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ffen-SS)의 전투부대 목록 문서.
의 준군사조직이지만 대규모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래 부대들 중 부대 명칭에 SS가 특별히 붙지 않는 부대들은 비게르만계 자원으로 구성하여, 엄밀히 말해 정통 무장친위대가 아닌 사단이다. 단 외국에서 병력을 모집한 부대도 순수한 외국인이 아니라 해외 거주 독일인(폴크스도이체(Volksdeutsche)라고 부른다.)으로 구성된 경우 SS 명칭을 사용할 수 있다. 종전 시점에서는 무장친위대 사단의 60%가 '''외국인'''이었다. 이쪽 관련으로는
항목 참조.
최근엔 같은 무장친위대라고 해도 오로지 전투에만 임했던 일선의 전투병들과 주로 후방에서 활동한 인종말살부대를 구별해야 된다는 의견이 일부 있다. 실제로 무장친위대 중사였던
는 이들 전투병들과 인종말살부대는 정말 하늘과 땅 차이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투부대와 인종말살부대를 구분하자는 의견은 대세라기보다는 일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정도에 가깝다.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더라도 실제로는 사단급 부대가 아닌 경우가 압도적이다. 보통은 초기의 3개 사단
과 경찰 장갑척탄병 사단까지가 끝까지 사단급 부대였고, 최대한 범위를 넓혀도 제12 SS기갑사단 히틀러 유겐트까지가 진짜로 사단급 병력을 가지며 그 이후의 부대는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나 그 이하의 병력만 실제 병력으로 유지했다. (여기에 전투력까지 따지게 되면...)
급인 기타 부대로 나뉜다.
그리고 이런 부대의 구분은 존속기간으로도 파악이 가능하다. 존속기간이 중요한 이유는 나치당 집권기부터 함께 한
부대인가를 판가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생겨난 부대일수록 훈련상태나 그에 따른 전투력, 보급품, 무기 보유등이 열악했고 하다못해 게르만 민족의 혈통적 순수성이나 사상성마저 흔들린 경우가 많았다.
기본적으로 전쟁 말까지 사단급 전력을 유지한 부대를 말한다. 무장친위대의 실질적인 전투력 대부분을 담당했다.
(사단 마크 오른쪽 귀퉁이가 없으면 기갑사단, 마크 가운데 귀퉁이가 없으면 기병/산악사단, 사단 마크 왼쪽 귀퉁이가 잘려있으면 기갑척탄병사단, 어느 곳도 잘려있지 않으면 있으면 일반 척탄병사단으로 구분한다.)
부대명
| 비고
|
[image] 1 SS기갑사단 ''' ''LSSAH'' '''[4] Leibstandarte SS Adolf Hitler. 라이프슈탄다르테 슈츠슈타펠 아돌프 히틀러 또는 총통경호대 친위대 아돌프 히틀러; 약칭 LSSAH 혹은 LAH가 더 많이 쓰인다. (1923.11.9. ~ 1945.05.08)
| 친위대의 출발부터 함께한 부대로 원래 그 창설 목적이었던 히틀러 개인의 경호 임무에서 출발했다. 그러다보니 독일정부나 나치당에 충성하기보다는 히틀러 개인에게만 충성하는 사람만 받아들였다. 초대 사단장은 요제프 디트리히다. 1939년까지는 연대로서 폴란드전 및 프랑스전에 참가하였으며 1940년에 여단으로 승격하여 발칸 전역과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가한 후 1942년에 사단으로 승격되었다. 사단장 디트리히의 이름이 열쇠를 의미하며 적진에 돌파구를 연다는 의미에서 열쇠를 부대 마크로 썼다.[5] LSSAH 소속의 파이퍼 전투단이 연루된 말메디 학살사건의 경우 인위적인 학살인지 우발적인 참사인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영화 세인트 앤 솔져에선 실제 독일군 출신들과 미군들의 증언을 토대로 포로로 잡힌 미군 몇 명이 탈출을 시도하다가 사살, 미군들이 동요하고 몇 명이 항의하자 독일군이 이들을 몰아붙임, 미군 한 명이 권총으로 독일군 한 명을 사살, 독일군이 사격을 시작하고 미군들이 단체로 도주하다가 사살이란 식으로 나온다.
|
[image] 2 SS기갑사단 ''' ''다스 라이히'' '''[6] Das Reich. 제국으로 흔히 번역되지만 독일어에서 Reich는 꼭 제국이라기보다는 '''국가'''에 가까운 뜻이다. 라이히 항목 참고. 앞의 Das는 영어 관사 The에 해당. (1939.10.10. ~ 1945.05.09)
| SS 페어퓌궁스트루펜(Verfügungstruppen;전투부대)로서 첫 편성되었고 폴란드전부터 참전한 부대이다. 연대에서 사단으로 개편되면서 '''무장친위대의 아버지'''라 불리는 파울 하우서가 초대 사단장을 지냈다. 가장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진 SS 사단이고, 또한 SS 사단들 중 메이커 사단이라 인기가 높다.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과 툴레(Tulle)학살[7] 프랑스 마을 오라두르 쉬르 글란에서 레지스탕스들이 다스 라이히 장병들을 습격한 것이 발단이 되었으며 이 때 독일군 장교가 레지스탕스에게 생포당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장교 구출 및 보복으로 벌어진 학살. 을 저질렀다. 특이점은 알려진 학살이 점령지 프랑스의 대파르티잔 작전에 국한되어있다는 것. 물론 학살은 학살이지만, 이는 바로 밑의 토텐코프 사단의 잔혹한 학살행위들과 비교된다.
|
[image] 3 SS기갑사단 ''' ''토텐코프'' '''[8] (1939.10.16. ~ 1945.05.08.)
| 강제수용소 경비부대인 토텐코프 연대(Totenkopfverbände)를 모태로 확장되었다. 해골은 강제수용소 교도관의 표식이며 그대로 부대 마크가 되었다.[9] 육군 기갑병과의 해골 마크는 구 프로이센 육군의 창기병 연대원들이 쓰던 것을 그대로 따온 것으로, 토텐코프 사단의 해골과는 사용 시작 시기도, 유래도, 디자인도 다르다. 의외로 국방군 기갑사단이 토텐코프의 마크가 멋있다는 이유로 군법을 어기고 몰래 슈츠슈타펠의 마크를 자신의 커프스에 다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역시 대전 초반부터 참전한 부대이며, 프랑스 침공에서 영국 육군 노퍽 연대 포로들을 즉결 처형한 르 파라디 학살을 선보인 바 있고, 동부전선에서는 '''인종청소 수준으로 학살을 했다.''' 테오도어 아이케가 초대 사단장을 맡았다. 앞에서 언급한 헤르베르트 브루네거가 이 사단 출신이다. 대전차포 에이스 프리츠 크리스텐도 여기 출신, 전쟁중 학살과 인종범죄에 가장 깊숙히 관련된 사단이며 전후 모든 포로들이 소련에 인계되었다. 다만 포로 송환 당시의 병력들 중 학살의 주축이었던 초기 부대원들은 거의 전사나 부상, 전출 등으로 갈려서 이후 보충된 인원들이 80%에 가까웠다는 것을 보면 상당수의 포로들은 선배들의 만행때문에 독박썼다고 볼 수도 있다. 특이하게, 이 사단은 군복 오른쪽 카라에 SS 시겔문자가 아닌 해골 문양을 부착했다.
|
[image] 4 '''SS경찰 장갑척탄병사단''' ( 1939.3.18. ~ 1945)
| 친위대 장관 하인리히 힘러가 경찰 지휘권까지 쥐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친위대 예하에 있다시피했던 경찰조직에서 선발한 대원으로 편성한 부대로서[10] 당시 나치 독일 치하의 경찰들은 군대에 필적할 만큼 중무장을 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경찰 출신들로 구성된 부대답게 개전 초 부대원의 7할이 운전면허증 소지자였다.[11] 당시에 자동차란 대단히 귀한 물건이라 아무나 접하기 힘든 것이라 운전능력은 특수능력쯤 되었다. 징집 대상인 20대 초반의 청년이 어디서 자동차 운전 경력을 쌓겠는가. 일례로 자동차의 나라라는 미국에서조차도 도시출신보다는 농촌 출신이 운전 가능자가 많았는데, 농업용 트렉터를 몰던 경험 때문이었다. 초창기에는 부착물도 경찰과 동일한 것을 달았으나, 창설 이후부터는 경찰이 아닌 일반인에서 신병을 뽑는 등 점차 경찰과의 연관성이 사라져 1943년부터는 일반 SS 부대와 동일한 부착물을 달았다. 즉, 부대 이름에만 경찰이 들어가는 일반 기계화보병사단. 북부집단군에 소속되어 레닌그라드 포위전에 종군하였으며 소련 동계작전때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1944년 이후 유고슬라비아에 주둔하여 파르티잔진압에 종군하였다. 최후에 미 육군에게 항복.
|
[image] 5 SS기갑사단 ''' ''비킹'' '''[12] (1940.11.20. ~ 1945.5.9.)
| 다스 라이히 사단의 게르마니아 연대와 덴마크, 노르웨이 등에서 지원한 사람들로 편성된 부대이다. 보통 외국인 출신 부대는 정예와는 거리가 먼 3류 취급을 받았으나, 이들은 같은 게르만 계열임과 동시에 용맹한 바이킹의 후손이라는 선전 덕분에 대우가 매우 좋았다. 창설 당시부터 소련 전역에서 싸웠다. 무장 친위대의 정예 부대인 동시에 종전끝까지 소련군과 전투를 벌였다. 최종적으로는 오스트리아에서 연합군 진형에 항복했다.생체실험으로 악명높은 요제프 멩겔레가 이 부대의 군의관으로 잠시 복무했다. 그 시절의 동료들 말로는 '꽤 성실하고 괜찮은 친구'였다고 한다.
|
[image] 6 SS산악사단 ''' ''노르트'' '''[13] (1941.11. ~ 1945.5.)
| 토텐코프 부대원들을 근간으로 하여 편성된 산악전 부대. 주로 핀란드에서 종군하였지만 1941년과 1944년을 제외하면 대체로 평온하게 보냈다(대신 배치된 지역이 북극권에 가까운 오지라서 전투보다도 겨울철 생존이 더 다급한 편이었다고 한다.). 핀란드가 대전에서 발을 뺀 이후에는 서부전선으로 이동하여 아르덴 대공세를 지원하는 로렌 방면에서의 북풍 작전에 참가하고 1945년 1월 이후에는 독일 본국에서 방어전에 종사했다. 사단 본부는 미 육군 제71보병사단과의 교전에서 부대가 궤멸한다. 자세한 것은 항목참조,
|
[image] 7 SS의용산악사단 ''' ''프린츠 오이겐'' '''[14] Prinz Eugene. 사부아 공자 외젠을 말한다. (1941.4.15 ~ 1945.5.9)
| 유고슬라비아 침공이 마무리된 1941년 후반기 즈음 편성된 산악전 부대. 발칸 지역 일대에 퍼져있던 혈통상의 독일계 주민들을 주축으로 편성되었다. 초기에는 의용사단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의용병을 주축으로 편성하려 했으나 그 수를 확보하기 어렵자 발칸 지역 일대에서의 징병령을 통해 충원되었다. 파르티잔을 토벌하면서 엄청난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며 종전 당시 서방의 연합군에게 항복했지만 연합군 당국은 이들을 유고슬라비아에 송환시켜 대부분이 처형됐다.
|
[image] 8 SS기병사단 ''' ''플로리안 가이어'' '''[15] Florian Geyer. 16세기 청교도 혁명 당시 농민들을 보호한 독일 기사. (1942.9.9. ~ 1945.2.12)
| 1942년에 무장 친위대 기병여단을 확대개편하여 창설된 부대로 동부전선에 종군하며 르제프 공방전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은후 전선 후방에 배치되어 파르티잔 진압/전쟁범죄에 주로 종사했다. 기병여단이지만 돌격포 등의 현대적인 장비도 갖추었다. 1945년 초 헝가리 부다페스트 공방전에서 사단장의 자살과 함께 부대가 전멸 판정을 받고 해체됐다.[16] 일부는 포위망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사단 일부와 함께 탈출 여담으로 2차 대전 종전 직전의 나치 고위층들의 모습을 담은 영화인 다운폴의 등장 인물이자 그 영화의 패러디물에서[히틀러] 만악의 근원 취급받는 헤르만 페겔라인이 이 사단의 4대 사단장이자 전신인 SS기병여단과 연대의 초대 연대장과 여단장이었다.
|
[image] 9 SS기갑사단 ''' ''호엔슈타우펜'' '''[17] Hohenstaufen. 12세기와 13세기에 왕과 황제를 배출한 독일 왕조. 프리드리히 2세를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음. (1943.2. ~ 1945.5.)
| 1943년 프랑스에서 창설된 기갑사단으로 프룬츠베르크와는 자매 사단이다. 2 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에서 경험을 쌓은 빌헬름 비트리히가 초대 사단장으로 재임했다. 제국 노동단 출신의 인원들을 중심으로 하여 장갑척탄병 사단으로 편성될 예정이었으나 전황이 급박해진 1943년 말 기갑사단으로 개편되었다. 마켓 가든 작전에서 대활약했다.
|
[image] 10 SS기갑사단 ''' ''프룬츠베르크'' '''[18] Frundsberg. 16세기 신성로마제국의 장군 게오르그 폰 프룬츠베르크. 일명 란츠크네히트의 아버지로도 알려져 있다. (1943.1.2. ~1945.5.8.)
| 샤를마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공식적으로는 프룬츠베르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호엔슈타우펜과 함께 1943년 창설되었다. 전범 집단인 무장 친위대 내에서도 상당히 이질적인 부대였다는 평가가 있는데, 민간인 학살 등의 전쟁범죄와는 가능한 한 거리를 두었기에 나온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양철북의 작가 귄터 그라스가 복무한 부대로 알려져 있다.
|
[image] 11 SS의용장갑척탄병사단 ''' ''노르트란트'' '''[19] Nordland. 즉 북국(北國)이란 뜻이다. (1943.7. ~ 1945.5.)
| 5 SS장갑척탄병사단 비킹 소속의 노르트란트 장갑척탄병 연대를 주축으로 1943년 창설된 기계화보병사단. 이름에 걸맞게 스칸디나비아계 병력을 보유했던 사단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SS 부대 중 가장 다양한 민족적 스펙트럼을 보여준 부대로도 알려져 있다.[20] 전쟁 말기에 이른 독일군 부대 대부분이 비슷한 꼴이었지만 노르트란트는 좀 더 심했다. 전쟁 말기에 이르른 노르트란트 사단에는 덴마크/헝가리/네덜란드/노르웨이/핀란드/프랑스/루마니아/스페인/스웨덴/스위스/영국/에스토니아 등에서 모여든 병력들이 득실거렸다. 베를린 공방전에 소련군과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였던 부대이며 이 곳에서 부대가 소멸한다. 라이히스탁 방어전에 참가했던 소대는 노르트 사단이 아닌 이쪽.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
[image] 12 SS기갑사단 ''' ''히틀러 유겐트'' '''[21] (1943.7.20 ~ 1945.5.8.)
| 히틀러 소년단 출신의 소년들을 주력 병력으로 하고, LSSAH 사단 등에서 파견된 장교와 부사관 등을 기간으로 삼아 창설된 기갑사단. 1943년 창설 당시 1926년 태어난 소년병을 동원했던 터라 이 사단의 보급품으로는 술과 담배 대신 과자와 사탕 등이 지급되었다고 한다.
|
전쟁 중반쯤부터 우후죽순식으로 급조한 부대를 말한다. 사단이라고 이름붙기는 했지만 전투력, 인원, 장비등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사단이라는 이름이 붙기에는 문제점이 많은 부대다. 다만 이들중에도 매우 잘 싸워서 정예부대 취급 받는 부대는 있었다. (정예부대 취급 받는 부대는 '''볼트체'''표시를 한다.)
부대명
| 비고
|
[image] 13 무장산악사단 ''한트샤르'' ''(크로아티아 1사단)''[22] (1943.3.1. ~ 1945.5.)
| 괴뢰국으로 독립한 크로아티아 국내의 무슬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 중 하나로 창설된 산악사단. 사단의 주력 병력들을 보스니아계 무슬림으로 채우겠다는 야심찬 시도였지만 역시 인원 부족에 시달리면서 크로아티아계 기독교 신자들을 추가로 뽑아 사단의 정수를 채웠다. 1943년 9월17일, 무장 친위대가 생긴 이래 미증유의 사건, SS 의용병의 반란이 한트샤르에서 일어났다. 반란이 진압된 이후 군사재판에서 반란에 가담한 병 14명은 전원 총살형에 처해졌고, 정치사상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된 825명의 장병은 무장해제되어 다하우 수용소를 거쳐 대부분이 토트 기관에 편입되었다. 사단은 독일 본국의 노이하마로 이동되었다. 이후 이 사단이 빨치산과의 커넥션이 들통나는 등 발칸 반도의 막장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사단이었다. 44년 이후 아예 여단 규모로 축소시키기까지 하였다. 상세한 내역은 항목 참조. ( 관련 항목 : 아민 알 후세이니 )
|
[image] 14 무장척탄병사단[23] 일명 갈리치엔(Galizien)으로 불리기도 했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있던 소왕국 갈리시아를 가리킨다. ''(우크라이나 1사단)'' (1943.7. ~ 1945.5.)
| 우크라이나인을 중심으로 한 동유럽인들을 주축으로 편성된 보병사단. 상세한 내역은 항목 참조.
|
[image] '''15 무장척탄병사단''' ''(라트비아 1사단)'' (1943.2. ~ 1945.5.)
| 동방 국가판무관부(Reichskommissariat Ostland, 발트 3국 일대를 일컫는 행정분류)에서 모은 병력으로 창설된 보병사단.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라트비아인을 중심으로 창설되었다. 참고로 한가지 흠좀무한 점은 전후에 이들은 라트비아 국내에서 소련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지키려고 한 참전용사로 제대로 대접받고 있다. 이는 에스토니아인 사단도 마찬가지이며 소련시절에 대한 앙금으로 발트 3국이 대체로 나치 동방 국가판무관부 연간에 호의적인 것을 감안해야 한다.
|
[image] '''16 SS장갑척탄병사단 ''라이히스퓌러'' '''[24] Reichsführer-SS. 말 그대로 Reich와 Führer를 합친 표현이다. 약칭은 SS장관. 하인리히 힘러의 계급이다. (1943.10.3. ~ 1945.5.)
| 1943년 11월 하인리히 힘러의 개인 경호대대를 바탕으로 창설된 라이히스퓌러 돌격여단이 확대 개편된 기계화보병사단. 1944년 동안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1945년 2월부터는 헝가리 일대에서 종군했다.
|
[image] 17 SS장갑척탄병사단 ''괴츠 폰 베를리힝엔''[25] 일명 강철의 손 괴츠로 알려진 16세기의 장군. 독일 농민 반란에 종군했다. [26] 참고로 뮐하우젠과 알슈테트의 독일 농민 전쟁을 이끈 사제 토마스 뮌처는 (천년왕국 도래의)"때가 되었을 때,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하고 필요한 자에게 분배되어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으며 마르크스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스스로를 반공투사로 간주한 나치당과 여러 민족들의 범유럽 반볼셰비키 십자군으로 선포한 친위대다운 부대명이다. (1943.10. ~ 1945.5.)
| 1943년 10월 창설된 사단으로, 서부 전역에 종군했다. 사단분류는 거창하게 기계화보병사단이었지만 정작 보병의 이동수단으로 써야 할 장갑차와 트럭은 1944년 말에나 소량 배치되었다는 안습의 부대이다.
|
[image] 18 SS의용장갑척탄병사단 ''호르스트 베셀'' (1944.1.25. ~ 1945.5.)
| 나치 활동가였던 호르스트 베셀의 이름을 따 1944년 창설된 사단. 1 SS보병여단과 독일계 헝가리인들을 주축으로 삼았다. 동부전선 배후에서 파르티잔 진압에 주로 종사했으며 동유럽에서 최후를 맞았다.
|
[image] '''19 무장척탄병사단''' (라트비아 2사단) (1944.1. ~ 1945.5.)
| 2 SS보병여단 병력을 주축으로 라트비아인을 받아들여 창설된 보병사단. 이후 소련군에 항복한다.
|
[image] '''20 무장척탄병사단''' (에스토니아 1사단) (1944.1.24. ~ 1945.5.)
| 에스토니아 지역 방어를 위해 창설된 사단으로, 3 SS 의용 에스토니아 여단을 그 골자로 삼았다.
|
[image] 21 무장산악사단 ''스칸데르베그''[27] Skanderbeg. 15세기 알바니아의 귀족 제르지 카스트리오티를 일컫는 말이다. (알바니아 1사단) (1944.5. ~ 1944/1945.)
| 발칸 반도 일대의 파르티잔 진압을 목적으로 창설된 사단이지만, 사단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실제 병력 규모는 여단 규모에 머물렀다.
|
[image] 22 '''SS의용기병사단 ''마리아 테레지아'' '''[28] (1944.4.29. ~ 1945.2.)
| 1944년 봄 헝가리의 독일계 주민과 제8 SS기병사단 플로리안 가이어 소속의 제17 SS기병연대를 기간으로 창설되었다.위에 앞서 말한대로 부다페스트 공방전에서 플로리앙 가이어 사단과 함께 궤멸됐다.
|
[image] 23 무장산악사단 ''카마'' (크로아티아 2사단) (1944.6.10. ~ 1944.11.)
| 크로아티아 파시즘 지지자 및 독일계 주민과 일부 독일인으로 구성한 부대로, 몇 개월 가지도 않아서 해산한다.
|
[image] '''23 SS의용장갑척탄병사단 ''' ''' ''네델란트'' ''' (네덜란드 1사단) (1941.2. ~ 1945.5.)
| SS의용장갑척탄병여단인 네덜란드의 병력을 중심으로 확대편성해서 1944년 12월에 사단이 되었다. 주로 레닌그라드 지역에서 전투를 했으며, 전쟁 말기에는 오데르 전선에도 참가했다. 번호가 23인 이유는 크로아티아 2사단이 해체된 후 창설되어 그 번호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
[image] '''24 무장척탄병사단 ''카르스트예거'' '''
| 1942년 7월에 엘리트급 산악부대를 만들기 위해 중대 규모로 편성한 것을 시작으로, 1942년 11월에는 대대병력으로 확충했으며, 1944년에는 여단병력으로 늘어났고, 1944년 7월에 사단으로 편성된 이상한 이력을 가진 부대다. 병력은 주로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독일계 주민을 소집해서 만들었으며, 주로 유고슬라비아에서 파르티잔과 전투를 벌였으나, 1943년부터는 이탈리아의 독일군 점령지역에서 치안유지와 파르티잔 토벌을 했다.
|
[image] 25 무장척탄병사단 ''훈야디'' (헝가리 1사단) (1944.11.2. ~ 1945.5.)
| 1944년에 편성하자마자 소련군과 전투를 시작한 이 부대는 곧 소련군에 의해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소멸한다.
|
[image] 26 무장척탄병사단 ''훙가리아'' (헝가리 2사단)
| 1944년 8월에 헝가리 파시즘 지지자로 편성한 부대다. 이 부대도 소련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상세한 기록이 부족하다.
|
[image] '''27 SS의용척탄병사단 ''랑게마르크'' ''' (플랑드르 1사단) (1940 ~ 1945)
| 2 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에 속했던 제2 SS 보병연대 랑게마르크가 뿌리가 된 사단이다. 원래 연대였으나, 1943년에는 여단 규모의 병력을 보유했고, 패전 직전에 사단으로 편성했다. 주로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싸웠다.
|
[image] '''28 SS의용장갑척탄병사단 ''발로니엔'' '''[29] (1941. ~ 1945.)
| 벨기에의 파시즘 지지자로 구성한 부대로 1944년 말에 편성했다. 이 부대는 주로 동부전선에서 싸웠으며, 아르덴 대공세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명목만 사단이지 실병력은 여단규모였으며, 베를린 공방전에 참여하기 직전에 소련군에 의해 대타격을 입은 후, 거의 전멸상태로 전락해서 항복한다. 보통 왈롱사단이라고 부른다.
|
[image] 29 무장척탄병사단 (러시아 1사단)
| 러시아내의 추축군측 민병대로 시작했으나 전범행위로 유명해진다. 자세한 것은 카민스키 여단 참조.
|
[image] 29 무장척탄병사단 (이탈리아 1사단) (1943. ~ 1945.)
| 의용SS척탄병여단 이탈리아와 이탈리아 파시스트 의용군을 주축으로 편성되었다. 주로 파르티잔을 상대하는 전투에 투입되었으나 1945년도에 소멸한다.헤르베르트 브루네거가 부상으로 3사단에서 나오고 나서 32사단으로 배속되기 전까지 전속했다. 번호가 29인 이유는 러시아 1사단이 해체된 후 창설되어 그 번호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
[image] 30 무장척탄병사단 (러시아 2사단) (1944.8.1. ~ 1945.4.15.)
| 카민스키 여단의 잔여병력과 소련군 탈주병들로 구성된 부대다. 기본적으로 소련군 포로중에서 무장친위대가 모집한 야전보안부대였으며, 1944년에 독일군이 프랑스로부터 퇴각할 때 사실상 전멸한다.
|
[image] 30 무장척탄병사단 (벨로루시 1사단)
| 러시아 2사단과 마크를 공유한다.
|
[image] 31 SS의용척탄병사단 ''뵈멘 메렌''[30] (1944. ~ 1945.)
| 1945년에 편성한 연대 규모의 부대로 독일인과 독일계 주민으로 구성했다.
|
[image] 32 SS의용척탄병사단 ''1월 30일'' (1944.12. ~ 1945.5.)
| SS기갑학교등의 교관과 생도를 중심으로 편성한 부대다. 위에 말했듯이 헤르베르트 브루네거가 마지막으로 전속했던 사단이기도 하다. 1월 30일은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날을 의미한다.
|
(부대마크 불명)
33 무장기병사단 (헝가리 3사단) (1944.12. ~ 1945.1.)
| 1945년에 헝가리인으로 편성되었으나, 창설하자마자 소련군의 공격으로 전멸했다.
|
[image] '''33 무장 척탄병 사단 ''샤를마뉴'' ''' (프랑스 1사단) (1944. ~ 1945.)
| 1945년에 프랑스 파시즘 지지자로 구성한 부대로, 이전의 육군에서 프랑스인들을 모집해 만든 의용연대 등을 흡수하고, 크릭스마리네에 지원했던 프랑스인들과 비시 프랑스의 치안유지용 민병대 조직인 밀리츠 등에서 차출한 인원 등까지 합쳐 1944년 편성한 샤를마뉴 여단을 1945년 초에 사단으로 확대 개편한 것이다. 베를린 전투에서 전멸한다. 번호가 33인 이유는 위의 헝가리 3사단이 전투에서 전멸하여 그 번호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
[image] '''34 SS의용척탄병사단 ''란트슈투름 니덜란데'' ''' (1943.3.12. ~ 1945.5.5.)
| 1943년에 네덜란드 파시즘 지지자로 구성한 부대로, 1945년에 해산한다.
|
[image] 35 SS경찰 척탄병사단 (1945.3.1.~ 1945.5.8.)
| 1945년에 독일인 경찰관으로 편성한 연대규모의 부대로 독일의 패전과 함께 해산한다.
|
[image] 36 무장척탄병사단 ''디를레방어'' (1940. ~ 1945.)
| 카민스키 여단과 함께 전범행위로 악명을 떨친 부대인 디를레방어 여단이 1945년에 사단으로 승격하면서 만들어진다. 애시당초 국방군 형벌 부대에서도 구제불능의 죄수들에게 무기를 준 사단이었고 SS역시 이들을 '일원'으로 받아들인게 아니라 '밑에 두었을 뿐'이라고 물타기와 책임회피를 했을 정도로 친위대 상층부에게조차 경멸받고 찍혔던 사단. 사단장 오스카 파울 디를레방어는 아동성애자이자 연쇄살인마였던 인간쓰레기였으며 여러 차례 나치당에서 제명당했으나 친구인 베르거의 도움으로 여러차례 구제된 적이 있다. 디를레방어는 바르샤바 봉기의 잔혹한 진압 이후 해고되며 전후 야전병원에서 프랑스군에게 맞아 죽는다.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
[image] 37 SS의용기병사단 ''뤼초'' (1945.1. ~ 1945.5.)
| 1945년 2월 프레스부르크에서 제8 SS기병사단 플로리안 가이어와 제22 SS의용기병사단 마리아 테레지아의 잔존 병력을 기간으로 창설된 부대. 여담으로 이 부대의 지휘관 중 한 명이 발데마르 페겔라인인데 바로 헤르만 페겔라인의 동생이다.
|
[image] 38 SS척탄병사단 ''니벨룽'' (1945.3. ~ 1945.5.)
| SS사관학교의 교관과 생도들을 근간으로 편성된 부대로 총인원은 고작해야 연대 규모에도 못 미친 부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