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복
1. 설명
胡服. 오랑캐[1] 의 옷이라고 하여 한나라 한족의 남방계 복식인 한푸와 대비되는 주변 국가의 복식을 중국에서 칭하던 말로 초기 호(胡)의 개념은 농경민족인 한족이 주변 유목, 기마민족을 칭하는 의미로 시작되었다. 처음에 胡는 흉노를 뜻하는 말이었고, 흉노족의 복식을 호복으로 칭했지만 흉노의 세력이 확장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북방, 서방 이민족을 칭하는 명칭으로 확대되어 자연스레 호복 역시 이민족의 복식을 칭하는 말로 자리잡았다.
[ ''접기'' 자치통감 3권 주기 ]
역사적으로 호복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자치통감에서 조무령왕이 기원전 307년, 중국에 오랑캐의 바지를 도입하도록 하는 호복령을 낸 것에서 명칭의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참조기사 - 무령왕의 호복령) 호복은 크게 스키타이, 훈족, 아바르, 흉노, 선비족, 몽골족, 돌궐, 강족 등을 위시한 서, 북 동방 유목민족의 옷을 칭하며, 기준을 더 크게 잡을 경우 한복과 기모노 역시 호복으로 정의할 수도 있다.[2] 나무위키에서 한복이나 기모노의 근간으로 호복을 설명할 때에는 알타이 계 호복을 뜻하는 말로 받아들이는 것이 편하다.
2.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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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특징은 바지와 저고리를 함께 입는 상유하고(上襦下袴) 형 복식이라는 것으로 아래에 치마를 두르는 상의하상(上衣下裳)인 한푸와 구분되는 형태를 하고 있다. 이는 말을 주로 타고 다니는 기마민족 특성상 바지가 발달한 것에 기인한다.[3][4] 또한 소매가 좁은 착수형 복식이라는 특징이 있는데, 이 역시 서늘한 기후적인 요소와 활동성을 중시했기 때문에 생긴 특징으로 소매가 넓은 한푸의 활수형 복식과 구분되는 요소이다.
또한 직령 교임(앞자락을 y자로 여미는 것) 형태의 복식을 입을 때 오른쪽 옷깃이 위로 올라가는 좌임을 한다는 특징이 있다. 중국에서는 좌임을 미개하다는 의미의 멸칭으로 사용했다. 그렇지만 상술했듯 중국의 한푸조차 기원전 3세기부터 호복의 요소들을 전 시대에 걸쳐 받아들였고[5] , 호복과 상호 영향을 받은 고구려 역시 좌임형 복식이 기본이었다. 호복이 미개하다는 발상 자체가 '''한푸가 받은 호복의 영향을 부정하고 모든 것이 중국에서 넘어갔다고 주장하는 중화사상의 발로이니 그 주장에 동조할 이유는 없다.''' 물론, 우임을 하도록 만들어진 현대의 한복이나, 죽은 이에게 입히는 기모노 수의에만 좌임을 하는 일본[6] 도 있으니 그런 부분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어디까지나 호복에 대한 편견을 갖지 말자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편하다.
한반도에서는 대체로 스키타이 계열의 호복이 중앙아시아를 지나서 동아시아로 건너와 고대의 한복의 원형이 되었다는 것이 복식학계에서 가장 유력한 학설로 여겨지고 있다. 한복 저고리의 형태가 스키타이의 카프탄과 여밈이 같은 형태이며, 바지의 재단 형태 역시 스키타이의 바지 유물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고대한국복식의 원류에 관한 연구 : 스키타이계 복식문화를 중심으로, 스키타이 복식 유형 및 형태에 관한 연구- 고대 한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 (pdf)
3. 기타
호복의 존재를 모르는 몇몇 무지한 네티즌들이 한복과 기모노의 근간을 한푸로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중국 네티즌 사이에서 많이 나오는 주장인데, 조선시대 한복의 근간을 명나라 복식이라고 주장하고, 삼국시대의 한복과 기모노의 근간을 당나라 복식이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심각한 착각이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분명 한복의 근간은 호복이고, 명나라 한푸는 원나라에서 유행한 고려양의 영향이며, 기모노는 4~5세기 경 가야와 백제를 위시한 한반도 고대 국가에서 호복 형태의 복식이 넘어간 것이 시작이었다. 물론, 기모노가 8세기 경 당나라 복식의 영향을 짙게 받은 것은 사실이고, 한복과 기모노 모두 중국과의 지속적인 교류로 한푸의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자국 풍토에 맞게 변화시켰지만 문화 요소라는 것은 일방적으로 전파되거나 전파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당장 상술했듯이 중국에서도 조무령왕의 호복령으로 중국 복식에 상유하고(바지저고리) 형태의 복식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그렇게 명나라 한푸가 조선 한복의 근간이라는 헛소리는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 근근히 들려오다가 기어고 2020년에 몰지각한 중국 네티즌들이 한복을 중국의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주장하고, 중국산 모바일게임이 중국측 관계자의 적반하장식 태도와 함께 일방적으로 서비스가 종료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중국의 한복 왜곡 논란, 샤이닝니키 한복 사태 문서 참조.
- 참조 논문: 당(唐)시대의 호복(胡服)에 관한 연구[국문초록]
4. 관련 문서
[1] 오랑카이(Урианхай) 뿐 아니라 이민족 전반을 칭하는 멸칭의 의미를 지닌 오랑캐.[2] 사실 한복과 기모노도 그 근간에는 북방계 호복이 있다. 대표적으로 고구려의 복장. 물론 한푸의 영향을 아예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경우로는 주로 궁궐 내에서 입는 복식이 있다.[3] 호복을 받아들이기 이전의 중국과 한반도에서 호복계열 복식이 건너가기 전 일본 복식은 전형적인 상의하상 형태의 복식을 하고 있었다. 자세한 사항은 한푸, 기모노 문서 참조. 남방계의 영향이 짙은 제주도 지역 역시 바지가 없이 상의만 입는 복식이 전해진다.[4] '문명 대 야만'이라는 차별적 구도에 근거한 비교이긴 하나, 옛 유럽의 복식 역시 토가로 대표되는 로마인들의 복식과 바지와 같은 갈리아족 등의 복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5] 대표적으로 한중일, 베트남 4개국의 공통 관복으로 널리 사용된 단령 역시 호복에서 비롯된 복식이다.[6] 이것은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국문초록] 본 논문은 한족(漢族) 우월주의에 젖어있는 중국인들이 호복(胡服)을 수용하여 보여주는 복식(服飾)의 양식(樣式) 변천 과정을 호(胡)의 개념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당(唐)을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연구 목적은 당(唐) 이전에 착용했던 호복(胡服)이 어떠한 방식으로 융합되어 당대(唐代)에 착용되었는지 규명하며, 횡적인 전파와 교류를 통하여 국제성을 띠었던 당대(唐代) 호복(胡服)의 원류를 밝히고, 동아시아의 복식(服飾)을 대표하던 당대(唐代) 호복(胡服)의 양식 변천 과정을 규명하는데 있다. 이를 통하여 한족(漢族)의 관점에서만 피력되어온 동양 복식의 흐름에 대한 이해를 바로잡고, 나아가서 한족의 영향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왔던 한국 복식의 계보를 밝히는데 의의가 있다.[7] 호복 중 동아시아에서 가장 널리, 오래 착장된 대표적인 복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