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한국사

 


1. 개요
2. 고대
2.1. 고조선~원삼국시대
2.2. 삼국시대
3. 중세
3.1. 고려시대
4. 근세
4.1. 조선 전기
4.2. 조선 중후기
5. 근대
5.1. 개화기
5.3. 일제강점기
6. 현대


1. 개요


한국의 화폐 역사를 정리한 문서다.

2. 고대



2.1. 고조선~원삼국시대


한국사에서는 기록상으로는 기자조선흥평왕자모전이라는 돈을 사용했고, 자전은 소액/모전은 거액 화폐라고 하나 이는 18세기 이후 해동역사동국사략에 나타나는 것이라 그대로 믿기 어렵다. 또한 '해동역사'에 따르면 삼한에서는 덩이쇠라고 불리는 일정한 규격/재질로 만든 쇳덩어리를, 동옥저에서는 무늬가 없는 금/은전이 사용되었다. 이외에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한반도 북부에서 오수전이 사용된 것으로 보이지만, 중국 이주민들이 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지 실제 한반도 내에서 얼마나 유통되었을지는 미지수다.
삼국지 동이전에서 동옥저국(東沃沮國)의 돈에는 문양(文樣)이 없다거나, 혼인 풍속은 여자의 친정집에서 돈을 요구하는데 신랑 집에서 돈을 다 지불하면 이에 신랑 집으로 돌아온다거나 하는 부분에서 돈으로 여겨지는 물건이 있었다는 기록은 여러 번 나온다. 시대상 실물화폐인 곡식이나 옷감 등을 화폐로 사용했다고 추정되며,[1] 또한 여러 유적에서 중국의 명도전, 반량전, 오수전 등이 나온다. 다만 시기적으로 볼 때 화폐경제가 중국 대륙, 한사군과의 국제교역이 아닌 내부적으로 활성화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쓰여도 극히 일부에서 화폐로 쓰였을 것이다. 대부분은 장신구, 위세품, 부장용품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구리가 드물어 청동기시대에도 주로 발굴되는것은 청동기가 아닌 토기류나 간돌검이다. 청동검이나 청동도끼등의 청동기는 고위층 권력자의 매우 귀한 물건이었고 청동화폐도 그러한 용도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2.2. 삼국시대


삼국시대에는 기본적으로 쌀과 포목을 화폐로 사용했다. 삼국유사에서 신라 태종 무열왕 때 성 안에서 베 1필의 시장 가격이 벼 30섬 혹은 50섬이라 백성들이 태평성대라 했고, 문무왕대 665년에는 견포 1필의 규격을 조정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직물이 화폐의 역할을 하고 국가가 그 규격을 조정하는 등 사실상의 화폐 역할을 했다.
여기에 중국의 동전을 가져와 사용하거나 가야의 철정, 신라의 경우 자체적으로 금/은으로 만든 무늬가 없는 동전(무문전)을 사용했다고 한다. 동아시아에서도 금과 은이 국가간에 통용되는 귀금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농업 중심의 당시 경제 체제상 금속 화폐가 전국적으로 널리 쓰이지는 못했고 남은 유물도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수는 적다. 그리고 이러한 유물들도 대개 말 그대로 '금덩어리, 은덩어리, 철덩어리' 수준에 그치는 것이지, 본격적인 금속 화폐 경제의 길로 접어드는 데는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3. 중세



3.1. 고려시대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자체 주화를 만들어 사용한 것이 유물로 확실하게 드러나는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성종 15년(996년) 건원중보와 무문전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무문전은 무늬가 없는 동전으로 부장용으로 만들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외에 1101년 처음 만들어진 조롱박 형태의 고액화폐인 은병과 이를 축소한 소은병 등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은병과 소은병은 위조가 잦아 1408년 유통이 금지된다. 이 외에 칭량화폐로 금이나 은을 일정한 규격과 모양으로 자른 금정/은정(金錠/銀錠, 금편/은편(金片/銀片)이라고도 한다), 은병을 일정하게 자른 쇄은을 사용했다고 한다. 다만 유통이 잘 되지 않았고, 고려도경에서도 고려인들은 쌀과 포목을 주로 쓰며 약국에서 약을 살 때는 종종 화폐를 사용했다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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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사용한 여러 화폐들.출처:오마이뉴스

4. 근세



4.1. 조선 전기


원나라가 망하면서 국제교역, 정부에서 발행한 지폐사용의 위험성을 경험했다. 원말기 교초의 과다발행으로 인한 가치 폭락 또한 원이 망하는 원인 중의 하나이다. 이 때문에 충분히 경험한 명과 조선은 자급자족을 통한 안정된 사회를 추구했고 화폐 경제와 교역에 대해 비우호적이었다. 여말선초 시기 목화농업이 널리 퍼지면서 이전까지는 삼베포를 돈으로 쓰다 면포로 바뀐 정도가 차이점이다.
상품 화폐를 규격화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면포의 경우 일정하게 씨실과 날실이 겹친 정도를 규격화하여 '승'이라는 단위로 나타내 액수를 정하기도 했으며, 너무 성글어 실제로 옷감으로 쓸 수 없고 화폐의 목적으로만 쓰인 거래전용 면포도 출현하였다.[출처]
이렇기 때문에 조선시대 내내 화폐를 보급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지만, 조선 초기의 노력은 거하게 실패하고 만다.
세종은 중국의 화폐제도를 모방하여 조선에도 화폐제도를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이미 태종 대에 고려 말에 쓰이던 화폐인 저화를 재도입되어 유통하려 했으나 널리 통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태종이 열심히 통용하려고 엄하게 나갔지만 어떻게 되었는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에 새로운 대책으로 중국에서 사용하듯이 금속을 이용한 동전 형식의 화폐인 조선통보를 주조하였다. 그리고 상거래에 더 이상 물물교환을 금하고 화폐를 통한 거래만을 할 것을 명령하게 되었다.
세종대왕은 열악한 조선의 화폐경제를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화폐정책을 수립하고 동전과 저화를 대대적으로 발행했으나 쉽게 정착되지 않았다. 백성들은 늘 물물교환이나 다른 교환수단을 사용했고, 정부는 강제성을 띠며 탄압하기 시작했다. 물물교환을 하는 백성들은 가산을 몰수당하고 거기에 벌금형을 때리는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며, 벌금을 때우기 위해 사채를 쓰거나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살을 택하기도 했다. 윗사람들은 어떻게든 빠져나갔으나, 당연히 백성들이 재수 없으면 골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2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화폐 사용 경험 부족 및 국내 교역이 미비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도 해동통보, 동국통보, 동국중보, 해동중보, 삼한통보, 삼한중보 등 동전과 철전을 만들어 널리 유포하려 하였으나 관영 상점이나 일부 주점 및 약방에서 쓰이는 것 말고는 사실상 화폐 유통이 미비했다. 영토가 넓어 막대한 물자를 생산하고, 평야가 많은데다 대운하를 통해 널리 물자를 유통할 수 있었던 중국과 달리 한반도는 면적이 중국보다 작은데다 그나마도 산지가 70%를 차지했다. 전근대의 기술력으로는 수레가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도로를 산에 놓기는 사실상 어려웠기 때문에 물자를 널리 유통하기가 어려웠다. 저화가 유입되어 유통되기도 했으나 저화는 송나라, 원나라라는 거대 제국의 보증이 있었기 때문에 유통이 가능한 것이었고 조선 조정의 보증만으로는 유통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17세기 자본주의가 성숙해지기 이전에 지폐가 널리 유통된 사례는 송, 원대 말곤 없다시피 했다. 결국 17세기 이후 농업생산량의 증가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은 유통 경험이 쌓이고, 대동법의 시행과 점진적인 확대가 되면서 화폐를 널리 유통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는 "화폐 불신"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저화는 원나라 대까지 널리 유통되었으나 원나라 후기에 흑사병이 전세계적으로 창궐하면서 상황이 돌변한다. 흑사병으로 비단길을 통한 동서양 무역이 붕괴되었고, 이는 원나라에 경제에 큰 타격을 주고 여기에 과도한 남발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교초는 휴지조각이 되었다. 이는 원나라 뿐만 아니라 원나라와 교역하던 고려, 일본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나마 고려는 농업이 발달되어있어 현물로 어떻게 버틸 수 있었지만 원나라에서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는 버티지 못했고 결국 남북조 시대라는 혼란기가 열렸다. 그리고 이는 고려에도 영향을 미치니 바로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다. 여기에 조정에서 특산물은 현물로 받으려는 모순적인 체제도 한몫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대 백성들은 화폐를 신뢰하기가 어려웠다. 태종 대에도 저화를 발행하면서 세액 납부를 일부 저화로 대체 가능하게 하고 녹봉도 저화로 지급하는 등의 노력을 했으나, 이것만으론 신뢰를 얻기는 힘들었다.
이처럼 화폐개혁이 지지부진해지자, 마음이 급해진 세종대왕과 신하들은 점차 강력한 법규를 제정하여 동전의 유통을 강제하려 들었고 때문에 관아와 민중들간의 충돌이 점차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전국 곳곳에서 물물교환식으로 물건을 사고팔던 민중들이 적발되어 처벌받는 일이 발생했고 이에 대해 민중들의 반발 역시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쌀 한 됫박으로 물물교환을 하던 사람이 관리에게 적발되어 곤장 100대를 맞고 수군으로 끌려가다 자결하고 아내는 목을 매는 일이 발생했으며 종로 시전일대가 방화로 쑥대밭이 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마침내, 한양 성안이 폭동전야로까지 흉흉해지자 세종대왕은 더 이상의 화폐개혁을 포기하였고, 결국 이전의 물물교환 경제로 회귀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은 물론이다. 애초에 전국을 다 털어도 한양을 제외하면 변변한 시장조차 없는 나라에서 무리한 화폐도입이 잘 될 리가 없었다. 조선은 명종조부터 장시가 등장, 활발해진 이후에 은화가 들어오면서 시장이 활성화 되고, 전국에 장시가 들어서고 나서야 화폐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4.2. 조선 중후기


이후 조선의 상업적 역량이 성숙한 17세기에 조금씩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청나라에서 정씨 왕국 봉쇄를 위해 실시된 해금책으로 일본과 중국의 무역은 전적으로 육로인 조선을 경유하여야만 했고 이에 조선은 인삼, 담배, 건어물 등의 수출과 비단의 원료인 생사의 중계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벌어들었다. 당시 중국이 은본위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이러한 무역흑자는 은의 유입을 불러왔는데, 이렇게 벌어들인 은으로 조선은 동(銅)[2]을 대거 수입하여 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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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평통보
인조 대에 개성이나 평양 등지에서 화폐가 시험적으로 사용되었고, 17세기 중엽 김육의 노력으로 서울 인근에서도 화폐 통용이 시도되었으며, 1678년 상평통보가 법정 통화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청의 해금정책이 해제되고 일본에서는 국산품으로 수입생산품이 대체하게면서 중개무역은 시들해졌고 이에 18세기 들어서면 조선의 무역 수지가 비교적 나빠지다보니 은가가 오르고 동의 수입과 주조도 역시 감소하였다.
더불어 상평통보 도입 이후에도, 서양과 비견될 만한 수준의 화폐 유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화폐가 전국적으로 보급되면서 장시가 보다 흥성하고 상거래가 일반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화폐가 유통되지 않고 부의 축적 수단으로만 사용되어 디플레이션이 발발하는 전황이 나타나기도 했고, 이 경우 정부는 정책적으로 돈을 풀어 이를 해결하려 했지만 간혹 이로 인해 오히려 인플레이션이 나타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상평통보의 재료인 동은 늘 부족해서 동광 개발과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이 조선 후기 들어 더욱 활발해졌다. 뭐 이건 동시대 중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로 겪는 문제지만...
조선후기까지 화폐는 상류층 내의 소비나 외국과의 무역 결제대금 등에만 사용되었으며, 일반 민간에서는 대동법의 대중화 전까지는 계속 쌀과 포목을 상품 화폐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된 이유는 농업 위주의 자급자족식 경제체제에서 일반 백성들이 화폐를 구하기 쉽지 않았으며, 정부에서 발행한 화폐도 재료부족 등의 원인이 있어서 액면가보다 실제가치가 높은 관계로 동전을 쓰기보다는 항아리에 담아서 묻어놓는 것이 더 이득이라 툭하면 전황이 발생하는 등 실제 유통거래에 쓰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화폐 유통이 부진했던 것은 조선의 경제 체제는 자영농의 육성과 안정적인 농업 가정의 구성을 중심으로 한 폐쇄적 농경 사회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유교 이념의 지향점이 이것이었으니 이것은 차라리 당연한 일이었고, 전국의 장시 또한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적 사회에서 부족한 것을 간단한 상거래를 통해 보충하는 정도의 역할을 했다. 이 수준에서 상평통보 또한 그 역할은 비교적 제한적이었다. 예를 들어, 상평통보에는 2문 이상의 가치를 가지는 통화가 통용되지 않았다[4]. 이는 높은 단위의 화폐 거래가 부진했음을 암시한다.

5. 근대




5.1. 개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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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경복궁을 재건하는 등 왕실에 재정이 필요하게 되자 일반 상평통보 100개분의 액면가를 가진 당백전을 발행했다. 그러나 발행의 남발로 가치가 크게 떨어져서 인플레이션을 유발시키게 되고, 상평통보 몇 개 수준의 가치로 추락하며 액면가와 따로 놀게 된다. 결국 몇년도 채 못 채우고 통용이 금지됐다. 개항 이후 다시 당오전이 발행되나, 위와 같은 악영향을 줄 뿐이었다. 이후 대동은전 등을 찍어냈지만 이번엔 생산비 과다로 1년도 안되어 중단됐다.
1880년대 들어 전환국이 설치되고, 새로 전래된 압인 기술로 상평통보를 찍어내기도 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태극 문양과 용 문양이 박힌 근대적 화폐가 발행됐고, 화폐단위는 문에서 양으로 바뀐다. 그러나 일본이 전환국의 운영권을 가져가는 등 조폐권을 장악하였고, 이 무렵 조선 왕실의 문양인 오얏꽃이 박힌 화폐가 발행됐다.

5.2. 대한제국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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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을 선포한 직후에 새로운 화폐가 나왔다. 그러나 이후 일본에서 밀어붙힌 화폐정리사업으로 가치절하되며 제일은행권으로 대체되고, 이 과정에서 민족자본의 상당수가 휴지조각이 됐다.

5.3. 일제강점기



태평양 전쟁 시기 군수자금을 마련한다고 돈을 마구 찍어내서 발생한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물가폭등이 발생했다.

6. 현대



6.1. 광복 직후


8.15 광복을 맞이하며 일본으로 철수하던 일본인들이 돈을 마구 풀어놓고 가고, 북한 정권이 남한의 경제 혼란을 초래하기 위해 위조지폐를 대량으로 살포하는 등 여전히 경제는 대혼란이었다. 조선은행 원도 참조.

6.2. 대한민국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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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직후 이승만 정부에서 화폐개혁을 하여 환 단위로 대체된다. 그러나 얼마 못가 1962년 원으로 다시 화폐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6.3. 대한민국 원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에서 10환:1원 비율로 화폐개혁을 하여 현재에 이른다.

6.4. 북한 원



[1] 고조선의 범금8조에 보면 '남을 다치게 한 자는 곡식으로 갚는다', '도둑질을 한 자는 종이 되거나 50만 전을 내야 한다'는 기록이 있어 이를 근거로 학계에서 추정하고 있다.[출처]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3권, KBS HD 역사스페셜[2] 구리[3] 오두환, <한국근대화폐사>[4] 5문, 10문권은 정부에서 내려보낸 견본품으로만 남아 있다. 2문을 넘는 화폐가 있긴 한데 흥선 대원군 시절의 '''당백전'''... 이후 고종 때는 당오전이 통용되었지만, 실제 가치는 상평통보의 2배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