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image]
후보자들의 선거 벽보

1992년 12월 18일
14대 대선

1997년 12월 18일
'''15대 대선'''

2002년 12월 19일
16대 대선
}}}
'''투표율'''
80.7%▼ 1.2%p
'''선거 결과'''
'''후보'''
'''한나라당''']]
'''이회창'''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국민신당''']]
'''이인제'''
'''득표율'''

38.7%
'''40.3%'''
19.2%
'''득표수'''
9,935,718
'''10,326,275'''
4,925,591
'''당선인'''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1. 개요
2. 배경
3. 과정
3.1. 국민회의-자민련의 출발
3.3.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의혹
3.4. 이인제의 독자 출마
3.5. DJP연합과 이회창-조순
3.6. 본선
4. 결과
4.1. 총 득표수
4.2. 주요 후보의 지역별 득표수와 득표율
4.3. 대선 격전 지역
5. 평가
5.1. 이인제 효과로 보수 표가 분산되어 김대중이 승리한 것이라 보는 관점
5.2. 이인제 효과가 이회창의 표만 흡수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는 관점
5.3. 보수 단일후보의 등장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관점
6. 선거 예측 조사
7. 선거 관련 논란
7.1. 되풀이된 지역감정, 편파보도
7.2. 대선 후보들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 논란
8. 특이사항

[clearfix]

1. 개요


'''환호하는 김대중 당선자'''
'''당선 확정을 알리는 기사'''

'''대통령 취임 영상'''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로 1997년 12월 18일에 실시되어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여당의 이회창 후보를 득표율 1.6%, 표차 39만 557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따돌리고 당선되었다. 대한민국 헌정사 50년 만에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가 성립된 선거이다. 여당의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회창에게 패한 이인제가 독자 출마하여 여당 지지 표가 분열된 것이 김대중 후보의 승리의 주요 요인 중 하나였는데, 따라서 이는 2005년 공직선거법이 개정되어 당내 경선에서 패한 후보가 불복하고 독자 출마하는 것을 금지하는 이른바 '이인제 방지법'이 생겨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2. 배경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에게 패배한 김대중 당시 민주당 총재는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은퇴했으나, 주변 인물들의 지속적인 권유로 1995년 6월 민주당의 지방 선거를 지원하며 정계에 복귀한다. 이 후 김대중은 9월 민주당을 탈당한 인물들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여 야권계의 대권 주자로 떠올랐다. 물론 4번째 도전이었기에 논란도 있었으며 대통령병에 걸린 사람이라는 조롱도 듣게 되었지만, 김대중이라는 이름값과 경력이 죽지 않아 야권의 대권 주자로 이름을 굳히기 시작했다.
반면 신한국당의 상황은 심각했다. 1996년 하반기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와 1997년 한보사태, 김현철 사태, IMF 사태 등으로 문민정부는 레임덕에 빠져 국민들의 신임을 잃고 있었고, 김영삼 前 대통령의 지지율은 5%까지 추락했다. 이는 당연히 여당이었던 신한국당의 지지율에도 큰 영향을 미치며 국민들은 정권 심판의 주장을 높였다.

3. 과정



3.1. 국민회의-자민련의 출발


이 대선을 앞두고 가장 먼저 후보로 결정된 사람은 바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인데, 1997년 5월 19일 서울 잠실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대선후보 경선에서 정대철 부총재를 득표율 77.5%로 이기고 무난히 대선 후보가 됐다. 한편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6월 24일 경선대회에서 득표율 82.3%로 한영수 부총재를 이기고 대통령 후보로 결정됐다.

3.2. 신한국당의 경선


신한국당김영삼 대한민국 대통령이 엄정 중립을 선언한 가운데 집권 여당으로서는 사실상 처음으로 대통령 후보 경선을 실시했다.[1] 당시 신한국당 내부에서는 이른바 '9룡'이라 하여 김영삼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이회창, 이홍구, 이수성, 민주계의 최형우, 김덕룡, 이인제, 민정계의 김윤환, 이한동,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150만 표를 득표한 적이 있던 박찬종이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에서 내무부 장관을 지내면서 1995년 행정구역 개편을 실행하는 등 실력자로 통했던 최형우가 1997년 3월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경선에 나서지 못했고, 김윤환도 "차기 대통령은 TK가 아니어야 한다"고 후보 등록을 포기했다. 대신 민정계 중진인 최병렬김종호가 경선 참여 선언을 했다. 경선 과정에서는 후보 줄세우기 등의 논란이 계속되면서 당내 기반이 약했던 박찬종, 이홍구가 경선 자격을 중도 반납했고, 김종호도 중도 사퇴해 최종적으로는 6인이 경선을 치렀다.
여튼 저 9(-3)명의 각축전 때문인지 경선 열기만큼은 대체로 '김대중으로 대동단결'하는 분위기로 정리 가능한(하지만 하술할 DJP 연합의 파장이...) 새정치국민회의보다 높았던 듯 하다. 신문 만평에서도 마침 히트 사극인 용의 눈물을 패러디한 경선 상황을 풍자한 만평들이 날마다 실릴 정도. 다른 신문 만평도 사극 패러디 만평을 제법 내놓았지만 당시 경향신문에 있던 김상택이 주로 이런 풍자 구도를 써먹었다. 당시 이회창에 반대하는 주자들 간 연대 움직임이 강화되는 중에 6월 25일, 反이회창파 6인 경선 주자 및 '정치발전협의회(정발협)' 대표가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이회창 대표 사퇴를 촉구했다. 이러한 '反이회창' 움직임으로 동월 27일 이 대표가 대선 출마를 선언한 후 7월 1일 대표직을 사퇴했다. 그 뒤 당내 경선 판도는 '이회창 대세론' 속에서도 이인제 前 경기도지사가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결국 7월 21일 실시된 경선에서 '''이회창이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인제가 2위를 기록하며 결선에 진출하는[2] 파란을 일으켰으나, 대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김윤환을 중심으로 한 민정계가 단합하여 이회창을 지지한 반면 민주계는 이인제, 김덕룡, 이수성 지지파로 분열한 것이 이회창 승리의 배경으로 분석되었다. 이때만 해도 이회창의 당선이 유력해 보였다.

3.3.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의혹


그런데 이회창이 신한국당 대선 후보가 된 후, '''이회창의 아들 두 명이 모두 체중 미달 사유로 병역 면제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회창은 부정하게 병역을 면제받은 사실이 없다고 항변했으나, 둘째 아들의 병적 기록표에 부모가 아닌 백부, 백모가 기재되어 있는 등 석연찮은 정황이 계속 발견되자 국민 여론은 차갑게 돌아섰고 급기야 이회창의 지지율은 '''10%대로 폭락'''한다. 이에 이인제는 공개적으로 후보 교체를 주장했으나, 결국 바뀌지 않았다.

3.4. 이인제의 독자 출마


이인제는 9월 13일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대선에 독자 출마한다고 선언한다.[3][4] 그 후 김영삼의 최측근이었던 서석재를 포함해 이인제를 지지하는 인사들이 속속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을 창당하여 이인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한다.
10월 20일 동아일보 여론조사에 의하면 이 당시 지지율은 김대중 32.3%, 이회창 16.6%[5], 이인제 24.9%, 조순 4.7%, 김종필 2.9%였다.


3.5. DJP연합과 이회창-조순


10월 26일, 자유민주연합 총재 김종필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 김대중과 손을 잡는다.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김종필을 국무총리로 지명하고,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함께 내각을 구성하는 등 공동 정부를 운영한다'''는 데 합의한 것. 그 후 민주자유당 시절 민정계의 수장이었던 박태준도 여기에 합류한다. 이로써 김대중은 충청도 지역의 지지를 얻음과 동시에 김종필, 박태준을 통해 '빨갱이가 아님'을 보장받아 보수 세력의 거부감을 누그러뜨릴 수 있게 되었다.
반면, 대선 국면에서 입지가 어려워진 이기택 민주당 총재가 8월 8일 조순 서울시장에게 대통령 후보 및 총재직을 제안했고, 조 시장이 이에 화답하자 민주당은 조순을 총재 및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그러나 초기 기세와는 달리 10월 들어 4.7%로 하락하면서 그는 "건전한 세력과 연대키 위해 마음을 비웠다"며 후보 사퇴를 시사했다. 이에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도 "3김 청산 원칙에 뜻을 같이 한다면 합당도 고려 가능하다" 하여 후보 단일화가 성사됐다. 이회창은 조순 지지자들을 흡수하면서 지지율이 단번에 2~3배로 뛰어 올랐으며, 11월 7일 양당 총재가 만나 합당에 합의 후 21일 대전 충무체육관 합당대회에서 새 통합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정한 후 대통령 후보에 이회창, 총재에 조순을 선출함으로써 이회창-이인제-김대중 3자 구도가 형성됐다.
이회창-조순, DJ-JP 단일화 직후의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11월 10일 한겨레신문에서 김대중 35.3%, 이회창 21%, 이인제 28.1% 순이었고, 11월 25일 한국일보에선 김대중 32.1%, 이회창 31.5%, 이인제 19.9% 순이었다.

3.6. 본선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3인으로 최종 후보가 압축됨으로써 천하삼분지계가 완성되었으며, 기본 쟁점은 정권 교체/3김 청산, 세대 교체로 압축됐다. 김대중 후보는 전부터 내걸었던 '수평적 정권 교체론'과 자민련의 '내각제를 위한 정권 교체론'을 접목해 '정권 교체'를 캐치프레이즈로 삼았고, 이회창은 내각제를 "3김 시대 연장을 위한 야합의 도구"로 간주해 '3김 청산'을, 이인제는 "한나라당도 3김 정치 유산에 따른 수구 정당이며 내각제에 동조할 세력"이라 하여 '세대교체'를 각각 내걸었다. 여기에 이회창 후보 아들 병역 문제, 1992년 대선 때 YS 대선자금 및 DJ 비자금, 그리고 11월 외환위기 문제가 대선 정국을 뜨겁게 달군 공방거리였다.
더군다나 8월 15일 오익제 前 천도교 교령 밀입북 사건으로 김대중 후보의 색깔론 시비가 터졌으며, 북한 김병식-김장수 등 편지 사건으로 '북풍 조작' 논란도 나왔다. 더군다나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도 김영삼 대통령과 한동안 갈등을 빚어 여당 프리미엄을 행사하지 못했고, 9월 30일 이회창이 김영삼 대신 신한국당 총재가 됐으나 그 뒷편에는 갈등이 많았다. 한동안 여론조사 결과는 김대중 1위, 이인제 2위, 이회창 3위로 나왔으나, 보수 표심이 차차 결집되면서 이회창이 2위로 치고 올라왔다. 이 때 나온 말이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된다'라는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네거티브 구호.[6] . TV 토론에서 이인제는 이 말을 언급하면서 '이인제를 찍으면, 이인제가 됩니다' 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7].
이회창 후보는 강삼재 사무총장 등을 통해 김대중 후보의 비자금 문제를 터뜨리려 했으나 제14대 대통령 선거 비자금 문제도 함께 건드리는 바람에 10월 21일 검찰이 선거 중립을 고려해 수사를 유보했다. 이에 이회창 후보는 10월 22일 기자회견에서 비자금 수사 유보가 YS-DJ 밀약 때문이었다고 판단해 DJ 비자금 수사를 요청했다. 이러한 갈등은 11월 6일 포항 신한국당 경북지역 필승 결의대회에서 김영삼을 상징하는 'YS 마스코트'를 몽둥이로 내리쳐 파문이 일었고, 하루 뒤 김영삼이 신한국당을 탈당하면서 갈등이 정점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 외환위기가 닥치고 11월 21일 정부가 IMF 구제금융 신청을 발표했고, 12월 3일 IMF 협상으로 새 국면을 맞았다. 외환위기 및 경제 파탄 책임문제를 두고 대선 후보들 사이에 열띤 공방전이 벌어졌으며, 김대중 후보의 IMF 재협상론이 나옴으로써 공방전이 더 치열하게 전개됐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국가경제 파탄 원인은 김영삼 정부와 이에 관여해 혜택받은 이회창과 한나라당이었다"고 하며 집권 뒤 경제 청문회를 열겠다고 했다. 이에 이회창이 "김 후보가 IMF 재협상을 주장해서 외환위기가 더 심화됐다"고 물고 늘어졌다. 이인제도 이에 맞서 처음엔 재협상론을 주장하다 다단계 협상론으로 바꾸기도 했다.
출구 조사에서는 이회창이 조금 뒤쳐지는 것으로 나왔지만 초반 개표에서는 예상과 다르게 이회창이 앞서는 것으로 나왔는데, 수도권 지역과 호남지역의 개표율이 올라가고 나서는 득표율 격차가 조금씩 좁혀지기 시작했고 저녁 8시 반부터 10시까지 격차가 좁혀지며 1, 2위가 바뀌는 경합 양상을 보였다. 밤 10시를 기해 개표율이 올라가는 과정에서 김대중 후보의 1.5-2.0%차의 우세가 지속적으로 이어졌고 개표율이 올라가는 과정에서 표 차이도 커지면서 승리를 확정지었다. 최종 결과는 불과 390,557표 차로 김대중의 '''아슬아슬한''' 승리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14년 뒤, 이회창과 이인제는 자유선진당이라는 한 지붕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총선 패배 후 다시 이합집산해 새누리당에서 또 만나버리지만(…)

4. 결과



4.1. 총 득표수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기호'''
'''후보명'''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선여부'''
1
이회창
''' '''

9,935,718
38.7%
2
낙선
'''2'''
'''김대중'''

'''10,326,275'''
'''40.3%'''
'''1'''
'''당선'''
3
이인제

4,925,591
19.2%
3
낙선
4
권영길

306,026
1.2%
4
낙선
5
허경영

39,055
0.2%
7
낙선
6
김한식

48,717
0.2%
6
낙선
7
신정일

61,056
0.2%
5
낙선
선거인수
32,290,416
투표수
26,042,633
무효표수
400,195
투표율
80.7%

4.2. 주요 후보의 지역별 득표수와 득표율


[image]
[8]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지역별 개표 결과'''
지역
'''한나라당
이회창'''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국민신당
이인제'''
전국
9,935,718
(38.7%)
'''10,326,275
(40.3%)'''
4,925,591
(19.2%)
서울
2,394,309
(40.9%)
'''2,627,308
(44.9%)'''
747,856
(12.8%)
인천
470,560
(36.4%)
'''497,839
(38.5%)'''
297,739
(23.0%)
경기
1,612,108
(35.5%)
'''1,781,577
(39.3%)'''
1,071,704
(23.6%)
강원
'''358,921
(43.2%)'''
197,438
(23.8%)
257,140
(30.9%)
대전
199,266
(29.2%)
'''307,493
(45.0%)'''
164,374
(24.1%)
충남
235,457
(23.5%)
'''483,093
(48.3%)'''
261,802
(26.1%)
충북
243,210
(30.8%)
'''295,666
(37.4%)'''
232,254
(29.4%)
부산
'''1,117,069
(53.3%)'''
320,178
(15.3%)
623,756
(29.8%)
울산
'''268,998
(51.4%)'''
80,751
(15.4%)
139,824
(26.7%)
대구
'''965,907
(72.7%)'''
166,576
(12.5%)
173,649
(13.1%)
경남
'''908,808
(55.1%)'''
182,102
(11.0%)
'''515,869
(31.3%)'''
경북
'''953,360
(61.9%)'''
210,403
(13.7%)
335,087
(21.8%)
광주
13,294
(1.7%)
'''754,159
(97.3%)'''
5,181
(0.7%)
전남
41,534
(3.2%)
'''1,231,726
(94.6%)'''
18,305
(1.4%)
전북
53,124
(4.5%)
'''1,078,957
(92.3%)'''
25,037
(2.1%)
제주
100,103
(36.6%)
'''111,009
(40.6%)'''
56,104
(20.5%)
김대중 후보는 서울, 경기, 호남과 충청권과 제주에서 모두 승리를 거뒀다. 충청권의 지지를 얻은 대표적인 이유는 DJP 연합으로 인한 충청 유권자들의 지지를 흡수했기 때문이다. 반면 이회창 후보는 전통적인 보수 정당 지지 지역인 경북, 경남과 강원에서만 1위를 얻는 데 그쳤다. 심지어 본인이 본적지로 둔 충남에서는 2위도 아니고 '''3위'''를 하는 굴욕을 맛봤다.[9]
다만 이회창 후보와 이인제 후보 표차를 합치면 서울, 경기와 충청권에서도 보수진영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했지만, 국민신당 영향으로 표가 분열되어서 김대중 후보가 1위를 차지했다.

4.3. 대선 격전 지역


비록 지역주의가 강하게 자리잡혀 있었지만 그래도 1.6% 차 초박빙 접전이었던 만큼 1, 2위 후보 간 표 차가 적게 나서 치열했던 접전 지역이 매우 많았다. 시, 군, 구 단위로 살폈을 때 1, 2위 간 표 차가 1,000표 미만이었던 지역은 다음과 같다.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101표김대중
  • 경기도 의정부시 - 117표이회창
  • 충청북도 영동군 - 196표이회창[10]
  • 경기도 이천시 - 215표이회창[11]
  • 강원도 철원군 - 440표이회창[12]
  • 서울특별시 강서구 을 - 455표김대중
  • 서울특별시 용산구 - 564표이회창
  • 강원도 양구군 - 637표이회창[13]
  • 강원도 인제군 - 638표이회창[14]
  • 강원도 횡성군 - 676표이회창[15]
  • 인천광역시 남구 갑 - 821표이회창
  • 강원도 화천군 - 875표이회창[16]
  • 서울특별시 노원구 을 - 893표김대중
이상 13곳이 이번 대선 격전지였고 이 중 10곳에서 이회창이 승리했으나 끝내 대권은 김대중이 차지했다. 이로 볼 때 이회창이 승리한 곳에선 적은 표 차로 이겼으나 패배한 곳에서 왕창 패하는 바람에 벌어진 결과로 보인다.

5. 평가


'''"준비된 대통령"'''을 내세운 김대중의 중도 안정 전략의 승리였다. 처음 실시된 TV토론 역시 DJ의 지지율을 높이는 데 한몫 했다. 반면, 이회창 측은 "깨끗한 정치, 튼튼한 경제" "3김 정치 해소" 등 아무리 봐도 야당에게나 어울릴 법한 구호를 내세웠고, 1988년 당시의 조지 H. W. 부시의 선거전처럼 강력한 네거티브 전략을 펼쳤다. 재야 현대사학자 임영태는 저서 <대한민국 50년사> 2권에서 "관권 시비 및 금품 살포 시비가 없어 비교적 깨끗이 치러졌다"고 평했으며, 대선 후보 TV 토론 본격화로 종전의 세몰이식 군중 집회에서 정책 대결 및 후보자들의 면면에 대한 국민 스스로의 판단을 중시하는 풍토로 바꿨다고도 했다.
이 정권 교체는 1961년 이후 36년만의 여야 교체에 해당한다. 그러나 1961년의 정권 교체는 5.16 군사정변의 결과였고 1960년의 정권 교체는 전국적인 시위로 사상자까지 나온 4.19 혁명의 결과였기 때문에,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평화롭고 민주적인 정권교체''''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경우도 있으며, 임영태처럼 "김대중 당선은 국민 전체의 영광이며, 한국 민주주의가 본 궤도에 들어선 커다란 진전이었다"는 식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49년, 근 반세기만의 일'''이었다. 또한 90년대를 풍미했던 소위 3김시대의 끝물을 장식한 대선으로, 이후 대선부터는 포스트 3김을 자처하는 새로운 유력 정치인들이 부상하기 시작한다.
이 선거 결과에 대하여 이인제의 독자 출마로 인한 보수표의 분열이 김대중의 당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주장과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고 보는 주장이 있다. 양측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5.1. 이인제 효과로 보수 표가 분산되어 김대중이 승리한 것이라 보는 관점


이런 관점을 취하는 보수 우파 진영에서는 해당 선거를 매우 안타까운 선거라고 보며, 이런 관점을 취하는 진보 좌파 진영에서는 해당 선거를 고마워요 이인제라고 본다. 왜냐하면 김대중이 39만표 차이로 이겼지만, 이것은 이인제 독자 출마로 인한 경상도 표가 분열된 반면 DJP연합으로 인해 충청도 표가 김대중으로 심히 휩쓸렸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때 자민련이랑 신한국당 같은 보수 진영이 제18대 대통령 선거 때처럼 합쳤으면, 제 아무리 정치 10단인 김대중이라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화 진영이 김영삼과 김대중으로 갈라져 노태우가 승리했다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보수 진영이 이회창과 이인제로 분열됨으로써 김대중 당선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의 야권후보 단일화 실패 과정에 대해서는 항목을 참조할 것.

5.2. 이인제 효과가 이회창의 표만 흡수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는 관점


15대 대선에서 보수정당 패배의 원인이 '보수 후보 분열' 에 있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라는 반론 역시 적지 않다. 일단 이 주장의 가장 기본적인 논점은 '이인제가 이회창 표를 갈라먹어서 이회창이 패배했다'는 데 있는데... 위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이인제가 이회창 표를 주로 잠식했다고 볼 근거가 없다. 오히려 같은 민주화 운동 출신이란 특성상 김대중의 노장 이미지나 DJP 연합에 실망을 느낀 민주계 지지자들의 표가 오히려 제 3후보인 이인제로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는 반론이 가능한 것. 6공 초기 정치 세력의 세력구도가 형성된 13대 대선 당시의 구도와 비교해 보면 (김대중, 김종필은 그대로고) 노태우가 차지하던 위치를 대체한 것이 민정계의 지지를 받던 이회창이고, 김영삼이 차지한 위치를 이어받은 것이 민주계가 지지한 이인제라고 분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같은 기반의 표를 갈라먹는다는 분석은 김대중-이인제 사이에서나 성립 가능하지, 이인제-이회창 사이에서 나올 분석이 아니다.

그리고 1990년대에는 여촌야도가 상대적으로 희미해지고 영남, 호남, 충청에 이르는 지방에서는 세대별로 정치 성향이 동조화되면서 별로 주목받지 못해서 그렇지, 실상 당대에도 청년층일수록 민주당계 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하고, 장노년층에서는 보수계 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한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여론조사를 살펴볼 때 김대중이 청년층에게 생각보다 많은 표를 얻지 못한 반면에 이인제가 중장년층보다 청년층에게 인기가 상대적으로 높았던 인물이었고, 이회창은 청년층에게 인기가 적었고 장노년층으로 갈수록 인기가 많았는데 이 점에 있어서 DJ 표도 어느 정도 잠식했다는 점도 일리는 있는 것이다.[17]

5.3. 보수 단일후보의 등장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관점


그렇다면 반대로 이인제가 신한국당 후보로 단독 출마했다고 가정한다면? 이 경우 이인제가 보수표+민주계 중도 유권자 표 일부를 독식하여 여유있게 승리했을 것이라는 가정도 있는데, 이게 바로 보수 정당에서 중도 후보를 내놓으면 이탈할 다른 정당이 없는 보수표 전체+중도 후보를 통해 흡수한 중도 유동층표를 통해 승리할 수 있다는 소위 '보수 정당 중도 후보 필승론' 의 한 전형이다. 문제는 이것이 수십년간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정치 공학 모델이긴 한데... 정작 대선급의 큰 선거에서 이 모델을 통해 승리한 사례가 단 한 번도 없다는 것. 대선 등 주요 선거 때마다 비주류 중도 후보는 중도 후보 필승론을 내세워 자신의 경쟁력을 어필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런 중도 후보들은 경선 등 당내 후보 결정 절차조차 뚫지 못했다. 그런데 이인제의 경우에만 중도 후보 필승론을 성공시킬 수 있었으리라고 여길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당장 15대 대선 당시 보수 후보 분열이 패배의 원인이라고 하는 보수층에서도 대부분 '이인제가 나와서 이회창이 졌다'고 말하지 '이회창이 나와서 이인제가 졌다'고 말하지는 않는 것.
이 선거에서 보수 단일 후보의 등장이 가능했는지 자체가 의심스러운 부분이다. 자민련과 신한국당이 힘을 합쳤으면 김대중이라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고 쉽게 말하는데, 자민련이 3당 합당 이후 민자당 대오에서 이탈한 이유는 김영삼의 대선 승리 이후 민주계가 민자당(신한국당)을 완전히 장악하고 민정계와 공화계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즉, '공화계가 민자당을 이탈하지 않는다'가 성립하려면 김영삼 집권기 신한국당(민자당)의 정치적 기조가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는 것. 극단적으로 말해, 김영삼 당선 이후 범 민자계 최대의 정치적 거물이 된 김종필의 지분을 인정하여 그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거나, 하다못해 김종필이 그렇게 원하던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는 정도의 양보는 했어야 할 가능성도 있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공화계의 정치적 지분을 보장함으로써 여당 내의 정치적 지형이 실제 역사와는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 결국 자민련으로 이탈한 공화계가 신한국당에 잔류했을 경우 신한국당(구 민자당)의 정치적 정체성이 전혀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런 맥락을 모두 무시하고 신한국당의 정체성은 그대로인데 자민련(공화계)가 신한국당 대선 후보를 그대로 지지하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은 크게 의미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측면에서 보면 이회창-이인제의 분열 역시 당시 사회의 맥락상 어느 정도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민자당이 3당 합당으로 탄생한 정당인 만큼 당시까지도 당 내에는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정파들이 상당한 갈등 요소들을 가지고 공존하고 있었던 것. 결국 민정계의 지지를 받은 이회창과 민주계의 대표 주자 중 하나였던 이인제의 분열은 상당부분 이러한 정파간 갈등에 기반한 것이고, 따라서 한 후보가 이 양대 정파 모두의 지지를 받는 상황을 가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민정계와 민주계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지 역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15대 대선 당시 범 민자당계 보수가 모두 힘을 합쳤으면 아무리 김대중이라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가정은 서로 상이한 입장과 이해관계를 가진 최소 3개의 정파를 어떻게 모두 납득시켜 아우를 것인지에 대한 설명 없이는 현실적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는 것.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실현 가능성은 차치하고라도 김대중이 절대 못 이기는 상황을 가정하면 김대중은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식의 공허한 말장난일 뿐이다. 19대 대선에 비유해 보자면,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이 힘을 합쳐 한 명의 대선 후보를 밀어주었다면 문재인이라도 그 후보를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그런 후보가 있었다면 문재인 후보를 꺾을 가능성이 실제 19대 대선보다는 훨씬 높아지겠지만 그런 자리에 들어설 수 있는 후보가 없었다. 즉, 현실을 도외시한 무의미한 가정이라는 것.
'보수 분열로 인한 김대중 어부지리 당선설'은 상당 부분 '여당이 대선에서 패배했다'는 상황에 당황한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었다는 점 역시 생각해야 한다. 사실 15대 대선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당이 패배하여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선거라는 것. 따라서 그 당시에는 '야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야당 지도자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6공화국이 수립된 이래로 13대 총선14대 총선,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여당이 패배하여 세가 위축된 적은 있으나 이때에도 어쨌든 1당은 유지했고, 대통령을 내주었다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런 이들이 '여당의 선거 패배'라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현상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던 끝에 '특별한 이유(후보 분열)가 있었기에 패배한 것'이라는 나름의 대답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6. 선거 예측 조사


'''MBC-한국갤럽 예측조사'''
출처(PDF)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기타 후보'''
전체
38.9%
'''39.9%'''
19.7%
1.5%
실제 결과보다
'''-0.2%p '''
'''+0.4%p '''
'''-0.5%p'''
-
세대별
20대
27.9%
'''43.2%'''
24.6%
4.3%
30대
34.8%
'''43.7%'''
20.7%
0.9%
40대
'''44.1%'''
37.2%
17.8%
1.0%
50대 이상
'''51.0%'''
34.2%
14.8%
-
성별
남성
34.1%
'''39.8%'''
23.9%
2.2%
여성
'''43.5%'''
40.0%
15.5%
1.1%
권역별
서울
38.8%
'''46.8%'''
12.4%
2.0%
인천/경기
36.3%
'''40.2%'''
21.8%
1.7%
강원
'''43.7%'''
23.8%
29.7%
2.8%
대전/충청
30.2%
'''39.0%'''
28.8%
2.0%
광주/전라
3.2%
'''94.9%'''
1.6%
0.3%
대구/경북
'''71.2%'''
10.1%
17.8%
0.9%
부산/경남
'''50.9%'''
14.4%
32.7%
1.9%
제주
'''40.8%'''
39.5%
19.7%
-
학력별
초졸 이하
'''43.1%'''
38.0%
18.8%
0.1%
중졸
36.5%
'''45.4%'''
17.4%
0.8%
고졸
37.1%
'''40.3%'''
21.1%
1.4%
대재 이상
'''39.6%'''
38.4%
19.0%
2.9%
직업별
농/임/어업
30.9%
'''46.3%'''
22.6%
0.2%
자영업
36.4%
'''41.5%'''
20.7%
1.3%
블루칼라
30.6%
'''42.5%'''
24.9%
2.0%
화이트칼라
'''40.2%'''
37.5%
19.9%
2.3%
가정주부
'''46.1%'''
38.3%
14.5%
1.0%
학생
29.0%
'''46.7%'''
18.9%
5.4%
무직/기타
'''47.0%'''
30.7%
22.0%
0.3%
92대선투표별
김영삼
'''55.7%'''
19.3%
24.4%
0.7%
김대중
7.2%
'''87.5%'''
4.2%
1.2%
정주영
'''50.1%'''
21.2%
26.1%
2.6%
박찬종
'''47.9%'''
19.3%
27.1%
5.8%
세대별로 볼 경우, 이회창의 경우에는 확실히 연령대가 높을수록 지지율이 높아지는 추세를 보였다. 김대중과 이인제의 경우에는 저연령대로 갈수록 지지율이 높아지는 추세를 보였으나, 이러한 경향은 이인제 쪽에서 두드러졌다. 한나라당과 새정치국민회의라는 기성정치권의 거대 양당 모두에 반감을 가진 젊은층들의 표를 당시 참신한 이미지였던 이인제가 대거 흡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남성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김대중이, 여성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이회창이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페미니즘의 대두에 의해 형성된 갈등적인 남녀구도에 익숙한 젊은층들은 의아해할지도 모르지만, 민주당계는 남성에, 보수정당은 여성에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이러한 구도는 본격적으로 투표자 조사가 진행됐던 13대 대선부터 18대 대선의 출구조사까지 줄곧 이어져온 추세이다.
지역별로 볼 경우, 경상도와 강원도는 보수정당, 수도권과 충청도, 그리고 전라도는 민주당계가 우세한 동서구도가 나타났다. 서울은 전통적으로 친야 성향이고, 경기도는 전국평균과 유사하여 대선의 승리자인 김대중이 우세했고, 충청도의 경우에는 DJP 연합 때문에 김종필의 충청도 지지기반 상당부분이 김대중 지지층에 포함되었다. 김영삼의 기반인 PK에서 이인제 지지율이 높게 나온 것도 주목할만한데, 이는 여당 후보인 이회창이 현직 대통령 김영삼과 단절하는 듯한 행보를 보여 김영삼의 코어 지지층이 이인제 지지로 상당수 돌아섰던 것으로 파악된다.
학력별로 볼 경우, 초졸과 대재 이상은 이회창이 우세했지만, 그 사이에 있는 중졸과 고졸은 김대중이 우세했다. 이회창이 초졸에서 우세한 것은 상단에서 언급한 고연령대 유권자들의 높은 지지와 맞물린 것으로 파악된다. 직업별로 볼 경우, 김대중은 블루칼라 노동자 계층, 이회창의 경우 화이트칼라전문직중산층 사이에서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대졸 이상에서 이회창이, 중졸과 고졸에서 김대중이 우세한 것과 긴밀히 연결돼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전통적인 보수층인 가정주부들은 이번에도 이회창이 우세했으며, 이것이 이회창의 전체 여성 지지율을 끌어올린 것으로 보인다. 다만 또 하나의 전통적인 보수 우위 계층 농어민들은 김대중이 우세했는데, 이는 DJP 연합으로 충청권 농민들이 대거 김대중으로 결집한 결과로 해석된다.

7. 선거 관련 논란



7.1. 되풀이된 지역감정, 편파보도


선거 때마다 전가의 보도였던 지역감정은 해당 대선에도 되풀이됐는데, 김윤환 한나라당 선거대책위원장이 경남지역 필승대회에서 "우리가 남이가"를 주장하며 범 영남권 단결을 주창해 파문이 일었고, 한나라당도 '이인제 지지 = 김대중 당선'이란 등식을 주장하며 부경지역에 反호남 감정을 선동했다. 심지어 언론 편파보도 중에서 중앙일보의 보도가 문제가 됐는데, 11월 초 'YS 신당설''청와대 창당자금 지원설' 등을 보도하면서 이인제 네거티브 보도를 하여 지난 대선 때 조선일보처럼 '이회창 vs 김대중' 양자 대결 구도를 부각시켰다. 이에 대해 이인제 측은 강력히 항의했으나, 언론의 네거티브 보도는 목적을 달성했다.

7.2. 대선 후보들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 논란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이 김대중 당선자와 합의하여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신군부 관련자를 모두 특별사면했다.
이에 관해 김대중 당선자가 먼저 건의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사면은 어디까지나 김영삼 정부에 의한 것이었고 당시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3후보 모두가 거의 경쟁적으로 전두환, 노태우 사면 복권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다.[18]
결국 김영삼 정부이회창 김대중 이인제후보가 이 전노 사면을 추진하고 전노사면에 찬성의사를 밝혔던 것이라 전노사면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다.[19]
1997년 대선 당시 이회창은 전두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감옥에 있는 전두환이회창에게 "'''고맙다"'''며 "'''우리 때문에 정치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냐"''' 화답할 만큼 매우 기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20] 그에 대해 이회창 후보도 전두환의 화답에 "'''고생 많으시다. 추석 때 나오시기를 바랬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다"'''고 전두환측에게 화답한 것으로 밝혀졌다.[21] 당시 한겨레에서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추석 전 전두환, 노태우 두분의 석방을 바랬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게 됐다"'''고 전두환 측근들에게 화답하였다고 보도했다.[22]
이에 있어서 김영삼의 회고록에선 어느정도 이면이 밝혀졌는데, 김영삼은 이미 누구에게 정권이 넘어가든간에 대선 후와 자신의 임기 사이에 사면을 진행할 수 있도록 판을 짜고 추징금을 환수하도록 계획했으며 이를 발설하지 말라 했다고 밝혔었다. 의외로 김대중은 대통령의 권한이라 이를 묵묵히 받아들였으나, 이회창은 이인제에게 밀리면서 후보교체론까지 거론되자 압박을 받았는지 오는 9월 4일에 있을 주례보고때 사면을 직접 건의하겠단 발언을 하면서 국민적인 관심사로 올라오게 되었다.

8. 특이사항


  • 1, 2위간 전국 표차가 불과 39만여 표(1.6%차) 정도인 초박빙이었다. 이는 34년 전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15만 표차(1.5%) 다음으로 근소한 차이이다. 이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는 사상 최초로 1천만표 이상 득표로 당선됐으나 이회창 후보도 993만표로 거의 1천만에 근접했다. 민주계 입장에서는 DJP 연합으로 긁어모을 수 있는 표는 다 긁어모은 상태에다 이인제 후보로 인한 보수 진영의 대분열이 있었음에도 40만 표 정도의 차이에 그치면서 아슬아슬한 결과였다. 보수 입장에서도 아까운 석패였다. 반대로 민주 진영 입장에서는 여당이 외환위기라는 전대미문의 국가적 위기를 초래했음에도 보수 진영의 후보 분열이 아니었으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고 그나마도 1.6% 차이로 겨우 신승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많이 보였다. 그래서 보수 편향적인 한국의 정치 지형을 설명할 때 이 선거 결과가 가장 많이 인용되기도 한다. 물론 이 당시는 민주 진영이 보수 진영을 상대로 거의 대등하게 싸웠던 18대 대선과 민주 진영이 국정 농단 사태를 터트린 보수 진영을 압도한 19대 대선이 나온 2010년대보다 더 보수 우위였던 것도 있긴 하지만, 홍준표가 24%로 패배한 걸 보면서 김대중을 거의 따라 잡던 이회창이 정말 강력한 보수 후보였구나라며 재평가를 하는 사람도 있다.[23] 15대 대선에서 민주 진영의 아슬아슬한 승리가 이후 민주 진영의 강화와 압도적인 승리에 큰 기여를 한 것이다.
  • DJ의 눈물겨운 이미지 개선 노력이 돋보인 선거였다.[24] 가장 유명한 CM송 광고로는 DJ DOC의 "DOC와 춤을"을 패러디한 "DJ와 춤을"이 있다. 그 # 희대의 명광고에서 김대중은 정권 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준비된 자신에게 꼭 한번 기회를 달라는 식으로 접근했다.(이른바 '프레임의 연성화') 또 DJP 연합 강조를 위해 김종필박태준 등 자민련의 인물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이웃집 할아버지 이미지나 신세대적 감각의 원곡, 당 소속 연예인(정한용, 손숙)의 등장 등.. 가히 가장 모범적이고 집약적인 선거 광고랄까.[25] 자세히 보면 "행복한 가정, 안정된 사회, 강력한 국가!"라는 보수 여당에나 어울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지금도 노무현상록수 기타 광고, 이명박국밥 광고와 함께 성공적인 대선 광고의 예로 꼽히는 역사를 바꾼 선거 광고이다.[26][27]
  • 허경영이 처음으로 등장한 선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꼴찌로 고배를 마시고 묻혔다.
  • 1987년 이래 무소속 후보와 사퇴한 후보가 없는 선거였다.
  • 대통령 선거에 계수기가 처음으로 도입된 선거[28]이긴 했으나 투표지 분류기를 통한 개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개표방송날밤 까면서 했다.[29] 문화방송의 개표방송 오프닝 부분인데, 투표 종료 다음날인 12월 19일 새벽 3시의 현황이다. 개표율은 90%를 넘은 상태. 또 MBC 개표방송에서 오후 6시가 되자 출구조사 결과[30][31]를 발표했는데 김대중 39.9%, 이회창 38.9%. 이인제 19.7%로 오차범위 내로 맞춰 선거가 끝난 직후 출구조사 결과를 방송하는 걸 정착시키는 데 공헌했다.[32] 당시 MBC 출구조사 결과
KBS에서는 주유 미터기를 연상케 하는 그래픽을 선보였는데, 당시 1-2위 득표자의 득표 수를 실시간으로 집계하여 큰 인기를 끌었었다. 그 덕에 KBS에서 했던 15대 대선 개표 방송은 무려 40%를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 직선제로 치러진 대선 중 유일하게 대선 3위의 경력을 가졌던 사람이 당선된 대선이다.[33]


[1] 1992년 민자당이 14대 대통령 후보 경선을 실시하였으나, 이종찬 후보가 중도 사퇴하면서 제대로 된 경선이 이뤄지지 못했다.[2] 이때 3위인 이한동과의 표차는 불과 8표였다.[3] 이 때 이인제가 경선 결과에 불복하고 대선에 뛰어든 이유 중 하나가 뒤에서 이 분이 은근히 지원 사격을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 이회창 캠프에서는 이인제 배후에 김영삼이 있다거나, 김영삼이 이인제 신당을 지원한다는 공세를 퍼부으며 反YS 감정을 자극했다. 이러한 가설은 <중앙일보>가 재생산해 파문을 일으켰다.[4] 이 때문에 훗날 한나라당이 일명 "이인제 방지법"을 상정하여, 경선에서 탈락한 예비후보들의 독자 출마가 막히게 되었다.[5] 7월까지는 지지율 45%로 압도적이었지만 아들의 병역 의혹으로 8월에는 30%까지 수직 하락하고(그 지지율을 고스란히 이인제가 다 받아 먹었다. 여기에 자신감을 얻고 탈당), 10월에는 김대중 비자금 의혹과 경제실정 기업도산 부도의 와중에 야당을 잘못 건드려 지지율이 또 떨어졌다[6]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선일보 류근일 논설실장이 '정주영 변수'라는 칼럼으로 '정주영을 찍으면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논리를 펼친 적 있다. 그래놓고는 이 선거 때 대통령 하나 잘못 뽑아서 IMF가 왔다라는 칼럼을 써서 자기 반성도 없는 기레기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줬다.[7] 당시 이인제 선거 운동에 동참하던 코미디언 김형곤은 지원 연설에서 "(카메라로) 이인제를 찍었는데 TV에 이회창이 나오는 것 봤느냐"고 코믹 문구를 시전하기도[8] 행정구역은 현재의 행정구역 기준이며, 1997년 당시와는 일치하지 않다.[9] 이건 마찬가지로 충남에 본적지를 두었던 이인제의 영향이 컸다.[10] 득표율 각 32.8%, 32.2%. 참고로 3위 이인제 역시 31.9%를 득표하여 1, 2, 3위가 정말 간발의 차로 갈렸다.[11] 다만 이 곳의 1위는 이인제였다.[12] 역시 이 곳도 이인제가 1위를 차지했다.[13] 이쪽 역시 이인제 1위.[14] 여기는 이인제가 비교적 큰 표차로 1위를 차지했고, 이회창과 김대중은 20%대 득표에 그쳤다.[15] 이인제 1위[16] 이인제 1위[17] 한국갤럽의 15대 대선 여론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김대중은 20대와 30대 층에서 각각 43%를 획득하는 것으로 나왔고, 40대에서 37%, 50대 이상에서 34%의 지지를 얻은 것으로 나온다. 다만 앞선 13대 대선과 14대 대선에서는 김영삼, 박찬종, 정주영과 청년층 지지를 나눠먹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은 지지를 확보했을지언정 특출나게 높은 득표를 확보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와 별개로 총선이나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에 대한 청년층들의 지지가 높았던 것은 사실이었다.[18] 위키백과 15대 대통령선거문단 참고[19] 전노 사면에 대한 청와대 정치권 반응 1997.12.21 동아일보[20] 옥중 전씨 사면 건의 이회창 대표에 고맙다, 구두 메세지[21] 李(이)대표-全(전)씨 비밀 메시지 오갔다 사면 파동 후 변호사 통해 동아일보 1997.9.24 [22] 사면 노력해줘 고맙다” 전씨, 이회창 대표에 인사말 1997.9.24 한겨레[23] 그도 그럴 것이, 김대중은 한국 헌정 역사상 정치인 개인의 팬덤이 가장 두텁고, 열성적인 정치인이랄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영남에서의 득표율을 보면 알겠지만 보수표와 진보표가 경합인 수도권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영남에서 호남 출신인 김대중과 민주당 비토가 매우 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영남에서의 저 득표율도 포항제철과 광양제철을 만들고 민주정의당 당대표로 활동 했던 박태준이 DJP 연합에 들어가고 김대중을 지지하면서, 김대중을 대놓고 빨갱이 정도로 여긴 영남 보수층의 반감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고 反신한국당 표심을 조금이나마 김대중으로 돌리면서 13, 14대보다 더 올라간 거다.[24] 그는 이경규가 간다의 전격 방문으로 TV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 한 꼭지의 등장으로 DJ는 30년 가까이 계속 된(혹은 조장된) 부정적 이미지, 굳은 얼굴을 모두 벗게 되었다. # 그런 컨셉의 선거 광고도 있었는데 출연하는 연예인들이 그야말로 역대급#. 최종원, 백일섭, 윤석화, 손창민, 이선희, 노영심, 오정해, 이봉원, 팽현숙, 최양락, 코리아나, 김수미가 출연했다. 이후 최종원은 2010년, 민주당에서 국회의원이 되었고(이광재가 강원 지사에 출마한 뒤 공석이 된 태백, 영월, 평창, 정선 지역구), 백일섭은 이명박 지지 선언을 했다.[25] 이 광고에서는 노무현 당시 의원이 직접 등장하고, 2002 한일 월드컵을 연상하는 장면이 나오기에 "5년 후를 예언한 광고"라는 드립도 있다. 게다가 노무현 前 대통령이 나오는 장면은 공교롭게도 16초다. 백괴사전에선 한술 더 떠 중간에 나오는 지구본이 1999년 지구 멸망설을 부정한 것이라고 한다(...).[26] 이 광고를 기획한 사람은 스포츠서울 사장을 지냈던 윤흥렬인데, 이밖에도 김대중 캠프 안팎에는 쟁쟁한 선거 전략가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었다. 이 선거 외에 다음 선거도 지휘한 이해찬이라든지, 요즘도 종합편성채널에 종종 출연하곤 하는 이영작이라든지(DJ의 처조카다), 훗날 이명박 대통령 당선의 공신으로 꼽히는 최시중(당시 한국갤럽 사장)이라든지, 김한길이라든지.[27] 사실 71년 제7대 대선 당시 김상희의 "여덟 시 통근 길에 대머리 총각"을 "신민당 강연장에 김대중 후보"로 개사하고 96년 제15대 총선 당시 육각수의 "흥보가 기가 막혀"를 "YS가 기가 막혀"로 바꿔 쓰는 등, 김대중과 노래 개사는 역사가 깊다.[28] 계수기가 선거에 최초로 도입된 것은 93년 4·23 재보궐 선거이다. 전국 단위 선거로는 95년 6.27 지방선거에 처음 도입되었다. 당시기사[29] (MBC 기준으로) 김대중의 당선 확정 공표는 새벽 4시 12분에 나왔고, 최종 개표 마감 시각이 선거 다음 날 오전 5시 29분 강남을 선거구 개표가 마무리되면서 모든 개표가 끝났다.[30] 참고로 KBS와 SBS에서도 출구조사 결과를 발표할 계획이 있었지만 선거 막판 김대중과 이회창의 지지율이 오차범위 내로 좁혀지면서 15대 총선의 악몽이 다시 나타날까 두려워진 방송국들은 출구조사는 하되, 발표는 안 하기로 협약을 했는데 MBC에서 이 협약을 깼다. 어쨌든 이 예측조사 발표 덕택에 MBC는 1995년 지방선거 이래로 한번도 예측조사 발표를 빼먹지 않은 방송국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31] 이 때문에 KBS는 선거 당일 출구조사를 발표하지 않고는 개표 시작 무려 6시간만인 다음날 자정 예측 결과를 공개한 게 가장 정확했다는 식의 정신승리급 보도를 내놓는 등의 분풀이를 했다(...)[32] 그런데 정작 MBC는 득표율 수치를 유효투표수가 아닌 무효표가 포함된 전체투표수로 계산했다. 그리고는 당선 확정 순간의 득표율이 예상 수치와 0.1%밖에 차이가 안났다고 뻥카를 날렸다. [33] 김대중제13대 대통령 선거김영삼에 밀려 3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