이자 가문을 이은 마사히코(1943년생)가 무령왕릉을 참배했다는 기사가 있다. #[10]
  • 차남 오토와 타다히코(音羽正彦、1914년 1월 5일 ~ 1944년 2월 6일): 1936년 신적강하를 신청, '오토와'라는 성씨를 창씨함.[11] 일본 해군 대위. 콰잘레인 전투 중 전사하여 소좌 추서.

7. 미디어에서


영화 욘 라베에서 욘 라베와 맞서는 주요 악역 이다.[12]. 난징중국인들을 학살하려고 광분하나[13] 욘 라베와 서양인들과 중국인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일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거기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 일본군 장교들이 학살 계획을 욘 라베에게 누설하는 바람에 끝내 안전 구역에 숨은 중국인 30만 명은 건드리지 못한다.
당연하지만 일본 작품에서는 절대 나오지 않고, 만약 일본 매체에서 난징 대학살이 나오더라도 '''마쓰이 이와네와 사이 좋게 난징의 중국인들을 학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광분해서 학살을 저지른 부하들을 질타하는 장면만이 나올 뿐이다.'''

[1] 생시르, École Spéciale Militaire de Saint-Cyr, 홈페이지.[2] 여담이지만 장택상의 형인 장직상이 1937년 중일전쟁에 참가해 아사카를 만난 적이 있다. 이 대화에서 장직상은 "아사카를 만난 것이 최고의 영광"이라는 어리석은 망언을 했다. 이후 장직상은 황기 2600년 봉축 행사에 참가하고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남선전기의 사장을 맡는 등 악랄한 친일 행적 후에도 잘 먹고 잘 살았다. 여기서 이 인간은 "한국 사람들이 지원병제를 실시하니 기뻐하지?"라는 개드립을 지껄였다.[3] 말이 동생이지 아버지 아사히코 친왕이 워낙 늙어서까지도 정력을 자랑했기 때문에, 고작 이 둘의 나이 차이는 2개월밖에 되지 않는다. 동갑이긴 해도 야스히코가 더 일찍 태어났지만. 더불어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역시 메이지 덴노의 내친왕이자 노부코의 여동생인 도시코 내친왕과 결혼했기 때문에 야스히코 왕과 나루히코 왕은 형제인 동시에 동서지간이 된다.[4] 고노에 가는 후지와라 고셋케/오섭가의 우두머리라서 족보상으로는 후지와라 후미마로다.[5] 몰락 작전은 지금 기준으로도 '미국만이 가능한 작전' 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엄청난 양의 병력과 예산이 투입되는 작전이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과 달리 당시 미국 여론은 "왜놈들 때려잡자"고 이를 갈던 상황이었고, 원폭으로도 일본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일본을 지옥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즉, 미국은 엄청난 병력과 재정이 손실된다는 걸 알면서도 정말로 몰락 작전을 실행하려 하고 있었다.[6] 이탈리아 왕국의 경우에는 1943년 베니토 무솔리니를 몰아내고 연합군으로 전향해 1년 동안 이탈리아 내전을 치른 결과, 무솔리니는 죽었음에도 이탈리아 왕국이 망하고 공화정이 되었으며, 루마니아 왕국추축국이었다 연합군으로 전향했음에도 소련에 의해 망했다.[7] 농담이 아니고 미국이 마음만 먹었다면 아키히토,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를 제외하고는 그야말로 몰살시켜버릴 수도 있었다.[8] 다만 대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서, 덴노를 비롯한 일본 황실은 바지 저고리로 추락해버렸고, 일본 황실의 직궁가(다이쇼 덴노의 직계후손)를 제외한 세습친왕가와 화족들이 모두 평민으로 전락했다(신적강하). 이는 직궁가에게 있어서 큰 타격이었는데, 왜냐하면 당시에도 직궁가는 남계가 부족해서 세습친왕가인 후시미노미야와 직궁가를 배출한 간인노미야, 특히 후시미노미야와 그 분가들로 남자들의 수가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츠라노미야아리스가와노미야는 이미 대가 단절되어 있었다.[9] 공식적으로는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도 아들과 며느리를 위해서였다. [10] 기사의 당숙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11] 차남이라 가문을 이을 수 없었으므로 신적 강하를 자청, 후작 작위를 얻었다.[12] 역할을 맡은 사람은 일본의 유명한 배우인 카가와 테루유키. 그래서 이 덕분에 일본의 극우 집단에게 엄청나게 욕 들어먹었다. 감히 천것이 '''황족을 모욕했다'''는 이유로.[13] 단, 이거는 영화의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정말 난징의 중국인들을 계속 학살하려는 미친 짓을 했다면 전범 재판에서 그냥 놔둘 리가 없다. 그랬다면 황족 불기소 방침을 유일하게 예외로 두고 그 역시 교수대로 직행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