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봉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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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이름
경주역사유적지구[1]
Gyeongju Historic Areas /
Zones historiques de Gyeongju
국가·위치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00년
등재기준
(ii)[2], (iii)[3]
1. 개요
2. 발굴 조사
2.1. 서봉총 북분
2.2. 서봉총 남분(데이비드총)
3. 주요 출토유물
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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瑞鳳塚

1. 개요


경주시 노서동 고분군에 있는 대형고분으로 편호 상으로는 노서리 129호분에 해당한다. 서봉총이라는 이름은 스웨덴의 한자표현 서전(瑞典)의 '서' 자와 봉황의 '봉' 자를 합쳐 지은 것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을 방문한 스웨덴의 왕자가 봉황 장식의 금관을 발굴하여 이렇게 붙였다.[4]
황남대총처럼 연접분의 형태로 북분과 남분으로 구분된다. 지금은 명칭이 정리되어 서봉총이라고 하면 연접된 남분, 북분 모두를 뜻하기도 하지만 과거에는 남분은 데이비드총이라고 하였고 북분만 서봉총이라고 불렀다. 둘 다 일제시대 발굴 당시 서양인들이 참여하여 붙은 고분명.

2. 발굴 조사



2.1. 서봉총 북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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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서봉총 발굴당시의 모습
일제강점기 당시 금관총에서 우연히 신라 금관이 발견되자 수많은 신라 왕릉급 고분들을 발굴하기 위해 일본인 고고학자들이 대거 경주로 몰려들었다. 연이어 발굴한 금령총, 식리총에서도 금관을 비롯한 여러 금공품들이 출토되었고 더불어 적석목곽묘라는 묘제를 인식한 다음부터는 더욱 대릉원 일원의 신라 고분을 발굴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발굴 이전 서봉총은 남, 북분을 모두 통틀어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였다. 그 때문에 무덤이라는 인식이 상당히 낮았을 뿐더러 조선경동철도 공사의 철도 관련 부지 확장 공사 등에서 무덤에서 노출된 돌들을 사용하는 상황이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발굴은 매장주체부와 매납된 유물들에 초점을 맞추었고, 봉분은 조사대상이 아닌 걷어내야 할 일거리였기 때문에 일제 학자들은 이미 봉분이 거의 없어져있던 서봉총이 다음 발굴 대상으로 적절하다고 판단했고, 1926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1897-1993)가 서봉총 발굴에 착수했다.
금관총, 금령총에 연이어 또 다시 금관이 확인된 것을 비롯하여 '연수'라는 고구려 연호가 새겨진 은제함[5]이 발굴되어 당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직접 현장발굴조사를 보러 올 정도로 주목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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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황태자가 참가한 발굴 현장. 사진 왼쪽 하단에서 무릎을 꿇고 뭔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사람이 구스타프 황태자이다.
1926년 마침 당시 스웨덴의 황태자이자 고고학자이기도 했던 구스타프 공작[6]이 국빈으로서 일본을 방문 중이었다. 일제는 구스타프 공작이 고고학자라는 점을 파악해 직접 이 무덤 발굴에 참가해달라고 청했고, 공작 또한 고대 동양의 무덤을 직접 발굴할 기회에 호기심이 동하여 기꺼이 받아들였다.
1926년 10월 9일, 구스타프 공작이 식민지 조선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바로 경주로 이동해 불국사 동쪽에 있던 철도호텔(옛 불국사 관광호텔, 1973년 철거)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과 불국사, 석굴암을 관람한 뒤 서봉총에 도착해 발굴작업을 시작하였다. 다만 구스타프 황태자의 발굴은 퍼포먼스로, 이미 황태자가 도착하기 전까지 일본 고고학자들이 미리 발굴을 사실상 마치고 대부분의 주변 유물을 걷어내고 목관만 남겨놓은 채 황태자를 기다렸다고 한다. 황태자는 직접 금관을 출토해 나무상자에 넣어 박물관으로 가져가 세척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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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총 금관 발굴 당시, 광복 이후 재처리 및 복원된 금관
조사 결과 이 무덤은 신라 특유의 돌무지 덧널무덤 양식으로, 이전에 발굴했던 금관총, 금령총, 식리총의 매장 주체부는 절반 정도가 이미 파괴되었던 것과는 달리 비교적 온전하게 잔존했기 때문에 적석목곽묘의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금관, 금목걸이, 가슴장식, 금반지 등이 출토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호우총의 은제합이랑 유사한 연수명 은제합을 비롯하여 황남대총 남분에서나 나오는 유리배, 완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피장자는 여성이라고 밝혀졌다.
구스타프 황태자는 그날 오후 열차를 타고 경성에 들러 만찬회에 참석한 뒤 이튿날(11일) 오전에 중국으로 기차를 타고 넘어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구스타프 황태자는 경성에서 점심을 먹은 뒤 일정을 변경해서 방향을 돌려 다시 경주 고분 발굴현장으로 돌아왔다. 아마 금관이라는 특이한 유물을 직접 발굴해 낸 것이 내심 기뻤기 때문이었던 듯. 그리하여 황태자는 또 하룻밤을 경주에서 머물고 본래 일정보다 4일 늦게 서울과 평양을 다시 거쳐 중국으로 넘어갔다.
서봉총 발굴은 19일에 완료되었다. 조선총독부박물관 소속으로 발굴을 주도한 일본인 학자 고이즈미 아키오는 끝나는 날짜에 맞추어 일본에서 승려를 초청하여 위령법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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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서봉총 옛 터에 발굴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발굴된 금관 등에 대한 흑역사가 있다. 이 당시 발굴을 주도한 고이즈미 아키오는 이후 평양박물관장을 역임했는데, 이 때 서봉총에서 나온 유물들을 대여해서 평양박물관에서 특별 전시회를 열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전시회가 끝나고 술집에서 뒤풀이를 하면서 금관을 가져다가 연회에 참석했던 기생에게 씌워주곤 기념촬영까지 했다. # 보도에 따르면 이짓을 벌이다 유물이 일부 망가지기도 한 모양인데, 언론에 보도되자 엄청난 비난이 쏟아져 결국 고이즈미 아키오가 박물관장직을 내놓았다.

2.2. 서봉총 남분(데이비드총)


서봉총과 서양인의 접점이 상술한 바가 끝은 아니고 원래 서봉총에는 남분과 북분이 있는데, 이중 구스타프 황태자는 북분 발굴에만 참가하였다. 남분은 막대한 발굴비용 부담으로 발굴이 지연되고 있었는데, 3년이 지난 1929년, 영국 귀족 퍼시벌 데이비드 경(Sir Percival David, 2nd Baronet, 1892-1964)에게 자금을 지원받아서 남분을 발굴했다. 데이비드 집안은 할아버지대에 영국에서 영국령 인도로 건너가 정착해 면사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집안이었다. 퍼시벌 데이비드가 사업차 중국에 가 있을 때 서봉총 이야기를 듣고는 '조선의 고대 문화유산이 발굴되면 좋겠다. 내 희망을 허락해준다면 발굴시 견학하고 싶다.'는 편지와 함께 3천 엔을 보냈다.
그러나 이렇게 겨우 발굴을 시작했음에도 북분 서봉총에 비해 매우 초라한 유물만 출토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금제 귀고리 2개, 팔찌 4개, 반지 5개, 황색 및 흑색 유리구슬 등이었다. 동아일보 1929년 9월 3일자 기사에 보면 후원자 데이비드가 경주 불국사 철도호텔에 숙박했다고 보도하여 데이비드 경이 직접 발굴에 참관한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데이비드의 공로를 사 이 무덤은 데이비드총(塚)이라 이름 붙였다.

3. 주요 출토유물



4. 이후


서봉총은 스웨덴과의 '고고학 외교'를 위해 떠들썩하게 이용되었지만, 정작 황태자가 돌아간 후 일제의 서봉총 발굴은 내팽겨치듯 마무리되었다. 일제의 발굴 보고서를 지금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유물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고 전체 유물의 목록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구스타프 황태자가 직접 발굴한 유물 중 일부도 그 흔적이 없는데, 한자를 읽을 줄 알았던 구스타프 황태자는 한자로 '부'와 '귀'라는 글자가 쓰인 비단 조각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그것을 수거했다고 하는데 정작 지금 남아있는 유물 중에는 그런 유물을 찾아볼 수 없다. 당시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명색이 박물관인데도 불구하고, 발굴한 뒤 발굴 책임자였던 고이즈미 아키오가 따로 일본 학술지에 발표한 것을 제외하면 정식 보고서 한 편 내놓지 않았었다. 하지만 일련의 재발굴, 재조명 사업의 일환으로 국립경주박물관이 새롭게 유적, 유구 도면을 정리한 보고서를 2014년에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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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총의 발굴이 아무래도 스웨덴 황태자와 관련된 유적이다보니 스웨덴 왕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면 들르곤 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바로 인근의 봉황대, 서봉황대 고분의 초대형분들 사이에 있는 것도 모자라서 봉분마저 사라진 상태로 있기 때문에 경주에 직접 찾아가서 보면 상대적으로 초라한 느낌을 받는다. 봉분은 상술되어 있듯이 일제강점기에 이미 무덤의 돌들을 철도 부설 및 관련 시설 확장 공사에 사용하였기 때문에 되돌릴 수 없는 상태였다.[7] 현재야 당연히 그것을 복원하고자 한다면 복원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일종의 각 무덤만의 아이덴티티 정도로 남은 듯하다. 어쨌거나 남아있는 부분만 보더라도 원형을 상상해보면, 서봉총이 천마총보다는 약간 작지만 그래도 꽤나 큰 무덤임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신라 고분 조사도 그렇고 해방 이후 70~80년대의 발굴도 그렇듯이 봉분을 조사할 필요성을 인지한 것은 90년대 이후였고, 경주 일대 기조사 발굴고분을 본격적으로 재조사한 것은 2010년대에 들어서이다.[8] 서봉총이 그 일빠따로써 잔존한 봉분의 기저부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여 고분 매장주체부 재확인, 봉분의 정확한 규모 및 제사관련 유물과 시설 등을 재확인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기사 이후 금령총에도 재조사를 실시했다.

[1] 석굴암, 불국사, 양동마을 제외[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원래는 스웨덴, 즉 서전총으로 하자고 했지만 구스타프 황태자가 반대해서 서봉총으로 지었다고 한다.[5] '연수(延壽) 원년'이라고 새겨진 은제 그릇이 출토되었다. 연수는 고구려연호로 추정되나 아쉽게도 언제적 연호인지 알 수 없다. 장수왕 시기라고 막연한 추정만 할 뿐이다.[6] 훗날 스웨덴의 국왕이 되는 구스타프 6세 아돌프이다. 2016년 현재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는 그의 손자다.[7] 금관총도 마찬가지로 절반 정도가 사라졌음을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금관총을 처음으로 인지했을 당시에 금관총 절반가량을 파내고 민가가 들어서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대로 냅둔 것이다. 호우총 또한 동일한 이유[8] 물론 1990년대 즈음한 발굴부터는 애초에 조사를 착수함과 동시에 봉분조사도 같이 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