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하

 

새정치국민회의 원내총무
창당

제1대
신기하


제2대
박상천
[image]
辛基夏
1941년 4월 27일 ~ 1997년 8월 6일
1. 개요
2. 선거 이력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변호사, 정치인이다.
1941년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송암리#에서 태어났다. 조선대학교부속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 전남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전남대학교 2학년 때인 1960년 4.19 혁명에 참여하였다. 1961년 전남대학교 민족통일연구회 회장으로 통일운동을 주도하다 5.16 군사정변으로 3개월간 구속되면서 제적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다행히 동년 9월에 복학할 수 있었다.
8년 후 1969년 제10회 사법시험에 합격, 1974년 육군 대위(법무관)로 예편해 그 해 광주지방법원 판사를 거쳐 1980년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약칭 민추협) 운영위원회 위원으로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인권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순직한 개그맨 심현섭의 아버지 심상우 민주정의당 총재비서실장의 선거구였던 전라남도 광주시 동구-북구 선거구에 신한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고귀남 후보와 동반 당선되어 정계 입문. 하지만 이후에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등에서 학생들을 변호하고 통일 문제를 연구해 관련 저서를 내는 등 인권 및 통일 문제의 해결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이후 평화민주당, 민주당,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제13대, 14대, 15대(광주 동구)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민주당 때는 이기택 대표최고위원 체제 하에서 원내총무를 역임하였다.
  • 국민회의에서 활동할 당시[1]
초선 당시만 하더라도 선량한 학자 같은 분위기에 수줍음 많은 성격으로 주변에서 과연 정계에서 잘 헤쳐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학자의 탐구열로 사회복지와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갖고 파고들어 전문가가 되었으며, 이후 13·14·15대까지 4선을 연임하면서,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후에는 당의 총무로 발탁됐고, 만일 DJ가 대통령이 된다면 다음 대통령 후보는 신기하일 것이라는 덕담이 나올만큼 기량과 경륜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1997년 8월 5일부터 8월 11일까지 6박7일 일정으로 괌에서 지구당 당직자 해외 연수를 갖기 위해서 부인 김정숙 여사 및 24명의 당원들과 함께 으로 떠났다가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로 인해 향년 57세로 사망했다. 게다가 신기하가 사망한 이후 어머니도 충격을 받아서 식음을 전폐하다가 뒤따라 세상을 떠났고, 신한국당 국회의원들이 사고현장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해 큰 파문이 일기도 하였다.
여담이지만, 신기하를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의 목격담에 의하면, 신기하는 생전에 키가 160cm[2]밖에 안 되는 단신이었다고 한다.

2. 선거 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광주 동구·북구)
신한민주당
96,449 (44.19%)
당선 (1위)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광주 동구)
평화민주당
78,093 (88.05%)
당선 (1위)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광주 동구)
민주당
51,804 (62.74%)
당선 (1위)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광주 동구)
새정치국민회의
58,673 (89.90%)
당선 (1위)
[3]

[1] 1996년 9월 13일 노원구 구청장 재선거 때 당선된 김용채 자유민주연합 후보가 새정치국민회의 당사를 방문했을 때. 맨 좌측이 신기하 의원. 김대중 총재와 악수하고 있는 사람이 김용채 구청장 당선인. 여담으로 이 노원구청장 재선거는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최초로 후보단일화를 한 경우로, 이것이 15대 대선DJP연합으로 발전한다. * 사진출처 : 중앙일보 포토[2] 국민회의에서 활동할 당시 사진을 보면 김대중보다는 확실히 차이가 많이 나게 작은 걸 알 수 있다.[3] 1997.8.6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