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학

 


李康學
1924년 2월 15일 ~ 2006년 5월 22일
1. 개요
2. 일생
2.1. 경찰 시절
2.2. 기업가로서의 행보
3. 출처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경찰공무원, 기업인이다. 창씨명은 고세이 야스유키(香星康之).

2. 일생



2.1. 경찰 시절


1924년 경상북도 대구부 서문동 18번지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일본 니혼대학의 제1상업과로 유학하여 1943년에는 같은 대학의 경제학과를 전공했지만, 태평양 전쟁 중인 1944년에 일본군에 학병으로 징발되었으며 1945년 7월에는 일본군의 소위로 임관했다.
1945년에 미군정청이 설립한 국방경비사관학교의 교육대원으로 입대했지만, 1946년에 영어를 잘 한다는 이유로 제5관구경찰청의 경찰관으로 전직(轉職)했다. 그는 제5관구경찰청의 특별경비대장을 재임하면서 대구 10.1 사건의 폭동진압작전에 참가했으며, 제5관구경찰청의 통신과에서 부과장으로 근무하면서 진급(경사→경위→경감)했다. 1948년에 제주경찰감찰청의 비상참모부장으로 부임했으나 갑자기 경찰복을 벗고 잠깐 대한식량공사의 경북지사에서 차장으로 일하다가 1949년 7월 14일에 경감으로 복귀해 경북경찰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으며, 1950년 1월에는 경주경찰서장으로 근무했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직후에 총경으로 진급하여 경주전투경찰대를 이끌면서 북한군을 토벌하는 작전에서 큰 공을 세웠고, 1952년에는 전라북도청 경찰국에서[1] 경무과장으로 발령되었다가 이듬해 6월부터 주미대한동지회와 국제방범협회의 후원을 받으며 경찰관 유학요원에 선발되어 1년 동안 미국 본토의 남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경찰행정학과를 수료했으며 영국과 프랑스와 스위스 등을 답사하며 유럽 각국의 경찰 제도를 연구한 바 있었다. 일본군 출신답게 그는 보안경찰이나 수사경찰의 임무보다 전투경찰 분야의 임무가 더 드러난 편이다.
귀국한 뒤에 그는 1954년 4월 내무부 치안국에서 공보계장으로 근무하다가 8월 용산경찰서장으로 전근했는데, 2년 뒤 경무관으로 승진해 경찰전문학교 학감으로 재임했다. 1957년 3월 보안과장, 1958년 9월 경무과장으로 각각 전근했다가 10월 30일에는 서울특별시청 경찰국장으로 승진했으니 그의 출세는 탄탄대로를 걸었다. 특히 2.4 보안법 파동 때 무술경관들을 동원해 야당 의원들을 연금하는 등 정치적 수완이 뛰어나 이 사건을 계기로 내무부 장관(최인규)의 눈에 들어 마침내 치안국장[2]으로 승진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1960년 3.15 의거 당시 시위대의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고 발표했다가 민중의 거센 항의를 받아 결국 3월 28일에 해임되었다.
결국 제2공화국 시기에는 3.15 부정선거에 개입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이듬해 5.16 군사정변이 터지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4년 만에 석방되었다.

2.2. 기업가로서의 행보


석방 이후 그는 동대문시장에서 사업을 시작하여 1966년에는 '해외산업'이란 회사를 설립해 태평양 곳곳에서 참치를 잡아 일본에 전량 수출했고, 1969년에는 고려통상을 창립하면서 부동산 사업에 투신하여 1975년에 빅토리아호텔(구 대연각호텔)을 인수해 큰 주목을 받기 시작해 1978년에는 대아증권과 동광약품(현 동광제약)을 인수하여 3년 뒤 사명을 '고려증권'으로 바꾸었고, 1983년 반도투자금융[3] 설립, 1989년에는 미국 코네티컷뮤추얼과 합작해 고려씨엠생명보험[4]을 세워 금융 전문 그룹으로 성장시키는 한편 1983년에는 고려증권 배구단을 만들어 슈퍼리그에서 위엄을 보였다.
그러나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지던 1997년 12월부터 고려증권, 고려생명, 고려종금, 동광제약 4사가 부도를 맞으면서 사세는 급격히 기울어졌다. 몰락 이후에도 그는 죽기 1년 전까지 대연각빌딩에 출근하며 재기의 의지를 불태우는 한편, 역대 경찰청장 모임 참석을 빼고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다가 2006년 5월 22일, 83세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러나 사망 소식은 이틀 뒤에야 언론에 알려졌다.
유족으로는 아들 이창재 고려통상 회장이 있다.

3. 출처


[1] 지금의 지방경찰청(행정자치부 직할의 광역경찰청)과 전혀 다른 직제로서 XX도청 직할의 XX부국이다. 제1공화국미군정청의 경무부(警務部)와 관구경찰청(管區警察廳)을 내무부의 치안국과 10개 도청의 경찰국으로 축소했기 때문에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지방공무원으로 근무한 경찰관들은 박봉과 격무에 시달렸지만, 내무부가 모든 도청의 고위직(예를 들면 대한민국 대통령도지사/국무총리→부지사/내무부 장관국장/내무부 차관과장)을 임명하여 파견하는 방식으로 경찰국을 통제했다. [2] 1950년대~1960년대의 이사관급 경찰총수.[3] 1994년부터 고려종합금융으로 변경.[4] 1996년경부터 고려생명으로 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