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재보궐선거

 


'''대한민국 재보궐선거'''
1996년

1997년

1998년
1996년 재보궐선거

'''1997년 재보궐선거'''

1998년 재보궐선거
1. 개요
2. 3월 5일
2.1. 인천광역시 서구
2.2.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3. 7월 24일
3.1. 충청남도 예산군
3.2. 포항시 북구
4. 9월 4일
4.1. 선거결과
5. 12월 18일


1. 개요


대한민국의 공직선거법 규정에 따라 1997년 3월 5일과 7월 24일, 9월 4일, 12월 18일에 치러진 재보궐선거다. 2000년 2월 이전까지는 재보궐선거의 일정이 정례화 되지 않아 지역마다 선거일이 모두 달랐다.[1]

2. 3월 5일


'''1997년 3월 재보궐선거/국회의원 선거 결과'''
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1석
1석
'''제15대 국회의원'''
인천 서구는 조철구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의 사망으로, 경기 수원시 장안구는 이병희 자유민주연합 의원의 사망으로 보궐선거 사유가 발생하였다. 선거 결과 인천 서구는 국민회의 조한천 후보가, 수원 장안구는 자민련 이태섭 후보가 당선되면서 두 정당 모두 의석을 유지하였지만, 반대로 여당인 신한국당은 수도권 선거에서 0대 2로 져 김영삼 정권의 레임덕이 가속화 됐다.
정권 심판론과 국민회의-자민련 야권 공조가 선거 승리의 원인으로 평가됐다. 이후 두 야당은 연대를 넘어 헌정사상 최초로 연립정부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투표율은 당시 치러진 재보선 가운데 가장 낮았다.

2.1. 인천광역시 서구


전임자 새정치국민회의 조철구 작고
'''인천광역시''' '''서구'''
'''기호'''
'''후보명'''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선 여부'''
1
조영장
신한국당
24,070표
33.39%
2
2
조한천
새정치국민회의
42,503표
58.96%
1
'''당선'''
3
백석두
무소속
5,517표
7.65%
3
'''선거인 수'''
199,035
'''투표수'''
74,221
'''무효표 수'''
2,131
'''투표율'''
37.29%

2.2.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전임자 자유민주연합 이병희 작고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기호'''
'''후보명'''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선 여부'''
1
이호정
신한국당
16,018표
29.46%
2

2
이태섭
자유민주연합
28,780표
52.92%
1
'''당선'''
3
유용근
민주당
7,179표
13.20%
3

4
이대의
무소속
1,280표
2.35%
4

5
이학성
무소속
1,119표
2.06%
5

'''선거인 수'''
169,346
'''투표수'''
55,392
'''무효표 수'''
1,016
'''투표율'''
32.71%

3. 7월 24일


'''1997년 7월 재보궐선거/국회의원 선거 결과'''
신한국당
무소속
1석
1석
'''제15대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로는 보기 드문 '''출구조사'''가 실시되었다.[2] MBC와 갤럽의 전화 여론조사 결과, 충남 예산군에 신한국당 오장섭, 포항 북구에 무소속 박태준의 당선을 각각 예측하였고 결과는 적중했다.
다가오는 12월 대통령 선거의 대리전으로 여겨져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충청 맹주를 자처했던 JP는 예산에서의 참패에 충격이 컸다. 국민회의와의 협상에서 발언권이 줄어들까 노심초사하기도. 포항시 북구에서는 신한국당 후보가 민주당에도 밀린 3위를 기록하며 TK내 반YS정서가 선거로 표출됐다. 이 부분은 상황이 조금 복잡한데, YS정권은 역대 보수정권 중 유일하게 TK에서의 지지세가 PK보다 약했다. 게다가 전두환-노태우 구속으로 TK 지역내 분위기가 미묘하게 흘러갔다.[3]
출구조사 결과(오차범위 ±3.2%p)
  • 충남 예산군: 신한국당 오장섭 58.9% vs 자민련 조종석 41.1%
  • 포항시 북구: 무소속 박태준 49.1% vs 민주당 이기택 29.0% vs 신한국당 이병석 21.9%

3.1. 충청남도 예산군


전임자 자유민주연합 조종석 당선무효로 의원직을 상실
'''예산군'''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오장섭'''
'''26,608'''
'''1위'''
'''신한국당'''
'''53.30%'''
'''당선'''
'''3'''
조종석
23,312
2위
자유민주연합
46.70%
낙선
'''계'''
'''선거인 수'''
77,326
'''투표율'''
68.48%
'''투표 수'''
52,935
'''무효표 수'''
3,015
자민련 조종석 후보는 당선무효로 의원직을 상실하고도 같은 당적으로 그 지역구에 그대로 출마했다(...) 조씨는 본인이 아닌 선거사무장의 선거법 위반 때문에 의원직을 상실한 지라 본인의 선거권은 살아 있었기 때문. 하지만 본적이 예산인 신한국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가 예산 아버지 생가에 상주하면서 신한국당 오장섭 후보를 총력지원했고, 그 결과 오장섭 후보가 설욕에 성공한다.

3.2. 포항시 북구


무소속 '''허화평'''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으로 형을 선고 받아 의원직을 상실.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호'''
'''후보명'''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선 여부'''
1
이병석
신한국당
17,801표
17.66%
3

4
이기택
민주당
35,137표
34.85%
2

5
박태준
무소속
47,884표
47.49%
1
'''당선'''
'''선거인 수'''
166,075
'''투표수'''
104,819
'''무효표 수'''
3,997
'''투표율'''
63.12%
참고로 박태준의 당적이 위키백과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4] 무소속으로 당선된 이후 자민련에 입당한 것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엔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포항시 북구에 출마한 민주당 이기택은 김대중과 갈등을 빚었던 그 이기택이 맞다.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으로 대거 탈당 후 남은 민주당의 운명을 이 선거에 걸었으나, 2위에 그쳤다. 자세한건 이기택 문서 참조.

4. 9월 4일


'''1997년 9월 재보궐선거/국회의원 선거 결과'''
'''자유민주연합'''
'''1석'''
'''제15대 국회의원'''
YTN에서 출구조사를 실시하였다. 출구조사 결과
  • 안양시 만안구: 자민련 김일주 60.3% vs 신한국당 박종근 28.6% vs 무소속 김영호 11.1%
최종 결과는 57.1%, 30.8%, 12%로 거의 정확히 들어맞았다.
국민회의-자민련에서는 연합공천의 의미를 부각하며 대선 승리를 다짐해 나간다. 신한국당은 패배를 겸허히 수용하나, 낮은 투표율(33.1%)인 만큼 지나친 확대해석을 경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4.1. 선거결과


전임자 자유민주연합 권수창 작고
'''안양시 만안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박종근
18,067
2위
신한국당
30.78%

'''2'''
'''김일주'''
'''33,550'''
'''1위'''
자유민주연합
'''57.16%'''
'''당선'''
3
김영호
7,074
3위
무소속
12.05%

'''계'''
선거인 수
180,420
투표율
33.12%
투표 수
59,763
무효표 수
1,072

5. 12월 18일


'''1997년 12월 재보궐선거/국회의원 선거 결과'''
'''새정치국민회의 '''
'''1석'''
'''제15대 국회의원'''
당시 유력 대권주자였던 김대중 후보의 측근 신기하 의원이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로 사망'''하여 광주 동구 의석이 궐석되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와 동시에 치러질 예정이었으나... 후보자가 민주정의당 출신의 이영일 전 의원 밖에 없어 '''무투표 당선'''되었다.[5]

[1] 그래서 위키피디아나 나무위키 문서에 기재되지 않은 2000년 이전 재보선 결과도 상당하다. 지역별로 날짜가 전부 달라 목록을 만드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2000년 이전의 지역별 재보선 결과를 자세히 알고 싶다면 중앙 선관위 자료를 참조하길 바람 # [2] 당시에는 출구조사 도입 초기였던데다가 15대 총선에서 예측조사가 완전히 틀려버리는 등 시행착오가 많았고 15대 대선을 앞두고 출구조사의 오차를 줄이기 위해 일종의 시범조사 격으로 출구조사가 실시되었다고 보면된다. 막상 1997년 대선에서 출구조사를 공개한 방송사는 MBC밖에 없었지만. [3] 90년대와 지금의 군사정권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을 한 것도 얼마되지 않은 시기였고, 전두환 구속 당시 반대 여론도 적지 않았다. 대구-경북지역 정치 성향상 정도가 더했다고 봐야 한다.[4] 선거 문서에는 자민련, 박태준 개인의 문서에는 무소속으로 당선된 것으로 나와있다.[5] 원래는 한나라당에서도 후보를 냈지만 그 후보가 사퇴하여서 자동으로 무투표 당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