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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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聖秀
1917년 02월 22일 ~ 1997년 03월 05일
대한민국의 전 법조인, 학자, 정치인이다.
1917년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태어났다. 보성국민학교[1] 와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가 메이지대학, 토호쿠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으며,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잠시 연구하였다. 1940년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 대학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연구하였다. 한편 미국에서 잠시 관료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45년 8.15 광복 후 귀국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46년 미군정청 법무부 고문관을 지냈다. 1948년 제2회 조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같은 해 대한민국 정부 산하 관료로 근무하였다. 1952년 변호사로 개업을 하였다.
한편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지역구를 옮긴 민주국민당 홍성하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한편 1950년부터 195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외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56년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김원만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9년 6월부터 8월까지 전라남도지사를 역임하였다. 닭죽 사건으로 인해 같은 해 치러진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재보궐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전라남도 보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대한민국 참의원(전라남도)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1년 3월 3.15 부정선거 등의 혐의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공민권을 제한당하고 국회의원직을 상실당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전라남도 보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이중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 벌교남국민학교(現 벌교초등학교) 4학년 때 전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