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베르트 브루네거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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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bert brunnegger(1923~2002)'''
1923년 오스트리아에서 출생. 신장 176cm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무장친위대에 입대하였으며 최종계급은 SS중사[1] .보병이자 통신병, 운전병 등 여러 직종을 거쳤다. 전쟁이 끝난직후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귀향하여 이후 회고록 '폭풍 속의 씨앗'을 썼다. 그 후 2002년에 사망했다. 2급 철십자 훈장과 데미얀스크 참전 기장을 수여받았고 베를린 공방전 당시 1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을 예정이었지만 전쟁이 나치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면서 결국 받지 못했다.
독일어권 이외의 언어로 번역 출간된 것은 한국어판이 최초로서, 밀리터리 서적의 출판이 매우 빈약한 한국 출판시장에서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2. 회고록
2.1. 무장친위대 입대
당시 저자가 불과 '''15살'''일때 육군 입대영장이 날아왔다. 처음엔 착오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고 결국 육군 대신 SS에 지원해 15살의 나이에 무장친위대에 입대해 독일군 최연소 병사가 되었다.[2] 그가 배속된 부대는 다름아닌 그 유명한 토텐코프 사단. 처음엔 말단 보병으로 강제수용소의 경비를 서게 되었다. 경비로 서면서 '''수감자들과 대화를 하기도''' 했다.[3] 그 외에도 카포에게 폭행당하고 있던 노인을 도와주기도 했다고 한다. 1938년 독일이 체코의 주데텐란트를 합병할때 투입되었다가 다시 강제수용소 경비로 복귀했다. 이때 강제수용소 보초를 서는 동안 여러 일들이 일어났는데 한 수감자가 탈출을 감행하여[4] '''영국'''까지 갔다고 한다. 그 외에도 변호사 출신의 예비역 SS 하사가 나치를 욕하다가[5] 계급을 박탈당하고 강제수용소에 수감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독일이 체코를 합병할때도 투입되었는데 행군이랑 분대원중 하나가 실수로 사슴을 기관총으로 갈긴거 밖에 한 게 없다.
2.2.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대전이 발발하자 그가 속한 토텐코프 사단도 국경을 넘어 폴란드 영내로 진입한다. 하지만 후방부대여서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 않았고 이때 맡은 임무는 바로 폴란드 패잔병들을 찾아내서 무장해제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기관포까지 장비한 멀쩡한 폴란드군이 독일군이 나타나자 전투는 하지않고 무기도 내팽겨치고 도망치는 모습도 봤다고. 폴란드전이 끝난후엔 서부로 이동하여 1940년 프랑스 침공에 참여한다. 당시 유럽최강을 자부하던 프랑스군은 어이없게 무너졌지만 영국군은 프랑스군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끈질기고 악랄했다고 회고록에 쓰여있다. 대신 국제법 상 금지된 할로우 포인트[6] 를 리-엔필드 이나 보이스 대전차 소총이나 브렌 경기관총에 넣어 쓰거나 항복하는 척하다가 기관총 쏘고 수류탄 던지고 도망가는 등 치졸한 짓들을 하여 장병들을 빡치게 했다고 한다.
르 파라디에서 그는 프리츠 크뇌힐라인 SS 대위가 영국군 89명을 집단총살하는 것을 보게된다.[7][8] 서부진격이 끝나고 남프랑스에 주둔하게 되었고 1941년 6월 독소전쟁 준비로 동프로이센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계속 그곳에만 있게된다. 물론 평범하게 지나가지는 않았다. 전투 때 세운 공로로 훈장까지 받은 오토바이 전령이자 브루네거와도 아는 사이였던 단처란 병사가 술에 취해서 한 프랑스 여성을 성폭행하려다가 마침 근처를 지나던 SS 순찰대에게 체포되었는데 다음날 탈영하여 오토바이를 타고 도주했다가 국경선 근처에서 다시 검거되어 총살당한 적이 있었다. 원래는 무장친위대 계급박탈 및 불명예 전역, 부대 옆 노동수용소로 보낼 거라 예상했는데 탈옥해서 총살로 업그레이드 시켰다고. 그 외에 헤르베르트 자신도 과속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내서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10]
2.3. 동부전선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기 전 당시 병사들 사이엔 온갖 소문이 돌았는데 그중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믿고 있던 소문이 '소련이 독일로부터 각종 공업기술을 제공받는 댓가로 우크라이나를 25년간 분리시켜 독일에게 임대해주게 되었는데 우린 우크라이나에 치안유지군으로 가는 것'이었다. 일부는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곧 전쟁이 벌어질 것 같아서 가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대다수는 '설마 그러겠냐'고 그냥 웃어 넘겼다. 동부전선이 개전되자 모두 당혹스런 분위기에 사기도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소련이 동맹의 뒤통수를 쳤다는 것에 놀랐다고 한다. 만약 그 당시 진실을 알았다면 어떻게 생각했을지... 브루네거가 속한 토텐코프 사단은 이후 국경을 넘어 동쪽으로 전진해서 7월 스탈린 선에 도착하기 전까진 별다른 전투를 치루지 않았다. 스탈린 선에 도착했을 때 비록 공사가 다 끝난 상태가 아니었지만 이 방어선을 뚫기 위해 적지 않은 희생을 치루어야 했다. 스탈린 선을 돌파한 후 브리얀스크까지 진군하지만 겨울이 오면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설상가상으로 소련군에 의해 포위되고 만다.
1942년 중순 포위망을 돌파하여 아군과 합류하기까지 토텐코프 사단이 겪은 고난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탄약과 식량, 피복 등 모든 물자가 부족해서 개고생을 해야 했다. 이러한 고난은 회고록에 매우 생생하게 적혀있다. 게다가 소련의 신형 중형(中型)전차인 T-34의 출현, 소련군의 끊임없는 압박과 공격으로 포위망을 돌파하여 아군과 합류할때 쯤에는 병력수가 4분의 1로 줄어있었다.[11] 이 기간동안 저자는 식물학자이자 대학교수로 SS에 입대한 그뤼테 SS 소위[12] 의 운전병으로 배치되었다.[13] 브리얀스크 포위전 동안 브루네거도 여러가지 흠좀무한 경험을 겪었다. 크뇌홀라인의 명으로 신병 2명을 데리고 소련군의 수중에 들어간 다리를 폭파하기도 했고 정찰활동 중 소련군과 만났는데 이때 그 소련군들이 '''같은 소련군들로 착각해서 무사히 넘어갔다.'''[14] 한가지 특이한 건 이 당시에는 무장친위대도 아인자츠그루펜 같은 인종말살부대에게 잡히는 최악의 경우가 아닌 이상 포로로 잡은 소련군을 제대로 된 포로취급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브루네거도 인종말살부대가 포로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목격했다.[15][16]
2.4. 부상과 후방으로 이송
쿠르스크 전투가 벌어지기 전 브루네거는 하사로 진급한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그는 공군 소속의 부사관에게 진지를 안내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그가 돌아가고 밤에 독일군으로 위장한 소련군 별동대의 기습을 받으나 격퇴한다. 이때 포로로 잡은 소련군 사관후보생으로부터 놀라운 사실을 접한다. 바로 얼마전에 왔다간 부사관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변절해서 소련군 스파이로 일하고 있었다는 것.[17] 그 부사관은 육군 상사로 위장해서 다른 부대에 나타났다가 체포되어 총살당했다고 한다. 이후 전투가 벌여지고 부상을 입은 브루네거는 이후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폴란드 바르샤바에 주둔하게 된다. 주둔기간 동안 바르샤바는 하루에도 몇번씩 테러가 일어나고 외출나간 독일군 병사들이 하수구나 골목에서 시체로 발견되는 등 치안이 영 좋지 않았다. 이때도 몇번 죽을 뻔했다.[18]
다시 그는 1944년 중후반 이탈리아 무장친위대로 배속받은 뒤 바르샤바에 비해 상대적으로 양호한 북이탈리아에 주둔하면서 중사로 진급한다. 그가 주둔하는 북이탈리아도 바르샤바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처지였지만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여기도 빨치산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게다가 폭격이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어졌다. 한번은 미군 폭격기가 병원열차를 폭격해서 안에 탑승했던 부상자들이 죄다 타죽는 천인공노할 일이 있었는데 이때 폭격기가 대공포에 맞고 격추, 안에 탑승했던 조종사가 죽기 직전까지 이탈리아 애들한테 쳐맞고 증언했는데 다름 아니라 상부에서 독일 병원열차에는 부상자 대신 전선으로 향하는 무기가 실려있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1945년 1월 함부르크로 이동하여 소대장으로 부임.[19] 4월 전선에 투입되기까지 어린이와 중장년층들로 이루어진 1개 소대의 훈련을 맡게 된다.
2.5. 종전과 포로
1945년 4월 마침내 다시 전선에 투입된다. 여기서 그의 소대가 속한 중대의 중대장으로 온 사람은 경험많은 장교나 부사관이 아닌 이제 겨우 사관학교를 나온 애송이 소위였다. 결국 그는 경험없는 소위를 대신해서 사실상 중대장을 맡게 되었고 히틀러 유겐트와 국민돌격대원들로 이루어진 중대를 이끌고 소련군과 전투를 치른다. 소련군과 끝없이 전투를 치르면서 서쪽으로 후퇴하지만 이미 사단본부는 와해되었고 소련군 대포진지를 급습하고 퇴각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게 되었다. 결국 그는 중대원들에게 행동의 자유를 주고는 자신도 몇몇 전우들과 개별적으로 후퇴하던 도중 소련군에게 붙은 국방군 병사의 신고로 소련군에게 붙잡힌다. 소련군에 학대 당하면서 뮌헨베르크 근교에 토착한 브루네거는 카민스키 여단을 색출하던 소련 총살대에게 소련인으로 오해받아 살해당할 뻔하지만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독일 군의관이 살려줬다. 그리고 낙오되어서 총살당하기 직전 어느 맘씨 좋은 소련군 병사의 도움으로 포로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게 된다. 포로들이 행군하는 도중에 정말 씁쓸하고 기분이 더러워지는 장면이 있는데, 독일군 포로에게 물을 가져다준 5~7살쯤 되어 보이는 독일의 여자아이가 소련군들에게 근처 헛간으로 끌려갔는데,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포로들이 가보려 하자 소련군들이 못 가게 막았고, 나이 많고 자식이 있는 중년 독일포로만 통과시켜줬는데 '''피 묻은 속옷을 입에 재갈로 묶은 채로 여자아이를 강간하고 죽인 현장을 보고 아무 말도 못하고 충격먹은 얼굴로 "그들이 죽였어"라고 말했다.'''
이 말을 쓴 이후에 헤르베르트 브루네거는 감시역인 독일 육군 장교의 눈길을 피해서 다친 다리의 근육을 불리고 최대한 오래 걷기 위한 훈련을 남몰래 시작하면서 탈출의 시작을 준비했다. 이후 병원에서 근무하던 마틸데 간호사의 도움으로 탈출, 군사분계선을 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성공한다.
2.6. 도피생활 그 이후
이렇게 전범 재판을 받지 않고 민중 속으로 몰래 잠입한 헤르베르트 브루네거는 1965년 1월 6일 주현절부터 회고록을 쓰기 시작, 르 파라디 영국군 공동묘지의 방명록에서 주소를 하나 찾아낸다. 그 주소는 당시 크뇌홀라인 대위가 서부전선에서 전범 행위를 할 때 해당 지역에서 전투했던 로열 노퍽 연대 참전군인 모임을 이끌던 영국 육군 장교의 주소였으며, 해당인과 편지를 수년간 주고받으면서 양측의 진상을 규명했다.
이 결과 회고록의 123페이지에 나온 사진처럼 1985년 3월 27일자 이스턴 이브닝 뉴스에서 영국 육군에 대한 집단학살을 보도하면서 증인으로 나왔으며 그 결과로 전범 재판을 사실상 면제받았다. 이는 다른 전범의 행위를 입증할 증인 역할을 했으며 이로 인해 영국 내에서도 지지자들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종전 후 많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는 점도 한 몫 했다.
이를 통해 사실상 사면받은 헤르베르트 브루네거는 2000년, 2차대전 때 참전했던 장병들과 당시 어린이였던 수녀를 비롯해 많은 이들을 만나고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해서 회고록인 폭풍속의 씨앗을 출간했다.
3. 한계점
위에 언급된 폭풍속의 씨앗 내용만 본다면 헤르베르크 브루네거는 SS대원이지만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선 중립적이며 당시 나치가 행한 홀로코스트와 인종말살부대의 민간인, 포로학살 등에 대해서 솔직하게 인정하고 본문에서도 이를 증언하는 등, 나치 관계자로서는 양심있는 개인처럼 보인다. 그리고 영국군인협회와 함께 르 파라디 학살사건을 밝혀 신문에 난 적도 있다.
하지만 보통 좋은 말만 쓰는 추천사에서도 개인차원에서는 몰라도 집단차원에서는 과거를 미화하려는 유혹에 넘어갔다는 언급을 할 정도로 객관적인 책이라고 말하기에는 힘들다.
3.1. 회고록
헤르베르트 브루네거의 폭풍속의 씨앗은 회고록이라는 특성상 객관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회고록 자체가 자신이 겪은 일을 회고하면서 쓰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불확실한 기억에 의존하는데다가 자신에게 불리한 일은 변조하거나 적어도 옹호하려고 하기 때문에 제3자의 감수를 받지 않으면 자기변호적인 책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회고록인 이상 극복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회고록에 나와있다고 해서 그 사실을 100% 신뢰하면 안 된다. 만일 회고록에 나온 내용이 전부 객관적인 사실이라면 나치 독일에서 활동한 수많은 장성들이 낸 책에서 나오는 "나는 나치즘을 몰랐다"는 말이나 "나는 국가에만 충성했다"는 식의 철면피 같은 변명도 그대로 받아줘야 하는데 이게 말이 안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회고록에서는 교차검증이 가능한 내용만 신뢰하는 것이 제일 이롭다.
특히 본인이 소속된 부대원 대부분이 전쟁중 사망하였거나 설사 살아남았더라도 전후 소련으로 압송되었다는걸 생각한다면 교차검증이 상당히 힘든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3.2. 자원입대
헤르베르트 브루네거는 자신이 15세에 징병영장을 받고 친위대에 지원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렇게 자원입대한 경우랑 나중에 징집된 경우랑은 전후 대우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 일단 그가 지원했는지는 자세하게는 나오지 않지만 일단은 본문에 지원했다라는 말이 있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의 슈츠슈타펠은 구성인원을 엄격하게 심사해서 뽑는 것이 기본이었다. 일단 스스로 지원한 자원자여야 하고, 자원자의 신체적합성도 엄격하게 따지는데다가 가계 구성도를 뽑아와서 유대인피가 섞이지 않았는지 입증까지 해야 했다. 무장친위대가 이런 인원구성원칙을 포기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다음 인원의 대량손실을 겪은 후다.
그런데 1938년은 아직 전쟁이 시작되기 전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는 징병대상자라고 하더라도 해당인이 무장친위대에 입대를 자원하면 군복무 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아돌프 히틀러의 허가가 있었으며, 당시의 친위대는 나치당 입당의 지름길로 알려졌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자원자가 폭주했다. 이 때문에 징병권을 행사하던 육군에서 친위대의 크기를 너무 크게 만들지 말라는 불만이 쏟아졌고, 친위대를 기존의 돌격대처럼 엄청난 크기의 괴물로 만들기 싫어한 히틀러도 이에 동의했다. 그래서 친위대는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엄격한 인원구성원칙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헤르베르트 브루네거도 육군의 징병대상이었지만 징병심사장에서 나치 친위대로 자원입대를 선택했고, 140명의 지원자중 10명 정도라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상당한 나치 지지자였다는 것을 알수있다.
3.3. 토텐코프
헤르베르트 브루네거는 자서전에서 항상 자신이 속한 조직인 제3 SS기갑사단 토텐코프를 자랑스러워 했으며, 특히 그 중에서도 전쟁 초반부터 참전한 고참들을 매우 뛰어난 전사이자 전투원으로 칭송했다[20] . 특히 아인자츠그루펜과 디클레방어 사단과 같은 인종말살을 전문으로 하는 쓰레기 사단과는 전혀 다르다고 선을 긋기까지 했다. 여기에 더해서 앞서 나온 크뇌홀라인 대위같은 전범은 조직과는 무관한 예외중의 예외라고 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자는 '''토텐코프란 조직 자체가 전범중의 전범이라는 점'''은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이들은 무장친위대/부대일람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치가 세운 '''불법 사설강제노동수용소 경비부대인 토텐코프 연대를 근간으로 확장된 부대'''로, 강제노동수용소 간수의 표식인 해골이 그대로 부대마크가 되었다는 막장부대다.[21][22] 당시 토텐코프가 관리한 강제노동수용소 역시 나치당이 불법으로 세운 사설시설로, 나치당에게 반대한 사람들을 제대로 재판도 받지 않고 강제로 수용한 후 식사와 수면을 제대로 제공하지 않은 채 가혹한 노동과 학대를 한 곳이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면 아우슈비츠의 프로토타입이라고 보면 된다. 나중에 전투전문부대가 되긴 했지만 이런 막장스런 과거를 감출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전쟁때도 각종 학살을 수없이 저질렀다. 그의 입장에선 그래도 아인자츠그루펜같은 부대보단 낫다고 볼수도 있겠지만 전후 연합군 입장에선 다 그놈이 그놈이었기 때문.
그나마 전쟁 중반 이후에 친위대로 강제전입되거나 징병된 인원들은 전투원의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정상참작이라도 가능하지만 브루네거같이 전쟁 이전이나 초반에 자원입대한 이들은 그런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즉 헤르베르트 브루네거가 자랑스러워했던 전쟁 초반의 토텐코프 부대의 베테랑들 역시 다 원조 전범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다.
3.4. 그 외
헤르베르트 브루네거는 강제수용소 경비를 지냈던 경력이 있었기에 만약 그가 탈출하지 못하고 그대로 있었다면 '''최소 굴라그행이었는데다가 심할 경우 사형을 당할수도 있었다.''' 실제로 전쟁이 끝난 직후 이렇게 강제수용소 경비를 맡았던 일개 말단 병사들까지도 대부분 처벌을 면하지 못했는데 그의 입장에선 매우 운이 좋았던 것.
적군인 소련군을 꽤나 높게 평가하는 부분도 있다. 그리고 그가 친위대 출신임을 숨기고 도주했다는 것을 비난하는 서술도 있었는데 사실 일단 친위대 출신임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지 너무나도 명확한 상황이었기에 그가 자신이 국방군이었던 것으로 위장한 것도 어쩔 수는 없었을 것이다[23] . 실제로 그처럼 나치 친위대 출신자들은 신분을 숨기고 조용히 살아가야만 했는데 이런 헤르베르트의 행보는 생각 외로 독보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유태인 친구들이 있다. 동부전선에서 유태인 친구 어머니들로부터 아우슈비츠 이야기를 들었는데 본인은 도시전설쯤으로 여겨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답장을 보냈는데 그 후로 소식이 끊겼다가 다행히도 전후, 친구들은 국방군으로 무사히 전역,어머니들도 살아남았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3.5. 내용상 오류
헤르베르트 브루네거는 전쟁중에 하급직책만 전전했기 때문에 상급정보를 받아볼 기회가 전혀 없어서 내용상에 오류가 좀 있다.
예를 들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사용한 적이 없는 덤덤탄을 실제 탄환을 확인해보지도 않고 사용했다고 서술하거나[24] 실제론 존재한 적이 없는 47mm 크루프 포가 나오거나 소련군의 152mm 대포를 172mm로 잘못 표시하는 등의 오류가 존재하며, IL-2 를 전투기(!)로 잘못 표기하는 오류도 있다.
4. 결론
심각한 한계점이 있기는 해도 헤르베르트 브루네거는 나치 친위대원이면서도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선 중립적이며 당시 나치가 행한 홀로코스트와 인종말살부대의 민간인 및 포로 학살 등에 대해서 솔직하게 인정하고 본문에서도 이를 상세히 서술하는 등의 행위를 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영국군인협회와 함께 르 파라디 학살사건을 밝혀 신문에 난 적도 있다. 따라서 "우리도 희생자다, 우린 나치의 만행 따윈 몰랐다"고 주장하는 일반적인 나치 관련자와는 다른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상술했듯 헤르베르트 브루네거도 다른 전범의 행위를 증언한 것으로 전범행위를 용서받았을 뿐 전범은 맞으며 자신이 속한 전범조직인 토텐코프를 미화하는 등 나치 관련자들이 공유하는 가장 근본적인 한계점을 벗어던지지는 못했다. 또한 다른 나치 전범들이 아직도 나치즘에 빠져있거나 입으로만 나치를 까는 사람이 많아서 헤르베르트 브루네거가 상대적으로 나아보이는 것 뿐이지 사실 나치 전범이면서 '''나치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 역시[25] 심각한 결점이 되기도 한다.
그가 저술한 책이 미국에서 번역되고 출판되는 것에 제동이 걸린 적이 있다. 당시 미국 여론의 반발도 있었다. 이를 두고 미국에서도 그 이전에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책이 미국에서 출판된 적이 있지 않느냐며 이를 문제삼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수용소 경비로 복무한 적이 있는 전직 친위대 대원이라는 사람이 나치즘과 나치즘 정권에 대하여 '중립'적 입장에서 서술했다는 책이 반발에 부딪히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나치즘 정권이 저지른 구체적 범죄 뿐만 아니라 그 범죄를 촉진한 근원이 되는 나치즘 자체가 잘못되었음은 일부 극우를 제외한 대다수 사람이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명제다. 이렇게 일부 극우를 제외하고는 보편적으로 규탄을 받는 것이 나치즘과 나치즘 정권이다. 그런데 이유야 어찌되었든 친위대에 복무했던 그리고 도중에 수용소 경비로까지 복무했던 사람이 나치즘 정권의 행적에 대해 '중립'적 관점으로 책을 저술한다? 충분히 사람들로부터 의심과 반대를 살 만한 일이다. 객관적으로 나치즘과 나치즘 정권의 행적에 대해서 평가한다면 다른 수많은 연구자의 결론과 같이 비판적으로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데 다른 수많은 객관적 평가의 결과로써 이미 비판 받고 있는 나치즘과 나치즘 정권의 행적에 대하여 굳이 '중립'적으로 평가하겠다며 글을 쓰고 이를 책으로 출판하는 행동은 그 동기가 불순하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한 것이다. 더군다나 본인 스스로 나치의 범죄를 목격하기까지 했던 사람 아닌가?
책 내용에서 일부 내용을 뺀다면 나머지는 약간의 내용상 오류는 있으나 실제 참전자 답게 현실감 넘치는 전투묘사와 당시 독일군의 모습을 자세하게 써놓았다.
[1] 반지도자[2] 공교롭게도 나중에 바르샤바의 도살자라고 불리던 에리히 폰 뎀 바흐 첼레프스키도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그와 같은 나이에 독일군에 입대했다.[3] 당시 경비병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수감자들과 사적으로 대화를 나누면 안된다는 규칙이 있었으며 이를 어기면 큰 처벌을 받았다.[4] 외부조직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전에도 두번의 탈옥이 있었는데 한 번은 군견부대가 소나무위에 숨어있는 수감자를 발견하고 한 번은 수용소 부지를 샅샅이 뒤져도 안나오자 상급부대에서 설계도를 확인하고 설계와 미묘하게 다른 벽난로를 허물어서 발견한다. 유일하게 탈출한 사례가 이것뿐.[5] 저서엔 상당히 위험한 정치적 발언이라고만 적혀있다. 이쯤되도 상상이 갈거다.[6] 책에선 덤덤탄이라 나왔다.[7] 영국군 포로들이 가족 사진을 보여주면서 사정을 해대서 "내가 뭔 휴가라도 보내주길 바라나"라고 생각했는데 포로들을 감옥에 수감한게 아니라 헛간에다가 귀한 기관총 2정을 겨누면서 감시하여 뭔가 수상하게 여긴다. 그래서 기관총 사수에게 뭔 일이냐고 묻자 사수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저놈들 오늘 총살된다."라고 답한다. 그래서 장난인줄알고 누가 시켰는데? 라고 묻자 크뇌힐라인 SS대위의 명령이라 하자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는다.[8] 그 전에 전투가 한창일때 크뇌홀라인이 피신해있던 프랑스 여자들을 권총으로 사격하는 것을 보고 "저들은 그냥 여자잖아요!"라고 말했다. 이때 크뇌힐라인의 눈밖에 났고 고생길이 시작되었다. 크뇌힐라인은 이후 브루네거를 죽이기 위해 온갖 위험한 일을 다 시킨다.[9] 그라우잠grausam은 독일어로 "참혹한"이란 뜻이다[10] 군의관 '독터 그라우잠'[9] 에르잠 SS 대위와 짜고 쳐서 일시적 시각장애 판정을 받고 군법재판에 회부 되지 않았다. [11] 국방군 장교가 그들을 보고는 "여기 소대의 지휘관이 누군가?"라고 말하자 "소대가 아니라 대대병력입니다."라고 말하자 그 장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12] 나중에 중위로 진급[13] 브루네거는 그뤼테를 가리켜 '''자기가 만나본 군인들 중 최고의 군인'''라고 극찬했다. 게다가 그뤼테 자체가 회고록에서 적지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처음 만났을때 그뤼테가 짬밥 퍼오라고 시켜서 이에 브루네거는 그뤼테 소위를 골탕 먹이려고 밥을 뒤섞어서 가져왔는데 화를 내기는 커녕 '꼭 이랬어야 했나' 라고만 말했다고 한다. 포로에게도 너그러웠을 정도로 온화한 성품에 탁월한 지휘로 부지런하고 머리좋은, 즉 한마디로 유능하고 인기가 많은 장교이다. 하지만 브루네거가 후송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르코프에서 전사했다고 한다.[14] 당시 소련군은 포로로 잡은 무장친위대 병사들을 고문한 뒤 살해했는데 실제로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힌 무장 친위대원들은 대부분 살아남을 수 없었다. 만약 이 소련군들이 착각하지만 않았어도 '''이 항목이 작성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15] 회고록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아인자츠그루펜과 디클레방어 사단과 같은 인종말살을 전문으로 하는 소위 쓰레기 사단들은 같은 친위대 내에서도 '''SS의 수치'''란 소릴 들을 정도로 사람 취급을 못 받는 패들이었다.[16]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만화 장갑척탄병과 해피 타이거에서도 이와 같은 장면이 나온다.[17] 독소전 당시 독일군 포로들은 혹독한 처우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향하여 스파이로 투입됐는데 스파이를 핑계삼아 아군기지로 복귀하거나 진짜로 스파이 행위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이런 자들 때문에 브루네거 역시 전쟁 막바지에 꼬임에 넘어가 포로가 된 것이다.[18] 가령 간발의 차로 놓친 전차가 얼마 안 가 폭탄테러를 당했다던가[19] 회고록에 의하면 차출당하기 전에 자신이 자원했다고 한다.[20] 사실 브루네거도 나이가 어려서 그렇지 전쟁의 시작부터 참전한 고참이다 [21]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 12대 정예부대 중에서 독소전당시 무자비한 학살, 약탈을 비일비재하게 저지른 천인공노할 개쌍놈 집단이며 '''얼마나 심했는지 무장친위대 중에서도 전쟁 범죄에 가장 깊이 관여한 사단이다. 그래서 악명이 다른 사단에 비할 수 없다.'''[22] 오토카리우스도 이것 때문에 곤혹을 치렀는데 미군과 협상을 하기 위해 찾아간 중위에게 토텐코프로 오해받는다. 다만 오토 카리우스가 기갑사단은 오래전부터 토텐코프보다 먼저 해골 마크를 썻다 하고 설명하여 넘어간다.[23] 픽션이지만 만화 흑기사 이야기를 보면 SS 수리중대에게 낡은 국방군 군복 몇 벌하고 티거 2 한 대하고 바꾸었다고 언급 된다.[24] 일반적인 군용소총탄인 FMJ의 위력강화로 인해 벌어진 오해. 총탄이 무연화약을 사용하면서 탄속이 엄청나게 빨라졌기에 굳이 명중률과 관통력을 떨어뜨리는 덤덤탄 따위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총탄의 파괴력이 엄청났기 때문에 연합군이건 추축군이건 상대방이 덤덤탄을 쓴다고 서로 욕하고 다니는 일이 벌어진 것으로 본인도 여기에 낚인 셈.[25]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 무신경한 태도를 가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인도적인 관점에서 보면 회고록에서 무신경한 자세를 보인 것은 나치를 찬양하지만 않은 것이지 결코 양식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얼마든지 문제삼을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