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사노미야 사치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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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9월 10일 ~ 1928년 3월 8일
久宮祐子内親王(히사노미야 사치코 내친왕)
久宮祐子姬(히사노미야 사치코 공주)
쇼와 시대에서 일제강점기 초기의 인물. 1927년 일본 도쿄에서, 쇼와 덴노(히로히토)와 고준 황후(나가코)의 차녀(둘째)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 키는 약 50.8cm, 몸무게는 약 3.3kg이였다.[1]
이름의 祐子라는 한자는 역경에 등장하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며, 또한 고스자쿠 덴노[2] 의 3녀인 다카쿠라노미야 유시(高倉宮祐子)[3] 공주와 같은 한자이기도 하다. 요시다 마스조(吉田増蔵) 등의 중신들이 정한 3가지 후보 중에, 아버지 쇼와 덴노가 골랐다.[4]
나가코 황후는 첫째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를 낳았을 때, 유모의 도움도 받았지만 가능한 직접 모유 수유를 했다. 이는 당시 일본 황실로서는 굉장히 파격적인 일이었다.[5] 나가코 황후는 둘째 히사노미야 사치코 공주에게도 마찬가지로 직접 모유 수유를 했다. 당시 일본도 유아사망률이 높던 시대였지만, 사치코 공주는 순조롭게 잘 자라는 듯 보였다.
1927년 12월 17일, 사치코 공주는 생애 첫 외출을 했다. 어머니 나가코 황후, 언니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와 함께 할아버지 다이쇼 덴노의 영전에 참배하러 고쿄를 찾은 것이었다.
1928년 3월 3일에는 다이쇼 덴노의 국상(國喪) 및 애도 기간이 끝나는 것을 기념하는 큰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또한 3일 후인 3월 6일은 나가코 황후의 만 25세 생일이었다. 쇼와 덴노와 나가코 황후는 두 딸을 위해 30가지 종류의 과자를 준비했고, 메이지 덴노의 딸들[6] 과 나가코 황후의 친정 구니노미야(久邇宮) 가문에서도 시게코 공주와 사치코 공주에게 선물을 보내 왔다.
그러나 2월 27일, 사치코 공주는 갑자기 습진과 고열이 나기 시작하면서 인후염으로 진단받았다. 행사는 연기되고, 덴노 내외는 사치코 공주를 간호하는데 힘썼다. 이때까지만 해도 심각한 병은 아니었고, 의사들도 "안심해도 된다"고 해서 그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3월 3일에는 열이 제법 내렸다.
하지만 이튿날인 3월 4일, 사치코 공주는 다시 열이 39도까지 치솟았고, 패혈증이 의심되었다. 나가코 황후는 직접 시녀들과 함께 번갈아 가며 사치코 공주를 간병했고, 3월 6일 나가코 황후의 생일잔치도 취소되었다. 아타미에 있던 사치코 공주의 외할아버지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 왕과 외할머니 치카코(俔子) 비도, 일정을 취소하고 딸과 외손녀의 곁으로 달려왔다.
1928년 3월 8일, 사치코 공주는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사망하고 만다. 생후 6개월만이었다. 쇼와 덴노와 나가코 황후는 큰 슬픔에 빠졌고, 특히 나가코 황후는 한동안 아기와 비슷한 크기의 베개를 인형처럼 안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 황실 법도에 따라, 아직 7세가 되지 않은 사치코 공주의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졌고, 사치코 공주는 도시마가오카(豊島岡) 묘지에 묻혔다.
비슷한 사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장남 도요토미 츠루마츠가 있다. 츠루마츠는 선천적으로 병약한 아이는 아니었으나, 3살에 요절했다. 또한 이전 일본 황실에도 요절한 아이들이 많다. 사치코 공주의 증조할아버지인 메이지 덴노는 야나기하라 나루코, 소노 사치코 등 후궁들로부터 5남 10녀를 낳았으나, 성인기까지 생존한 것은 1남 4녀뿐이었다.
1927년 9월 10일 ~ 1928년 3월 8일
久宮祐子内親王(히사노미야 사치코 내친왕)
久宮祐子姬(히사노미야 사치코 공주)
1. 개요
쇼와 시대에서 일제강점기 초기의 인물. 1927년 일본 도쿄에서, 쇼와 덴노(히로히토)와 고준 황후(나가코)의 차녀(둘째)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 키는 약 50.8cm, 몸무게는 약 3.3kg이였다.[1]
이름의 祐子라는 한자는 역경에 등장하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며, 또한 고스자쿠 덴노[2] 의 3녀인 다카쿠라노미야 유시(高倉宮祐子)[3] 공주와 같은 한자이기도 하다. 요시다 마스조(吉田増蔵) 등의 중신들이 정한 3가지 후보 중에, 아버지 쇼와 덴노가 골랐다.[4]
2. 성장
나가코 황후는 첫째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를 낳았을 때, 유모의 도움도 받았지만 가능한 직접 모유 수유를 했다. 이는 당시 일본 황실로서는 굉장히 파격적인 일이었다.[5] 나가코 황후는 둘째 히사노미야 사치코 공주에게도 마찬가지로 직접 모유 수유를 했다. 당시 일본도 유아사망률이 높던 시대였지만, 사치코 공주는 순조롭게 잘 자라는 듯 보였다.
1927년 12월 17일, 사치코 공주는 생애 첫 외출을 했다. 어머니 나가코 황후, 언니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와 함께 할아버지 다이쇼 덴노의 영전에 참배하러 고쿄를 찾은 것이었다.
1928년 3월 3일에는 다이쇼 덴노의 국상(國喪) 및 애도 기간이 끝나는 것을 기념하는 큰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또한 3일 후인 3월 6일은 나가코 황후의 만 25세 생일이었다. 쇼와 덴노와 나가코 황후는 두 딸을 위해 30가지 종류의 과자를 준비했고, 메이지 덴노의 딸들[6] 과 나가코 황후의 친정 구니노미야(久邇宮) 가문에서도 시게코 공주와 사치코 공주에게 선물을 보내 왔다.
3. 발병과 죽음
그러나 2월 27일, 사치코 공주는 갑자기 습진과 고열이 나기 시작하면서 인후염으로 진단받았다. 행사는 연기되고, 덴노 내외는 사치코 공주를 간호하는데 힘썼다. 이때까지만 해도 심각한 병은 아니었고, 의사들도 "안심해도 된다"고 해서 그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3월 3일에는 열이 제법 내렸다.
하지만 이튿날인 3월 4일, 사치코 공주는 다시 열이 39도까지 치솟았고, 패혈증이 의심되었다. 나가코 황후는 직접 시녀들과 함께 번갈아 가며 사치코 공주를 간병했고, 3월 6일 나가코 황후의 생일잔치도 취소되었다. 아타미에 있던 사치코 공주의 외할아버지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 왕과 외할머니 치카코(俔子) 비도, 일정을 취소하고 딸과 외손녀의 곁으로 달려왔다.
1928년 3월 8일, 사치코 공주는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사망하고 만다. 생후 6개월만이었다. 쇼와 덴노와 나가코 황후는 큰 슬픔에 빠졌고, 특히 나가코 황후는 한동안 아기와 비슷한 크기의 베개를 인형처럼 안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 황실 법도에 따라, 아직 7세가 되지 않은 사치코 공주의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졌고, 사치코 공주는 도시마가오카(豊島岡) 묘지에 묻혔다.
4. 비슷한 사례
비슷한 사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장남 도요토미 츠루마츠가 있다. 츠루마츠는 선천적으로 병약한 아이는 아니었으나, 3살에 요절했다. 또한 이전 일본 황실에도 요절한 아이들이 많다. 사치코 공주의 증조할아버지인 메이지 덴노는 야나기하라 나루코, 소노 사치코 등 후궁들로부터 5남 10녀를 낳았으나, 성인기까지 생존한 것은 1남 4녀뿐이었다.
[1] 아사히 신문 1928년 3월 8일, 《お傷わしき御一生 御誕生より御7ケ月目 桃の節句も御むなしく》[2] 고스자쿠 덴노의 장녀는 良子이다. 히사노미야 사치코 공주의 어머니 나가코 황후와 한자가 똑같다. '료시'라고도 읽고, '나가코'라고도 읽었다.[3] '스케코'라고도 읽는다.[4] 아사히 신문, 1927년 12월 17일, 《きょう久宮様はじめて宮城へ》[5] 훗날 나가코 황후의 큰며느리 미치코 황태자비는 아예 유모를 두지 않았고, 아이들에게 직접 모유 수유를 하다가 모유가 부족하면 분유를 먹였다.[6] 쇼와 덴노의 고모들. 다들 방계 황족 가문에 시집가서 황족 비(妃)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