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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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정치인, 언론인이다. 2018년 기준 노동당 소속. 김규항, 박노자. 오세철 등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좌파 계열 지식인 중 한명으로 손꼽힌다.'''나는 살아서 즐거운 '아웃사이더'이고 싶다.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다.'''
한국 사회에서 서슴없이 '''나는 사회주의자'''라고 이야기하는 몇 안 되는 인물.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할 때 지나치게 온건하다면서 참여하지 않은 인물이다. 공공연히 사회주의를 강령으로 내걸고 활동하는 정당을 원한다고.
2. 생애
1947년에 태어났다. 196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67년 10월 자퇴하였다. 그 뒤, 다시 입시 재수하여 196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에 입학하였고, 이후 문리대에서 연극반 활동을 하였다. 1972년에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제적되었다가, 다시 복학하였으며, 1977년에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외교학과를 나왔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 후 무역회사에 재직하던 중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파리 지사 근무[1] 중 프랑스에 망명을 신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프랑스에서 20년간 망명 생활을 하였다[2] . 이 당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인지도가 그다지 높지 않았던 시절이기 때문에, 프랑스 이민국의 망명 담당자가 했던 질문이란 게 "당신은 그저 당신의 정치적 의견을 표명한 것뿐인데 왜 이게 문제가 되느냐?" 물론 이에 대한 홍세화의 대답은 '''"그렇게 하면 잡혀가니까...(...)"''' 이후 한동안 파리에서 택시기사 생활을 했다. 그러나 저건 홍세화의 주장일 뿐이고 남민전은 그냥 단순한 정치 견해 표명하는 단체가 아니라 북한을 추종하는 국가전복세력이었다. 애초에 남민전이라는 이름부터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한겨레신문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고, 당시엔 인터넷도 없고 해외여행 자유화도 막 되던 시기라 아직 해외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프랑스와 유럽 상황을 신속히 전달하는 언론인 역할도 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의 택시기사 생활 경험과 프랑스 사회에 대한 소개, 본인의 성장기와 한국 사회의 과제를 담은 1995년작[3]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국내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이름을 날렸다.
그 후 1999년에 귀국하고 2002년 1월에는 영구귀국했다.[4] 귀국과 동시에 한겨레에 입사했다. # 그 후 한국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지의 초대 편집장을 지냈다.
2002년 3월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2002년 12월 5일 민주노동당 측 패널로 MBC 100분토론에 출연했다가 한겨레로부터 징계를 먹었다. 이 사건으로 언론인들의 중립성과 개개인의 양심과 관련한 여러 논의가 일었다. 당시 기사
2008년 2월 5일 민주노동당을 탈당했다. 탈당 사유로 '오늘의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라는 점을 들었다. 기사 탈당의 변
2011년 11월 25일 진보신당의 대표로 선출되기도 했다. #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보신당 비례대표 2번으로 출마했지만, 당의 득표율이 3%를 넘지 못해 낙선했다.
2012년 10월 27일 진보신당의 상임대표 직에서 사퇴했다. 기사 이후엔 벌금형을 선고받고 돈을 내지 못해 옥살이를 해야 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사회단체 '장발장 은행'의 은행장으로 재직 중이다.
2018년 김길오 등이 연루된 '노동당 언더조직 폭로 사건'과 관련해서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
2020년 2월 14일 더불어민주당의 임미리 교수 비판 칼럼 고발 사건에 관해 "민주당은 자유한국당보다 배타적이며 비관용적"이라며 비판했다. #
2021년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를 "내용은 없고 수사(꾸미고 다음어진 말)만 있는 정부", "남은 임기 동안에도 임금님이 아닌 대통령으로 돌아오길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3. 논란
3.1. 대통령 기자회견 횟수 날조 논란
2020년 11월 19일 한겨레신문 칼럼을 통해 '기자협회보' 자료를 인용하며 역대 대통령의 직접 브리핑과 기자간담회를 합친 횟수는 김대중 150회, 노무현 150회, 이명박 20회, 박근혜 5회, 문재인 6회라는 수치를 제시하며 문재인 현 대통령의 소통 부족을 비판했다. 국민의힘을 비롯한 야권과 정부 비판 세력에서는 이 수치를 꾸준히 인용하며 비판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홍세화가 출처로 제시한 '기자협회보'를 발간하는 기자협회에서는 대통령 기자회견 횟수를 조사한 적은 없다. 어떤 경로로 우리를 출처로 제시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밝혔다. 더군다나 기자회견 횟수를 어떤 기준으로 집계하더라도 홍세화가 제시했단 수치는 나올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즉 홍세화는 근거 없이 날조된 수치를 기반으로 하여 칼럼을 썼고, 이것이 팩트체크도 되지 않은 채 수도 없이 인용되어 왔던 것이다.[5] 글을 업으로 삼는 사람에게 치명적인 윤리위반 행위인 데이터 날조를 저지른 홍세화는 물론, 단 한 번의 검증도 없이 이를 인용한 타 언론 및 국민의힘 역시 비판을 받았다.
4. 선거 이력
5. 여담
- 영남패권주의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이다. 박정희 정권 이래로 성장한 영남 출신 보수 정치 세력이 기득권층으로 빠르게 성장했고 패권화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이건 2010년대 후반 이후로는 이미 과거의 얘기다.
- 2018년 이후 가발을 쓰는 모양이다.
- 2020년 들어 더불어민주당에 민주적인 사람이 없다며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 무키무키만만수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곡을 쓰기도 했다.
[1] 이전 편집본에 파리출장 중이라 되어있으나, 파리 지사 근무 중이 맞다. 대붕실업이라는 무역회사였다.[2]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보면, 처음 발급받은 망명자 신분증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한다. '갈 수 있는 나라 : 모든 나라, 갈 수 없는 나라 : Corea'[3] 2006년에 개정판이 나왔다.[4] 단, 아주 어려서부터 프랑스에서 살아온 그의 딸과 아들은 프랑스 국적을 취득해 그곳에 남았고, 아내는 한국과 프랑스를 왔다갔다한다고. 한국 국적의 홍세화가 한국에 오지 못하는 동안, 프랑스 국적의 딸은 한국학을 전공한 뒤 한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고 한다.[5] YTN의 팩트와이 기사가 나온 것은 한겨레 칼럼 게재 후 2개월이 지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