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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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나라의 장수. 조부는 홍대순(洪大純), 아버지는 홍복원(洪福源)이며 대대로 인주(麟州, 현 평안북도 의주군)를 관할하던 수령이었는데 홍대순은 1218년 몽골의 칩입 때 그들에게 협력하였고, 홍복원은 한술 더 떠 1231년 몽골의 1차 침입 때 몽골 쪽에 붙어 조국을 여러 차례 침공하여 짓밟은 매국노이다. 홍복원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해 원으로 쫓겨가서 홍다구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홍복원이 고려에서 인질로 온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과 귀부한 고려 백성들을 관리하는 문제로 마찰을 일으키다 모함을 받아 장사들에게 맞아 죽자 이때부터 홍다구는 고려에 적개심을 품게 된다. 1261년(원종 2년) 홍복원이 맡고 있던 관령귀부고려군민총관(管領歸附高麗軍民摠管)을 이어받았으며 1263년 아버지의 원수인 왕준을 모함해 그가 가지고 있던 고려 군민에 대한 관령권을 빼앗았다.
2. 고려 입국 후
1269년 당시 원에 입조해 있던 원종이 권신 임연을 처단하고자 도움을 요청하므로 2년 뒤 홍다구는 툴렝케이(頭輦哥) 장군을 따라 귀부 고려 병사 3000명을 이끌고 들어와 봉주(鳳州)에 둔전총관부(屯田總管府)를 세우고 부원세력(원에 붙어서 고려에 해를 끼친 세력)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
한편 임유무가 죽고 무신정권이 무너지자 무신정권의 뒷배를 봐주던 삼별초들은 원종이 개경으로 환도를 실행하고 자신들을 해체할려고 하자 이에 반대해 난을 일으켰는데 1271년 홍다구는 지휘관이 되어 김방경(金方慶), 훈둔(忻都, 忽敦)과 함께 진도를 기습하여 기세를 크게 꺾어 놓았고[2] 이때 삼별초의 수장이었던 배중손이 전사하고 왕으로 옹립했던 승화후 왕온(承化侯 王溫)은 홍다구가 직접 베어버렸다.[3]
세력이 약화된 삼별초는 김통정, 유존혁 등이 잔여 세력을 모아 탐라로 가서 재기를 노렸으나 홍다구는 여기까지 쫓아가서 결국 모조리 토벌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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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항전
그 후 원나라가 일본을 칠 계획을 세우자 소용대장군(昭勇大將軍)으로 감독조선관군민총관(監督造船官軍民摠管)으로 임명되어 함선의 건조를 심하게 닥달하므로 고려의 백성들이 모두 죽일 놈이라고 원망하였다.
3. 일본원정과 그 후
1274년 도원수 훈둔(忻都, 忽敦) 휘하로 동정우부도원수(東征右副都元帥)가 되어 유복형(劉復亨), 김방경 등과 일본에 쳐들어가서 초반에 쓰시마 섬, 이키 섬을 헤집어 놓고 기타큐슈 해안까지 진출하였으나 기후가 영 좋지 않은 탓에 전력의 30퍼센트 ~ 40퍼센트를 잃어버리고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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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습래회사
하지만 원은 포기하지 않고 또 일본을 침략할 생각을 해서 1277년 홍다구를 정동도원수(征東都元帥)에 삼고 고려에 주둔하게 했다. 그런데 원나라 상도(上都)에서 반란이 일어나 일본 원정에 지장을 주자 바린 바얀(伯顔) 승상을 따라 참전해서 공을 세우고 다시 고려에 들어오게 된다. 이때 김방경이 위득유(韋得儒) · 노진의(盧進義) · 김복대(金福大)등에게 원나라를 반역하려 한다는 모함을 받자 이를 더 부풀려 원나라에 고려를 침략할 구실을 만들려 김방경을 모질게 문초하였다. 하지만 김방경은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였고 충렬왕과 대신들이 거의 그의 편을 들므로 홍다구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로 원나라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1281년 원나라가 다시금 일본을 치려고 하자 자청하여 동정군의 지휘관이 되었고, 고려에서는 그동안 그가 상당히 어그로를 끌어놓은지라 고려에 오는 걸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결국 용호위상장군 정동행성우승(龍虎衛上將軍征東行省右丞)에 임명되어 훈둔, 김방경과 일본 원정을 떠난다. 그리고 마치 1차 원정 리플레이 보듯이 초반에 승승장구하지만 돌림병과 이번에도 영 좋지 못한 날씨 때문에[4] 1차보다 더 심하게 망한다.
그 후 원나라가 일본에 대한 정벌을 중단하면서[5] 다시는 고려 땅을 밟지 못했다고 한다.
4. 기타
홍다구와 달리 그의 동생인 홍군상은 원의 일본원정 중단을 요청하며 고려에서 관직을 받기도 하는 등 고려에 우호적이었다. 그래서 충렬왕이 원나라에 내조했을때 홍군상의 집에서 숙박하기도 하였고 충렬왕 29년에 요양행성의 승상이 되자 홍다구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홍중희와 경쟁하기도 하였다.
기록상 한국에 수박을 처음 가져온 게 홍다구였다고 한다. 그러나 좀 더 앞 시대인 고려도경에서 이미 수박이 고려에 있었다고 하기도 하는데, 고려도경의 ‘과(瓜)’가 수박을 지칭하는 게 맞는지 애매하다고 한다.
자신에게 방해되면 동맹군인 고려군까지도 팀킬을 했다. 오죽했으면 당대 장수였던 김방경도 홍다구를 잔인무도하고 훈둔보다 더 나쁜놈이라 했을까? 아무리 몽골군이 적에겐 잔인했어도 동맹군을 팀킬하진 않았는데 말이다.
5. 대중 매체에서
코에이의 게임인 징기스칸 4 시나리오 2에 등장한다. 능력치는 고만고만하고 원나라 장수 중에서는 그나마 수군 적성이 높지만 특기는 하나도 없다. 또한 제아무리 수군 적성이 높다지만 해당 시나리오에서는 홍다구의 완벽한 상위호환인 장홍범이 있기 때문에 전투에서 어그로용으로 쓰거나 가도 까는 노동자로 쓰자. 어차피 이 게임은 잡장 활용도가 높아서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다. 출신은 아비 홍복원이 몽골에 항복한 후 거기서 태어났다는 것을 반영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고려가 아니라 화북 출신으로 되어 있다. 일본의 징기스칸 4 팬사이트에서는 홍다구 인물 열전에서 '고려와 일본 모두에게 있어 역병신[6] 이자 고려나 일본으로 플레이한다면 가장 먼저 참수할 만한 인물'이라고 촌평해 놓기도 했다.
[1] 그래서 사실 그의 이름은 '홍다구'가 아니라 '홍차구'라고 발음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있다. '홍다구'라는 표기보다는 적지만, 관련 서적이나 학술논문 등에도 '홍차구'라고 표기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몽원사 전공인 충남대학교 고명수 교수가 이렇게 표기하며, 역사저널 그날의 패널 서울시립대학교의 이익주 교수도 '홍차구'라고 발음했다.[2] 이때 훈둔이 몽골 본국에 요청해 가져온 '''화약 무기'''가 처음으로 쓰였다고 한다.[3] 참고로 승화후 왕온은 영녕공 왕준의 형이다. 진도 공격에는 영녕공의 두 아들도 함께 있었는데 영녕공은 아들들에게 백부를 죽이지 말고 살려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해두었었다고.[4] 그리고 1차에 한 번 호되게 당한 일본군도 그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고 해안에 원구방루라 불리는 방어용 성채를 쌓고 규슈 지역뿐 아니라 혼슈 지역 무사들까지 동원하는 등 방비를 단단히 해 둔 터였다.[5] 이때 원 조정에 일본 원정을 중단해야 한다고 아뢴 인물이 홍다구의 동생인 홍군상이었다. 그 공로로 홍군상은 고려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받는다. [6] 원래는 역병을 부르는 귀신이라는 의미지만 일본에서 일상회화로 쓰일 때는 '불행을 부르는 존재', '꺼림직한 존재' 정도의 관용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