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가봉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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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가봉'''
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21세기 이전
2.2. 21세기
2.2.1. 2020년
3. 대사관
4. 여담
5.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가봉의 관계.

2. 역사적 관계



2.1. 21세기 이전


박정희 정권에서 오마르 봉고에 대해 국빈으로 엄청나게 잘 대우했고, 오일쇼크를 맞아 해외에서 기회를 찾던 한국기업들도 가봉에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친정부그룹의 대표주자였던 쌍용그룹[1]이 가봉 국영기업들과 합작하여 가봉에 15층짜리 4500평 규모로 첨단 백화점(유신백화점)을 세워주고 한국인 직원과 상인들이 가서 일했지만 이는 엄청난 정책 실패로 끝나게 되는데. 이는 모회사인 쌍용그룹이 애초에 백화점 운영경험이 없었던데다가 현지로 파견온 한국인 직원들이 가봉 현지 흑인들을 무시하고 유럽백인에게만 과도하게 친절하게 대하는 몰상식한 인종차별을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백화점은 애초에 수익을 보려고 만들었다기보다는 정관계 로비용으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실패가 예상되었다 할만하다.
이때 한국인 간부들이 흑인 종업원도 무시했기 때문에 흑인 종업원들은 아예 대놓고 물건 값을 싸게 계산하거나 아예 장부 조작을 하거나 조직적으로 물건을 빼돌리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한국인 직원들이 계산대 뒤에서 흑인 직원들을 감시해야 했다. 즉, 이상한 우월감에 빠져서 자기 회사 직원들도 피부색이 까맣다고 차별하다가 '''일만 더 늘어나게 된 셈'''. 참고로 당시 가봉의 1인당 국민소득이 오일 쇼크의 영향으로 한국의 세배들 넘기던 시절로 비록 가봉의 빈부격차가 심하기는 했다만 그럼에도 당시까지만 해도 '''가봉이 한국보다 잘살았고''' 한국이 가봉의 1인당 국민소득 수준을 넘기게 된것은 1987년도의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지 흑인들을 무시, 홀대하고 백화점을 운영하는것도 매우 웃기는 일이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가봉에 체류하던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은 이 유신백화점에서는 쇼핑은 일절 하지 않았는데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던 게 유신백화점에서 팔았던 물품들 태반이 한국에서 물건팔다 남은 재고를 가져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메이드 인 코리아하면 세계적으로 알아주지만, 당시에는 그저 듣보잡에 불과했고 좀 알려졌다 해도 짝퉁으로 악명(?)이 자자했거나 아니면 그냥 싸구려 제품 정도의 취급을 받았던 터였다. 차라리 팔던 한국산 물건들조차도 짝퉁이나 싸구려 제품 취급만 받았다면 또 모르겠는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한국에서 수입해온 옷과 바지들의 사이즈가 당대 한국인들의 체형에 맞추었기에 당연히 백인들이 입기에 너무 '''작았다'''. 이러니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이 물건을 제대로 살리가 없고 간단한 요깃거리 정도나 하는 정도가 고작일수밖에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가봉 대다수 흑인들도 당연히 이 백화점으로 쇼핑올 일은 없었고 당연히 백화점은 파리를 날릴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가봉에서도 봉고차가 봉고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소문이 나돌고 현지 교민들이 태권도 보급 등의 사업으로 겨우 뒷수습을 했기에 망정이었지 쌍용그룹 출신 간부들과 직원들이 얼마나 얼척없는 짓이나 했는지 알만하다.
한편 가봉 정부와 당시 가봉의 국회의원들도 이에 대하여 항의하자고 이를 갈았지만 그마저도 독재자 봉고가 반대 여론을 무시하면서 억지로 이 백화점을 운영했다. 하지만 봉고도 이런 차별을 불쾌하게 여겨 이 백화점에서 아무 것도 사지 않았고 정부 요인들이나 부유층도 외면해버렸다. 결국 1년도 못 가 엄청난 손해를 보며 팔려고 해도 도통 판매자가 없어서 울며 겨자먹기로 운영했다가 1986년에 현지인 사업가에게 헐값으로 백화점을 넘겨버렸으며, 이 일이 1980년대 이후 위축된 한-가봉 외교적 관계로도 이어졌다는 분석까지 있다. 여담으로 가봉에서 이 무렵에 어린 시절을 살던 한국계 의사가 있었는데 1990년대 후반 책을 내며 당시 가봉인들에게 이 백화점 때문에 한국이 얼마나 혐오를 받았는지 한국인들도 가봉에서 생활할 때 굉장히 안 좋게 지냈다고 하며 이 인종차별을 무척 비난한 바 있었다.
1982년에 전두환이 아프리카 4개국을 순방하면서 가봉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당시 환영 행사에서 대한민국의 애국가 악보를 북한 공작원들이 북한의 애국가 악보로 바꿔치기 하는 바람에 북한 애국가가 연주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로 심히 난처해진 봉고 대통령은 "완전히 진절머리가 난다."라는 직설적인 표현까지 쓰며 북한을 비난했다고 한다.

2.2. 21세기


불확실한 사업성과 노동문화의 차이로 한국 기업의 투자활동 및 관심이 미미해졌다. 그래도 뉴스기사를 보면 아직까지도 친하게 지내는 모양. #
2019년 5월 13일에 한국선급은 가봉 해사청으로부터 정부대행검사권을 받았다.#

2.2.1. 2020년


4월 9일에 주가봉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코로나19진단키트 5만개를 실은 비행기가 도착했다고 밝혔고 가봉내의 교민 4명도 특별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했다.# 4월 18일에 가봉으로 한국산 진단키트 5만개가 항공편으로 도착했다고 주가봉 한국대사관이 밝혔다.#
5월 3일에 가봉 해역에서 한국인 1명을 비롯해 선원 6명이 해적들에 의해 납치됐다.#1#2
5월 3일에 해적들에게 피랍된 50대 한국인 남성이 피랍 37일째인 6월 8일에 세네갈·인도네시아 국적 선원 5명과 함께 석방됐다.#
10월 6일에 주 가봉 대한민국 대사관은 추석연휴와 개천절에 현지 고아원과 장애인들을 돌봤다고 밝혔다.#
12월 22일에 주 가봉 대한민국 대사관은 가봉의 고등학교 8곳에 한국을 소개하는 교과서 3천여권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3. 대사관


대한민국은 리브르빌에, 가봉은 서울에 대사관을 두고 있다.

4. 여담


박정희 정권 당시 남북한간의 제3세계 수교경쟁을 하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가봉의 오마르 봉고 대통령을 국빈으로 대우하였고, 그 덕에 승합차를 당시 봉고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봉고차라 부르게 되었다는 소리가 있으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기아산업과 일본 마쓰다의 기술 제휴로 만들어진 차가 봉고인데, 실은 마쓰다의 승합 차량 모델명이 '''Bongo'''였다고 한다. 문서 참고.[2]
하지만 남북한간 제3세계 수교경쟁을 한 것과 오마르 봉고 대통령을 국빈으로 대우한 것은 사실이다.[3] 지금이야 남북한의 경제 및 외교력 차이가 어마어마하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아프리카 등 제3세계에서 남북간 치열한 외교전이 벌어졌었고 당시 한국과 북한은 서로 라이벌 관계였다. 때문에 남북한은 UN에서 지지를 얻기 위하여 치열한 외교전쟁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한국과 가봉은 의료 협력 협정과 경제·기술·문화·과학협정 등을 맺으면서 우애를 다지게 된다. 여기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김창훈 가봉 대사는 1977년 가봉 공화국 수교 훈장을 받았다. 지금 서울대학교에 가면, 오마르 봉고 대통령의 기념 식수가 있다.
가봉 공화국의 2대 대통령 오마르 봉고는 독재자였다. 1967년 취임한 이래로 사망한 해인 2009년까지 '''42년''' 동안 장기집권을 해왔다. 하지만 한국 내에서는 워낙 국빈 대접을 해왔던 인물이기에... 그의 사망으로 2009년에는 대통령 투표가 이뤄졌고, 알리 봉고 온딤바가 당선되어 집권 중이다. 이름에서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면 잘 맞춘 것. 알리 봉고 온딤바는 오마르 봉고의 아들이다.[4][5] 그래서 야당에서 부정선거의혹을 제기하며 소요사태까지 일어난 탓에 재투표를 실시. '''알리 봉고 온딤바가 당선'''되었다. 무한도전에서 방영된 바로는 오마르 봉고의 대통령 경호실장을 맡았던 한국인이 계속해서 경호실장을 역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지배층간에서는 한국에 대한 호감은 유지되고 있는 것 같다.# 알리 봉고 온딤바는 2017년 재선에 성공하였다.

5. 관련 문서


[1] 김성곤이 박정희와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나중에 항명파동으로 김성곤이 말년에 고생을 험하게 했지만 박정희와 쌍용그룹 일가간의 친분관계는 남아있었다.[2] 봉고 대통령의 생전 인터뷰를 보면 정작 본인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생각했고, 이에 한국 사람들이 자신을 생각해 줘서 고마워했다고 한다.[3] 봉고 대통령은 1975년에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1977년에는 북한도 방문했다.[4] 오마르 봉고는 말년에 이슬람으로 개종하였으며, 알리 봉고 온딤바도 같이 개종해서 이름이 바뀐 것.[5] 무한도전에서 박명수가 가봉 대통령 환영 인파에 있었고, 얼굴을 보고 낯이 익다고 했으나 돌아온건 유재석의 잔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