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기

 

1. 식물
2. 중국과 일본의 기년법
2.1. 중국의 황기
2.2. 일본의 황기
3. 카트라이더의 황금기사 시리즈의 줄임말


1. 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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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명: ''Astragalus membranaceus''
장미목 콩과의 식물. 일반인에게는 닭백숙이나 삼계탕의 주재료로 명칭은 잘 알려졌다. 국물에 넣으면 특유의 풍미가 은근 강하게 우러나오는데, 백숙이나 삼계탕, 닭죽에 황기가 들어가냐 안 들어가느냐에 따라 맛이 제법 차이난다. 황기 없이 백숙 따위를 조리해 먹으면 뭔가 심심한 느낌이 난다.
황기는 독성이 거의 없어 기운을 보하는 처방,즉 보약에 반드시 들어가는 약재이기도 하다. 인삼의 부작용이 우려되는 사람들은 차라리 황기를 다량 복용하는 것이 더 낫다. 가격도 인삼에 비하면 저렴하다. 한방에서는그 효능을 강장·지한(止汗)·이뇨(利尿)·소종(消腫)이라고 설명한다. 쉽게 말하자면 땀 덜 나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여름철에 병적으로 땀이 나면 쓰는 약이고 보양강장식인 삼계탕에도 들어가는 것.
강장, 강심작용이 나타나며 혈관을 확장시켜 피부혈액순환과 만성궤양을 치료한다. 세포의 생성을 빠르게 하고 면역력 증가와 노화를 방지한다. 다른 약재의 독성을 중화하는 효능도 있다.
황기에는 변을 묽게 하는 성질이 있어 설사 환자에게는 쓰지 않지만, 황기가 비위(脾胃)를 보하는 작용이 탁월하기 때문에 비위가 허해서 나는 설사에는 사용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황기가 변을 묽게 하는 부작용보다 비위를 보하는 긍정적인 작용이 더 크기 때문. 열성(熱性) 설사 등에는 당연히 쓰지 않는다.
여담이지만 효능에 상관없이 재배 황기는 1~2년생이 가장 많이 유통된다. 효능은 3년 이상이 되어야 제대로 나오는 데도 이렇게 팔리는 이유는 3년근 이상은 대개 의약품용 한약재로 등록되어 한약재 회사들이 싸그리 쓸어가기 때문이다. 식품으로 유통되는 황기는 대부분 1년근이다. 황기가 자생종이 아닌 외래종 근원이기 때문에 약효가 뛰어난 국내산 황기의 물량은 항상 부족한 실정이다. 1년근 황기는 약효가 거의 없어 삼계탕에 한약맛 내는 용도로나 적합하다. 게다가 어째선지 흰색으로 표백하는 경우가 간간이 존재한다고 한다.
주로 껍질을 제거하여 판매하지만 껍질에도 약효 성분이 많다. 그러나 보존성을 위해 보통 벗겨서 판매된다. 차로도 달여 마시기도 한다. 황기차 문서를 참조.
지리적 표시제/대한민국에는 정선 황기가 등록되어 있다.


2. 중국과 일본의 기년법



2.1. 중국의 황기


누를 황(黃)을 써서 황제기원(黃帝紀元), 이를 약칭하여 황기(黃紀)라 한다. 중국 신화에서 삼황오제 중 오제의 대표 격으로 등장하는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를 기준으로 삼은 기년법이다.
1895년 중국은 청일전쟁에서 패배했다. 서구열강만이 아니라 근대화한 일본에게도 패했다는 것은 많은 중국의 지식인들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자, 서둘러 나라를 개혁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케 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젊은 지식인 강유위(康有爲)는 강학회(強學會)라는 단체를 만들고 <중외기문中外紀聞>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했다. 이때 <중외기문>은 당시 청나라 연호 광서(光緖)에 앞서 공자졸후(孔子卒後)[1]라는 새로운 기년법을 앞세웠다. 광서 21년(1895) <중외기문> 첫 호를 발행하며[2] 연도를 앞에 공자졸후 2373년, 뒤에 광서 21년이라고 적었다. 금상황제보다 유학의 시조 공자를 앞세운 것이다. 공자졸후 기년의 원년을 따져보면 기원전 478년이다. 공자가 기원전 479년에 죽었으므로 그 이듬해를 '공자졸후 원년'으로 삼았다.
강유위 등 변법파(變法派)가 딱히 청나라를 전복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18세기 문자의 옥을 아는 이들에게, 비록 청나라 연호를 부정하지야 않았지만 다른 기년법을 앞세움은 자칫하면 '역모'의 뜻을 품었다고 해석하기에 딱 좋았다. 아닌 게 아니라 양계초(梁啓超)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중외기문>의 연도 표기를 보고 강학회 회원들 중 일부는 화가 닥칠까 두려워서 "이것은 임금의 정삭(正朔)[3]을 받듦이 아니요, 예수를 본받는 것이외다." 하면서 강학회에서 탈퇴할 뜻을 표했다. 장지동(張之洞)은 <중외기문> 첫 호가 발행된 지 2주일 만에 폐간을 명했다.
반대자들의 눈에 공자기년은 중국의 전통을 거부하고 예수(서력기원)를 본받으며 청나라를 부정하려는 뜻이 담긴 짓으로 보였다. 실제로도 강유위서력기원그리스도교를 강렬하게 의식하고 이에 대항하여 공자기년과 유교를 강조했다. 공자는 중국에서 가장 높은 성현이므로 공자기년을 사용하면 공자를 존숭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 맞서서 나온 또다른 주장이 바로 황제기원이다. 유사배(劉師培)가 1903년 <황제기년론黃帝紀年論>에서 강유위가 주장하는 공자기년을 비판하며 황제기원을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강유위는 유교를 지키고자 공자기년을 주장하지만, 자신은 중국민족을 지키려 하므로 황제기원을 주장한다 하였다. 또한 그는 (일본의 진무 덴노 기원을 의식하여) 역대 중국의 모든 왕조의 군주들이 결국은 황제의 자손이니, 중국이 황제기원을 사용함은 일본이 진무 덴노 기원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또한 황제기년을 사용하면 황제기년 이전의 일은 적으므로 역사를 서술하기 편리하단 점 또한 이야기하였다.[4]
유사배는 황제강생(黃帝降生) 기원을 주장하며 글에 적었는데 원년이 기원전 2711년이었다. 황제가 그때 태어났다고 본 것이다. 또한 만주족이 중국을 다스리는 현실을 부정하여 '정당한 군주가 없는' 시절로 간주하고, 정당한 군주가 없으니 서양의 예를 따라 황제기년을 사용함이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중국 내에서도 점차 공자기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적어지고 황제기년을 따르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리하여 광서 29년(1903)부터 황제기년을 사용하는 출판물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전통적인 음력을 사용하면서도 연도만 황제기원으로 적었다. 몇 년 전에 <중문기외>가 공자기년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금지되었건만, 그 사이에 청의 통치력은 눈에 띄게 약해지고 사람들의 공감대가 형성되어서인지 이런 출판물은 아무렇지도 않게 간행될 수 있었다.
그런데 황제는 신화 속 인물이므로 막상 황제기원을 쓰려니 어느 해를 원년으로 삼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원년이 몇백 년씩 널뛰기를 하는 황제기원이 서로 병립했다. 1905년 송교인(宋敎仁)은 황극경세(皇極經世) 같은 고서를 바탕으로 황제가 기원전 2698년에 즉위했다고 주장했다. 손문은 일본에서 송교인과 함께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를 결성했는데, 중국동맹회는 송교인의 주장을 받아들여 기관지 《민보民報》를 발행하여 기원전 2698년을 원년으로 삼은 황제기원을 사용하였다.
민보에서 사용한 기원전 2698년 기준 황제기년이 점차 황제기년의 표준처럼 널리 퍼져 사용되었다. 하지만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이듬해에 청나라가 멸망했다. 손문중화민국을 건국하고 1912년 1월 1일 임시대총통 자리에 오르면서 '중화민국은 양력을 사용하며, 따라서 황제기년 4609년 11월 13일 신해(辛亥)를 중화민국 원년 1월 1일로 삼는다.'는 내용으로 각 성의 도독(都督)들에게 전보를 보내었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상원갑자(上元甲子)라 하여 60갑자가 시작된 해가 있다고 여겼다. 그 연도가 언제인지는 그야말로 주술의 영역이라 온갖 다른 주장이 있었지만 기원전 2697년이라는 주장이 널리 알려졌다. 황제가 기원전 2698년(계해년癸亥年)에 즉위했고 이듬해(기원전 2697년)에 처음으로 60갑자를 시작하여 그해가 갑자년(甲子年)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중국에서 황제기원의 원년은 갑자가 시작된 해로 삼음이 더 좋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래서 비록 더 이상 황제기원을 공적인 영역에서 사용하지는 않지만, 현대 중국에서 황제기원을 사용할 경우에는 다들 기원전 2697년을 원년으로 삼아 헤아린다. (우리나라의 사주가들도 기원전 2697년에 갑자가 시작되었다는 설을 널리 따른다.)
현재 중국에서 통용되는 황제기원은 서기연도+2697, 20세기 중국에서 가장 널리 쓰였던 방법은 서기연도+2698이다. 현대 중국에서도 일부 민족주의적인 사람이나 단체들은 중원(中元)이란 이름으로 황제기원을 사용한다고 한다.
현대 중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설에 따르면, 황제는 기원전 2717년에 태어나 스무 살이 되는 기원전 2698년에 즉위했으며 119세 되는 기원전 2599년에 천제(天帝)가 보낸 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2.2. 일본의 황기


일본에서는 진무 천황 즉위기원(神武天皇即位紀元)을 줄여서 진무 기원(神武紀元), 황기(皇紀), 황력(皇曆) 등으로 불렀다. (오해를 막고자 이 항목에서는 '진무 기원'이라 약칭함.)
미토번(水戸藩: 오늘날 이바라키현 미토시 일대)의 국학자 후지무라 토코(藤田東湖)가 1840년 지은 한시(漢詩)에서 그 해를 (진무 천황으로부터) 2500년이라고 설명하였다. 후지무라가 진무로부터 연도를 헤아려보긴 했지만, 딱히 기년법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츠와노번(津和野藩: 오늘날 시마네현 카노아시군鹿足郡)의 국학자 오쿠니 타카마사(大国隆正)가 1855년 집필한 《본학거요本學擧要》에서 존황양이론에 입각하여 서양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서력기원을 사용하듯, 일본도 진무 천황 즉위년을 원년으로 삼아 중흥기원(中興紀元)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72년 메이지 유신을 시작하고 역법을 전통적인 음력에서 그레고리력으로 바꾸고 일세일원제[5]를 도입했다. 이때 일본도 연호 대신 서력기원처럼 원년으로부터 계속 헤아리는 기년법을 사용하자며 진무 기원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입장은 어중간하였다. 연호를 폐지하지는 않으면서도 진무 천황 즉위기원을 채택했고, 또 언제부터 진무 기원이 발효되는지도 정하지 않았다. 또한 가장 격식을 갖춘 공문서에는 진무 기원과 연호를 병용하되, 약식 공문서나 사적인 문서에서는 연호만 쓴다는 방침을 세웠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진무 천황은 45세 되던 기원전 667년(갑인년)에 큐슈에서 동쪽으로 정벌에 나서서 나라를 세우고 52세 되던 기원전 660년(신유년) 설날 (오늘날 나라현 카시하라시橿原市에 있던) 카시하라 궁(橿原宮)에서 즉위하였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서기 연도에 660을 더하여 '진무 천황 즉위기원'을 정하고 1872년(메이지 5, 진무기원 2532)부터 처음으로 공적으로 사용했다.
황기2600주년 기념 봉축곡들은 진무 기원으로 2600년이 되는 서기 1940년을 기념하여 작곡했기 때문에 저런 제목이 붙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1945년 패전 이전까지 일본에서 그냥 기원(紀元)이라고 하면 바로 '진무 기원'을 가리켰다. 당시 일본에서는 연호를 대부분 사용하되 교과서와 격식을 갖춘 공문서에서는 진무 기원을 사용했다고 한다. (물론 일본 안에서 쓰인 대다수 공문서는 그냥 연호만 사용하였다.) 또한 일본군에서도 무기의 제식명에 진무 기원에서 따온 숫자를 붙이곤 했다. 일본어 위키페디아의 神武天皇即位紀元(진무천황즉위기원) 항목[6]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또한 일본 식민지로 있던 시절에는 연호 없이 진무 기원만 사용했다고 한다. 일본이 패전한 1945년이 진무 기원으로는 2605년이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독립선언문에서 연도를 '05년 8월 17일'이라고 표기하였다.
패전 이후로는 일본 사회가 연호 아니면 서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진무 기원이 잘 쓰이진 않지만, 법령이 따로 폐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법적으로는 유효하고 국수적인 성향이 강한 단체에서 아직도 진무 기원을 사용하기도 한다.
환산방법은 서기+660이다.

3. 카트라이더의 황금기사 시리즈의 줄임말


황금기사 X 또는 황금기사 9으로. 2019년 12월 18일까지는 황금기사 9의 줄임말이었다. 여전히 황금기사 9이라는 카트바디가 임팩트가 컸기때문에 황금기사 9을 가리키는 경우도 많다.



[1] 한자에서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죽음을 가리키는 표현을 달리 쓴다. 천자는 붕(崩), 제후는 훙(薨), 고위 벼슬아치의 죽음은 졸(卒), 일반 서민의 죽음을 사(死)라고 한다. 그래서 '공자가 죽은 이후'라는 뜻으로 '공자졸후'라 한 것이다.[2] 양력으로는 해를 넘겨 1896년 1월이었지만, 음력으로는 아직 광서 21년(1895) 11월이었다.[3] 임금이 정한 올바른 역법. 여기서는 청나라가 정한 역법과 기년법 체계를 뜻한다. 중국 문화권에서 왕조가 바뀔 떄마다 역법과 기년법을 새로 반포하였으므로 '정삭'은 나라와 임금의 통치권을 상징했다.[4] 이것은 강유위가 공자기년을 주장하며 주장한 장점이기도 하다. 중국에서도 전통적인 연호로 역사를 서술하기가 굉장히 불편하다는 공감대가 있었던 것이다.[5] 임금이 즉위하여 한 번 연호를 정하면 죽을 때까지 바꾸지 않고 사용하는 제도.[6] 2021년 1월 19일 수정판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