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의거
1. 개요
'''3.15 부정선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부정선거가 적발됐고, 일부 도시에서 투표권을 우롱당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벌였고 경찰이 총기를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경상남도 마산시(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일대)에서 벌어진 시위가 가장 유명해서 3.15 의거 = 마산으로 알려져 있다.
3월 15일 마산의 경우 아침에 장군동 제1투표소에서 민주당 참관인과 자유당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참관인이 투표함을 엎어버리자 그 투표함에서 부정선거가 적발되었다. 투표함을 엎어버린 참관인 안맹선과 그의 남편이자 민주당 경상남도의회 의원 정남규는 사전투표를 발견했으나 곧 경찰서에 끌려가버린다. 당시 자유당에서 펼친 부정선거공작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3.15 부정선거#s-2.1 문서를 참조.
경찰서로 끌려간 정남규는 도의원 신분이라서 곧 풀려났는데, 그는 곧장 오동동 마산시당부로 가서 민주당원들과 논의한 끝에 아침 10시 30분 독자적으로 선거포기를 선언하고 참관인들을 철수시킨다. 이후 방송을 통해 부정선거 무효를 주장하고 오후 3시 30분부터 민주당원들이 모여 시위에 시작한다. 민주당원들은 가두시위를 벌이며 시위대를 모았고 오동동 마산시당부에 1,500여명의 시위대가 모였는데 이때 경찰들이 들이닥쳐 민주당원들을 연행하고 시위대들에게 해산할 것을 요구하나 시민들에게 욕만 대차게 먹고 자리를 떠난다. 특히 경찰 간부가 곤봉으로 고등학생을 두들겨패는 바람에 그 자리에 모여있던 군중들은 더욱 격앙되었고, 남은 시위대들이 독자적으로 시위에 돌입하자 경찰과 반공청년단들이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1] 시위대들은 저녁에 개표가 시작되는 시청으로 모이자고 서로 약속하고 해산하게 된다.
이 소식이 시내에 퍼지자 마산 시민들은 저녁 즈음 옛 마산시청[2] 앞에 모이기 시작했고 시위 인원은 만여 명을 넘을 정도로 불어났다. 일부는 당시 마산의 중심가였던 남성동파출소로 모였으며, 일몰 후 시위대와 경찰과 대치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던 중 시위진압을 위해 출동한 소방차가[3] 무학초등학교 앞 전신주를 들이받아서 전기 공급이 끊어졌다. 이로 인해 정전이 되고 신마산 일대가 깜깜해졌다. 경찰은 때를 놓치지 않고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같은 시각 남성동파출소에서도 발포로 한 명이 사망했고 시청 앞 발포 이후 시위대들은 자정이 다 될 때까지 관공서, 경찰서(및 파출소), 자유당사 등을 습격하며 저항했다. 제1차 마산의거로 총 '''9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에 마산 시민들은 물론 전 국민이 충격에 빠졌다.
※ 3.15 마산 의거 사망자 명단 [보기 / 접기]
2. 각계의 대응
2.1. 이승만과 자유당
이 사건에 대해 후에 국회조사단이 이승만과 이기붕에게 경찰의 강경 대응에 대해 따졌는데 이승만은 공산당 사주로 벌어진 시위라고 보고받은 것을 그대로 발표했다. 심지어 최인규 내무장관 주도로 도립병원 영안실에 안치된 마산고 1학년 C반 반장 김용실의 주머니 안에 '인민공화국' 운운하는 날조된 삐라까지 집어넣는 등 공산당의 배후조종으로 모는 공작을 펼쳤다.[4]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은 "'''총은 쏘라고 줬지 갖고 놀라고 준 게 아니다'''" 라는 망언을 터뜨렸다. 가뜩이나 정부 수립 이래 최초의 "평화적 시위대를 향한 대민발포" 사례라서 그 파장은 컸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AP통신이 마산 사건에 대해 묻자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였다.
15일의 발포 사건은 이미 중앙 언론과 외신의 주목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기에[5] 당국에서는 여야합동 국회조사단을 파견, 이강학 치안국장의 사임 및 최인규 내무부장관의 교체[6] 로 사건을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홍진기 법무장관을 내무장관으로 자리만 옮기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인사조치였다. 게다가 홍진기 신임 내무장관은 공산당 사주설을 주장하면서 경찰의 실탄 발포를 지시하고 이후 강경 진압을 주도하였고, "경찰의 구속, 마산 시위대의 선처 등의 대략적인 조치를 한 뒤 모든 조치를 마쳤다" 라고 밝힌다. 이러한 눈 가리고 아웅식의 조치에 여론은 더더욱 악화되고 말았다.본인과 그의 부통령 러닝 메이트인 이기붕 민의원 의장은 3.15 선거가 부정하다고 비난하는 민주당을 물리치고 석권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정부가 질서유지를 위한 경우 이외에는 선거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민주당의 선동을 받은 일부 시위자들이 일을 저지를 때 수습을 하지 못한 것이다. 만일 경찰이 야당측의 정치적 활동을 방지하는 데 동원되었던들 이런 불행한 난동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민주주의적 발전에는 방해가 있게 되었을 것이다. 민주당은 폭력수단으로써는 결코 정권을 잡지 못할 것이다. 민주당은 어느 시기에 가서 국민이 동당을 권위있는 자리로 이끌게 될 참을성 있고 건설적인 지도역량을 기르지 않으면 안된다. 폭력행위는 정부나 자유당이 원하는 바도 아니요 실지 행하고 있는 일도 아니다. 민주당은 수치스럽게도 그들의 패배를 은폐하기 위해 그런 수단을 강구하였던 것이며 따라서 그들이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킨데 대해 한국 국민에게 보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은 직접 경찰에게 어느 정당이나 후보자를 위해서도 어떠한 종류의 영향을 주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며 경찰은 하시에도 간섭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사실 수많은 한국 애국자들이 민주당의 전술과 공격의 일부에 대해 분개하고 보복을 원하였으나 그들은 경찰 당국에 의해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산 의거가 벌어진 뒤 여론은 계속 험악해져 갔다. 이에 몇몇 자유당 인사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어차피 우세한 선거였는데 너무 오버했다" 라며 지도부를 비난하였다. 또한 이승만, 이기붕에 의해 모든 당론이 좌지우지되는 상황에 의해 국회의원들이 거수기로 전락했다라며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모여 혁신 위원회를 조직하며 집단반발할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이승만이 직접 호통을 치자[7] 이들은 기가 죽었다. 이에 이들은 이기붕과 면담을 갖고 이기붕이 당을 위해 애쓴다며 치하한 뒤 선처할 것을 약속하자 이에 만족하여 해산한다. 이에 동아일보 기자가 "앞으로 어떻게 활동할 것입니까?" 라고 묻자 이들은 '이기붕 의장이 선처를 약속하셨으니 앞으로 더 이상 혁신에 대해 거론 않겠다' 라고 답하였고 이를 동아일보측에선 이승만의 호통 한 번에 잠잠해졌으니 논에 우는 개구리한테 돌 던지자 순신간에 잠잠해진 격이라며 비꼬았다.
그리고 자유당 측은 공산당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여러 희생양을 찾으려고 했었고 때문에 민주당의 정남규 도의원을 남로당에 가입한 공산당원으로 총지휘하였다라고 혐의를 씌운다. 정남규 도의원은 당시 유치장에 갇혀있었는데 기자가 경찰의 혐의가 사실이냐고 물어보자 노발대발하며 "뭐요? 날더러 빨갱이라고? 그러면 어째서 나를 시의원으로 놔두고 도의원으로 당선되게 놔두었단 말이요?" 라며 반박한다.
또한 22살 먹은 청년을 체포해 그가 경찰서를 방화하였다며 그가 6.25 때 공산당 측에 부역한 자라고 하였는데 6.25 때는 그의 나이가 12세였으므로 말이 되지 않았고 이에 대해 민주당 측과 언론의 거센 비판을 받는다. 그러자 경찰측에선 32세라고 나이를 조작해서 발표하는 해프닝을 벌인다.[8]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 청년은 그냥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체포되었으며 그의 신원조회를 하는 중 자동차 정비 면허증이 발견되었으며 이를 본 순경은 자동차=휘발유=방화라는 공식이 머리 속에 떠올라 그에게 방화 혐의를 뒤집어 씌운 것이었다.
2.2. 민주당 등 야권
이에 대해 민주당은 다음날 성명을 다음과 같이 내었다.
민주당은 3.15 선거 무효선언을 한 뒤 당내 방침을 두고 신파와 구파가 내분을 일으켜 계속 지리한 회의를 거듭하였다. 구파는 국회 총사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신파는 원내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9] 이들은 이 논쟁으로 인해 3월이 다가도록 2주 동안에 걸쳐 대응방침조차 결정하지 못하였고 마침내 신파가 이겨 원내에서 투쟁하기로 결정했을 땐 이미 자유당 측에서 마산 경찰들 체포와 내무장관 경질 등의 조치를 끝내놓은 상태였다.이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실질적 자격이 결여된 것이다. 이 대통령이 AP 기자에게 폭력 행위는 정부나 자유당이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당이 수치스럽게 수단을 강구하였던 것이며 그들이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에 대해 한국 국민에게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하였는데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말을 국민에게 부끄럽게도 어떻게 감히 할 수 있으며 또 하늘이 무섭지 아니한가? 이번 3.15 선거에 있어서 도덕과 법을 파괴하고 부정, 추잡, 폭력, 살인 등 모든 악랄한 방법을 사용하여 국민 주권을 철저히 강탈하고 민주주의를 도살하였으며 그러고도 부족하여 마산에서는 학생과 시민을 무차별 총격으로 대량학살하였음을 전 국민이 몸서리나게 체험하였고 민주 우방제국인 공인한 바이며 런던 타임즈의 사설에선 '폭력이 가장된 선거보다도 나쁘다'라는 요지로 비난하고 또 워싱턴포스트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세력은 또 한번의 선거승리를 불도저로 밀고 들어가듯이 차지하였다'라고 비난하였다. 이 대통령은 이를 알고서도 모르는 척하는지 아니면 진실로 아무것도 모르고 말하는지? 어느 것이건 간에 대통령으로써 실질적 자격이 결여된 발언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이때 민주당은 간신히 내부 의견을 통합하고 서울 시내에서 집회를 열겠다고 하자 임흥순 서울특별시장은 '부정선거는 서울시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서울 어디에서도 집회를 열 수 없다'라고 통보한다.
2.3. 후속 시위
그러자 민주당 측은 이를 무시한 채 4월 6일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이 시위가 엄청난 시민의 호응을 받아 인파가 상당한 규모로 불어난다. 이 시위의 결과로 자신감을 얻은 민주당 측은 지부를 통해 각 지역에 시위를 벌일 것을 계획한다.
하지만 서울시에서의 시위에 놀란 정부측은 등교 중지령을 선포하는 등 시위를 철통같이 감시토록 하였고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에워쌌다. 부산에서 4월 8일 민주당의 지부에서 시위를 벌였으나 이러한 자유당 측의 감시에 의해 시위대는 소극적으로 가두행진을 벌인 뒤 해산하게 된다.
그리고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전국적으로 시위의 불길이 다시 타오르게 된다. 이후 전개는 4.19 혁명 문서 참조.
3. 기타
- 3.15 하면 마산의 의거가 가장 유명하지만, 광주 금남로에서 학생, 시민들에 의해 처음으로 3.15 부정선거에 맞선 광주 3.15 의거도 있다. '곡(哭) 민주주의 장송'을 주제로 한 시위였는데 해산 과정에서 10여 명이 부상당하여 이쪽도 만만찮은 역사적 모먼트이긴 하다. 사실 5.18 민주화운동의 임팩트가 워낙 커서 이쪽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 당시 총알자국이 남은 무학초등학교 담벼락은 1990년대 말까지 그대로 남아있었다가 2000년대 초 담장이 철제 펜스로 바뀌며 철거되었다. 현재는 복원된 담벼락이 길거리에 전시되어 있다. 다음 로드뷰
- 창원에서는 이 날을 기리는 의미로 3.15가 붙는 지명이 많다.
- 옛 마산MBC 구 사옥 옆에 있던 극장 이름은 '3.15 회관'이었다. 초기에는 공회당, 극장 개봉관으로 쓰이다 점차 재개봉관, MBC의 야외 스튜디오(...)등으로 쓰였고 결국 시설이 노후화되어 철거되었다. 현재는 마산노인복지관이 들어서 있다.
- 무학초등학교 담벼락 인근에는 '3.15 의거탑'이 있으며, 문서 상단부의 동상 사진이 의거탑 옆에 서 있는 조형물이다. 3.15 회관과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사실 이 곳이 마산시외버스터미널이 합성동으로 옮겨가기 전에는 터미널이 있던 교통의 요지였다. 사실 집창촌이 있는 이유도 여기가 터미널 앞인데다 뱃사람 부두노동자 상대하는 여인숙촌+경남선과 마산선 사이의 애매한 철도부지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당시 집창촌의 여인들은 행주치마에다 경전선 철도 자갈을 담아서 날라다가 경찰에게 던졌다는 야사가 남아있다.[10]
- 마산시가 3시 통합으로 창원이 되기 조금 전, 당시 총격이 일어났던 장군동-자산동 일대를 관통하던 (구)장군로와 (구)중앙로를 합쳐서 3.15대로로 새로 명명하였다. 이 도로는 옛 마산시 영역을 관통하는 중요한 간선축 역할을 하고 있다.[11]
- 당시 경찰의 발포 등으로 희생된 학생과 시민들은 이후 구암동 산비탈 양지바른 곳에 '국립 3.15 민주묘지'가 조성되어 영면하게 되었다.#홈페이지 바로가기 김주열 열사는 본인의 선산이 있는 남원에 안장되어 있다가 민주묘지 조성과 함께 이장되었다. 이외에도 3.15 의거 및 기타 4.19 관련 유공자들도 노환으로 영면하신 후에는 이 곳에 안장될 자격이 있다고 한다.
- MBC경남 창원본부 옆에는 '3.15 아트센터'가 있다. 성산아트홀과 함께 창원의 양대 공연시설 역할을 하고 있는 곳.
- 이 날을 기리는 뮤지컬"삼월이 오면"이 2010년 3월 마산에서 초연되었다. 당시 기사 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881555 이후 간헐적으로 몇 번 더 무대에 올랐고, 2020년 3월에는 "3월의 그들" 이라는 제목으로 뮤지컬이 다시 무대에 올라갈 예정이다.
- 2020년 국민의힘에서 강령에 3.15 의거를 새롭게 추가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