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평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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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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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돔 내부(붕괴되지 않도록 철골을 설치하였다.)
아침 노을의 원폭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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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쪽에서 바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전경
반대편에서 바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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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원폭 돔)
영어
Hiroshima Peace Memorial
(Genbaku Dome)
일본어
原爆ドーム
프랑스어
Mémorial de la paix d'Hiroshima
(Dôme de Genbaku)
국가·위치
일본 히로시마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96년
등재기준
(vi)[1]
지정번호
775
영어: Hiroshima Peace Memorial (Genbaku Dome)
간자체: 广岛和平纪念公园(原爆遗址)
프랑스어: Mémorial de la paix d'Hiroshima (Dôme de Genbaku)
일본어: 原爆ドーム (원폭돔)[2]
1. 개요
2. 역사
3. 원폭돔이 무사했던 이유
4. 평화기념공원
5. 평화기념관
6. 논란
6.2.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6.3. 방사능 잔류 위험?
7. 교통, 입장료, 관람시간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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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많은 내용이 다음 출처에서 나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원폭 돔)<유네스코,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번역 감수>)
일본 히로시마시 나카구 나카지마에 위치해 있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원폭돔 및 평화기념공원 3부분으로 구성된 공원으로 흔히 간단하게 원폭돔으로 불려진다. 원폭돔과 평화기념관은 바로 옆에 있으나, 강이 중간에 흐르며, 다리를 통해서 모두 이어져 있다.

2. 역사


원래 이 폐허가 된 건물의 정체는 히로시마 상업전시관(広島県物産陳列館)으로 1910년 히로시마현 시의원회가 히로시마 현 내의 산업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상업 전시관을 세우기로 결정한 것이 이 건물의 기원이다. 그 후에, 체코의 건축가인 얀 렛트르(Jan Letzel)의 설계에 따라 모토야스(元安) 강의 동쪽 자리에 건축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 완공되었다. 1933년 상업전시관은 히로시마현 산업장려관(広島県産業奨励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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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히로시마 물산기념관과 그 주변을 실체화한 모형
히로시마 물산 장려관은 원래 5층으로 된 중심 코어(core)가 있는 3층의 벽돌 건물로서, 구리로 덮인 철골의 타원형 돔이 얹어져 있었다. 면적은 1,023㎡, 높이는 25m에 이르렀고, 물산장려관은 히로시마시의 한 가운데 위치한데다, 구조상 히로시마의 스팟 역할을 하는 건물이 되'''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이 원자폭탄과 그 후폭풍인 화염때문에 약 1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이 건물은, 비록 골조뿐이기는 하지만 폭심지(爆心地)[3] 인근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겨졌다.(이유는 아래에 후술). 히로시마현의 재건 사업이 시작되면서, 이 건물은 당시의 상태 그대로 보존이 되었으며, 1966년 히로시마 시의회는 원폭 돔을 영구히 보존해야 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히로시마 평화 기념공원이 1950년에서 1964년 사이에 설계, 조성되었으며, 공원 안에 있는 평화기념 전시관 역시 1955년에 문을 열었다. 1952년 이후로 이 공원은 매년 8월 6일에 히로시마 평화 기념식을 열고있다.

지금의 원폭돔은 말 그대로 폐허이다. 주요 건물들이 폭발 당시 완전히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외벽이 철강과 시멘트 플라스터로 덮여 있는데, 폭발의 흔적으로 철골이 드러난 부분도 있으며, 툭치면 부서질 것 같은 부분도 존재한다. 특히 평화기념관 안에 있는 일전 물산장려관 사진과 비교해보면 그때 당시의 창문같은 것들은 물론이고 구조 역시 유추하기 어려울 정도로 폐허가 되었다. 그리고 그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안에 여러 돌들이 역시 폭발당시 최대한 '''그대로''' 널부러져 있는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복원사업을 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보존을 원했기 때문에 그 맞았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지금도 일본정부는 이 원폭돔을 2년, 3년 주기로 복원공사를 하면서 '''그 폭발맞은 원형 그대로 완벽히 보존'''하고있다.

3. 원폭돔이 무사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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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을 보면 좌측 하단에 빨간 선(흰색 안내카드가 있는 위치) 위 6~700m 상공에서 원자폭탄이 터졌다. 그리고 물산기념관의 위치가 보인다.[4] 실제로 이 거리에서 정상적인 건물이 남진 않았으므로 원폭돔은 지붕과 마루, 2층 이상의 내벽 대부분이 붕괴되었다. 하지만 그나마 이정도가 남았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원자폭탄이 터진 위치와 원폭돔이 가까워서였다. 즉 원자폭탄이 터졌을때, 원자폭탄의 충격파를 측면이 아닌 수직 방향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돔 아래 건물의 중심부는 비록 골조뿐이기는 하지만 남아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외에도 몇가지 것들이 남아서 물산장려관의 남쪽에 있는 서양식 정원에 있던 분수의 잔해같은 것들도 남았고 그 모습은 원폭돔처럼 폭발 직후의 형태 그대로다.

4. 평화기념공원


평화기념공원(平和記念公園)은 원폭돔과 평화기념관 그리고 그 주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크게 '''3가지 키워드'''로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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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는 '''위령탑'''으로 동원학생 위령탑, 사망자 위령비 등이 곳곳에 늘어져 있으며, 히로시마 기념공원이 아니더라도 주위에 잘 찾아보면 1~2개정도 주위에 위치해있다. 이는 히로시마 원폭으로 피해를 받은 한국인들을 추모하는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사진)역시 마찬가지로 정말로 찾기가 어려운 숲속에 위치하고 있다. 처음 가는 사람은 운 좋으면 5분만에도 찾지만, 운이 나쁘면 두바퀴정도 돌아도 못찾는다. 따라서 방문하고 싶다면 미리 블로그나 지도를 통해서 위치를 숙지하는 것이 현명하다. 구글 지도상의 위치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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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키워드는 '''원폭'''으로 원폭을 맞았을 때,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피난가는 것을 동상으로 만든것부터(사진), 원폭의 어린이상, 원폭공양탑 등 원폭과 관련되어 무서움과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동상, 비석을 만들어 놓고 있다. 비교적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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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키워드는 '''평화'''다. 이 공원을 잘 보면 이 주변이 모두 '평화'로 도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문객이 접근하는 다리도 '평화대교' 그쪽에 있는 종도 '평화의 종' 기념물로 '평화의 탑'(사진. 각나라말로 '평화'가 씌어있다). '평화의 샘'. '평화의 시계탑' 등 평화로 도배되어 있다.
공원이 꽤 넓다.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받아먹어서 살이 통통하게 올라 편안하게 대놓고 숙면을 취하는 길 고양이도 있고 저녁즈음이 되면 개들을 데리고 산책오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있다. 특히 대형개인 경우는 산책할 만한 공간이 별로 없다보니 대형견주들이 많이 보인다.
원폭이 투하된 아침 8시 15분에 맞춰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차임벨이 매일 1분 동안 울린다.

5. 평화기념관


평화기념관(広島平和記念資料館) 크게 동관과 본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관 1층에서 관람을 시작하며 이렇게 돈을 내고 입장하면 자동적으로 본관까지 연결이 된다. 입장료는 리뉴얼되면서 200엔으로 올랐다. 추가요금(400엔)을 내 음성 설명기를 빌리면 각 전시물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물론 한국어 설명기도 있다.
아래 설명은 리뉴얼 이전의 설명이라 2019년 현 시점과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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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지하에는 조그마한 전시실이 있는데, 히로시마 시민 혹은 어린이들이 그린 원자폭탄 그림, 기획전시들을 하고 있다. 기획전시도 원자폭탄과 관련된 것으로 주로 피폭자의 사연과 그 피폭자의 집, 혹은 사망 위치 근처에서 나온 옷가지, 타지 않는 동전 같은 것들을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지하 전시관으로 가려면 돈을 내지 않고 돈 내기 전에 입구 바로 우측에 보이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서 봐야한다.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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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1층에는 매표소가 있다. 팜플렛도 여기서 나누어주는데, 한국어도 있으니 챙겨두면 관람에 도움이 된다. 음성기기지원도 있다. 이곳을 통해서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동관 1층 전시장은 피폭 전의 히로시마와 피폭 후의 히로시마, 원자폭탄이 개발되어 투하되기까지의 일련의 사건, 사고들을 모형(위에 올려둔 모형. 원폭 돔을 옮겨둔 모형도 있다), 사진, 판넬 등으로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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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동관 2~3층 전시장으로 연결 된다. 이 부분은 히로시마 원폭 이후에 히로시마가 어떠한 상황을 겪었으며,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재건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사진과 모형, 수기 등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위의 사진은 원폭이 떨어진 후에 히로시마시의 연표로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는지를 자세히 적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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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히로시마의 여러 사진과 피해를 입은 물건들을 들고와서 전시하는 말 그대로 '''원폭의 무서움'''을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특히 유명한 것은 '인영의 돌'이라는 돌과 사다코의 종이학인데, 인영의 돌은 人影(인간의 그림자), 즉 인간이 있었던 흔적(원폭 그림자)이 남은 돌이라는 뜻이다. 히로시마역 앞에서 어떤 사람이 돌 위에 앉았는데, 원자폭탄이 떨어지면서 그 사람이 '''승화'''가 되고 그 그을음만 남아서 검은 탄 자국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사다코의 종이학'은 2살 때 피폭된 사사키 사다코가 10년 뒤 백혈병으로 죽어가면서 회복을 간절히 빌며 접은 것인데, 사다코는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1955년에 숨을 거두었다.
이후 사다코의 천 마리 종이학은 평화와 반전 반핵의 상징이 되었다. 여기서는 사다코의 인생과 같이 사진을 보여주면서 원폭의 무서움을 몸서 보여주고 있다. 소녀의 비극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다는 점에서, 사다코는 '일본판 안네 프랑크'로 인식되고 있는 셈. 공원 야외에도 이 종이학을 형상화한 기념 조형물이 전시되어있고, 매년 8월 초 원폭 참사 추모일에 맞춰 각지에서 접은 종이학들이 도착하곤 한다.
또 유명한 전시물로는 신이치의 세발자전거가 있다. 테츠타니 신이치(사망 당시 3세)는 빨간 세발자전거를 타고 노는 것을 매우 좋아하던 아이였다. 당시 일본은 전쟁 때문에 금속을 죄다 압류해갔기에 자전거는 물론 세발자전거는 매우 귀했고, 부모가 군인인 지인을 통해 어렵게 구한 것이었다. 이 테츠타니 신이치는 친구 키미코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놀다가 피폭되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아버지 테츠타니 노부오는 돌무더기에 깔린 신이치를 가까스로 구했는데, 신이치는 치명상을 입은 상태에 자전거 손잡이를 꼭 쥐고 있었다. 결국 그날 저녁 신이치는 사망했고, 노부오는 그 자리에 아들과 자전거를 함께 묻었다. 약 40년이 지나 1985년, 노부오는 그날 사망한 신이치와 두 누나의 유해를 발굴했고, 그때 묻었던 자전거도 발견하여 여기 기증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코다마 테츠하루라는 작가가 그림책으로 출간해 일본과 여러 국가에 출시되었는데,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매우 강하게 나타냈다는 점에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는 반면, 7-11세용 그림책이면서 테마가 무겁고 그림 묘사가 상당히 무서운지라 대상연령이 보기엔 부적절하다는 평이 있다.

6. 논란



6.1. 평화기념관 전시 내용의 편향성 문제


기본적으로 원폭투하와 그에 따른 피해를 알리기 위해서 세워진 곳이며, 과거 일본군의 전쟁 범죄에 대한 내용은 없다. 원폭을 투하한 국가인 미국과의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즉, 진주만 공습부터 원폭투하까지의 진행과정을 설명한 전시물이 있을 뿐이다.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너희들이 전쟁을 일으켰으니 원폭 투하를 슬퍼할 자격이 없다.'까지는 아니지만, 피해자 행세로 보기도 한다. 따라서 전시물의 대다수가 원폭의 가공할 위력과 그 피해를 강조하는 데 치중되어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일본에는 과거 자신들의 전쟁 범죄가 나빴다고 반성하는 게시물이 전시된 곳은 없다시피 하다. 하물며 원폭의 참상을 알릴 목적으로 세워진 이 기념관에 그러한 전시물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이다. 원폭이 실제로 사용된 참상을 보기 위해서라면 몰라도, 그 이상은 바라지 말자.
일본인의 시각에서 보면, 과거 일본이 전쟁을 일으켰으며, 전쟁 범죄가 나빴다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조차도 원폭이 떨어진 곳에 원폭의 참상을 알리고 이를 슬퍼하는 내용이 주된 전시물인 것에 별다른 이의를 갖지 않는다. 이는 스스로를 '전쟁의 가해자인 동시에 원폭의 피해자'라고 인식하는 것을 반영하며, 특히 우경화가 진행된 2010년대 중반 이후로는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것을 '''전후 자학사관과 반일세력의 일방적이고 부당한 덮어씌우기'''라는 인식마저 확대되고 있다. 국회의원・공영 매체들까지 "난징 대학살부터 일본군 위안부 등 당시 있었다는 사건들은 모두 날조된 것."이라 부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평화기념관에 '자국의 책임' 운운하는 정보가 전시되지 않는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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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앞에 가면 핵폭탄이 떨어진지 며칠이 되었고, 핵실험이 언제 가장 마지막에 일어났으며, 마지막으로 그 위치와 장소, 시간을 알려주는 종이와 시계를 둔다.[5] 한편 히로시마시 시장의 주 업무중 하나로써 핵실험을 하는 나라의 정부에 '항의서한'을 보내는 것이다.(저 철제판 하나하나가 항의서한을 새겨넣은 것이다.) 소련, 미국 가릴 것 없이 핵실험이 일어났다고 하면 다 보냈다.
일본의 민간인 입장에서는 어느날 갑자기 핵폭탄을 맞았으니 피해자라고 주장할 여지도 있을 수 있지만, 원자폭탄이 투하된 주 이유인 '''태평양 전쟁은 일본의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으로 시작된 전쟁'''이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또한 민간인 피해문제도 숫자의 차이가 있을뿐, 일본군이 살해한 민간인들도 존재한다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진주만 공습 당시 피해를 입은 미국의 민간인들 외에도 징용, 징병된 조선인이나 중국인 등의 아시아인들을 포함해서 계산할경우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의 민간인 피해자를 모두 합치더라도 일본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는 압도적으로 많다. 다른 사건을 다 제하더라도 난징 대학살 하나만 가져와도 일본은 민간인 피해가 있었으니 우린 피해자라고 말하는건 앞 뒤가 안 맞는다. 그리고 미국도 전쟁이 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어쩔수 없이 핵폭탄을 투하했음을 기억하자. 앞서 언급한것처럼 먼저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수백만의 무고한 사람들을 노예화하고 대량학살하고 문화재와 자원 약탈전쟁을 벌인 나라는 일본이다.
아래에서 나왔듯이 조선인 희생자등 애꿎은 외국인 희생자도 나왔다. 조선인 희생자는 대략 히로시마에서 3~4만명 가량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통계는 없다. 한국인 위령비 아래에 묻혀 있는 희생자 명단은 약 2,500명 가량인데, 이는 물론 신원이 명확하게 밝혀진 희생자의 명단만 넣은 것. 추정 희생자 수에 따르면 이는 히로시마 원폭 전체 희생자의 약 10%에 해당한다. 참고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합치면 약 6만에서 최대 7만까지 조선인 원폭 희생자가 있다고 추정된다. 물론 이러한 통계가 모두 맞다고 할 수는 없는것이 히로시마 원폭으로 희생된 사람을 공식적으로 집계한 것이 14만명이라는 것을 가정했을 때, 이는 비약이라는 관점도 있다. 아울러 조선인뿐만 아니라 히로시마에 수감되어 있던 연합군 포로 중에서도 희생자가 나왔다.
위의 비판을 히로시마에서도 인지하고 있었는지, 2019년 대대적인 기념관 리뉴얼 과정에서 어느정도 수정이 이루어졌다. 이 리뉴얼은 당초 동관부터 시작하던 것을 본관부터 시작하는 동선의 수정을 위시로 하여 그동안 초입에 나오던 인형들을 당사자들의 비판을 존중하여 제거하고 피폭자들의 유품 혹은 피폭자가 당시를 회고하면서 그린 그림 등을 중심으로 한 구성을 강화하여 점차 줄어드는 피폭자들의 증언을 최대한으로 보완하고 시간이 갈 수록 관람객들이 이들의 증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감안하여 이루어진 조치였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미흡했었던 외국인 피폭자 관련 전시물이 추가되었는 데 2019년 8월 6일 NHK 스페셜 방송에서는 미군 포로의 인식표 및 조선 출신자로 피폭 당시 군인이였던 분의 사진과 군인수첩[6]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전시관 도입부의 설명 문구에 강제징용이 있었음을 언급하는 내용과 국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하여 원폭을 맞았다는 내용이 간략하게나마 언급되어 있다.

6.2.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이 비가 처음 세워진 건 1970년인데, 이때는 원폭기념공원의 바깥쪽에 있었다. 히로시마시 당국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이 비의 공원 내 건립을 제한했기 때문. 이때 히로시마시가 댄 핑계는 공원 내에 이 이상 시설물이 들어가기 힘들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그 뒤로도 새로운 구조물들이 잘만 들어갔다.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간의 갈등. 맨 처음 비가 세워졌을 때는 민단측에서 세웠는데, 여기에 대해서 조총련측에서 반발을 했다. 왜냐하면 비의 이름이 '한국인' 위령비였기 때문. 조총련측은 '조선인도 있다' 면서 여기에 대해 반발을 했고, 1980년대에는 한국인 위령비와 별도로 '조선인 위령비'를 세우겠다면서 히로시마시 측에 허가를 요청하기도 했으나 '이미 한국인 위령비가 있으므로 안 된다. 하나로 통일하든지 알아서 해라'는 식의 시의 거부로 거부되었다. 결국 1999년 2월에 합의가 이루어져 비의 이름은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되었고, 이때서야 간신히 공원 내로의 이설이 허가되었다. 히로시마시 측에서도 국제사회의 비난이 두려웠는지, 그래도 그 뒤로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기념비에 관한 내용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공식 사이트, 팜플렛에 위치, 정보등이 조그만하게 포함이 되어 있기는 하다. 그리고 일본의 평화기념공원 가이드들은 안내 코스에 절대 이 비를 넣지 않으며, 이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질문받지 않는 한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가해자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묻어버리려는 행위로서 역사를 제대로 직시하지 않는 현재 일본의 상황을 대변한다는 시각이 보인다. 2017년 11월 현재 현장에서 가이드들이 일본인 고등학생들을 단체로 이끌고 한국인 위령비를 참배하고 설명 또한 제대로 하고 있으며 종이학도 바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부 양심적 가이드들은 위령비를 코스에 제대로 포함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일본의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중 이 한국인 원폭 위령비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는 교과서는 딱 하나다. 나머지 교과서에는 언급조차 없다(...).
전쟁을 일으켜서 핵폭탄을 맞았고, 이 과정에서 피폭이 만들어낸 여러 끔찍한 기억 때문인지 적어도 히로시마 사람들은 반전주의 성향이 강하다. 전쟁 당시 별 피해 안 본 일본인이 되려 극우 성향이 더 강하다고... 예나 지금이나 전쟁을 안 겪어본 놈들이 더 설친다.
고려대학교 일어일문과에서는 와세다대학과 함께 정기적으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방문하여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2019년경에 확인한 결과 평화기념관 곳곳에 있는 안내도에는 한국인/조선인 위령비 위치가 제대로 표시되어 있다.

6.3. 방사능 잔류 위험?


체르노빌처럼 방사선이 남아있는 건 아닌가 걱정하는 경우도 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은 비교적 고공에서 폭발했기 때문에 지상에서 폭발한 체르노빌과 같은 죽음의 재를 대량으로 형성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방사선 살포량도 체르노빌의 1/400. 실제로 이후 몇십년간 암 등의 발생률이 상당히 높았지만, 지금의 히로시마에 남아 있는 방사선의 양은 자연방사선 수준으로 인체에는 영향이 거의 없다고 한다.[7]

7. 교통, 입장료, 관람시간


가는 방법은 히로시마역에서 역 앞에 있는 히로시마 전철 본선의 2계통[8]이나 6계통 노면전차를 타고 겐바쿠돔마에역까지 가면 된다.[9] 노면전차의 가격은 150엔 균일 적용이다. 가격의 출처는 위키백과 히로시마 전철 부분. 히로시마 공항에서는 리무진을 타고 역까지 가면 똑같은 방법으로 갈 수 있다.[10]
그리고 공원안과 원폭돔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평화기념관은 돈을 내고 가야 하지만, 대학생 이상이 '''200엔'''(30인 이상 단체가 160엔),고등학생은 "100엔" (20인 이상 단체가 무료) 중학생 이하는 "무료"이며 심지어 65세 이상의 노인들은 여권을 보여주는 것에 한해서 30엔에 입장할 수 있다. 교토금각사, 은각사 입장료와 비교해보면 싼 것이다.
관람시간은 평화기념관 기준으로 3월~7월, 그리고 9월~11월은 8:30 ~ 18:00, 8월은 8:30 ~ 19:00 (8월 5,6일은 20:00까지), 12월~2월은 8:30 ~ 17:00까지 열며, 입장은 폐관 30분전까지는 해야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1시간 ~ 1시간 30분정도는 소요되므로 넉넉잡고 2시간 이전에 가기를 추천. 평화기념관은 연말연시(12월 29일 ~ 1월 1일)은 휴관이며, 공원과 원폭돔은 24시간, 연중무휴 관람가능하다.

8. 관련 문서



[1]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2] 출처 일본어 부분은 짤린것이 아니고 공식적으로 저렇게 등재되어있다.[3] 이 곳은 1933년 개원한 시마병원(島病院)이 있는데 흔히 폭심지시마병원(爆心地島病院)라고 부른다. 현재 건물은 개원할 당시 건물은 당연히 아니고 현재 병원 옆에는 이 곳이 폭심지였다는 작은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 하나 뿐이긴 하지만 원폭돔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4] 원래 미군의 투하조준 지점은 기념관 오른 편의 T자형 다리였다고 한다.[5] 사진의 표지판은 북한의 3차 핵실험을 표시한 것.[6] 해당 수첩의 주인공이신 곽 모씨의 경우에는 촬영일 기준으로 대한민국에서 생존해 계셨기에 자신의 물건이 전시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해당 박물관에 찾오셔서 자신의 물건을 보면서 원폭 피해자가 일본인뿐이 아니라는 걸 알려준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왔다.[7] 정확히 이 지역의 방사선량은 보통 세계평균 자연 방사선량의 1.5~2배 정도가 검출되며 이정도면 굉장히 미미한편이다. 그러나 폭발시 완전히 노출되어있던 원폭돔같은 건물같은 경우에는 대기보다 상대적으로 좀더 많은 방사선이 검출된다.[8] 버스 노선번호와 같은 개념이다.[9] 바로 앞에 서있는 노면전차들중 하나이니, 반드시 물어보거나 앞을 확인하고 타자. 앞의 행선 전광판에 표시된 번호가 2나 6이면 평화기념관 가는 노면전차다. 참고로 2계통 전차가 좀 더 넓고 차량도 새것으로 운행하니 쾌적하게 가고 싶다면 2계통을 타자.[10] 히로시마 전철의 열차들은 매년 8월 6일 아침 8시 15분에 추모의 의미로 근처 정류장에서 1분 가량 정차한다. 승차하면 안내방송으로 추모하는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