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택

 

'''이기택의 역임 직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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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e7edd> '''이름'''
이기택 (李基澤)
'''출생'''
1937년 7월 25일
경상북도 영일군 청하면 필화리
(現 포항시 북구 청하면 필화리)#
'''사망'''
2016년 2월 20일 (향년 78세)
'''본관'''
영천 이씨
'''학력'''
부산중학교 (졸업 / 6회)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 / 43회)
고려대학교 (상학 / 학사)
고려대학교 (경영학 / 석사)
'''가족'''
아내 이경의, 슬하 1남 3녀
'''의원 선수'''
'''7'''
'''의원 대수'''
7, 8, 9, 10, 12, 13, 14
'''경력'''
【 경력 보기】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학생위원장
신민당 사무총장
신민당 부총재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 정치학 객원 연구원
신한민주당 부총재
통일민주당 정무위원
통일민주당 부총재
국회5공 비리조사 위원장
통일민주당 부총재 겸 원내총무
민주당 공동대표 겸 상임고문
통합민주당 총재
한나라당 상임고문 겸 총재 권한대행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해외한민족교육진흥원 이사장
4.19 혁명공로자회 회장
범시민사회연합 상임고문

'''약칭'''
'''KT'''
1. 개요
2. 생애
2.1. 초년시절
2.2. 정계 입문 - 제3공화국 시대
2.3. 유신 시대
2.7. 말년
3. 평가
4. 기타 가족관계
5. 선거 이력
6. 소속 정당
7. 훈포장 수훈 이력
8. 저서
9.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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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정치인. 호는 일민(一民). 4.19세대의 대표 인물.
제7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때까지 제11대를 제외하고 내리 일곱 번 당선되었으며,1991년 민주당을 창당하고, 김대중과의 야당통합을 통해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제1야당의 수장이었다.
현재까지도 최연소 야당 사무총장, 최연소 부총재의 정치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한때 김영삼, 김대중을 이을 포스트 양김시대 대표 주자로 인식되며 야권 차세대 주자 여론조사 1위(1994년)의 기염을 토하기도 했으며, 시사저널 한국을 이끄는 인물 10인에 4년 연속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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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 이기택의 영수회담>'''

2. 생애



2.1. 초년시절


1937년 경상북도 영일군 청하면 필화리(현 포항시 북구 청하면 필화리)에서 태어났다. 6.25 전쟁통에 온가족이 부산으로 피난하여, 부산중학교, 부산상업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하였다.
1960년 고려대 상과대학 학생위원장 시절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4.18 고대 의거’를 주도하였다. 4.19 혁명을 일으킨 여러 학생운동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때 함께 학생 시위를 주도한 인물로 부산상고 동기동창인 신상우가 있다.
고려대학교 졸업 후 자형 이임용과 큰누이 이선애가 경영한 태광산업(현 태광그룹)에 입사하여 창립 멤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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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광그룹 흥국생명 빌딩>'''

2.2. 정계 입문 - 제3공화국 시대


고려대 은사인 유진오의 추천으로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전국구로 당선돼 정치를 시작하였다. 이후 신민당 소속으로 부산직할시 동래구에서 제8대(1971년), 제9대(1973년), 제10대(1978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69년 야당과 재야 세력이 총집결한 "3선 개헌 반대 투쟁"에서 핵심 역할을 맡는 등 30대 초반에 이미 민주 세력의 중심에 서있었다. "3선 개헌 반대 투쟁"에 윤보선, 장준하 등 기라성 같은 야당 인물이 모두 참여한 가운데, 이기택은 초기 준비위원회 32인에 피선되는 등, 당대에 김대중, 김영삼과 함께 청년대표로 자리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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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3선 개헌에 반대하며 김영삼 전 대통령(가운데)과 함께 광화문 거리로 나섰다. 오른쪽은 김상현 당시 신민당 의원.

2.3. 유신 시대


1974년 김영삼이 총재로 선출된 직후 신도환 계보에 속하면서 김영삼의 당 운영이 독선적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1976년 이철승이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는 데 기여하였다. 그 해 11월 이철승에 의해 역대 최연소 제1야당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나이 39세 때였다.
그러나 1978년 이철승이 박정희 정권에 미온적 비판을 이어가자 신도환 계보에서 이탈해 독자 계보를 선언, 1979년 5월 역사적인 5.30 전당대회 때에는 따르는 의원 1명도 없이 원외인사들로만 독자 계보를 형성하여 1차 대회에서 신도환을 뛰어넘는 92표를 획득했다. 그리고 전당대회 2차 투표를 앞둔 시점에서 사퇴하며 자신의 표를 김영삼에게 몰아 주어서 김영삼이 이철승을 꺾고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는 데 기여하였다. 야당의 노선이 선명야당으로 기운 이 결과는 5개월 후, 10.26 사태로 이어진다. 이 때 박정희 정권은 이기택이 이철승이 아닌 김영삼을 지지하려 하자 자형 이임용이 운영하는 태광그룹의 장부를 압수하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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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가져온 신민당 5.30 전당대회>'''
이후 김영삼에 의해 부총재로 임명되면서 김대중-김영삼의 뒤를 잇는 차세대 기수로 인정 받았다. 당시 겨우 42세의 나이였다.

2.4. 제5공화국 시대


1980년 5.17 내란으로 신군부에 의해 정치 활동이 규제되었다가 1984년 해금되면서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동래구 지역구에는 이미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한 자신의 비서 출신 박관용이 있었다. 이에 지역구를 해운대구-남구로 옮기고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신한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부총재 재당선되며, 양김을 잇는 야당 핵심 인사로 자리한다. 당시 최형우, 김현규 전의원 등 상도동계 인사들 외에도 정대철, 유준상, 조홍규 전의원 등 동교동계 정치인들과도 교류가 잦았다고 한다. 당시 최측근 인사로 손태인 전의원이 있다.
이후 야당이 신민당에서 분열되는 1987년 5월의 통일민주당 창당에 불참하고 '야당 통합'과 '호헌 철폐'를 주장하며 단식 농성을 벌인다. 6.29 선언 서울의 봄이 이루어지고 야당이 통일민주당으로 단일대오를 형성하자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이 다시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으로 분열되며 영호남 통합 노선의 이기택 계보는 적지 않은 타격을 입는다.

2.5. 제6공화국 시대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부산 해운대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89년 서석재의 뒤를 이어 통일민주당 원내총무에 선출되었다. 당시 5공비리 특별조사위원회가 설치되었을 때 위원장을 맡아 원만한 청문회 진행으로 국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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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청문회 위원장>'''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창당될 당시 장고(長考)를 거듭하다가 결국 노무현, 김상현과 함께 잔류하여 꼬마 민주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취임하였다.[1] 당시 민주당은 민자당과 평민당에 실망한 여론주도층의 지지를 받아 상당한 지지율을 보이기는 했지만, 막상 1991년 지방선거에서는 부족한 조직력에다가 투표율 저조, 야권분열로 인해 득표율로는 선전했음에도 의석을 얼마 얻지못하고 부진한 성적을 거두웠다. 지방선거 이후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하여 민주당을 창당하고 김대중과 공동대표를 맡았다. 당시 정가에서는 "이기택이 김대중에게 시집 갔다"고 놀리기도 했으나, 사실상 이때의 결단으로 이기택은 김대중에 이어 야권 제2인자로 발돋움한 셈이었다[2]는 평가도 있는데, 10년 전에 이미 신민당 부총재를 계속 역임했던 사람이다. 포스트 양김 정치인으로 이기택, 최형우, 김상현, 김덕룡, 정대철 정도가 손에 꼽힐 때였다.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부산 해운대구 출마를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전국구로 당선되었다. 반면에 노무현김정길은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감하게 부산에 출마해서 지역감정의 역풍 속에서도 처절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패배하면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3] "초재선 의원들이 지역구에서 지역감정과 맞서면서 싸우는데, 정작 격전지에 출마해서 바람을 불러일으켜야 할 당대표는 전국구 상위 순번으로 금뱃지를 달았다"는 평가도 상존한다.[4]
그러나, 영호남 통합구도의 당시 민주당 계파 구조 상 공동대표로서 자신의 지역구 선거 유세에 매몰될 수 없었다는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당시 수도권의 이기택계 후보들의 총선 생환이 당내 역학 구도에 최우선 과제였던 것도 사실이다.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김대중을 도와 야당 대표로 전국 유세를 하고 다녔다. 이 때 이기택은 3당 통합을 군사정권과의 야합으로 규정하고, 독재 정권으로부터의 완전한 정권 교체, 영호남 화합을 강조했다. 김대중이 대선에 패배하고 정계은퇴를 한 후 김대중의 뒤를 이어 민주당 대표가 되었다. 드디어 야권의 제1인자로 부상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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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통합, 영호남 화합이었던 민주당 합당>'''

2.6. 문민정부 시대


민주당 대표가 된 후 국가보안법 폐지, 6공 비리 청산,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대한민국-미국-북한의 3자 회담 등을 주장하며, 90여 명의 민주당 의원들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김대중의 빈자리를 지킨 동교동계와의 갈등이 지속되었다.[5] 동교동계 내에서 김대중의 부재가 김상현, 정대철 등 2인자들의 내부 투쟁을 촉발한 것.
당대표 시절, 김영삼과 김대중은 이기택을 직접적으로 견제했는데 이기택의 급부상은 양김 청산과 세대 교체를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남과 호남을 나누어 갖고 '40대 기수론'으로 야당을 대표하게 된 양김과 달리, 이기택에게는 지역 기반이라는 정치적 자양분이 없었다는 것이다. 포스트 양김 시대의 선두주자가 이기택이기는 했으나, 대권 주자로서는 양김의 그림자가 짙었다는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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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국회본회의 민주당 대표연설>'''
한반도에 전쟁위기가 몰아닥친 1994년, 야당 대표로서 방북을 추진하고,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대한민국-미국-북한의 3자 회담을 주장했다.[6] 그 후 1995년 6월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동교동계와 충돌을 감수하면서까지 공천한 장경우 경기도지사 후보가 민자당 이인제 후보에게 패배하면서 민주당이 민자당을 기초단체장과 광역의원에서 앞서는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당내 리더십에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이 때 이미 김대중이 영국 외유를 마치고 돌아와 정계 복귀가 임박한 시점이라 이기택은 초강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는 후일담. 오히려, 김대중의 정계 은퇴 번복이 수순으로 받아들여지던 상황에 동교동계가 의도적으로 경쟁 계파인 이기택의 설득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내지 않았다는 설도 존재한다.
결국 김대중이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정치적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재야 시민운동가들이 창당한 개혁신당을 흡수하여 통합민주당을 창당한 뒤 조순, 노무현, 이부영, 이철, 김원기, 제정구, 김정길, 홍성우, 서경석, 강창성 등 쟁쟁한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긴 하였으나, 문제는 이들이 야당과 재야의 스타 군단이라 자기 주장이 너무나 강한 사람들이었다는 것.[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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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택 노무현 김원기 이부영 강창성 등 통합민주당 최고위원회의>'''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당 고문으로서 해운대구-기장군 갑 지역구에 출마했다가 신한국당 김운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8] 그가 이끌던 통합민주당은 수도권에서 중도층의 지지를 일부 흡수하긴 했지만#, 기존의 30석에서 15석(지역구 9석 + 전국구 6석)으로 의석이 반토막나면서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하였고, 같은 야권의 경쟁 상대인 새정치국민회의에 비해 너무나도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9] 물론 김대중의 국민회의도 이때 상당히 부진했으나, 무엇보다 김종필자민련이 50석으로 크게 약진한 것과 크게 비교되었다.
1997년에는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재보궐선거에서 죽어가는 당의 명운과 함께 자신의 마지막 정치적 생명을 걸고 출마하였다. 그러나 무소속으로 출마한 박태준에 밀려 낙선. 사실 태어나기는 포항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의 정치적 기반을 부산에서 잡은 이상 당선되기는 어려웠다고 봐야 할 것이다.[10]

2.7. 말년


이후 통합민주당을 신한국당과 합당시키는 결단을 내렸다.[11] 이기택으로서는 DJ, YS, JP 3김을 중심으로 한 정치에 염증이 느끼고 있었고, 1996년 김대중의 정계 복귀 뒤에 김대중과 갈등이 크게 겪는 과정 속에서 통합민주당이 와해당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3김 정치 청산을 내세운 이회창과 손을 잡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해서 한나라당을 창당했으나, 결국 1997년 12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2000년에는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이회창 총재의 독선에 반발하여 김윤환, 이수성, 신상우, 조순 등과 함께 탈당해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부산광역시 연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권태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기택뿐 아니라 김윤환, 신상우, 조순, 김상현, 김동주 등이 모두 낙선하였으며, 지역구에서 홀로 당선된 한승수를 제외한 거의 모든 민국당 인사들이 결국 낙선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정계 은퇴를 하게 되었다. 이 때의 정치 중진들의 대거 은퇴는 "이회창의 공천 학살"이라는 신조어로 남았다.
이후, 신상우 등과 함께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12]를 지지하였으나, 참여정부 집권 이후 민주평통 수석 부의장, 적십자 총재 등의 자리는 고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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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기택>'''
열린우리당 창당 이후 참여정부와 거리를 둔 이기택은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13]를 지지하였다. 이 때에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되었다.
평통 수석부의장에서 물러난 뒤 '해외한민족교육진흥회' 이사장과 '4.19 혁명공로자회' 회장, '범시민사회연합' 상임고문, '글로벌 피스포럼' 대회장 등을 맡아 시민사회 활동에 주력하다가 2016년 2월 20일 사망했다. 장례는 시민사회장[14]으로 5일 간 진행되었다.
사망 전날 여의도 사무실에서 6년 간 준비해온 자서전 원고 작업을 끝냈고, 사무실을 나오면서 "아, 큰일을 마쳤네"라고 말할 정도로 흡족해 했다고 한다. 평소 지병 없이 건강했는데, 그 다음 날 아침 갑자기 사망했다고. 상술되었듯이 4.19 혁명 당시 고려대학교 학생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라서 사후 서울 강북구국립 4.19 민주묘지에 안장[15]되었다.

3. 평가


박정희 독재정권과 전두환 신군부 정권 하에서 ‘야당 외길’을 걸으며 이른바 ''''4.19 세대''''의 자존심을 지켜왔다. 1970~1980년대에는 민주진영에서 김대중, 김영삼의 바로 아랫자리를 차지한 인물이었으며, 김영삼이 여권으로 넘어간 이후에는 김대중에 이어 제2인자의 위상을 유지했다.
외모는 정치인이 아닌 대학교수를 연상케 하지만, 조기축구와 새벽 달리기로 체력을 연마한 강골이었으며, 키도 크고 듬직한 성품이어서 주변의 평판이 좋았다. 무엇보다 '4.19세대'의 대표적 인물이라는 상징성은 그가 가진 최고의 정치적 자산이었다.
1960년 4.19 민주혁명에서 고대 학생으로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1979년 5.30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선명야당을 선언했고, 1987년 단식투쟁으로 6.10 항쟁의 기폭제[16]가 되기도 하는 등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3대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나이에 비해 직위가 너무 빨리 올라간 탓인지 바닥 민심을 훑는 감각이나 정치적 타이밍을 포착하는 동물적 감각 등이 너무 일찍 사그라들어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했다.[17] 만약 1992년 제14대 총선 당시 부산에 출마하여 지역감정에 정면으로 맞섰다면, 노무현이 받은 스포트라이트를 그가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는 1990년 3당합당 때 차라리 김영삼을 따라갔다면, 김영삼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실제로 김영삼은 김동영최형우의 부재만큼 이기택을 아쉬워했다. 혹은 김대중의 정계 은퇴 번복을 받아들이고 그와 협력했다면, 포스트 양김 시대를 노무현이 아닌 이기택이 열 수도 있었다는 평가가 여전히 존재한다.[18] 정치경력의 사실상 마지막 순간에 통합민주당을 한나라당에 합당시키지 않고 노무현이 대선 후보가 될 때까지 그 간판만이라도 계속 지키고 있었다면, 민주당계 정당의 법통을 지켜온 존경받는 원로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19]
[image]
독자 계보 수장으로 양김과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던 당대 유일한 정치인이면서 김영삼, 김대중의 결정적 대권 시기에 대적해 두 인물과 상도동, 동교동 양대 계보의 집중견제를 받았다. 그래서 그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문희상 前 국회의장은 이기택에 대해 "좌절된 영웅"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1979년의 '5.30 전당대회'와 1987년의 '호헌철폐 단식투쟁', 1991년 '민주당 통합' 등 근현대 정치사의 굵직한 사건으로 보여준 이기택의 정치철학은 사후 재평가되고 있다. "선명한 정의"와 "영호남 화합", "야당 통합"으로 요약되는 이기택의 정치 인생은 사실상 양김 시대와 함께 저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망 이듬해인 2017년 회고록 "우행"이 출간돼 출판기념회가 9월25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려 500여명이 참석했다고 한다.[20]

4. 기타 가족관계


태광그룹 초대 회장인 이임용이 자형이었다. 태광그룹은 이기택의 본가에서 출자해 큰누이인 이선애가 창업한 기업이다. 이 태광그룹은 박연차 회장의 태광실업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태광산업, 흥국생명, 흥국쌍용화재, 티브로드 등을 계열사로 둔 재계 36위[21]의 준대기업이다. 태광그룹 이호진 3대 회장은 이기택의 조카가 된다. 태광그룹 이기화 2대 회장은 이기택의 친형이다.

5. 선거 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종류
선거구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14번

-
'''당선'''
'''초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3선거구[22]
'''34,471 (65.89%)'''
'''당선 (1위)'''
'''재선'''[23]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4선거구[24]
'''57,757 (39.23%)'''
'''당선 (2위)'''
'''3선'''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117,216 (40.14%)'''
'''당선 (1위)'''
'''4선'''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남/해운대

'''159,127 (43.00%)'''
'''5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해운대

'''54,223 (48.30%)'''
'''6선'''[25]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2번

-
'''당선'''
'''7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해운대/기장 갑

55,163 (47.65%)
낙선 (2위)

1997
1997년 7.24 재보궐선거[26]
경북 포항 북
35,137 (34.85%)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연제

26,060 (26.53%)


6.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67 - 1969
정계 입문

1969
자진 정당 해산

1969 - 1980
정당 재등록

1980 - 1985
정당 해산

1985 - 1987
창당

1987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1987 - 1990
창당

1990
3당 합당에 대한 반발로 탈당

1990 - 1991
창당

1991 - 1995
합당[27]

1995 - 1997
합당[28]

1997 - 2000
합당[29]

2000
총선 공천 탈락 불복으로 인한 탈당

2000 - 2002
창당

2002
탈당

2002 - 2003
입당[30]

2003 - 2007
탈당

2007 - 2012
복당[31]

2012 - 2013
당명 변경

2013 - 2016
탈당
정계 은퇴

7. 훈포장 수훈 이력


[image]
'''국민훈장무궁화장''' (2011)
[image]
'''대한민국 건국포장''' (1963)

8. 저서


• "우행(牛行), 내 길을 걷다" (2017)- 이상 384p
• "호랑이는 굶주려도 풀을 먹지 않는다" (1997)- 새로운사람들 652p
• "한국야당사" (1987)- 백실서당간 381p

9. 어록


"민주 회복만이 시대와 국민의 명령이다." (1979)
"야당에 선명성은 선택이 아니다." (1982)
"야권 통합과 화합만이 민주화의 올바른 여정이다." (1987)
"민주화는 누구의 훈장이 아니다. 국민의 승리이다." (1987)
"정치는 권력이 아닌 자기 희생이다." (1990)
"타도 대상과 하루 아침에 동지가 될 수는 없다. 그걸 배신이라고 한다." (1991)
"정치 지도자는 시대와 국민에 선택되어지는 임시직." (1992)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광주는 희생 당했다." (1994)
"미래, 아이들과 청년들을 생각하지 않는 정치는 권력에 불과하다." (1995)
"한반도, 한민족이 인류사의 기적이다." (1998)
"정치권력이 지역감정을 이용하는 것은 역사적 죄로 남을 것이다." (1999)
"선거의 낙선은 정치공학의 문제가 아니다. 오롯이 나의 모자람이다." (2001)
"역사를 부정하고 탓하는 정치는 어떤 미래도 그리지 못한다. 정치는 미래 담론이다." (2003)
"누가 분노에 불을 지르는지 지켜볼 일이다. 분노를 일으키는 정치 세력은 권력만 추구하는 이들이다. 분노는 절대로 정치의 함수가 아니다." (2003)
"위민(爲民)이 바로 정치다." (2006)
"과거만 이야기하는 정치는 선동일 뿐이다." (2005)
"국민에 분노를 심고 이를 통해 표를 얻는 정치가 가장 하류 정치이다." (2007)
"정치가 생계인 이들, 이념이 직업인 이들이 바른 정치,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할리가 없다." (2008)
"학생운동이 정권을 바꾼 4.19는 세계에서 전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2009)
"평생을 정치에 몸 담았지만, 국민은 언제나 옳았다는 사실에 전율하게 된다." (2011)
"정치는 국민이 잠시 위탁한 책임이고 소명이다. 정치인들이 그것을 권력으로 착각하는 순간까지 국민은 알고 있다." (2013)
"시류는 끊임없이 변한다. 일시적인 시류에 편승해 오만해진 정권은 결국 역사에 성공한 정권으로 남을 수 없는 법이다." (2015)
"(4.19 세대로서) 무한한 자긍심을 느끼며 내 삶의 동력으로 삼아왔지만 한편으로 무거운 짐이자 빚이었다. 평생 그 빚을 갚는다고 애썼지만 얼마나 갚았는지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 (2016)

[1] 당시 잔류파 중 지명도나 정치 경력 등 모든 면에서 넘버원이었다.[2] 당시 한겨레신문의 박재동 화백은 '한겨레그림판'에서 '로보트 야권V'라는 제목 하에 김대중과 이기택을 각각 로보트 태권V로 형상화하여 손을 잡은 모습을 그리고, 이에 놀란 김영삼을 괴물로 그려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 김대중과 이기택의 연합은 많은 사람들에게 청량감을 준 소식이었기 때문에, '로보트 야권V'라는 만평은 대단한 칭찬을 받았다.[3] 이때부터 부산에서 노무현은 4번, 김정길은 총 7번을 떨어졌으나, 김정길은 장관이 되었고 노무현은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4] 즉 지역구 당선 가능성을 보고 간을 보다가 지역감정으로 안 될 거 같으니 전국구로 도망간 거 아니냐는 비아냥이다. 실제 당대표이자 영남권에서 가장 정치 경력도 길고 지명도가 높은 이기택이 지역구 출마를 주저하면서 민주당의 영남권 선거 전략이 꼬인 건 사실이다. 결국 노무현, 김정길과 몇몇 정치 지망생들이 각개전투에 나서는 모양새가 되면서 모조리 낙선하였다. 그러나 뭘하던 당시 부산에서 김영삼을 넘기는 힘들었고, 야당의 양대 축이 합당한 상황에서 당대표가 개인적 정치 승부수는 띄우기가 무리이기도 했다.[5] 당시에도 영호남을 분할한 양김 시대가 이어지며 양김은 이기택의 급부상을 절대적으로 막았다는 평가. 당시 차세대 주자로서 이기택의 부상은 김영삼에게는 PK 정치적 기반의 붕괴였고, 김대중의 정계 복귀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6] 이때 김대중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대북특사 파견을 주장했는데, 이게 실제로 성사되면서 주가를 높였다.[7] 명단을 보면 알겠지만 모든 정치권이나 재야 민주화 운동, 시민운동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평범한 국회의원급은 뛰어넘는 지명도를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다. 이 때문에 당시 통합민주당은 스타 군단으로 불렸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게 마련.[8] 당시 정치적 지지 기반인 부산경남을 사수하기 위해 김영삼은 여당의 화력을 집중했다.[9] 서울특별시 지역에서는 양천구의 서경석 목사를 비롯한 쟁쟁한 후보들을 내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강동구 갑의 이부영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낙선을 면치 못했고, 거의 전지역 3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기대했던 부산광역시에서는 전원 낙선이었다. 그나마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몇 개의 의석을 건지긴 했으나, 김영삼의 신한국당이 과반수 확보를 위해 황규선(이천시), 이규택(여주군), 최욱철(강릉시 갑) 등의 당선자 빼가기에 나서면서 폭망 확정.[10] 게다가 상대가 포항의 경제를 쥐고 있는 포항제철의 창립자이니 이건 처음부터 안되는 싸움이었다.[11] 이때 조순, 이부영, 김부겸, 이철과 제정구는 이기택을 따라 한나라당으로 갔다. 그러나 노무현, 김정길, 김원기는 이기택과 결별하고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로 합류하였다.[12] 부산상고 후배이고, 민주당을 함께 창당하기도 했으며, 노무현 초기 측근들이 이기택계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13] 고려대 상대 후배이고, 고향(포항) 후배이기도 하다[14] 장례식 모습: http://m.blog.naver.com/binnie06/221122354264[15] 영결식 모습: http://m.blog.naver.com/binnie06/221122869297[16] "전두환이 4·13 호헌 조치로 군사정부 유지를 시도하자 이기택 총재는 호헌 철회를 요구하며 15일 동안 곡기를 끊었습니다. 노태우 후보의 6,29 선언, 즉 직선제 수용을 이끌어낸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SBS) #[17] 한 예로 야당 대표 시절에는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선거 공천을 하면서 명분이나 당선 가능성보다는 계보나 인맥 위주의 공천을 하여 생각보다 작은 그릇을 보여주었다.[18] 사실상 대통령 노무현을 만든 초기 친노 보좌진 멤버 중 조광한, 윤태영 등 다수가 이기택이 육성한 북아현동 사단이 주축을 이룬다.[19] 실제 참여정부 시기 원로 역할은 이기택과 동갑인 김원기에게 주어졌는데, 정치 경력이나 중량감 등에서 이기택이 앞선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므로 이기택이 민주당 간판을 지키다 노무현에게 합류했다면 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20] "故 이기택 회고록 '우행' 출판기념회에 옛 동지들 대거 출동 (연합뉴스)" #[21] 2018년 기준.[22] 부산 동래구 을[23] 1972.10.17 자격박탈
(10월 유신)
[24] 부산 동래구[25] 1990년 탈당
(3당합당 반대)
[26] 전임자 허화평 12.12 군사반란으로 피선거권 상실[27] 신민주연합당과 신설 합당[28] 개혁신당과 신설 합당[29] 신한국당과 신설 합당[30] 노무현 대통령 후보 지지 선언[31] 이명박 대통령 후보 지지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