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S 엠덴
[image]
SMS Emden. 사진은 1914년 칭다오에서 찍힌 것이다.
1. 개요
드레스덴급 경순양함의 2번함으로, 독일 제2제국이 한창 건함에 나서던 1906년 11월 1일 당시 독일령이던 단치히에서 기공되어 1908년 5월 26일 진수, 1909년 7월 10일 취역했다. 함명은 독일 북서부의 항구도시 엠덴에서 따왔다.
경순양함이라는 함급답게 주력 전투함은 아니었다. 만재배수량 4,268톤에 최대속도 23.5노트, 항속거리는 순항속도 12노트 기준으로 6,960km였다. 무장은 SK L/40 4.1인치 포 10문과 19.7인치 어뢰발사관 2문, 장갑은 덱 부분이 80mm, 포탑 부분이 50mm, 사령탑 부분이 100mm. 승조원은 장교 18명, 사병(부사관과 수병) 343명이었다. 이러한 세부 스펙은 동급함이자 네임쉽인 드레스덴과 동일하다. 드레스덴급은 2척으로 그치고, 이후 콜베르그급이 새로 건조된다.
경순양함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경순양함은 제1차 세계대전과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을 거치면서 정립된 함급이고 건조 당시에는 방호순양함 내지 장갑순양함에 가까웠다. 애시당초 해상전투 임무보다는 주요 항로순찰 등 보조임무를 맡은 전투함으로서 건조된 것이 드레스덴급이었다.
사실 별로 특출날 것 없는 함선이다. 그런데 왜 드레스덴급이라는 함급도 아니고 그 2번함인 엠덴이 독립 항목으로 개설되었는가 하면…
2. 대전 이전
20세기 초의 미칠듯한 건함경쟁 속에 아무리 보조함이라 하더라도 드레스덴은 취역 1년여만에 구형 취급을 받았다(…). 전함이라면 구형 취급받아도 막강한 화력으로 활용할 여지가 있지만 구식 취급받은 보조함은 활용하기가 마땅치 않았다.
당시 독일 해군 수뇌부는 독일의 세계 전략에 부합하면서 동시에 극동에서의 자국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독일 동양함대를 편성, 조차지였던 칭다오를 모항으로 삼아 운용하고 있었는데, 동양함대의 전력을 증강하기 위한 차원에서 1910년 엠덴을 파견했다. 러시아 태평양함대는 러일전쟁으로 소멸했지만 대신 영국 동양함대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분견대, 그리고 일본제국 연합함대를 견제하기에 동양함대의 전력은 너무 부족했던 것.
엠덴은 동양함대로 배속되는 과정에서 대서양을 횡단하여 주요 남미 국가들을 방문하며 아르헨티나의 독립 100주년 기념 행사에 독일을 대표하여 참석하기도 했다. 이후 드레이크 해협을 지나 칠레와 이스터 섬 등을 거쳐 일본과 중국을 방문한 다음 1910년 12월 22일 칭다오에 입항했다.
이후 1910~11년에 걸쳐 일어난 독일 태평양도서의 원주민 반란 진압에 참여하고 이후에는 평범한 통상 임무에 종사하였다.
3. 엠덴, 그 찬란한 이름
3.1. 대전 발발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 동양함대에는 비상이 걸렸다. 당장 독일 동양함대는 영국 동양함대, 프랑스 인도차이나 분견대, 러시아 태평양함대의 재건세력을 맞상대해야 했고, 이들의 모항인 칭다오를 지킬 수 있는 지상병력도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영일동맹으로 영국의 동맹이었던 일본이 참전할 가능성도 매우 높았다.
동양함대 사령관 막시밀리안 폰 슈페 제독[1] 은 작전구역을 포기하고 모든 전력을 모아 태평양과 대서양을 횡단하여 모국으로 귀환한다는 방침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 방침에서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엠덴이었다. 슈페 제독은 엠덴을 인도양으로 보내어 영국의 인도양 통상을 파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는 엠덴이 동양함대에서 가장 빠른 함선이기도 했고, 동양함대 본대로 가해질 영국 함대의 추격을 분산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3.2. 동남아시아 탈출
8월 19일, 독일령 팔라우에 도착한 엠덴은 접선하기로 한 석탄운반선과 조우하는데 실패하여 석탄 보급에 애로를 겪었다. 이후 엠덴은 네덜란드의 해안방어함 트롬프에 발각되었지만 네덜란드는 중립국이었기에 교전은 없었고, 대신 중립국 수역을 더 이상 침범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네덜란드 수역 바깥으로 이동했다.
그 와중에 영국군 장갑순양함 햄프셔, 미노타우르, 경순양함 야머스와 일본군 장갑순양함 치쿠마, 이부키가 투입되어 동남아시아 해역을 수색했으나 엠덴은 태연하게 가짜 증기굴뚝을 설치하며 수많은 상선 및 초계선들의 눈을 속이고 인도양으로 향했다. 엠덴의 증기굴똑은 3개, 영국군 선박은 4개였는데 엠덴은 가짜 굴뚝으로 마치 영국 배인 것처럼 항해를 했던 것.
그리고 9월 5일, 뱅골만에 진입하면서 엠덴은 마침내 인도양에 도달했다.
3.3. 인도양 통상파괴전
엠덴은 인도양 진입 직후 지나가던 중립국 그리스의 석탄운반선 폰토포로스(Pontoporos)을 발견한다. 폰토포로스는 중립국 선박이었지만 싣고 있던 석탄은 영국 해군용이었기에 엠덴은 폰토포로스가 적재하고 있던 영국군용 석탄을 신나게 털어먹고, 폰토포로스의 선장과 계약을 맺어 한동안 엠덴의 석탄보급선으로 활용했다.
직후 엠덴은 콜롬보-캘커타 항로를 급습하며 통상파괴전을 시작했다. 약 10일여만에 엠덴은 5척의 선박을 발견, 그중 4척을 격침시키고 1척을 나포했으며 나포선에 포로들을 옮겨싣고 항구로 보냈다. 그 직후인 9월 23일, 엠덴은 그야말로 대담하기 그지없는 군사작전을 단행했는데, 인도 동해안의 주요항구 중 하나인 마드라스(Madras)를 단독으로 급습한 것이다.
9월 23일의 마드라스 급습에서 엠덴은 아무런 피해 없이 항구에 신나게 포격을 퍼부었고, 정박해있던 증기선 1척을 격침시켰으며 항만의 유류 탱크에 포격을 퍼부어 날려버린 뒤 유유히 철수했다. 이 초유의 사건에 인도양 일대는 패닉에 휩싸였고 인도양 해운은 마비되기 시작했다. 단순히 전투함 1척이 항로상을 날뛰고 다녀도 무서운 판국에 아예 대놓고 항구를 습격할 지경이니 해운이 정상적으로 유지될 리 없었다.
이후 엠덴은 스리랑카를 지나 인도양 남부로 향하여 캘커타, 아덴, 호주를 잇는 항로를 습격한 다음 몰디브의 석탄저장소를 습격하여 석탄을 보급하고 10월 9일 영국령 디에고 가르시아에 도착했다. 그런데 개전한지 70여 일이 지나도록 디에고 가르시아에는 '''개전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아서''' 디에고 가르시아 수비대는 엠덴을 마침 지나가다 들린 열강 함선으로 여기고 따듯하게 환영해주었고 식수와 연료 등을 보급하고 정비까지 할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적군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환대와 도움을 받은 엠덴은 다시 출항하여 차고스 제도와 콜롬보 사이에서 활동하며 최소 5척 이상의 상선을 격침시켰다. 그리고 엠덴의 활극 중 가장 유명한 페낭 습격전이 벌어졌다.
10월 28일, 영국령 말레이 반도의 서해안에 위치한 페낭 항구를 엠덴이 홀로 습격한 것이다. 엠덴은 이번에도 야음을 틈타 가짜 네번째 굴뚝과 영국 해군기를 보이며 손쉽게 항만 경비대의 눈을 속이고 페낭 항구에 진입, 어뢰를 발사하여 정박해있던 러시아군 장갑순양함 젬추그(Zhemchug)를 격침시켰다. 쓰시마 해전에서 겨우 탈출에 성공한 젬추그는 결국 10년 뒤 허망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젬추그 격침 후 탈출하던 엠덴은 프랑스 해군 구축함 모스퀘트(Mousquet)와 조우하여 함포로 격침시키고, 탄약을 싣고 있던 상선 한 척을 추가로 격침시켰다.
페낭 습격의 결과로 인도양 해운은 말 그대로 마비, 전면중단되었다. 해운당국은 인도양의 모든 상선활동을 중단시켰으며, 항로의 안전이 확보되기 전까지 모든 비전투선의 출항을 금지시켰다. 특히 서부전선의 급박한 상황 속에 영국이 소환한 호주와 뉴질랜드 육군(안잭군)의 유럽 수송 일정도 크게 지연되었다.
그러나 엠덴의 운도 다해가고 있었다.
3.4. 코코스 해전과 엠덴의 최후
신나게 페낭을 털어먹고 대양으로 나온 엠덴은 엔진 이상으로 니코바르 제도에서 잠시 정비를 한 후 다음 항로로 코코스 제도로 향했다. 엠덴은 코코스 제도에 있는 영국군 통신중계소를 파괴하여 향후 인도양의 통상파괴전에서 연합군이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게끔 하고자 했다.
11월 9일 아침 6시 코코스 섬에 나타난 엠덴은 승조원들을 차출해 헬무트 폰 뮈케 대위[2] 가 이끄는 육전대를 상륙시켜 중계소를 습격했다. 그런데 중계소의 영국 해군 통신병들은 이들이 도착하기 전의 짧은 시간동안 SOS[3] 를 치며 엠덴의 출현 사실을 알리는 데 성공했고, 마침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호주 해군 경순양함 HMAS 시드니가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던 엠덴은 코코스 섬에서 접선하기로 한 석탄보급선 부레스크를 기다리고 있었다. 9시, 엠덴은 접근중인 선박 한 척을 발견하고 부레스크로 착각하여 석탄보급을 준비했으나 그 배는 HMAS 시드니였다. 둘 다 경순양함이기는 했으나 시드니는 1913년에 취역한 최신예함으로 주무장이 6인치 포 8문으로서 4.1인치 10문의 엠덴과 비교할 수 없었으며 속도나 장갑도 엠덴을 상위하는 전투함이었다. 즉 정면승부로는 왠만해선 엠덴이 어찌해볼 도리가 없던 상대.
뒤늦게 상대가 호주 해군임을 안 엠덴은 급히 전투준비에 돌입, 포화를 주고받으며 9시 40분에 먼저 명중탄을 내는데 성공하여 시드니의 거리측정기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엠덴과 비교가 안되는 두터운 장갑을 가진 시드니는 4.1인치 포탄 따위는 맞으면서 개긴다는 정신으로 엠덴의 포화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계속 포격, 10시경이 되면 거리측정기가 날아간 상태임에도 시드니 승조원들의 수기계산(!)에 힘입어 엠덴과의 거리를 정확히 측정하고 반격을 개시했다.
이후 1시간여 동안 신나게 시드니로부터 두들겨 맞은 엠덴은 해안에 좌초했고, 이후 시드니의 항복 제의를 수락하며 2달여의 파란만장한 통상파괴전이 막을 내리게 된다.
코코스 전투로 호주군은 전사 4명 부상 16명의 비교적 경미한 피해를, 독일군은 134명이 전사하고 69명이 부상, 157명은 포로로 잡혔다.
4. 기타
엠덴이 고평가를 받은 것은 단 1척의 배, 그것도 경순양함이라는 보조함으로 인도양의 해운을 완전히 마비시켰다는 흠좀무한 전과도 전과지만, 마드라스나 페낭 습격과 같은 온갖 대담한 활동에, 작전기간 동안 국제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도 있다. 엠덴은 중립국 선박은 공격하지 않았고, 중립국 선박 검속 중에 협상국 화물이 있을 경우에만 화물을 압류했다. 오히려 중립국 선박들과의 거래를 통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석탄을 구매하거나 포로의 육상이송 및 석방을 부탁하여 적인 협상국으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엠덴 이후로 그 어느 수상전투함도 엠덴급의 통상파괴전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도 있다. 1차대전기에는 엠덴 이후로 정규 수상함에 의한 통상파괴전은 시도조차 못했으며, 2차대전때 그라프 쉬페 등으로 통상파괴전에 나섰으나 엠덴보다 훨씬 크고 강력한 전투함을 투입했음에도 전과는 엠덴의 반의 반도 안되었다. 결국 독일은 1, 2차대전에서 수상함에 의한 통상파괴를 거의 포기하고 통상파괴전의 주력 수단을 잠수함, 즉 유보트로 변경한다. 단 양 대전에서 모두 위장습격함을 보조적으로 운용했으므로, 수상함에 의한 통상파괴를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다.
한편, 코코스 섬에 상륙 후 통신중계소를 습격한 뮈케가 이끄는 엠덴의 수병들은 엠덴과 시드니가 포화를 주고받는 동안 섬의 범선[4] 을 탈취하고 도망갔다. 우선 중립국이었던 네덜란드 식민지 항구 파당[5] 에 12월 27일에 도착, 28일 밤에 파당을 빠져나와 예멘[6] 으로 항해했다. 1915년 1월 9일에 예멘 호데이다에 도착 후에 사나로 가서 46피트 삼부크를 고용해 북쪽으로 항해, Al Qunfudhah[7] 에서 더 큰 배를 구했고 이때쯤 티푸스로 한 명이 사망. 그후 베두인족과의 전투에서 두 명이 전사하고 세명이 부상당하는 모험극 끝에 콘스탄티노플의 독일군 대표부에 도착하니 이때가 1915년 5월 23일이었다. 코코스 전투가 일어난 1914년 11월 9일로부터 약 반년간 모험영화를 찍었다.[8]
여담이지만 저 상륙전대를 지휘했던 헬무트 폰 뮈케 대위는 고국으로 돌아가서 타고다닌 배 두 척의 이름을 따서 "The Emden"과 "The Ayesha"라는 2권의 책을 썼다. 영어로 번역되어서 나름 베스트셀러로 잘 팔린듯 하다.
1차대전 후에는 평화운동을 하다가 나치당 정권에 의해 함부르크의 강제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다만 해당 지역 총독이 전쟁 영웅이라고 석방시켰다. 2차대전 중에도 전쟁기간 내내 평화운동을 했다. 장남은 동부전선에서 1943년에 전사했고, 본인은 1957년까지 살아있었다.
이후 독일은 엠덴의 함명을 이어받은 또다른 경순양함을 건조, 1915년에 취역시켰지만 별다른 전투를 치뤄보지도 못하고 종전, 전후 프랑스에 배상함으로 양도되었다가 스크랩 되었다.
호주는 엠덴의 포 하나를 떼어내서 시드니 하이드파크에 전리품으로서 전시하고 있다.#
[1] 1861 - 1914, 최종계급 중장.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서양 통상파괴전에 나섰던 포켓전함 그라프 쉬페가 바로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2] Kapitänleutnant로 되어있고 영어로 번역시 First Lieutenant가 되는 것으로 보아 갑판사관인 것 같다.[3] 정확히는 "Unidentified ship off entrance."라는 메시지를 전송했다[4] Ayesha라고 명명된 95톤급 스쿠너(...)[5] 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서 가장 큰 도시[6] 당시 독일의 동맹이었던 오스만 제국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7] 지금의 사우디 아라비아 서남부 지역이다.[8] 실제로 독일에서 2012년 Die Männer der Emden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다.(...)직역하면 '엠덴의 남자들' 정도. 독일어를 할 줄 아는 관심있는 위키러 들은 구해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