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섭

 



''' 자유민주연합 원내총무 '''
제5대
이긍규

제6대
''' 오장섭 '''

제7대
이양희
[image]
1947년 3월 26일 ~
1. 개요
2. 가족관계
3.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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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吳長燮
대한민국의 전 기업인, 정치인이다.
1947년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면(현 삽교읍)에서 태어났다. 예산농업고등학교(현 공주대학교 예산캠퍼스),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대산건설을 경영하였다. 한편 대한청년회의소 등의 단체에 몸담았으며 오성장학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88년 민주정의당 중앙위원에 임명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충청남도 예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통일국민당 박병선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같은 해 민주자유당 부대변인에 임명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연합 조종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조종석의 당선 무효로 치러진 1997년 재보궐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고향 선배라는 점에서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이회창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1998년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제15대 대통령 선거 직후의 대산건설 부도에 따라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였다고 하며 한편으로 이회창은 오장섭에게 배신감을 느꼈다고 하였다. 회고록에서도 이를 특히 언급했을 정도.
위의 이야기가 일반적인 겉으로 들어난 이유로 알고 있는데 이에 대해 오장섭 의원의 뒷 이야기 인터뷰가 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당시 JP의 당이었던 자민련은 DJ가 아니라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기로 하고 JP와 오장섭 의원 사이에서 이야기가 끝난 상황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한나라당에서 몇몇 당직자들이 이를 반대하였고 이로 인해 JP가 낙동강 오리알이 될 수 있는 상황에 직면 당시 상황에 책임을 지는 모습으로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자민련으로 가게 된 것이다. 사실 이때 DJP 연합은 김대중 당시 후보를 일명 '빨갱이론'에서 자유롭게 해줬고 망설이는 표의 결집의 강화까지 가져왔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이런 모든 점을 생각해 보았을때 JP를 이회창 후보가 잡았다면 선거에서 이겼다고 밖에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는 오장섭 의원의 변명으로 봐야 한다. 오장섭 의원이 당선된 1997년 7.24 재보궐 당시 이미 DJP연합은 가시권에 들어선 상태였고 反신한국당 전선으로 여러 재보궐에서 비공식적인 연합 공천이 이뤄지고 있었다. 당장 7.24 재보궐선거 해당 선거구 2개에서 새정치국민회의는 양쪽 모두 후보를 내지 않고 예산에서는 자민련 조종석 후보를, 포항에서는 자민련의 지원을 받는 무소속 박태준 후보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회창이 1998년에 자당을 탈당한 많은 의원들 중 유독 오장섭에게 섭섭해한 이유는 오장섭이 사실상 '''이회창 버프'''로 당선된 사람이었기 때문. 자민련 본진인 충남 한복판 예산에서 오장섭이 신한국당 타이틀로 당선된 이유 중 하나가 당시 막 신한국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이회창때문이었다. 이회창의 선영이 '''예산'''이었던지라 예산에서 이회창 버프가 매우 컸기 때문.[1]
실제 오장섭은 한나라당 탈당 및 자민련 입당 당시 '''상황변화론'''이라는 논리를 꺼냈는데, (1997년 재보궐 당시에는) 3김정치 타파의 대의명분하에 자민련을 공격했지만, (3김 중 하나인)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1년 초까지 자유민주연합 원내총무를 역임하였다. 2001년 3월부터 8월까지는 DJP 연합의 몫으로서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이후 같은 해부터 2002년까지 자유민주연합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민주연합을 탈당하여 한나라당에 복당하려 하였으나 입당 보류 조치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 한나라당의 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가 이회창 아니던가?(...) 이회창은 예전의 원한을 결코 잊지 않았다.(...) 실제 같이 탈당한 자민련 의원들은 모두 한나라당이 입당을 허가한 거 보면 이회창의 원한이 매우 컸다고밖에...
결국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남도 홍성군-예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홍문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안습했던게, 원래 지역구인 예산이 인구 감소로 홍성과 선거구 통합이 된데다 자민련 탈당 및 한나라당 입당 거부로 정당 버프도 못받았은 지라 예산에서는 1위를 차지했지만 홍성에서 겨우 3.78% 득표하며 망했다.(...)

2. 가족관계


아내 인계선 여사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예산)
'''민주자유당'''
'''35,834 (60.03%)'''
'''당선 (1위)'''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예산)
신한국당
23,090 (41.39%)
낙선 (2위)

1997
1997년 7.24 재보궐선거 (15대 국회 충남 예산)[2]
'''신한국당'''
'''26,608 (53.34%)'''
'''당선 (1위)'''
[3]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예산)
'''자유민주연합'''
'''26,738 (55.45%)'''
'''당선 (1위)'''
[4]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홍성·예산)
무소속
15,397 (18.50%)
낙선 (4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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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회창은 후일 2017년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도 탈당 의원들 명단을 덤덤히 적어나가면서도 오장섭에 대해서는 '''특히 충격이 컸다'''고 따로 언급하기도 했다.[2] 전임자 조종석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당선 무효[3] 1998.5.2 탈당, 5.5 자유민주연합 입당[4] 2002.11.14 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