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프랑크
1. 생애
독일 제국 바덴 대공국의 도시였던 카를스루에에서 중류 가톨릭 가정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한스 프랑크는 1923년 9월에 돌격대에 입대했다. 그리고 1923년 11월의 뮌헨 폭동에도 참가했다. 폭동의 실패로 아돌프 히틀러가 체포되는 와중에도 체포를 피한 프랑크는 후에 뮌헨 재판소에서 열린 히틀러의 재판에서 그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1924년에 킬 대학으로부터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프랑크는 부친의 법률사무소를 도왔는데 1925년에 아버지가 횡령 혐의로 체포되면서 변호사 자격을 상실했다.(1928년에 복권) 1926년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프랑크는 뮌헨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프랑크는 1925년에 가난한 공장 노동자의 딸이며 바이에른 주 의회에서 타자수로 일하던 여자와 결혼했다. 그녀는 미인이었지만 프랑크보다 4살 연상이어서 두 사람은 아주 잘 어울린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프랑크는 그녀와의 만남을 “내 인생에서 가장 과분한 일”이라 칭했다. 프랑크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3명과 딸 2명을 두었지만 '''사실 프랑크는 이 때 여러 명의 정부를 두고 있었다.'''
1926년에 나치당에 입당한 프랑크는 아버지가 나치당을 싫어했기 때문에 일시 탈당했지만 나치당원의 변호활동을 위해 1928년에 재입당하여 나치당의 전속 변호사가 되었다. 1929년에 당 법무부장으로 취임한 그는 1930년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나치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시 30세의 최연소 의원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프랑크의 회고록에 의하면 그는 1930년에 히틀러의 자택에 초대되어 히틀러로부터 세간의 히틀러 가문의 유대인 의혹을 비밀리에 조사해달라고 부탁받았다. 프랑크는 “히틀러는 유대인이 아니며 진짜 아버지를 가릴 수 없기에 유대인의 피가 흐를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라고 당시 술회했다. 하지만 오늘날 연구에서 히틀러의 아버지가 유대계란 사실은 부정되고 있다.
2. 폴란드 총독 시절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프랑크는 중위로서 독일 육군에 입대했다. 폴란드가 점령된 후 1939년 10월 10일에 히틀러는 프랑크를 폴란드 총독으로 임명했다. 전후의 폴란드는 동부를 소련이 지배하고 중앙 및 서부를 독일이 지배했다. 그리고 다시 서부는 독일에 병합되어 중앙부만 폴란드 총독부령이 되었다. 총독부령은 폴란드의 약 40%에 해당했다.
프랑크는 폴란드 총독이었지만 권한 일부는 친위대 전국지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와 공유할 수 밖에 없었다. 폴란드인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친위대가 가진 게슈타포와 강제 수용소 등의 탄압적인 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프랑크는 크라쿠프의 바벨 성에서 폴란드 총독부령을 통치했다. 그러나 프랑크는 폴란드를 야만의 땅이라 부르면서 경멸했다. 폴란드는 그저 노동력을 제공하는 땅일 뿐이라는 뜻이었고, 그런 노예들에게 토지와 미술품은 필요 없다면서 많은 폴란드 지식인들이 나치 친위대에 의해 살해되고 보물들은 프랑크의 성으로 이동하여 사유재산이 되었다.
총독부령 내의 유대인을 게토로 수용하고 친위대에 의한 절멸수용소 이송을 허락한 프랑크는 1941년 12월 16일 연설에서 '''“유대인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유대인들은 무가치한 존재다. 그들은 분명히 박멸해야 할 존재이며 그렇게 해야만 제국 전체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 하지만 350만명이나 되는 유대인을 총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제국이 검토 중인 대대적인 방법을 조합한다면 녀석들을 말살할 수 있을 방법이 있을 것이다.”''' 라는 견해를 밝혔다. 게다가 프랑크 자신은 날이면 날마다 연회를 신나게 열고 즐겼다. 그의 통치는 완전한 전제군주와 같아서 나치당의 회계사인 프란츠 슈바르츠는 폴란드를 '프랑크의 왕국'이라 불렀다.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도 '''"프랑크는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군림한다"''' 라고 비유했을 정도였다.
프랑크는 자신이 히틀러로부터 임명되고 폴란드가 자신의 사유지란 점, 누구도 히틀러 외에 자신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영지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친위대는 프랑크를 제재할 권한이 없었다. 결국 힘러와 갈등이 생겼고 힘러는 프랑크와 그의 아내가 저지른 불법 행위들을 파악하여 이를 빌미로 협박을 했다. 원래 권력투쟁에 약했던 프랑크는 신경쇠약 일보직전까지 몰렸으며, 그의 아내는 지친 나머지 바이에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프랑크는 아내가 간 곳에까지 약탈한 미술품들과 약탈품을 보냈다. 프랑크는 폴란드 총독 자리를 사임하려고 하여 국방군 최고사령부 총장이던 빌헬름 카이텔 원수에게 자신을 병역 대상자로 넣어달라고 탄원하기도 했다. 카이텔은 히틀러에게 이를 말했지만 히틀러가 거부하여 뜻을 이루진 못했다.
1942년 6월에 독일로 돌아온 프랑크는 독일 법률학회에서 힘러에게 배신감을 느껴서인지 게슈타포를 비난하는 연설을 했고. 이에 놀란 히틀러는 프랑크를 소환하였고 프랑크가 폴란드 이외의 지역에서 연설하는 것을 금지시키며 폴란드에서의 연설도 당의 방침에 따를 것을 명령했다. 프랑크는 나치당의 법무부장 및 법률학회 회장, 국가 변무관 자리를 내놓아야 했지만 폴란드 총독 자리는 유지했다.
그 후, 프랑크는 힘러에게 힘을 빼앗기고 친위대가 유대인에 대한 이송을 관할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프랑크는 자포자기했는지 전황의 악화에는 신경쓰지 않았고, 정치에 손을 떼고 취미인 피아노 연주와 소설에 매달리며 현실도피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련군이 1945년 1월에 폴란드로 압박해오자 그는 렘브란트, 레오나르도 다빈치, 루벤스 등의 미술품을 가지고 전용열차로 탈출했다.
3. 최후
1945년 5월 4일에 바이에른에서 프랑크는 미 육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미즈바하의 형무소로 이송되었는데, 다하우 강제수용소를 통과하던 중 그가 '크라쿠프의 학살자'라는 것을 알게 된 미 육군 보병들에게 무자비한 집단폭행을 당했다. 프랑크는 구타를 견디다 못해서 5월 6일에 감옥에서 칼로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프랑크는 옥중에서 가톨릭 신앙에 심취하였고 잘못을 뉘우쳤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인정하면서 “히틀러와 독일 제국이 저지른 죄가 여기 적혀있다”라며 폴란드 총독 재임시의 일기를 법정에 제공하였다. 그는 자신은 무력했으며 히틀러와 힘러에 휘둘렸다고 항변했지만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문화재를 약탈한 전범이었다. 결국 1946년 10월 1일에 프랑크는 “폴란드에서의 유대인 학살과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죄”라는 혐의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프랑크는 다른 사형수와는 다르게 사형에 불만을 가지지도 않았으며 탄원서도 쓰지 않았다. 그는 옥중에서 사형이 집행되기 전까지는 그래도 예우를 받으며 지냈고, 옥중에서 회고록인 “죽음과 직면하여“라는 회고록을 미완성인 채로 교수대에 끌려갔다. 결국 10월 16일에 다른 사형수들과 함께 교수대에 선 프랑크는 마지막 말로 “투옥 중 나에게 호의를 베푼 모두에게 감사한다. 신이시여. 제발 나를 자비로 맞아주소서. 나의 죄를 용서하소서.” 라며 생을 마감했다.
나무위키에 서술된 독일 2차대전 전범들 가운데 확실하게 미군들에게 '''Running the gauntlet''' [1] 이라는 폭행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나머지 전범들이 연합군에게 구타를 당했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기록만 없을 뿐 암암리에 행해졌을 가능성은 있으며,[2][3] 그가 이런 구타를 당했다는 점에서 유대인들과 폴란드 국민들에게 얼마나 악마같은 존재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 미친 작자 때문에 전쟁 기간 동안 폴란드 전 국민의 20%가 죽어나갔으니 악마로 보이지 않는 게 이상할 따름.
4. 기타
그가 죽고 난 뒤 1987년에 아들 니클라스가 오랜 조사와 회상에 근거한 부친의 생애를 담은 평론집 《아버지》를 출판했는데, 이 책에는 부친이 폴란드에서 행했던 범죄행위가 적나라하게 기술되어 있었고 '아버지는 극렬 나치주의자였으며 실제로는 자신의 죄를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발언으로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2000년 TV 영화인 뉘른베르크에선 캐나다 배우 프랑크 무어가 분했다. 자신에 대한 변호를 포기하고 죄를 진심으로 뉘우친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 때문에 영국과 미국 재판관들은 감형을 제안하지만 소련 측에서 강경하게 사형을 주장하여 교수대로 끌려간다.
[1] 피해자가 두 줄로 나뉘어 선 가해자들 가운데를 달려가면 가해자들이 피해자를 몽둥이로 구타하는 방식이다.[2] 처형된 나치 전범 중에는 한스 프랑크와 동급 또는 그 이상의 악마들이 차고도 넘친다.[3] 일본은 다치바나 요시오와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 사형수들이 이렇게 학대를 당하고 얻어 터졌다는 기록(이상 일본어판 위키백과 & GHQ 기록)이 있다. 심지어 동료 일본군 전범 장군들에게도 네 놈은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신사에 자리가 없을 것이라면서 얻어터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