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군기
建軍期.
창군기(創軍期)라고 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을 기준으론 8.15 광복 후인 1940년대말에 해당한다.
1907년 대한제국군이 해산된 이래로 대한민국의 정식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왕실의 근위대였던 조선보병대가 있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국방이나 전투를 수행할 능력은 없었고 일본군의 부분에 불과하였다. 조선인 일본군이 있긴 했지만 1940년대가 돼서 강제 징병된 경우가 대다수였고 소수의 장교는 주로 정치적인 이유에서 복무한 왕공족이 대다수였다. 해외에는 한국광복군이나 조선의용대 등의 군사 단체가 있고 국부군, 소련군, 중공군 등에 참가한 조선인이 있긴 했다. 공식적인 한반도 국가의 정부은 없지만 타국이나 무장단체 등에서 활동하는 군사 자원은 상존했고 이들은 건군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적 규모로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에 근무한 한국인이 40만명, 광복군 등을 포함한 독립군, 중국군벌 출신 등은 3만 5천명 수준이었다.[1]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인 군사교육과정 등이 통일된데 비해 광복군 출신들은 중국 각지의 군사학교 출신들이 많았다. 거기다가 1946년 6월까지 상당수의 광복군은 중국에 체류했기 때문에 군사영어학교에 들어올 자원은 거의 복귀한 일본군, 만주군 출신들이 다수였다.
일본군으로 편입된 대한제국군 일부를 제외하면 조선인들은 모국을 상실했기 때문에 정규군이 존재하지 않았다. 징병제 또한 일본 열도의 일본인들에게 적용되었지 조선인들에겐 적용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인들은 공무원이나 교사 등 여러 공적인 직종에서 엄청난 제한을 받았는데 그나마 가장 문호가 열린 쪽이 군대였다. 식민지 시기의 군경력자는 크게 세 부류인데 아래의 내용은 1985년 논문인 <미군정기 조선경비대 창설과정 연구(김영만, 1985, 고려대)>를 참고하였다. 대체로 아래의 자료들은 병이 아닌 건군기의 장교 과정에 참석을 뜻한다.
첫째로 직업으로서 군인을 선택한 쪽이다. 일본군 육군이나 만주군의 경우 조선인에게 약간이나마 문호를 개방한 편이었고 만주군에서 1940년대에 들어서 두드러졌다. 대표적인 인물로 정일권이나 박정희가 있다. 한국인이 일본육군사관학교에 간 것은 1883년 유학생이 최초였고 1945년 해방까지 141명이 일본육사에 입학했다. 일본육사 출신으로 국군 창설에 참여한 인물은 약 35명이었다. 이들은 당대에 한국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군사교육을 받은 편이었다. 홍사익와 영친왕이 일본군 중장으로 가장 높게 승진했다. 대한제국군에서 한일합방에 협조했단 이유로 중장 계급을 받은 조선인 일본군들도 있지만 소위부터 시작한 경우는 홍사익과 영친왕이 유일하다. 만주군의 경우엔 1932년 세워진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즉 봉청군관학교나 1938년 세워진 신경군관학교 출신들인데 봉천 시절엔 2년제, 신경 시절엔 4년제였다. 만주군 장교 가운덴 약 40명 가량이 창군 과정에 참석했다. 만주군 출신들의 상당수는 함경도나 간도 출신들이 많았다.
두번재로 학병 등 강제징병으로 끌려간 케이스이다. 1938년 지원병제, 1943년 학병제, 1944년 징병제로 일본군은 부족한 병력을 한반도에서 차출했는데 육군에 186,980명, 해군에 22,290명[2] 이 끌려갔다. 군경력자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지원병은 1944년까지 17,664명이었다. 선동에 끌린 이들도 있고 강요에 의한 자도 있어 굉장히 들쭉날쭉한 편이었다. 이들은 별도의 사전군사교육 없이[3] 일본군 병으로 입대해 훈련을 받은 뒤 근무했는데 일부는 간부후보생 과정을 거쳐 부사관이나 장교로 진급했다. 지원병 가운데 100명 이상이 국군 창군 과정에 참석했다. 가장 규모가 큰 집단이었다.
학병은 미군의 OCS제도와 유사한 제도로 간부후보생 과정을 거쳐 소위로 임관했는데 소모품으로서 소대장에 가까웠다. 일단은 병으로 간 지원병보다는 군사경력이 짧지만 한국군 창군 과정에 90명 가량이 참여했다. 이들은 일본육사나 지원병보다는 친일 문제에서 떳떳한 편이었다. 또한 이들은 대체로 구제전문학교 이상의 학력자들로 당시로서는 최고의 엘리트 계층이었고 군사영어학교 등에도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4]
김계원이 대표적인 학병 출신이다. 다만 단점으로는 일본육사 출신들이 비슷한 집단생활 경험을 공유하는 것과 달리 그런 경험이 없어 응집력이 약했다고 한다.
세번째로 독립운동 등의 이유로 중국에서 군사활동을 한 인물들이다. 광복군이나 국민혁명군, 팔로군 등에서 활약했다. 일부는 사관양성소를 세워 독립군 장교를 배출했고 중국의 중앙군관학교나 지방의 군관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이들은 건군 과정에 2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1920년대부터 무장투쟁에 참여한 인물들이 많았기에 만주군이나 일본군, 지원병, 학병, 징병 등보다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만주군이나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대체로 위관급이었던 것에 비해 중국군에서 근무했던 이들은 영관 급이었다. 그 중 최고는 중국 국민혁명군 중장이었던 김홍일 장군.
요약하자면 건군기의 군맥(軍脈)의 흐름은 크게 두 가지로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일본군, 만주군 출신들과 중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느라 중국색이 강해진 독립군 출신들이었다.
( 일본육사계, 학병 장교, 일본군 징집/지원병, 일본군 하사관, 만주군, 중국 중앙군, 중국 지방군, 광복군 등으로 구체화하여 특성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중국 공산당 등과 협력한 좌익계열의 독립군 출신들은 국공내전에 참여하거나 혹은 이북으로 간 경우가 많아 한국군 창설에는 거의 의미가 없었다. 단 이는 건군기의 장교단 구성을 얘기하는 것이고 국군에는 숙군 전까지 좌익계통이 꽤 있었다.
아래의 항목은 거의 대부분이 조선경비대에 치중되어 있고 조선해안경비대나 육군 항공대는 미미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은 무장해제된다. 그러자 곳곳에서 유사 군사집단이 생긴다. 이유는 군대 되려고...
이듬해인 1946년 1월 15일에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설치되며 이들은 대한민국 육군의 원형이 된다. 국방부 역할을 하던 통위부 하에 귀속된다. 2월 7일엔 남조선국방경비대 총사령부가 서울 남사동에 들어선다. 5월 1일에는 경비사관학교가 생긴다. 같은 해 6월 15일에 조선경비대로 개칭한다. 같은 날에 조선해안경비대가 출범하고 이들은 대한민국 해군의 원형이 된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방부가 설치되고 다음 달인 9월 5일에 조선경비대는 대한민국 육군으로 조선해안경비대는 대한민국 해군으로 개칭된다. 1948년 11월 30일에는 국군조직법이 공포되어 편제 등이 기틀을 잡고 1949년 4월 15일엔 대한민국 해군 내에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되고 10월 1일엔 대한민국 공군이 창설된다.[5] 현대전의 선두주자였던 미군에서도 1947년에서야 군종(軍種)으로서 공군이 나타났던 터라 당시 군사적 기반이 미약하던 한국군에서 공군을 굳이 분리할 필요가 있냔 말이 많았지만 공군의 창군인사들이 강하게 밀어붙인 터라 성사됐다. 공군으로 입대한 사람은 기훈단에서 공군사를 정리한 책에서 이를 읽었을 것이다. 1949년 12월 6일에는 징병검사가 최초로 실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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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7월 교련 교사로 배속될 여군 장교 선발도 이뤄졌다.
실전 경험이나 편제, 훈련, 군사교리 등의 축적이 상당히 빈약한 군대였지만 이듬해인 1950년에 대규모 열전인 한국전쟁이 북한의 침공으로 발발하는 바람에 금세 군은 기틀을 다지고 변화한다.
국방부 블로그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정은 정부 설치를 준비하면서 난립한 군사집단을 정리하고 1945년 11월 13일에 국방사령부를 설치한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 보안대와 무위대(武衛隊)를 두었으나 미군정이 정부기능을 불허함에 따라 무위에 그친다. 당시 주요 군사단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이들은 신생 조국의 군대가 되겠다며 독자적인 장교와 사병 양성기관을 세웠다.
이들의 활동은 미군정에서 세운 군사영어학교와 별도의 행동이었고 임시정부 출신이나 광복군 출신들이 군사영어학교에 오지 않아 만주군이나 일본군 출신이 대다수를 채우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미 본토는 일본 점령 문제에 몰두하느라 한국에 주둔할 부대를 1945년 8월부터 9월 사이에 12번이나 바꾸었다. 정책에 일관성이 부족했고 미군정의 최고 지휘관인 하지 중장은 야전 출신이며 군정청 내에 행정 경력을 가진 이가 거의 없었다. 이는 일본 총독부에서 일하던 이들의 인적구성이 초기 한국 정부에 상당수 유입되는 결과를 낳았다. 흔히 친일파를 청산했다는 인식의 소련이 주둔한 북한 역시 다를 바 없었다.
미군정은 갓 전쟁을 마친 터라 미군을 본국에 돌려보내고 감축하는 방안을 고려했다. 그런 제안이 고려되는 가운데 북한에선 빠르게 군대의 원형이 만들어졌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 계열에서 기존의 사설군사단체를 통합하여 보안대(保安隊)란 공식적인 군사집단을 만든 것에 미군정은 자극을 받았다. 보안대는 뒤에 조선인민군이 된다. 거기에다 한국에서 사설군사단체들이 난립하는 것을 통제할 필요도 있었다. 당시 미군정 치안국장이자 점령군사령부 헌병사령관이었던 로렌스 시크(Lawrence E. Schick) 준장은 이 문제를 최초로 거론하였다. 군정장관인 아치벌드 아놀드(Archivald V. Arnold) 소장은 그의 제의를 받아들여 당시의 국립경찰[7] 외 치안을 유지할 군사집단을 검토하였다. 같은 해 11월 13일에 시크 준장을 책임자로 하는 국방사령부가 발족되었다. 5일 뒤인 11월 18일에 연구팀은 국방군 창설안을 내놓았다. 국립경찰을 보강하기 위해 국방사령부 밑에 경찰대와 육/공군으로 구성되는 국방군, 해안경비대를 두기로 했다. 경찰병력은 25,000명 수준으로 증강하고 국방국 육군은 보병사단 3개 45,000명 수준, 공군은 운송중대와 2개의 전투비행중대를 두고 해안 경비를 위해 5,000명 수준의 해안경비대를 두기로 했다. 인원 편성은 미군 스타일을 따르고 장비는 미군에서 남는 것으로 충당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시크의 계획안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측의 반대에 부딪힌다. 맥아더는 한국에서 군을 창설하는 일이 자신의 권한 밖이라며 치안유지는 경찰로 충분하다고 반대했다. 시크의 계획안은 수포로 돌아갔는데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미국 정치권에선 한국에서 군대를 만드는 일이 소련을 자극하는 일이 될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었고 일본도 당시엔 한참 비군사화가 진행 중이었다. 중국 대륙에선 아직 중화민국이 굳건히 버티는 상태였다. 미 합참은 맥아더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한국의 국방군 창설 문제는 연기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 중장은 12월 20일에 국방사령부 사령관에 새로 챔프니 대령을 임명하며 시크의 계획안을 소형화하고 현실적으로 개편하라고 지시했다. 그의 계획은 뱀부(bamboo) 계획이라 불렸다. 그의 계획안은 당시 국방사령부의 한국인 고문이었던 이응준[8] 의 조언을 받은 것이다.
뱀부계획에 따라 창설될 경찰예비대의 인원 규모는 다음과 같다. 규모는 8개 연대로 25,000명이며 각 도마다 1개 연대를 배치한다. 한 개 중대의 편제는 장교 6명에 사병 225명이며 처음엔 도마다 한 개 중대를 설치하고 인원이 20%를 초과할 때마다 중대를 신설하고 3개 중대가 되면 본부중대와 대대본부를 구성하여 한 개 대대를 편성한다. 이런 식으로 연대가 될 때까지 계속 증설한다. 창설요원은 미군 장교 2명과 사병 2명을 각 도마다 배치한다.
경찰예비대는 1950년에 세워진 육상자위대의 전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처럼 1946년 당시에는 정식 군대를 만드는 것보다는 경찰을 보조하는 치안부대에 가까웠다. 뱀부 계획은 맥아더에게 보고됐고 맥아더는 합참에 이를 보고했다. 그리고 합참에 잉여무기 등을 요청했다. 합참이 이를 승인하면서 경찰예비대는 창설 준비에 들어갔다. 이런 무장집단의 형성은 상당히 소련의 반응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미군정청은 미군정법렬 제28호 국방사령부 설치법령으로 창군을 준비했다. 그리고 1945년 12월 5일에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31번지 감리교 신학교 자리에 군사영어학교를 세웠다. 개교 이전에 챔프니 대령은 여섯 개 사설군사단체의 대표를 불러 군경력자들을 적극 입교시켜줄 것을 부탁했다. 1946년 2월 27일에는 현재의 육군사관학교 자리인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태릉(현재의 도봉구 화랑로[9] )의 구 일본군지원병훈련소로 옮겼고 1946년 4월 30일 폐지할 때까지 경찰예비대 창설요원 110명을 배출하였다. 87명은 일본군, 21명은 만주군 출신이었으며 그 가운데 68명은 학병 출신이었다. 미군정은 군경력자들을 적극 채용할 계획이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언어였다. 미군정기의 공용어는 영어였기 때문에 초보적인 군사영어를 교육할 필요가 생겼다. 게다가 군사단체들이 정치단체와 연결되어 폭력행위를 저지르고 다녔기 때문에 통제가 필요했다.
군사영어학교의 교장은 미군 리스 소령이었고 그린 대위, 비숍 대위 등 미군 장교 셋에 부교장으로 원용덕[10] 과 원용덕의 세브란스 동창이었던 최용준과 임영채 목사가 교관으로 참석했다. 5개월 동안 리스 소령과 매커리 소령, 그린 대위, 비숍 대위 등 교장의 교체가 잇따르면서 교육 과정은 상당히 파행이었다. 군사영어를 습득하는 게 목표라서 훈련 등의 구령도 영어로 했으며 한국역사나 참모학, 소화기기계훈련, 자동차교육 등이 있었으나 교육효과는 미미하였다. 상당수가 일본군에서 교육을 받은 탓에 영어로 구령을 넣어야 하는데 일본어로 구령을 넣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다른 과목이 엉망으로 굴러가는 동안에도 영어는 매일 시험을 치렀다. A반부터 D반까지 실력에 따라 편성됐는데 A반은 영자지인 라이프를 읽을 수준이었고 D반은 알파벳과 숫자부터 가르쳤다. 성적순에 따라 반을 다시 편성했는데 이는 웨스트포인트에서 쓰던 교수법이었다. 학생들은 통역관 수준의 경제적 대우를 받았다. 그때문에 봉급도 받았는데 첫 달엔 900원을 받았고 1946년 1월부터는 1,300원을 받았다.[11] 당시 1,300원은 쌀 1.5가마(135L)를 살 수 있는 수준이었다.
군사영어학교의 입학 자격 기준은 해방 전에 장교나 준사관, 사관후보생 이상의 군경력이 있으면 가능했다. 학력은 중학교 이상이면 충분했다. 되도록이면 소장파로 뽑았는데 군사영어학교에서 사설군사단체들이 파벌질 하는 걸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1기는 60명인데 광복군 등 중국군 출신 20명, 만주군 20명, 일본군 20명으로 뽑으려고 했다. 일본군은 이응준이 만주군은 원용덕이 중국군은 조개옥이 추천하기로 했다. 이응준은 일본육군사관학교 26기 출신으로 홍사익과 동기이다. 남한 지역에 있던 일본군 출신 중에 최고 계급자였다.[12] 1919년 3. 1 운동 당시에 일본육사에 있던 김경천, 지청천이 중국으로 망명할 때 같이 모의했으나 본인은 가지 않았다. 원용덕은 세브란스의전을 나와 만주군 군의관으로 입대해 중령까지 올랐고 당시 한국에 있던 만주군 출신 중에 최고 계급자였다. 조개옥은 중국의 보정군관학교[13] 를 나와 화북의용군 여단장으로 준장[14] 에 오른 자였다. 이들의 추천이 중요했기에 선발시험은 사실 형식적인 것이었다. 학생들은 이력서를 제출하고 시험관인 챔프니 대령과 군사국 차장인 리아머 아르고(Reamer W. Argo) 대령의 면접을 하고 신체검사를 받으면 시험을 마쳤다. 즉 군경력이 있는지 확인하고 신체만 멀쩡하면 입학하는 구조였던 셈이다.
1기 60명 가운데 1946년 1월 15일에 경비대가 창설되자 21명은 창설요원으로 임관했다. 나머지는 10여 회에 걸쳐 나눠서 임관했다. 경비대가 생기자 서류상으로만 입교시키고 바로 현지에 부임한 경우도 많았는데 만주군 중위 출신인 백선엽이나 만주군 상위 출신인 김백일, 학병 소위 출신인 정진운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 외에 경비대에 사병으로 입대한 인원 중에 자격이 있다 싶으면 창설요원들의 추천을 받아 장교로 임관시키기도 했다. 학병 소위 출신인 유흥수나 지원병 준위 출신인 함병선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들은 경비대 1연대 사병으로 입대하여 근무했는데 지휘관 채병덕 대위(정위)의 추천으로 현지에서 임관되었다. 이응준 같은 경우엔 국방사령부의 고문이라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을 상황이 아니었는데 뒤늦게 군사교육을 받기에 모양새가 이상하니 소급해서 졸업했다고 서류상으로 처리했다. 원용덕 같은 경우엔 부교장이면서 학생이었다. 당시 200명 정도의 군경력자를 모았는데 110명이 군사영어학교를 나왔고 40명 정도는 군사영어학교를 폐지한 뒤에 만든 경비사관학교 1기생(육사 1기에 해당한다)으로 재입교해서 1946년 6월 15일에 임관했다. 나머지는 퇴교하거나 임관하지않고 대신 통역관으로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학생들은 대부분 참위(소위)로 임관했다. 그 후 실적에 따라 진급한단 구조였는데 대령이나 중령했던 사람이 소위로 임관하는 건 문제가 있다며 특례를 적용했다. 중국군 같은 경우엔 같은 연령대의 일본군과 비교할 때 계급이 높은 경향이 있어서 일본군 수준으로 조절했다. 이성가(국부군 소교)[15] , 백선엽(만주군 중위), 김백일(만주군 상위), 최남근(만주군 상위) 등은 소위(참위)로 임관했다. 이형근(일본군 대위), 채병덕(일본군 소좌), 유재흥(일본군 대위), 장석윤(일본군 중위), 정일권(만주군 상위) 등은 대위(정위)로 임관했다. 원용덕(만주군 중교)은 소령(참령)으로 임관했고 이응준(일본군 대좌)은 대령(정령)으로 임관했다.
이런 인원구성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만주군이 일본군의 괴뢰군이었으므로 군사영어학교 등 경비대 창설인원 가운데 98.2%가 일본군 출신이었고 1.8%가 중국에서 활동하던 이들이었다.
110명 가운데 60여명이 한반도 남부, 40명은 한반도 북부 출신이었고 10여명은 한반도 밖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월남이 본격화될 때가 아니라 남한에 북부 출신들이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북부 출신이 많았던 건 한반도 북부에 일본군 기지가 많고 만주와 가까웠던 탓이 작용했고 당시 소련군정과 공산주의 계열에서 일본에 부역한 이들을 강하게 처벌한다는 소문이 돌아 장교 출신들이 대피한 탓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백선엽은 자신이 만주군 간도특설경비대에서 공산계 군사집단인 만주항일게릴라들과 싸웠기 때문에 북한에선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울 거라 판단해 선배인 정일권을 설득해 월남했다. 월남한 이들 북부 출신 군경력자들은 남부에 경제적/사회적 기반이 없던 탓에 군대에 들어왔다. 육군참모총장 가운데 1대부터 18대까지는 전원이 군사영어학교 출신이며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다.[17] (이 부분에서 사실 누락된 문제가 있다. 1948년 육군총사령관 직책으로 송호성 장군이 있었다. 당시 육군총사령관은 육군참모총장의 원래명칭이었다. 하지만 1대 송호성(광복군 출신) 장군의 전시 월북문제와 월북후 행적문제가 여전히 논란중인 사항이라서 한국군으로서는 흑역사로 취급되었고 이점은 실질적으로 기록말살을 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
학력사항은 아래와 같다.
남조선국방경비대의 창설과 동시에 1946년 2월 1일 장병의 계급호칭·계급장을 제정했는데, 대한제국군의 계급을 참고로 하여 장교는 참위-부위-정위-참령-부령-정령, 하사관은 참교-부교-특무부교-정교-특무정교-대특무정교, 병은 이등병-일등병으로 제정했다. 하지만 나중에 일본군 출신들이 일본군식 계급제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가 임정요인들과의 절충을 통해서 1946년 12월 1일 미 육군 계급제도를 참조하여 장교는 소위-중위-대위-소령-중령-대령, 하사관은 하사-이등중사-일등중사-이등상사-일등상사-특무상사로 변경하였다.
창설요원은 각 연대별로 미군 장교 2명,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미군 사병 1명[19] 과 한국인 군경력자 3-5명 정도로 구성됐다. 공식적인 지휘권은 1946년 9월에 한국인에게 넘어갔다. 1946년 1월 15일 경기도에 조선경비대 제1연대가 창설됐고 4월 초에는 8개의 연대가 창설됐다.
창설요원으로 장교는 생겼으니 사병 모집이 문제였다. 먼저 경찰 내부와 사설군사단체들에 광고를 하여 군경력자를 모집했고 라디오방송과 지역신문에 광고를 실었다. 절차는 면접을 거친 뒤에 신상명세서를 작성하고 인근 병원에서 신체검사와 예비접종을 하면 됐다. 경기도에 주둔했던 제1연대는 1개 중대 225명을 선발하기 위해 모병을 했는데 1천명이 응모했다.[25] 다만 경기도 외의 다른 지방은 모병이 기대보다 적었다. 그때문에 장교들이 직접 모병 활동을 하고 다녔다.
초반엔 보급이 엉망이었다. 병영식의 경우엔 중앙으로 조달되는 현금으로 때웠으나 그 외에는 엉망이었다. 의복과 장비는 일본군이 버리고 간 것을 지급했다. 장비는 일본군이 썼던 38식 소총이나 99식 소총을 썼다. 소총은 그나마 6천 정 정도 수준이었고 탄알은 9만 발에 불과했다. 교육훈련도 부실했고 일단 인원 불리기에 집중했다. 통일된 지휘방침이나 교육방안도 없었는데 이는 당시 경비대의 법적지위가 경찰의 예비나 보조부대라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자위대와 비슷한 처지였던 셈이다. 미군정은 개인화기 이상의 무기의 조작법은 금지했고 도수훈련, 집총훈련, 총검술 외에는 모두 치안유지를 위한 폭동대처 등의 훈련에 치중했다. 다만 백선엽은 미군 고문과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술기동훈련을 했다.
19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소련의 눈치를 살피느라 한국의 무장에 소극적이던 태도에서 입장을 바꿨다.[26] 같은 해 3월 29일에 미군정법령 제63호는 국방사령부에 있던 경무국(경찰)을 독립시켜 군정청 내에서 치안담당부서와 국방담당부서를 구분하였다. 같은 날에 64호를 내어 각 부서를 국(bureau)에서 부(department)로 승격했는데 국방사령부(Office of Director of National Defense)는 국방부(Department of National Defense)로 승격됐다. 그러면서 군사영어학교를 폐지하고 정식으로 장교를 양성할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조선경비사관학교)를 세웠고 군정청의 예산 1/3이 경비대 예산이 되었다. 1946년 6월 15일엔 국방부가 국내경비부-또는 통위부(統衛部[27] , Department of Internal Security)로,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는 조선경비사관학교로 개칭되는 등 흐름은 위축되는 듯 했다. 이는 5월 20일에 재개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1946년 9월 11일 경비대에 배치됐던 미군 고문관들은 한국인 지휘권으로 대체되었다. 통위부의 담당자도 한국인으로 바뀌었다. 9월 12일에 일본육사 15기 출신으로 망명해 한국광복군 참모총장을 지낸 유동열이 통위부장에 임명되었다. 이는 일본군과 만주군이 주를 이뤄 경비대의 정통성이 약하다는 비판을 의식한 것이었다. 유동열이 들어오면서 광복군 출신들도 경비대에 입대하였다.
12월 7일에 통위부 참모총장에 이형근 중령이 선임되었다. 1946년 말엔 도마다 연대가 하나씩 자리를 잡았고 제주도에도 한 개 연대를 신설해 9개 연대가 되었다. 1946년 11월말 기준으로 경비대의 병력은 장교 143명, 사병 5,130명이었다. 1946년 7월에 국립경찰은 23,000명이었다.
경비대는 시설이나 장비, 의복 등에서 아주 열악했다. 그때문에 초기의 창설요원들은 근처의 미군기지 등을 방문해 미군과 협상을 벌여 물자를 획득해야했다. 파벌 문제도 심각했는데 이형근과 채병덕의 대립이 주됐다. 이형근은 장인이 당시 최고계급자였던 이응준 대령이었다. 채병덕 쪽엔 만주군 출신인 원용덕 등 북한 출신들이 참여했다. 채병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참모총장이 되자 양국진, 강문봉, 백선엽, 정일권 등의 자기파 인물을 기용했다. 뒤에 광복군 출신이 들어오자 광복군들도 자신들의 파벌을 형성했다. 통위장관이었던 유동열의 영향력이 작용했다. 그는 광복군 준장(참장) 출신인 송호성을 제2대경비대사령관에 기용했고 광복군 대령(정령) 출신인 최덕신을 제2연대장에 중국군 중령 출신인 오동기를 경비대 감찰총감 등에 중용했다. 다만 이들은 숫자가 적었던 탓에 큰 파벌을 이루진 못 했다.
가장 다수를 이룬 출신이 일본군이었기에 엄격한 규율과 무조건 복종, 절대충성 등을 강조하는 일본군의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다.[28] 이형근의 경우 일본군 장교제복을 입고 장화를 신고 일본도를 지휘도로 차고 근무했다. 이때문에 미군 고문과 자주 갈등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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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초가을에 광주에서 시가행진하는 조선경비대 4연대.
1947년 12월 1일, 미 군정은 기존 9개 연대에 제1·2·3여단을 창설하였고, 미 합동참모본부가 경비대의 50000명 증강계획을 승인하자, 1948년 4월 29일에 추가로 제4·5여단을 창설하였다.
이와 함께 1948년 5월 1~4일 사이에 제10·11·12·13·14·15연대를 창설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1948년 8월 15일 까지 조선경비대 육군은 5개 여단, 15개 연대, 50490명의 병력으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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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15일에 서울에서 시가 퍼레이드를 벌이는 국군. 흰 정복을 입은 것은 당시 조선해안경비대원.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과 정부조직법(법률 제1호)이 공포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미군정은 끝나고, 통위부의 행정은 국방부로 이양되었으며, 8월 16일 이범석 장군이 초대 국방장관에 취임되었다. 9월 1일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는 국군에 편입되었고, 9월 5일에 각각 육군과 해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1월 30일 국군조직법(법률 제9호), 12월 7일 국방부직제(대통령령 제37호)가 제정·공포됨으로써 12월 15일부터 통위부가 국방부로, 조선경비대·조선해안경비대가 각각 육군·해군으로 정식 편입·법제화되었다.
국군조직법에 따라 국방부에 참모총장을 두고, 그 밑에 육군본부와 해군본부를 설치하였으며, 각 군을 정규군과 호국군으로 조직하고, "필요할 때에 육군 항공병은 공군으로 조직할 수 있다"고 하여 공군 창설을 명시해두었다. 이범석 국방장관은 광복군 출신인 최용덕 장군을 국방차관에, 일본군 출신인 채병덕 대령을 국방부 참모총장에 임명하였고, 11월 20일 육군총참모장에 이응준 대령을 임명하있다. 창설 당시 국방부 기구는 비서실·제1국·제2국·제3국·제4국·항공국으로 조직되었고, 국방부참모총장·참모차장이 연합참모회의와 육군본부·해군본부를 관리했다. 육·해군 본부의 참모총장과 참모부장이 각군을 관리했다.
12월 10일 이응준·채병덕·송호성·손원일이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 김홍일이 준장으로 임관했으며 이 다섯명이 국군 최초의 장관급 장교로, 12월 22일 중앙청 광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계급장을 수여하였다. 2개월 후인 1949년 2월 4일 위 다섯명 중 송호성을 제외한 네명이 소장으로 진급하였고, 같은 날 정일권·이형근·원용덕 대령이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이범석 장관의 국군 육성 방침에 따라, 일본군, 만주군, 광복군 출신 경력자들이 육사 7기 특기와 육사 8기 특기로 대거 입교하여 일부는 3주간의 견습과정만 거친 뒤 대령 임관되기도 했다.
한편 1949년 3월 21일, 2대 국방장관에 취임한 신성모는 국방기구의 간소화를 도모한다는 이유로 5월 9일 국군조직법 제7조에 명시된 육·해군을 통할 지휘하던 국방부 참모총장 제도와 연합참모회의를 폐지하고, 장관이 직접 각군 총참모장을 통솔하는 것으로 개정했다. 이에 따라 국방부 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소장이 제6여단 제8연대 2개 대대의 월북으로 사퇴의사를 밝힌 이응준 육군총참모장에 이어 2대 육군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5월 12일에는 육·해군본부의 참모부장제가 작전참모부장제와 행정참모부장제로 개정되었다.
1948년 9월 조선경비대가 대한민국 육군으로 개칭됨에 따라 조선경비대총사령부는 육군총사령부로 개칭되었으며, 경비대총사령관 송호성 준장은 육군총사령관에 그대로 유임되었다. 그 뒤 12월 15일에 육군총사령부는 다시 육군본부로 개칭, 11월 20일 초대 육군총참모장에 제1여단장 이응준 대령이, 육군참모부장에 정일권 대령이 취임되었다.
육군은 1948년부터 1949년 6월까지 빠진 제16·17·18·19·20·21·22·23·25연대와 독립기갑연대를 창설하였는데, 이 중 제20연대는 광주의 제4연대를, 제22연대는 대구의 제6연대를 해체하여 개편한 것이고, 여순 사건을 일으킨 제14연대가 1948년 10월 28일에 해체됨으로써 1949년 6월 까지 총 8개 사단과 22개 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1948년 11월 20일, 제4여단을 제6여단으로 개편하고, 1949년 1월 7일에 용산에서 창설한 제7여단을 2월 1일에 수도여단으로 개칭하였다. 각 연대의 창설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1949년 5월 12일 국군조직법에 따라 제1·2·3·5·6·수도여단을 각각 사단으로 승격·개편하였으며, 이와 함께 총참모장 밑에 한명으로 되어있는 참모부장제를 작전참모부장과 행정참모부장 2명으로 편성했다. 6월 20일에는 수도사단을 제7사단으로 개칭하는 동시에 제8사단과 사단급인 수도경비사령부를 창설했다.
또한 육군은 국군조직법에 따라 보병·기병·포병·공병·기갑병·항공병·방공병·통신병·헌병 등의 병과가 제정됨에 따라 미 군사고문단과 협조하여 12개 군사학교를 창설하였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육군은 총 8개 사단과 22개 연대 및 지원부대와 특과부대, 94974명의 병력을 보유하였다.
대한민국 해군 문서의 역사 문단 참조.
1949년 4월 15일에 해군 내에 해병대가 설치됐다. 1949년 2월 1일에 창군선발대가 진해덕산비행장에 와서 기지 설립을 준비하였다. 초기에는 사실 해병대라기보단 해군 기지 경비대에 가까웠다. 초기 인원들은 장교는 만주군이나 일본군 육군, 부사관은 일본 해군 육전대 출신들이 많았다. 상륙작전을 경험한 인적자원이 그쪽 출신들이 많다보니. 상선사관 출신들이 주축이 된 해군과 달리 해병대는 일본군 출신이 상당했다. 해군에서 장교 26명, 부사관 54명에 병 300명을 인수한 380명으로 시작했다. 처음엔 사령부가 아니라 대대 규모였다. 첫 사령관인 신현준 중장은 일본육사와 만주국육군군관학교를 거친 만주군 대위 출신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상관이었고 한국군 중령으로 (명색은) 사령관을 지냈다. 2대 사령관인 김석범 역시 만주군 상위(상급대위) 출신이었다. 신 중장의 경우 사령관을 지낸 뒤에 해병대 규모가 확대되면서 여단장 등을 다시 지냈다. 3대인 김대식 중장부터 일본군 출신이 아닌 인물이 등장했다. 4대인 김성은 중장부터 사실상 해군사관학교 출신들이 사령관을 독점하고 있으나 전도봉 중장은 해병대 연세대 학사장교 출신으로 사령관에 올랐다. 참고로 이 양반은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의 주동자였다(...)
1949년 8월엔 해군에서 추가로 병 440명을 지원받아 두 개 대대 규모로 확대하였고 제주도와 지리산 인근에서 공비 토벌작전을 벌였다. 제주도에서는 4.3 사건 때문에 민간인 학살에서 자유롭진 못한 편이다.
1950년에 신규 임관자를 육군사관학교 9기 인원을 끌어다 썼고 그 이후엔 해군사관학교 출신 중에 임관한다.
해병 1기. 해군병 13기에서 특별모집했다.
1948년 4월 1일, 중화민국 공군의 원로[29] 이자 한국 광복군 참모처장을 지낸 최용덕의 주도하에 김정렬, 박범집, 장덕창[30] , 이근석, 김영환, 이영무가 조선국방경비대 보병학교에 입교하여 동년 5월 14일에 육군소위로 임관, 7월 12일엔 항공병 1기가 모집되었다. 당시 명칭은 항공기지부대였고(초대 부대장: 최용덕), 항공기지사령부로 이름을 바꿨다가 1949년 10월 1일에 총원 1,100여명의 대한민국 공군으로 독립했다.
1949년 1월 14일엔 공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육군항공사관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31] 참여한 인물들은 주로 중국 공군 출신, 일본 육군항공대 출신, 일부 민간항공 출신이었다. 일본 해군항공대에 복무했던 조선인들은 아무도 참여하지 않았다.
당시 국립경찰이 우익 중심이었던데 비해 건군기의 조선경비대는 우익과 좌익이 뒤섞이고 지방색이 강한 편이었다. 영관급 이상 장교 중엔 우익 출신이 많았지만 사병,부사관 중엔 좌익 출신도 많았고, 위관급 장교 중에도 좌익이 꽤 있었다. 그때문에 좌익 계통의 군인들과 우익 계통의 군인들끼리 충돌하는 일도 잦았고 군인과 경찰이 부딪치기도 했다.[32] 대표적으로 영암사건이 있다. 뒤에 일어날 여순사건의 전초전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문제로 여겼고 뒤에 숙군을 벌여 좌익 계통의 군인을 몰아내는데 이중 일부는 빨치산이 되기도 했다.[33]
민간인학살 문제도 잦았던 점도 문제였다. 대표적으로 4.3 사건, 문경 양민학살 사건, 여순사건 이후 부역자 처벌 과정에서 일어난 잔인한 보복과 학살 등을 들을 수 있다.
1. 개요
창군기(創軍期)라고 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을 기준으론 8.15 광복 후인 1940년대말에 해당한다.
2. 배경
1907년 대한제국군이 해산된 이래로 대한민국의 정식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왕실의 근위대였던 조선보병대가 있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국방이나 전투를 수행할 능력은 없었고 일본군의 부분에 불과하였다. 조선인 일본군이 있긴 했지만 1940년대가 돼서 강제 징병된 경우가 대다수였고 소수의 장교는 주로 정치적인 이유에서 복무한 왕공족이 대다수였다. 해외에는 한국광복군이나 조선의용대 등의 군사 단체가 있고 국부군, 소련군, 중공군 등에 참가한 조선인이 있긴 했다. 공식적인 한반도 국가의 정부은 없지만 타국이나 무장단체 등에서 활동하는 군사 자원은 상존했고 이들은 건군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적 규모로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에 근무한 한국인이 40만명, 광복군 등을 포함한 독립군, 중국군벌 출신 등은 3만 5천명 수준이었다.[1]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인 군사교육과정 등이 통일된데 비해 광복군 출신들은 중국 각지의 군사학교 출신들이 많았다. 거기다가 1946년 6월까지 상당수의 광복군은 중국에 체류했기 때문에 군사영어학교에 들어올 자원은 거의 복귀한 일본군, 만주군 출신들이 다수였다.
3. 일제강점기 시기의 군경력자
일본군으로 편입된 대한제국군 일부를 제외하면 조선인들은 모국을 상실했기 때문에 정규군이 존재하지 않았다. 징병제 또한 일본 열도의 일본인들에게 적용되었지 조선인들에겐 적용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인들은 공무원이나 교사 등 여러 공적인 직종에서 엄청난 제한을 받았는데 그나마 가장 문호가 열린 쪽이 군대였다. 식민지 시기의 군경력자는 크게 세 부류인데 아래의 내용은 1985년 논문인 <미군정기 조선경비대 창설과정 연구(김영만, 1985, 고려대)>를 참고하였다. 대체로 아래의 자료들은 병이 아닌 건군기의 장교 과정에 참석을 뜻한다.
첫째로 직업으로서 군인을 선택한 쪽이다. 일본군 육군이나 만주군의 경우 조선인에게 약간이나마 문호를 개방한 편이었고 만주군에서 1940년대에 들어서 두드러졌다. 대표적인 인물로 정일권이나 박정희가 있다. 한국인이 일본육군사관학교에 간 것은 1883년 유학생이 최초였고 1945년 해방까지 141명이 일본육사에 입학했다. 일본육사 출신으로 국군 창설에 참여한 인물은 약 35명이었다. 이들은 당대에 한국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군사교육을 받은 편이었다. 홍사익와 영친왕이 일본군 중장으로 가장 높게 승진했다. 대한제국군에서 한일합방에 협조했단 이유로 중장 계급을 받은 조선인 일본군들도 있지만 소위부터 시작한 경우는 홍사익과 영친왕이 유일하다. 만주군의 경우엔 1932년 세워진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즉 봉청군관학교나 1938년 세워진 신경군관학교 출신들인데 봉천 시절엔 2년제, 신경 시절엔 4년제였다. 만주군 장교 가운덴 약 40명 가량이 창군 과정에 참석했다. 만주군 출신들의 상당수는 함경도나 간도 출신들이 많았다.
두번재로 학병 등 강제징병으로 끌려간 케이스이다. 1938년 지원병제, 1943년 학병제, 1944년 징병제로 일본군은 부족한 병력을 한반도에서 차출했는데 육군에 186,980명, 해군에 22,290명[2] 이 끌려갔다. 군경력자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지원병은 1944년까지 17,664명이었다. 선동에 끌린 이들도 있고 강요에 의한 자도 있어 굉장히 들쭉날쭉한 편이었다. 이들은 별도의 사전군사교육 없이[3] 일본군 병으로 입대해 훈련을 받은 뒤 근무했는데 일부는 간부후보생 과정을 거쳐 부사관이나 장교로 진급했다. 지원병 가운데 100명 이상이 국군 창군 과정에 참석했다. 가장 규모가 큰 집단이었다.
학병은 미군의 OCS제도와 유사한 제도로 간부후보생 과정을 거쳐 소위로 임관했는데 소모품으로서 소대장에 가까웠다. 일단은 병으로 간 지원병보다는 군사경력이 짧지만 한국군 창군 과정에 90명 가량이 참여했다. 이들은 일본육사나 지원병보다는 친일 문제에서 떳떳한 편이었다. 또한 이들은 대체로 구제전문학교 이상의 학력자들로 당시로서는 최고의 엘리트 계층이었고 군사영어학교 등에도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4]
김계원이 대표적인 학병 출신이다. 다만 단점으로는 일본육사 출신들이 비슷한 집단생활 경험을 공유하는 것과 달리 그런 경험이 없어 응집력이 약했다고 한다.
세번째로 독립운동 등의 이유로 중국에서 군사활동을 한 인물들이다. 광복군이나 국민혁명군, 팔로군 등에서 활약했다. 일부는 사관양성소를 세워 독립군 장교를 배출했고 중국의 중앙군관학교나 지방의 군관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이들은 건군 과정에 2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1920년대부터 무장투쟁에 참여한 인물들이 많았기에 만주군이나 일본군, 지원병, 학병, 징병 등보다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만주군이나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대체로 위관급이었던 것에 비해 중국군에서 근무했던 이들은 영관 급이었다. 그 중 최고는 중국 국민혁명군 중장이었던 김홍일 장군.
요약하자면 건군기의 군맥(軍脈)의 흐름은 크게 두 가지로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일본군, 만주군 출신들과 중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느라 중국색이 강해진 독립군 출신들이었다.
( 일본육사계, 학병 장교, 일본군 징집/지원병, 일본군 하사관, 만주군, 중국 중앙군, 중국 지방군, 광복군 등으로 구체화하여 특성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중국 공산당 등과 협력한 좌익계열의 독립군 출신들은 국공내전에 참여하거나 혹은 이북으로 간 경우가 많아 한국군 창설에는 거의 의미가 없었다. 단 이는 건군기의 장교단 구성을 얘기하는 것이고 국군에는 숙군 전까지 좌익계통이 꽤 있었다.
4. 과정
아래의 항목은 거의 대부분이 조선경비대에 치중되어 있고 조선해안경비대나 육군 항공대는 미미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은 무장해제된다. 그러자 곳곳에서 유사 군사집단이 생긴다. 이유는 군대 되려고...
이듬해인 1946년 1월 15일에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설치되며 이들은 대한민국 육군의 원형이 된다. 국방부 역할을 하던 통위부 하에 귀속된다. 2월 7일엔 남조선국방경비대 총사령부가 서울 남사동에 들어선다. 5월 1일에는 경비사관학교가 생긴다. 같은 해 6월 15일에 조선경비대로 개칭한다. 같은 날에 조선해안경비대가 출범하고 이들은 대한민국 해군의 원형이 된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방부가 설치되고 다음 달인 9월 5일에 조선경비대는 대한민국 육군으로 조선해안경비대는 대한민국 해군으로 개칭된다. 1948년 11월 30일에는 국군조직법이 공포되어 편제 등이 기틀을 잡고 1949년 4월 15일엔 대한민국 해군 내에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되고 10월 1일엔 대한민국 공군이 창설된다.[5] 현대전의 선두주자였던 미군에서도 1947년에서야 군종(軍種)으로서 공군이 나타났던 터라 당시 군사적 기반이 미약하던 한국군에서 공군을 굳이 분리할 필요가 있냔 말이 많았지만 공군의 창군인사들이 강하게 밀어붙인 터라 성사됐다. 공군으로 입대한 사람은 기훈단에서 공군사를 정리한 책에서 이를 읽었을 것이다. 1949년 12월 6일에는 징병검사가 최초로 실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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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7월 교련 교사로 배속될 여군 장교 선발도 이뤄졌다.
실전 경험이나 편제, 훈련, 군사교리 등의 축적이 상당히 빈약한 군대였지만 이듬해인 1950년에 대규모 열전인 한국전쟁이 북한의 침공으로 발발하는 바람에 금세 군은 기틀을 다지고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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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대한민국 육군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정은 정부 설치를 준비하면서 난립한 군사집단을 정리하고 1945년 11월 13일에 국방사령부를 설치한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 보안대와 무위대(武衛隊)를 두었으나 미군정이 정부기능을 불허함에 따라 무위에 그친다. 당시 주요 군사단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이들은 신생 조국의 군대가 되겠다며 독자적인 장교와 사병 양성기관을 세웠다.
이들의 활동은 미군정에서 세운 군사영어학교와 별도의 행동이었고 임시정부 출신이나 광복군 출신들이 군사영어학교에 오지 않아 만주군이나 일본군 출신이 대다수를 채우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미 본토는 일본 점령 문제에 몰두하느라 한국에 주둔할 부대를 1945년 8월부터 9월 사이에 12번이나 바꾸었다. 정책에 일관성이 부족했고 미군정의 최고 지휘관인 하지 중장은 야전 출신이며 군정청 내에 행정 경력을 가진 이가 거의 없었다. 이는 일본 총독부에서 일하던 이들의 인적구성이 초기 한국 정부에 상당수 유입되는 결과를 낳았다. 흔히 친일파를 청산했다는 인식의 소련이 주둔한 북한 역시 다를 바 없었다.
미군정은 갓 전쟁을 마친 터라 미군을 본국에 돌려보내고 감축하는 방안을 고려했다. 그런 제안이 고려되는 가운데 북한에선 빠르게 군대의 원형이 만들어졌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 계열에서 기존의 사설군사단체를 통합하여 보안대(保安隊)란 공식적인 군사집단을 만든 것에 미군정은 자극을 받았다. 보안대는 뒤에 조선인민군이 된다. 거기에다 한국에서 사설군사단체들이 난립하는 것을 통제할 필요도 있었다. 당시 미군정 치안국장이자 점령군사령부 헌병사령관이었던 로렌스 시크(Lawrence E. Schick) 준장은 이 문제를 최초로 거론하였다. 군정장관인 아치벌드 아놀드(Archivald V. Arnold) 소장은 그의 제의를 받아들여 당시의 국립경찰[7] 외 치안을 유지할 군사집단을 검토하였다. 같은 해 11월 13일에 시크 준장을 책임자로 하는 국방사령부가 발족되었다. 5일 뒤인 11월 18일에 연구팀은 국방군 창설안을 내놓았다. 국립경찰을 보강하기 위해 국방사령부 밑에 경찰대와 육/공군으로 구성되는 국방군, 해안경비대를 두기로 했다. 경찰병력은 25,000명 수준으로 증강하고 국방국 육군은 보병사단 3개 45,000명 수준, 공군은 운송중대와 2개의 전투비행중대를 두고 해안 경비를 위해 5,000명 수준의 해안경비대를 두기로 했다. 인원 편성은 미군 스타일을 따르고 장비는 미군에서 남는 것으로 충당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시크의 계획안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측의 반대에 부딪힌다. 맥아더는 한국에서 군을 창설하는 일이 자신의 권한 밖이라며 치안유지는 경찰로 충분하다고 반대했다. 시크의 계획안은 수포로 돌아갔는데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미국 정치권에선 한국에서 군대를 만드는 일이 소련을 자극하는 일이 될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었고 일본도 당시엔 한참 비군사화가 진행 중이었다. 중국 대륙에선 아직 중화민국이 굳건히 버티는 상태였다. 미 합참은 맥아더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한국의 국방군 창설 문제는 연기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 중장은 12월 20일에 국방사령부 사령관에 새로 챔프니 대령을 임명하며 시크의 계획안을 소형화하고 현실적으로 개편하라고 지시했다. 그의 계획은 뱀부(bamboo) 계획이라 불렸다. 그의 계획안은 당시 국방사령부의 한국인 고문이었던 이응준[8] 의 조언을 받은 것이다.
뱀부계획에 따라 창설될 경찰예비대의 인원 규모는 다음과 같다. 규모는 8개 연대로 25,000명이며 각 도마다 1개 연대를 배치한다. 한 개 중대의 편제는 장교 6명에 사병 225명이며 처음엔 도마다 한 개 중대를 설치하고 인원이 20%를 초과할 때마다 중대를 신설하고 3개 중대가 되면 본부중대와 대대본부를 구성하여 한 개 대대를 편성한다. 이런 식으로 연대가 될 때까지 계속 증설한다. 창설요원은 미군 장교 2명과 사병 2명을 각 도마다 배치한다.
경찰예비대는 1950년에 세워진 육상자위대의 전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처럼 1946년 당시에는 정식 군대를 만드는 것보다는 경찰을 보조하는 치안부대에 가까웠다. 뱀부 계획은 맥아더에게 보고됐고 맥아더는 합참에 이를 보고했다. 그리고 합참에 잉여무기 등을 요청했다. 합참이 이를 승인하면서 경찰예비대는 창설 준비에 들어갔다. 이런 무장집단의 형성은 상당히 소련의 반응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미군정청은 미군정법렬 제28호 국방사령부 설치법령으로 창군을 준비했다. 그리고 1945년 12월 5일에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31번지 감리교 신학교 자리에 군사영어학교를 세웠다. 개교 이전에 챔프니 대령은 여섯 개 사설군사단체의 대표를 불러 군경력자들을 적극 입교시켜줄 것을 부탁했다. 1946년 2월 27일에는 현재의 육군사관학교 자리인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태릉(현재의 도봉구 화랑로[9] )의 구 일본군지원병훈련소로 옮겼고 1946년 4월 30일 폐지할 때까지 경찰예비대 창설요원 110명을 배출하였다. 87명은 일본군, 21명은 만주군 출신이었으며 그 가운데 68명은 학병 출신이었다. 미군정은 군경력자들을 적극 채용할 계획이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언어였다. 미군정기의 공용어는 영어였기 때문에 초보적인 군사영어를 교육할 필요가 생겼다. 게다가 군사단체들이 정치단체와 연결되어 폭력행위를 저지르고 다녔기 때문에 통제가 필요했다.
군사영어학교의 교장은 미군 리스 소령이었고 그린 대위, 비숍 대위 등 미군 장교 셋에 부교장으로 원용덕[10] 과 원용덕의 세브란스 동창이었던 최용준과 임영채 목사가 교관으로 참석했다. 5개월 동안 리스 소령과 매커리 소령, 그린 대위, 비숍 대위 등 교장의 교체가 잇따르면서 교육 과정은 상당히 파행이었다. 군사영어를 습득하는 게 목표라서 훈련 등의 구령도 영어로 했으며 한국역사나 참모학, 소화기기계훈련, 자동차교육 등이 있었으나 교육효과는 미미하였다. 상당수가 일본군에서 교육을 받은 탓에 영어로 구령을 넣어야 하는데 일본어로 구령을 넣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다른 과목이 엉망으로 굴러가는 동안에도 영어는 매일 시험을 치렀다. A반부터 D반까지 실력에 따라 편성됐는데 A반은 영자지인 라이프를 읽을 수준이었고 D반은 알파벳과 숫자부터 가르쳤다. 성적순에 따라 반을 다시 편성했는데 이는 웨스트포인트에서 쓰던 교수법이었다. 학생들은 통역관 수준의 경제적 대우를 받았다. 그때문에 봉급도 받았는데 첫 달엔 900원을 받았고 1946년 1월부터는 1,300원을 받았다.[11] 당시 1,300원은 쌀 1.5가마(135L)를 살 수 있는 수준이었다.
군사영어학교의 입학 자격 기준은 해방 전에 장교나 준사관, 사관후보생 이상의 군경력이 있으면 가능했다. 학력은 중학교 이상이면 충분했다. 되도록이면 소장파로 뽑았는데 군사영어학교에서 사설군사단체들이 파벌질 하는 걸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1기는 60명인데 광복군 등 중국군 출신 20명, 만주군 20명, 일본군 20명으로 뽑으려고 했다. 일본군은 이응준이 만주군은 원용덕이 중국군은 조개옥이 추천하기로 했다. 이응준은 일본육군사관학교 26기 출신으로 홍사익과 동기이다. 남한 지역에 있던 일본군 출신 중에 최고 계급자였다.[12] 1919년 3. 1 운동 당시에 일본육사에 있던 김경천, 지청천이 중국으로 망명할 때 같이 모의했으나 본인은 가지 않았다. 원용덕은 세브란스의전을 나와 만주군 군의관으로 입대해 중령까지 올랐고 당시 한국에 있던 만주군 출신 중에 최고 계급자였다. 조개옥은 중국의 보정군관학교[13] 를 나와 화북의용군 여단장으로 준장[14] 에 오른 자였다. 이들의 추천이 중요했기에 선발시험은 사실 형식적인 것이었다. 학생들은 이력서를 제출하고 시험관인 챔프니 대령과 군사국 차장인 리아머 아르고(Reamer W. Argo) 대령의 면접을 하고 신체검사를 받으면 시험을 마쳤다. 즉 군경력이 있는지 확인하고 신체만 멀쩡하면 입학하는 구조였던 셈이다.
1기 60명 가운데 1946년 1월 15일에 경비대가 창설되자 21명은 창설요원으로 임관했다. 나머지는 10여 회에 걸쳐 나눠서 임관했다. 경비대가 생기자 서류상으로만 입교시키고 바로 현지에 부임한 경우도 많았는데 만주군 중위 출신인 백선엽이나 만주군 상위 출신인 김백일, 학병 소위 출신인 정진운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 외에 경비대에 사병으로 입대한 인원 중에 자격이 있다 싶으면 창설요원들의 추천을 받아 장교로 임관시키기도 했다. 학병 소위 출신인 유흥수나 지원병 준위 출신인 함병선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들은 경비대 1연대 사병으로 입대하여 근무했는데 지휘관 채병덕 대위(정위)의 추천으로 현지에서 임관되었다. 이응준 같은 경우엔 국방사령부의 고문이라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을 상황이 아니었는데 뒤늦게 군사교육을 받기에 모양새가 이상하니 소급해서 졸업했다고 서류상으로 처리했다. 원용덕 같은 경우엔 부교장이면서 학생이었다. 당시 200명 정도의 군경력자를 모았는데 110명이 군사영어학교를 나왔고 40명 정도는 군사영어학교를 폐지한 뒤에 만든 경비사관학교 1기생(육사 1기에 해당한다)으로 재입교해서 1946년 6월 15일에 임관했다. 나머지는 퇴교하거나 임관하지않고 대신 통역관으로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학생들은 대부분 참위(소위)로 임관했다. 그 후 실적에 따라 진급한단 구조였는데 대령이나 중령했던 사람이 소위로 임관하는 건 문제가 있다며 특례를 적용했다. 중국군 같은 경우엔 같은 연령대의 일본군과 비교할 때 계급이 높은 경향이 있어서 일본군 수준으로 조절했다. 이성가(국부군 소교)[15] , 백선엽(만주군 중위), 김백일(만주군 상위), 최남근(만주군 상위) 등은 소위(참위)로 임관했다. 이형근(일본군 대위), 채병덕(일본군 소좌), 유재흥(일본군 대위), 장석윤(일본군 중위), 정일권(만주군 상위) 등은 대위(정위)로 임관했다. 원용덕(만주군 중교)은 소령(참령)으로 임관했고 이응준(일본군 대좌)은 대령(정령)으로 임관했다.
이런 인원구성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만주군이 일본군의 괴뢰군이었으므로 군사영어학교 등 경비대 창설인원 가운데 98.2%가 일본군 출신이었고 1.8%가 중국에서 활동하던 이들이었다.
110명 가운데 60여명이 한반도 남부, 40명은 한반도 북부 출신이었고 10여명은 한반도 밖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월남이 본격화될 때가 아니라 남한에 북부 출신들이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북부 출신이 많았던 건 한반도 북부에 일본군 기지가 많고 만주와 가까웠던 탓이 작용했고 당시 소련군정과 공산주의 계열에서 일본에 부역한 이들을 강하게 처벌한다는 소문이 돌아 장교 출신들이 대피한 탓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백선엽은 자신이 만주군 간도특설경비대에서 공산계 군사집단인 만주항일게릴라들과 싸웠기 때문에 북한에선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울 거라 판단해 선배인 정일권을 설득해 월남했다. 월남한 이들 북부 출신 군경력자들은 남부에 경제적/사회적 기반이 없던 탓에 군대에 들어왔다. 육군참모총장 가운데 1대부터 18대까지는 전원이 군사영어학교 출신이며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다.[17] (이 부분에서 사실 누락된 문제가 있다. 1948년 육군총사령관 직책으로 송호성 장군이 있었다. 당시 육군총사령관은 육군참모총장의 원래명칭이었다. 하지만 1대 송호성(광복군 출신) 장군의 전시 월북문제와 월북후 행적문제가 여전히 논란중인 사항이라서 한국군으로서는 흑역사로 취급되었고 이점은 실질적으로 기록말살을 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
학력사항은 아래와 같다.
남조선국방경비대의 창설과 동시에 1946년 2월 1일 장병의 계급호칭·계급장을 제정했는데, 대한제국군의 계급을 참고로 하여 장교는 참위-부위-정위-참령-부령-정령, 하사관은 참교-부교-특무부교-정교-특무정교-대특무정교, 병은 이등병-일등병으로 제정했다. 하지만 나중에 일본군 출신들이 일본군식 계급제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가 임정요인들과의 절충을 통해서 1946년 12월 1일 미 육군 계급제도를 참조하여 장교는 소위-중위-대위-소령-중령-대령, 하사관은 하사-이등중사-일등중사-이등상사-일등상사-특무상사로 변경하였다.
창설요원은 각 연대별로 미군 장교 2명,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미군 사병 1명[19] 과 한국인 군경력자 3-5명 정도로 구성됐다. 공식적인 지휘권은 1946년 9월에 한국인에게 넘어갔다. 1946년 1월 15일 경기도에 조선경비대 제1연대가 창설됐고 4월 초에는 8개의 연대가 창설됐다.
창설요원으로 장교는 생겼으니 사병 모집이 문제였다. 먼저 경찰 내부와 사설군사단체들에 광고를 하여 군경력자를 모집했고 라디오방송과 지역신문에 광고를 실었다. 절차는 면접을 거친 뒤에 신상명세서를 작성하고 인근 병원에서 신체검사와 예비접종을 하면 됐다. 경기도에 주둔했던 제1연대는 1개 중대 225명을 선발하기 위해 모병을 했는데 1천명이 응모했다.[25] 다만 경기도 외의 다른 지방은 모병이 기대보다 적었다. 그때문에 장교들이 직접 모병 활동을 하고 다녔다.
초반엔 보급이 엉망이었다. 병영식의 경우엔 중앙으로 조달되는 현금으로 때웠으나 그 외에는 엉망이었다. 의복과 장비는 일본군이 버리고 간 것을 지급했다. 장비는 일본군이 썼던 38식 소총이나 99식 소총을 썼다. 소총은 그나마 6천 정 정도 수준이었고 탄알은 9만 발에 불과했다. 교육훈련도 부실했고 일단 인원 불리기에 집중했다. 통일된 지휘방침이나 교육방안도 없었는데 이는 당시 경비대의 법적지위가 경찰의 예비나 보조부대라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자위대와 비슷한 처지였던 셈이다. 미군정은 개인화기 이상의 무기의 조작법은 금지했고 도수훈련, 집총훈련, 총검술 외에는 모두 치안유지를 위한 폭동대처 등의 훈련에 치중했다. 다만 백선엽은 미군 고문과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술기동훈련을 했다.
19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소련의 눈치를 살피느라 한국의 무장에 소극적이던 태도에서 입장을 바꿨다.[26] 같은 해 3월 29일에 미군정법령 제63호는 국방사령부에 있던 경무국(경찰)을 독립시켜 군정청 내에서 치안담당부서와 국방담당부서를 구분하였다. 같은 날에 64호를 내어 각 부서를 국(bureau)에서 부(department)로 승격했는데 국방사령부(Office of Director of National Defense)는 국방부(Department of National Defense)로 승격됐다. 그러면서 군사영어학교를 폐지하고 정식으로 장교를 양성할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조선경비사관학교)를 세웠고 군정청의 예산 1/3이 경비대 예산이 되었다. 1946년 6월 15일엔 국방부가 국내경비부-또는 통위부(統衛部[27] , Department of Internal Security)로,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는 조선경비사관학교로 개칭되는 등 흐름은 위축되는 듯 했다. 이는 5월 20일에 재개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1946년 9월 11일 경비대에 배치됐던 미군 고문관들은 한국인 지휘권으로 대체되었다. 통위부의 담당자도 한국인으로 바뀌었다. 9월 12일에 일본육사 15기 출신으로 망명해 한국광복군 참모총장을 지낸 유동열이 통위부장에 임명되었다. 이는 일본군과 만주군이 주를 이뤄 경비대의 정통성이 약하다는 비판을 의식한 것이었다. 유동열이 들어오면서 광복군 출신들도 경비대에 입대하였다.
12월 7일에 통위부 참모총장에 이형근 중령이 선임되었다. 1946년 말엔 도마다 연대가 하나씩 자리를 잡았고 제주도에도 한 개 연대를 신설해 9개 연대가 되었다. 1946년 11월말 기준으로 경비대의 병력은 장교 143명, 사병 5,130명이었다. 1946년 7월에 국립경찰은 23,000명이었다.
경비대는 시설이나 장비, 의복 등에서 아주 열악했다. 그때문에 초기의 창설요원들은 근처의 미군기지 등을 방문해 미군과 협상을 벌여 물자를 획득해야했다. 파벌 문제도 심각했는데 이형근과 채병덕의 대립이 주됐다. 이형근은 장인이 당시 최고계급자였던 이응준 대령이었다. 채병덕 쪽엔 만주군 출신인 원용덕 등 북한 출신들이 참여했다. 채병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참모총장이 되자 양국진, 강문봉, 백선엽, 정일권 등의 자기파 인물을 기용했다. 뒤에 광복군 출신이 들어오자 광복군들도 자신들의 파벌을 형성했다. 통위장관이었던 유동열의 영향력이 작용했다. 그는 광복군 준장(참장) 출신인 송호성을 제2대경비대사령관에 기용했고 광복군 대령(정령) 출신인 최덕신을 제2연대장에 중국군 중령 출신인 오동기를 경비대 감찰총감 등에 중용했다. 다만 이들은 숫자가 적었던 탓에 큰 파벌을 이루진 못 했다.
가장 다수를 이룬 출신이 일본군이었기에 엄격한 규율과 무조건 복종, 절대충성 등을 강조하는 일본군의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다.[28] 이형근의 경우 일본군 장교제복을 입고 장화를 신고 일본도를 지휘도로 차고 근무했다. 이때문에 미군 고문과 자주 갈등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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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초가을에 광주에서 시가행진하는 조선경비대 4연대.
1947년 12월 1일, 미 군정은 기존 9개 연대에 제1·2·3여단을 창설하였고, 미 합동참모본부가 경비대의 50000명 증강계획을 승인하자, 1948년 4월 29일에 추가로 제4·5여단을 창설하였다.
이와 함께 1948년 5월 1~4일 사이에 제10·11·12·13·14·15연대를 창설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1948년 8월 15일 까지 조선경비대 육군은 5개 여단, 15개 연대, 50490명의 병력으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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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15일에 서울에서 시가 퍼레이드를 벌이는 국군. 흰 정복을 입은 것은 당시 조선해안경비대원.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과 정부조직법(법률 제1호)이 공포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미군정은 끝나고, 통위부의 행정은 국방부로 이양되었으며, 8월 16일 이범석 장군이 초대 국방장관에 취임되었다. 9월 1일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는 국군에 편입되었고, 9월 5일에 각각 육군과 해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1월 30일 국군조직법(법률 제9호), 12월 7일 국방부직제(대통령령 제37호)가 제정·공포됨으로써 12월 15일부터 통위부가 국방부로, 조선경비대·조선해안경비대가 각각 육군·해군으로 정식 편입·법제화되었다.
국군조직법에 따라 국방부에 참모총장을 두고, 그 밑에 육군본부와 해군본부를 설치하였으며, 각 군을 정규군과 호국군으로 조직하고, "필요할 때에 육군 항공병은 공군으로 조직할 수 있다"고 하여 공군 창설을 명시해두었다. 이범석 국방장관은 광복군 출신인 최용덕 장군을 국방차관에, 일본군 출신인 채병덕 대령을 국방부 참모총장에 임명하였고, 11월 20일 육군총참모장에 이응준 대령을 임명하있다. 창설 당시 국방부 기구는 비서실·제1국·제2국·제3국·제4국·항공국으로 조직되었고, 국방부참모총장·참모차장이 연합참모회의와 육군본부·해군본부를 관리했다. 육·해군 본부의 참모총장과 참모부장이 각군을 관리했다.
12월 10일 이응준·채병덕·송호성·손원일이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 김홍일이 준장으로 임관했으며 이 다섯명이 국군 최초의 장관급 장교로, 12월 22일 중앙청 광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계급장을 수여하였다. 2개월 후인 1949년 2월 4일 위 다섯명 중 송호성을 제외한 네명이 소장으로 진급하였고, 같은 날 정일권·이형근·원용덕 대령이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이범석 장관의 국군 육성 방침에 따라, 일본군, 만주군, 광복군 출신 경력자들이 육사 7기 특기와 육사 8기 특기로 대거 입교하여 일부는 3주간의 견습과정만 거친 뒤 대령 임관되기도 했다.
한편 1949년 3월 21일, 2대 국방장관에 취임한 신성모는 국방기구의 간소화를 도모한다는 이유로 5월 9일 국군조직법 제7조에 명시된 육·해군을 통할 지휘하던 국방부 참모총장 제도와 연합참모회의를 폐지하고, 장관이 직접 각군 총참모장을 통솔하는 것으로 개정했다. 이에 따라 국방부 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소장이 제6여단 제8연대 2개 대대의 월북으로 사퇴의사를 밝힌 이응준 육군총참모장에 이어 2대 육군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5월 12일에는 육·해군본부의 참모부장제가 작전참모부장제와 행정참모부장제로 개정되었다.
1948년 9월 조선경비대가 대한민국 육군으로 개칭됨에 따라 조선경비대총사령부는 육군총사령부로 개칭되었으며, 경비대총사령관 송호성 준장은 육군총사령관에 그대로 유임되었다. 그 뒤 12월 15일에 육군총사령부는 다시 육군본부로 개칭, 11월 20일 초대 육군총참모장에 제1여단장 이응준 대령이, 육군참모부장에 정일권 대령이 취임되었다.
육군은 1948년부터 1949년 6월까지 빠진 제16·17·18·19·20·21·22·23·25연대와 독립기갑연대를 창설하였는데, 이 중 제20연대는 광주의 제4연대를, 제22연대는 대구의 제6연대를 해체하여 개편한 것이고, 여순 사건을 일으킨 제14연대가 1948년 10월 28일에 해체됨으로써 1949년 6월 까지 총 8개 사단과 22개 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1948년 11월 20일, 제4여단을 제6여단으로 개편하고, 1949년 1월 7일에 용산에서 창설한 제7여단을 2월 1일에 수도여단으로 개칭하였다. 각 연대의 창설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1949년 5월 12일 국군조직법에 따라 제1·2·3·5·6·수도여단을 각각 사단으로 승격·개편하였으며, 이와 함께 총참모장 밑에 한명으로 되어있는 참모부장제를 작전참모부장과 행정참모부장 2명으로 편성했다. 6월 20일에는 수도사단을 제7사단으로 개칭하는 동시에 제8사단과 사단급인 수도경비사령부를 창설했다.
또한 육군은 국군조직법에 따라 보병·기병·포병·공병·기갑병·항공병·방공병·통신병·헌병 등의 병과가 제정됨에 따라 미 군사고문단과 협조하여 12개 군사학교를 창설하였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육군은 총 8개 사단과 22개 연대 및 지원부대와 특과부대, 94974명의 병력을 보유하였다.
4.2. 대한민국 해군
대한민국 해군 문서의 역사 문단 참조.
4.2.1. 대한민국 해병대
1949년 4월 15일에 해군 내에 해병대가 설치됐다. 1949년 2월 1일에 창군선발대가 진해덕산비행장에 와서 기지 설립을 준비하였다. 초기에는 사실 해병대라기보단 해군 기지 경비대에 가까웠다. 초기 인원들은 장교는 만주군이나 일본군 육군, 부사관은 일본 해군 육전대 출신들이 많았다. 상륙작전을 경험한 인적자원이 그쪽 출신들이 많다보니. 상선사관 출신들이 주축이 된 해군과 달리 해병대는 일본군 출신이 상당했다. 해군에서 장교 26명, 부사관 54명에 병 300명을 인수한 380명으로 시작했다. 처음엔 사령부가 아니라 대대 규모였다. 첫 사령관인 신현준 중장은 일본육사와 만주국육군군관학교를 거친 만주군 대위 출신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상관이었고 한국군 중령으로 (명색은) 사령관을 지냈다. 2대 사령관인 김석범 역시 만주군 상위(상급대위) 출신이었다. 신 중장의 경우 사령관을 지낸 뒤에 해병대 규모가 확대되면서 여단장 등을 다시 지냈다. 3대인 김대식 중장부터 일본군 출신이 아닌 인물이 등장했다. 4대인 김성은 중장부터 사실상 해군사관학교 출신들이 사령관을 독점하고 있으나 전도봉 중장은 해병대 연세대 학사장교 출신으로 사령관에 올랐다. 참고로 이 양반은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의 주동자였다(...)
1949년 8월엔 해군에서 추가로 병 440명을 지원받아 두 개 대대 규모로 확대하였고 제주도와 지리산 인근에서 공비 토벌작전을 벌였다. 제주도에서는 4.3 사건 때문에 민간인 학살에서 자유롭진 못한 편이다.
1950년에 신규 임관자를 육군사관학교 9기 인원을 끌어다 썼고 그 이후엔 해군사관학교 출신 중에 임관한다.
해병 1기. 해군병 13기에서 특별모집했다.
4.3. 대한민국 공군
1948년 4월 1일, 중화민국 공군의 원로[29] 이자 한국 광복군 참모처장을 지낸 최용덕의 주도하에 김정렬, 박범집, 장덕창[30] , 이근석, 김영환, 이영무가 조선국방경비대 보병학교에 입교하여 동년 5월 14일에 육군소위로 임관, 7월 12일엔 항공병 1기가 모집되었다. 당시 명칭은 항공기지부대였고(초대 부대장: 최용덕), 항공기지사령부로 이름을 바꿨다가 1949년 10월 1일에 총원 1,100여명의 대한민국 공군으로 독립했다.
1949년 1월 14일엔 공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육군항공사관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31] 참여한 인물들은 주로 중국 공군 출신, 일본 육군항공대 출신, 일부 민간항공 출신이었다. 일본 해군항공대에 복무했던 조선인들은 아무도 참여하지 않았다.
5. 건군기에 발생한 사건/사고
당시 국립경찰이 우익 중심이었던데 비해 건군기의 조선경비대는 우익과 좌익이 뒤섞이고 지방색이 강한 편이었다. 영관급 이상 장교 중엔 우익 출신이 많았지만 사병,부사관 중엔 좌익 출신도 많았고, 위관급 장교 중에도 좌익이 꽤 있었다. 그때문에 좌익 계통의 군인들과 우익 계통의 군인들끼리 충돌하는 일도 잦았고 군인과 경찰이 부딪치기도 했다.[32] 대표적으로 영암사건이 있다. 뒤에 일어날 여순사건의 전초전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문제로 여겼고 뒤에 숙군을 벌여 좌익 계통의 군인을 몰아내는데 이중 일부는 빨치산이 되기도 했다.[33]
민간인학살 문제도 잦았던 점도 문제였다. 대표적으로 4.3 사건, 문경 양민학살 사건, 여순사건 이후 부역자 처벌 과정에서 일어난 잔인한 보복과 학살 등을 들을 수 있다.
[1] 출처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구술사료선집19 한국군 초기 역사를 듣다이다. 다만 중국 등지에서 활동한 인물들은 정확한 군적이 있거나 한 게 아니라서 숫자가 오락가락한다. 당장 광복군은 300명 수준이었다.[2] 다만 수상함 근무자보다는 육전대 등 지상근무자가 많았다.[3] 일본 육사와 비교해서 그렇다는 얘기다.[4] 구제 전문학교 출신은 현재로 인구비율 및 학적현황에 비유하자면 현 박사비율보다도 희소한 가치를 지닌다.[5] 국군의 날과는 관련 없다. 국군의 날은 한국군이 38선을 돌파해 북진하던 때를 기념했다.[6] 태릉에 있던 일본군 지원병 훈련소를 말한다. 1946년 1월 15일부터는 조선경비대가 주둔했다. 당시엔 서울이 아니었다.[7] 일본인들이 히키아게샤로 일본에 돌아가면서 조선에 있던 경찰병력은 한국인만 남게 되었다. 당시 조선경찰의 30% 정도가 한국인이었고 대부분 하위직이었다.[8] 일본군 대좌 출신이다.[9] 도로명주소 이전에는 공릉동이었다.[10] 만주군 군의관으로 중교 출신이다.[11] 해방 직후의 인플레이션 때문이다.[12] 홍사익은 전범으로 체포된 상황이었고 영친왕은 일본에서 발이 묶여 돌아오지 못 했다.[13] 군벌이 난립하던 시절에 중국은 지방마다 사관학교가 존재했다.[14] 화북의용군에선 참장(參將)이란 표현을 썼는데 대한제국군의 표현과 일치한다.[15] 그는 군사영어학교에 들어온 국부군 출신 둘 중에 유일하게 임관했다.[16] 이성가 장군. 그는 독립군 이관석 장군 아들로 남경군관학교로 진학한 까닭에 왕정위군으로 임관하여 소교로 있던 중 중경정부 남의사 북평 담당자와 접선, 남의사 활동을 겸하다 종전 전 국민혁명군 11군으로 투신하였고 종전 후 광복군 북평잠편지대장 군사부장을 지냈다. [17] 다만 지원병이나 학병 출신의 경우 친일 경력에 있어서 일본육사 및 만주군관학교 출신과 구분지을 필요가 있다.[18] 사관학교를 나오면 학사이지만 여기서는 육사 입학전의 최종학력을 말한다.[19] 35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였던 탓에 영어는 못 알아들어도 일본어는 알아듣는 사람이 많았고 미국에도 한국어보다는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았다.[20] 군사영어학교가 있던 자리로 과거에는 일본군 지원병 훈련소가 있었고 현재는 육군사관학교 자리다.[21] 일본군 해군 예비대(일본어로는 예과대豫科隊)가 있던 곳이다.[22] 일본군 해군 예비훈련소(일본어로는 예과훈병사豫科訓兵舍)가 있던 곳이다.[23] 일본군 해군 예비훈련소가 있던 곳이다.[24] 일본군 해군 예비훈련소가 있던 곳이다.[25] 자위대도 1950년에 경찰예비대 7만 5천 명을 모집할 때 38만명이 몰렸다. 당시는 인플레이션과 실업난이 심각했다.[26] 이는 미국이 일본의 재무장화를 검토하도록 영향을 주게 되고 중국의 공산화와 한국전쟁은 시기를 앞당긴다.[27] 이 명칭은 조선말 군제 3영(營)의 하나인 중영, 즉 우영·후영·해방영을 통합한 명칭인 통위영에서 따온 것이다.[28] 중국군(국민당군)식의 군사적인 문화도 영향을 끼쳤다.[29] 그는 중국 공군에서도 초기의 파일럿으로 활동하였으며 기지사령관, 지휘부 참모 등을 거쳐 종전 전 중국 공군의 상교(육군의 소장~중장 대우) 계급에 이르렀다.[30] 당시 아시아 최다 비행시간 보유자.[31] 구 일본제국 육군항공대의 경우엔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를 뒀다. 김정렬이 일본항사 출신이다.[32] 당시 군인과 경찰 사이 관계는 매우 험악했을정도로 안좋았는데, 실제로 대구에서 6연대 소속 군인들과 경찰들간의 무력충돌이 있었을 정도였다.[33] 숙군작업은 1949년 4월부터 7월까지 이루어졌는데, 이 숙군작업에서 군병력의 5%에 상당하는 4700여명이 처벌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리한 경우가 많았는데, 대체적으로 당시 수사하는 과정에서 극단적인 반공의식과 성과주의에 사로잡혀 고문,조작등의 방식으로 좌익으로 몰았다는 비판부분이 있다. 농담이 아닌 게 당시 복무했던 이들의 회고록들을 보면 엄한 사람 빨갱이로 몰아서 조졌다는 둥 김창룡은 이런 걸 담당하기 부적합하고 비합리적인 인간이었다는 등 치를 떠는 내용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