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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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스페인의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마르가리타 테레사[1] 왕녀와 그 시녀들을 그린 그림.[2]
1. 개요
侍女. Ladies-in-waiting / Maiden.
유럽의 왕실이나 귀족 가문에서 왕족/귀족을 곁에서 모시는 일을 맡은 여성들. 동양으로 치면 궁녀와 비슷하게 들리지만, 전혀 다르다. 궁녀는 공노비 출신이 많지만 시녀는 높은 지위의 귀족 여성[3] 이고, 승은을 입지 않는 한 평생을 홀몸으로 살아야 하는 궁녀와 달리 시녀는 모시는 윗사람의 허락만 받는다면 결혼도 가능하다. 또한 궁녀는 여관이기 전에 왕의 예비 신부였지만 시녀는 왕의 여자가 아니었다.[4] 궁녀가 '하인'의 성격이 좀더 크다면 시녀는 '직원'의 성격이 좀더 크다고 볼 수도 있다.
참고로 시종이나 시녀 등의 '시'는 한자로 모실 시 자를 쓰는데, 이걸 일본어로 음차하면 사무라이가 된다. 경우가 좀 다르지만 그 중요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응되는 남자는 집사가 아니라 시종이다.[5] 물론 시종 역시 비천한 신분의 사람을 쓰지 않았으며, 왕이나 왕자 등 왕족의 시종은 후작이나 백작 등 역시 꽤 지체 높은 집안 출신이어야 했다.[6][7]
2. 상세
시녀라는 말을 들어보면 하는 일이 메이드하고 비슷할 것 같지만 전혀 아니다. 중세 유럽의 시종과 종자들이 단순한 하인이 아닌 보좌관이자 수행원이었듯이, 시녀도 단순한 하녀가 아닌 귀부인들의 수행원에 가까웠다.
우선 시녀는 하층민이나 평민들이 맡던 직책이 아니라 '''매우 지체 높은 가문'''의 부인이나 영애가 맡던 직책이다. 예컨대 왕권이 끝판왕으로 강했던 루이 14세 시기 프랑스 궁정 법도에 의하면, 궁중 시녀장은 최소 백작부인 이상의 신분을 가진 귀부인만이 맡을 수 있었다. 이처럼 왕이나 왕비, 태자 등의 시녀는 대귀족 가문의 부인이나 영애, 심지어 왕의 서녀가 맡았고[8] , 귀족의 시녀는 그보다는 하급 귀족 가문의 부인이나 귀공녀가 맡는 식이었다. 산업혁명 이후에는 평민도 하녀 같은 복장을 하고 시녀를 하기도 하고 하녀가 시녀의 위치로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계급상으로는 하녀보다 높은 건 변함없었다.
영국 헨리 8세의 2번째 왕비가 된 앤 불린과 그녀의 언니 메리 불린, 앤 이후로 헨리 8세의 왕비가 된 제인 시모어와 캐서린 하워드도 시녀 출신이었다. 특히 불린 자매는 영국뿐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시녀로 일했는데, 당시 유행과 사교의 최첨단이었던 프랑스 궁정에서 지내며 여러가지를 배우고 높은 교양을 쌓을 수 있었다고 한다.[9]
이렇게 고귀한 신분의 여인들이니만큼 청소, 빨래, 바느질, 불 때기, 장작 패기, 물 긷기, 설거지 등등의 잡다한 노동은 모두 일꾼들이 했다. 시녀들은 놀이를 같이 해주고 말동무 상대가 되어주며, 옷과 장신구 등에 대해 조언, 외출이나 접견 시에 수행, 그 외에 궁정의 행정 업무를 맡아 했다.
시녀는 중세부터 근대까지 존재했던 개념이기에 그 동안 변화가 있긴 했지만, 본질적인 정의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동양과 달리 유럽의 시녀는 귀족 가문의 여성이 인맥을 쌓고 교양을 익히는 것, 미혼 귀족 여성에게는 혼사를 물색하는 신부수업이나 마찬가지였고, 기혼 귀족 여성에게는 자녀들 사이의 인맥이나 정보 교류를 위한 장이 되었다.[10] 기사들이 들이는 스콰이어와 같은 개념.
왕족 여성, 특히 왕비나 왕녀 등의 시녀가 되는 것은 귀족 여성으로서 명예 중의 명예였고, 이로 인해 생기는 인맥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시녀나 그 남편, 부모 등에게 떡고물이 떨어졌다. 그렇기에 연줄을 대가며 자기 아내, 누이, 딸을 시녀로 들이려 혈안이 된 사람들도 꽤 있었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예를 들자면 이렇다.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시녀의 급여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대신 수많은 청탁(!)이나 뇌물이 오갔고, 그것으로 많은 부를 쌓을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성인#s-2(聖人)을 섬기지는 않았으나[11] 대신 시녀에게 기도를 올렸다.'라고 어떤 귀족이 말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 당시 왕궁 시녀로 들어간다는 것은 권력에 직접 연결되는 일이기도 했기에, 영국의 많은 귀족의 딸들이 여왕이나 왕비의 시녀가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도 총애하는 시녀들에게는 몇 가지 은전을 내렸고, 또한 어린 시녀들에게 좋은 혼처를 물색해 주는 한편, 시녀가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할 상황에서 제지해 주기도 했다. 대신 시녀들은 여왕의 허락 없이는 결혼할 수 없었다. 여왕은 시녀들의 후견인이나 다름 없는 위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당시 왕궁 시녀가 된다는 것은 좋은 혼처를 구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한 시녀가 그만두려 한다는 소문이 나자 즉시 12명의 신청자가 몰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엘리자베스 1세는 학구파였기 때문에 시녀들 역시 내로라 하는 학식을 보유한 귀족 여성들이 대부분이어서, 엘리자베스 1세 재위 시절 잉글랜드 궁정을 방문한 사절들은 "마치 대학교에 온 것 같은 기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중세 신학자이자 도미니코회 수도사제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말도 이 맥락에서 풀이해보면 "종교가 짱이니 철학은 종교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섬겨라!"의 의미가 '''아니라''' '''' 종교와 철학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뜻에 더 가깝다. 굳이 시녀라는 단어를 써서 종교의 우위를 나타내긴 했지만.
그래도 시녀가 메이드와 완전히 연관이 없지는 않다. 시녀가 메이드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데, 메이드의 기원은 부르주아 계급이 옛 대귀족 계급이 시녀를 두던 관행을 흉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르주아보다 한 단계 아래 계급인 하층민들을 고용하는 것. 메이드 역시 단순 가정부보다는 급이 조금 높다고 할 수 있는데 제복을 풀세트로 차려입는다는게 노동력만큼이나 과시성이기 때문이다. 현대에서도 사복입은 알바와 정장 입은 직원의 사회적 직위가 다르다.
[1] 펠리페 4세의 7녀이자 카를로스 2세의 친 누나. 합스부르크 왕조의 왕녀다. 합스부르크 일족은 오랜 근친혼으로 인해 주걱턱 및 각종 질병에 시달렸지만 다행히도 마르가리타 왕녀는 주걱턱만 제외하면 유전질환 없이 건강하게 태어났다. 그녀는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가 되었지만 잦은 임신으로 건강을 해치고 말아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2] 그림의 제목은 <시녀들>이다.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 중. 파블로 피카소가 이걸 그 특유의 큐비즘 화풍으로 모사한 피카소의 시녀들 역시 유명하다.[3] 일례로 영국의 마거릿 로즈 공주를 측근에서 모신 시녀는 남작부인.[4] 물론 시녀였다가 왕의 정부, 심지어 왕비까지 되었던 사례도 있었는지라 백 퍼센트 아니라고 하긴 어렵지만 궁녀처럼 왕의 여자인 것이 당연시되는 시스템은 아니었다는 얘기. [5] 물론 집사도 그렇게 낮은 직책은 아니다. 어지간한 집에서도 집안 살림을 총괄하는 위치이며, 주인이 높은 귀족이라면 집사도 비서실장 수준에 해당하는 고위직이고 왕실 집사장쯤 되면 내무부장관과 동급이다.[6] 우리나라도 조선시대 들어 환관과 개념이 섞이기 전인 고려시대만 해도 내시는 지체 높은 집안의 학식 있는 문관이 맡아하는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현대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의 비서실장이나 정무수석을 연상케하는 자리.[7] 영국 의회 개원식에서 현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망토를 정돈하는 4명의 시종들은 여왕의 동생인 마거릿 공주의 친손자(즉 여왕의 조카손자)인 차기 스노든 백작 후계자, 그의 고종사촌, 스코틀랜드 후작 가문 후계자, 여왕의 모후였던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의 친정 자손(즉 여왕의 외가쪽 조카손자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8] 왕실이 어지간히 콩가루 집안인 상황이 아니고서야 정부인에게서 태어난 적통 왕녀가 시녀로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영국의 메리 1세가 이복동생 엘리자베스 1세의 시녀가 되어야 했던 적이 있었지만, 그건 아버지 헨리 8세가 그녀를 왕녀에서 사생아로 격하시켜버렸기 때문.[9] 참고로 불린 자매가 배웠다는 교양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예법과 지식은 물론, 남자 앞에서 고개를 숙여 은근슬쩍 가슴 노출하기, 넘어지는 척하며 다리 노출하기 등, 헌팅 기술도 포함되었다.[10] 시녀의 혼인 여부는 시대나 지역에 따라 달랐다. 미혼 여성만 시녀로 두고 결혼하면 은퇴시키는 경우도 있었고, 혼인 여부 무관한 경우도 있었다.[11] 종교개혁에 의해 가톨릭적인 색채를 배제하려는 당시 영국의 분위기를 감안하고 이해해야 한다. 다만, 영국국교회(현재 성공회의 전신)의 공식적인 입장은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성인에게 전구(傳求)를 청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아서, 실제로 성모 마리아나 성 제오르지오 같은 성인들을 인정한다. 웬만하면 성인을 굳이 거칠 필요 없이 신자 개개인이 직접 하느님께 고하길 더 권할 뿐... 장로교인이나 침례교인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겠지만, 목사님이나 장로님께 기도를 부탁하듯이, 죽은 자들에게도 그렇게 부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것 같다. 아무튼 그런 성공회 내의 분위기 때문에 종교개혁 이후 성공회에서 새로이 성인으로 인정한 인물이 전무하다. 저 말은 에드워드 시절의 청교도적인 분위기가 강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