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감록

 

鄭鑑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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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3. 여담
4. 같이보기


1. 개요



조선시대 말기에 등장한 작자 미상의 도참서. 고려시대 십팔자위왕 예언의 후속작.

2. 내용


정감록은 정본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본이 많다. 온갖 도참서가 다 섞인 형태로 전해지지만, 정감록 모든 판본에 포함되기 때문에 아마도 원형이리라 추측하는 것이 감결(鑑訣)이다. 그리고 감결은 내용이 조선의 조상이라는 이심(李沁)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이 금강산(또는 가야산)에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다. 그래서 책 이름이 정감록.
정감록이라는 제목 때문에 세간에는 정도전이 저술했다고도 하고, 혹은 정여립이 저술했다고도 하지만[1] 설득력은 없다. 정몽주나 그 후손이 썼다는 설도 있는데, 조선왕조 건국 직후 불안한 민심을 배경으로 이 책이 집필되었다는 것이다.
정확히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대체로 18세기 영조, 정조 무렵에 나왔다고 추측한다.[3] 지금까지 밝혀진 역사 기록들 중에서 정감록이 최초로 언급된 예는 조선 영조 15년(1739) 6월 9일자 승정원일기인데, 여기서 영조 임금은 “정감록은 도적들이 믿는 책이니 매우 교활하고 사악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감록이 이때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그 이전에도 정감록에 원형으로 추정, 포함되는 예언서들은 전해졌다고 추측한다. 세조 3년(1457) 5월 26일자 세조실록 기사를 보면, 세조가 팔도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대변설(大辯說),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 안함노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도증기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수찬기소(修撰企所), 동천록(動天錄), 마슬록(磨蝨錄), 통천록(通天錄),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들을 개인이 갖지 말고, 나라에 바치도록 명했다.”라는 내용도 있다. 이 문서들은 모두 정감록과 비슷한 내용의 예언서이고, 그렇기 때문에 조정에서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불온한 문서로 간주하여 개인의 소유를 금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감록은 정부의 탄압을 피해 민간에서 계속 돌아다녔고[4], 조선 왕조가 무너진 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쉬운 이해를 위해 비유를 하자면, 정감록은 오늘날 인터넷 이용자들이 자유롭게 글을 쓰고 편집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 백과사전’과 같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더구나 조선시대에는 지금과는 달리, 저작권에 대한 법이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손으로 글을 써서 책을 내는 필사꾼들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정감록을 마음대로 추가하거나 편집했을 것이다.
정조 9년(1785)에 일어난 이율, 양형, 홍복영의 모반 사건(정감록 모반 사건)에 정감록이 확실히 등장하기 때문에, 분명히 그 이전에 형성되었을 것이다. 정도령의 모델이 실제로 청나라에 대항해 명나라를 복원하려고 한 정성공이나 그의 아들 정경이라고 보는 최근 학설에 의하면, 17세기 중반(인조 말 - 효종 연간)까지 성립연대를 올려 보기도 한다.
다만 정씨 성을 가진 구세주인 정도령이 조선 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 왕이 된다는 정감록의 기본 줄거리 자체는 이미 16세기 말, 정여립의 난을 일으킨 정여립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아울러 인조 9년(1631) 2월 3일자 인조실록에 의하면 옥천에 사는 권대진이라는 자가 예언을 믿고 모반을 일으켰는데, 그와 한패인 권락과 권계 등은 ‘영남의 '''정(鄭)'''씨 성을 가진 사람은 생김새가 기이하고 두 어깨에 해와 달의 모양이 있는데, 이 사람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을 것이다. 이 사람은 가야산 아래에 사는데, 이름은 한(澣)이고, 나이는 임오생(壬午生)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역시 권대진과 한 패인 양천식은 ‘기미년 사이에 지리산에 가서 글을 읽던 중 어느 날 기이한 사람을 보게 되었다. 성은 '''정(鄭)'''이고 이름은 한(澣)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은 과연 새로운 도읍의 주인이 될 만 하였다.’라면서 장차 충청도의 계룡산을 새 도읍으로 정하려 했다는 것이다.
정성공이 반청복명 활동으로 유명해진 때는 아무리 빨리 잡아야 명나라가 망하고 그가 무장투쟁을 시작한 1647년 이후부터다. 인조실록이 기록되던 17세기에는 인터넷도, TV도, SNS도 없었던 때였는데 과연 조선인들이 무슨 재주로 이제 고작 7살밖에 안 된, 그것도 먼 남의 나라에 사는 외국인 아이를 구세주라고 생각했을까? 아니, 7살짜리 어린 아이인 정성공의 존재를 알기나 했을까? 물론 정성공의 존재가 해상진인이나 해도진인 전설에 영향을 주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도령 자체가 정성공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자 논리비약이라고 볼 수 있다. 정성공이 반청복명을 내걸고 전쟁을 벌이기 이전부터 이미 조선인들은 자기들 스스로 정씨 성을 가진 구세주의 존재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정감록에 있는 "이씨가 망한다." 하는 구절로 보아, 조선 왕조에 반대하는 의도를 내포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부 학자들은 정감록이 성리학을 위시한 조선 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민중의 저항 이데올로기'로 형성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런 내용 탓에 조선 시대에는 금기시되었지만, 민간에서 암암리에 퍼졌다.
필사가 반복되면서 판본이 다양하게 형성되었지만, 핵심요지는 조선왕조(木子,李)가 망하고 계룡산에 정씨가(奠邑,鄭)(정도령이라는 진인[5])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다.[6] 정감록 모반 사건의 판본에서는 이씨가 망하고 김씨, 유씨, 정씨의 삼국으로 나뉘었다가 최종적으로 정씨가 통일한다고 씌었다고 한다.[7] 다른 판본에서는 정씨의 계룡산(鷄龍山) 도읍 8백 년이 있고, 다음은 조씨(趙氏)의 가야산(伽倻山) 도읍 5백 년(혹은 천년), 또 그 다음은 범씨(范氏)의 완산(完山) 7백 년(혹은 6백 년이나 천년)과 왕씨(王氏)의 재차 송악(松嶽 : 개성) 도읍 천년(혹은 500년)이라고 한다. 또한 조선 왕조가 망하고 정도령, 혹은 정진인[8]이 새 왕조를 세우기 전까지 환란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를 피할 십승지로 피난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고도 한다.[9]
문제는 이 십승지이다.[10]
  • 풍기 차암 금계촌으로 소백산 두 물골 사이 (豊基車巖金鷄東峽小白山兩水之間) = 현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 화산 소령의 옛터 청양현 봉화 동촌으로 넘어 들어가는 곳 (花山召嶺古基在靑陽縣越入奉化東村) = 현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도심리
  • 보은 속리산 네 등성이 인근 (報恩俗離山四甑項延地) = 말 그대로 속리산 산속
  • 운봉 행촌(雲峰杏村) = 현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 예천 금당실(醴泉金堂室) = 현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동
  • 공주 계룡산 유구와 마곡 두 물길 사이(公州鷄龍山維鳩麻谷兩水之間) = 현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 영월 동쪽 상류(寧越正東上流) = 현 강원도 정선군에서 영월군으로 향하는 조양강
  • 무주 무봉산 북동방상동(茂朱舞鳳山北銅傍相洞) = 현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11]
  • 부안 호암 아래(扶安壺巖下) = 현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 합천 가야산 만수동(陜川伽倻山萬壽洞) = 현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 남산 제일봉
그런데 몇 가지 묘한 점이 있다. 십승지로 지목된 곳들이 대체로 남부 지방이라는 점인데, 이로 미루어볼 때 정감록의 형성지는 남부 지방에서 가까운 곳이 아니라, 때가 되었을 때 남부 지방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내용으로 보면 북쪽, 특히 서북 평안도 지역이라고 추정함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규모 봉기인 홍경래의 난이 농민 봉기에서 정감록을 본격적으로 활용한 첫 사례이다. 이후 홍경래의 이름과 더불어 정감록은 19세기 농민 봉기의 바이블처럼 사용되었다.[12]
그리고 해당 지역들은 대읍(大邑, 큰 고을)은 전무하고, 상당수는 산속, 협곡, 바위그늘 등 일반적 거주지로서는 부적합[13]한데, 대신 외부에서 접근하기 어렵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지역들이다. 즉, 무릉도원이라기보다는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에서 언급하는 베이스 캠프에 가깝다. 이를 위와 조합하면, 농민 봉기를 일으켰다가 실패했거나 세금문제 등으로 야반 도주한 사람들이 실제 역사의 빨치산마냥 숨어들기에 최적의 지세가 바로 저 십승지들이다.
그 외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 동학 접주 손화중이 선운사 마애좌불상 배꼽 아래에서 꺼냈다는 '비결록'이 정감록이었다 카더라라는 이야기가 오지영의 <동학사>에 있다. 선운사는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안리에 있는 로 바위맥 끝에 위치한 도솔암 마애좌불상이 유명하다. 이 마애좌불상은 보물 1200호로 지정되었으며 크기 15.6 m로 절벽에 새겨졌다.[14] 명치 부근 배꼽에 봉인된 흔적이 있는데 이 안에 검단 선사가 비결록을 써 넣었다는 전설이 있다. 조선 말 전라 감사 이서구가 이 비결록을 꺼내기 위해 봉인을 풀었다가 하늘에서 갑작스레 천둥 벼락이 내렸고, 이서구가 책의 첫 장을 열어보니 첫머리에 "전라 감사 이서구가 연다." 라는 구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서구는 두려워하며 다시 봉인하였고 19세기 말 손화중이 이 비결록을 가져갔다고 한다.
본문에 나오지는 않지만 정감록 하면 항상 언급되는 궁궁을을(弓乙)이란 주문이 있는데, 이것의 해석으로 반란도 일어나고, 동학 등 조선 말 ~ 일제 강점기의 많은 신흥종교들이 제각기 해석해서 교리로 삼았다.[15]
정감록은 일제강점기까지도 많은 신흥종교의 경전으로 활용되었다. 십팔자위왕설이 조선 건국으로 맞아떨어지자,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반란에 적당한 명분을 끼얹으려는 새로운 도참설로 떠올랐지만 십팔자위왕 때와는 달리 이 설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나마 억지로 끼워맞추면 정(鄭)에서 오른쪽 부수를 뺀 글자는 존(尊)과 비슷하게 되는데 이 글자는 원칙적으로 성을 사용하지 않는 일본 황실에서 황족 인명의 끝에 붙인다는 점을 들어 사실 일제강점기정감록이 예언한 정씨 왕국이었다고 해석은 된다.

3. 여담


  • 성이 정 씨인 유력 대권주자가 나올 때마다 '정도령' 드립이 많이 나왔는데[16], 특히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통일국민당 창당과 1992년 대선 출마, 2010년대 들어서는 충청도 출신의 정운찬 당시 총리가 잘 맞아 떨어져서 자주 나왔다.[17] 그래서인지 이제는 아예 정씨 유력 정치인들을 패러디할 때도 종종 쓰이는 모양이다. 민주평화당 정동영 의원의 경우 본인이 2007년 유력 대권 주자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본인의 이름과 발음이 비슷해서 지지자들로부터 정도령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지금은 오히려 지지자가 아닌 사람들이 조롱의 의미로 그렇게 부른다. 오히려 제17대 대통령 선거에는 이씨인 이명박이 당선됐다. 2020년 현재까지 역대 대통령 중 정씨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대통령 권한대행이나 영부인, 북한 역대 국가원수에서도 정씨는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정씨보다 드문 성씨인 윤씨, 전씨, 노씨, 문씨에서도 대통령이 나왔음을 감안하면, 예언이 들어맞기는커녕 계속 빗나간 것이다. 뭐 다만 정씨가 흔한 성씨인만큼 언젠가는 나오긴 할 가능성이야 있다고 할 수 있다.
  • 조선 말기에 정감록을 신봉하는 서민들이 이미 많았는데, 조선이 진짜로 망해버리자 정감록을 당장 실천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서민들이 많았다. 그래서 지금의 북한 지역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하삼도에 이주해서 6.25 때 피해를 거의 보지 않게 되었다.[18] 낙동강 방어선 때 북한군이 진주했지만 그 기간이 짧아 저런 깊은 산골까지 철저히 통제간섭하진 못했기 때문이다. 북쪽 사람들이 이주한 길지를 '감록촌'이라고 부른다. 현재도 그때 생긴 마을이 남아있는 곳도 있지만 산간벽지인지라 개발에서 소외되어 젊은 후손들은 대부분 대도시나 그 근교도시에 거주한다.
  • 서점에 가면 정감록이란 제목으로 여러 책이 팔리지만 내용이 전부 다르다. 사실 원본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최초의 '정감록'을 썼겠지만 이런 금서는 유통 금지이기에 '정감록이라는 미래를 다루는 금서가 있더라~'라는 말만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책은 전해지지 않았다. 이런 오리지날 '정감록'에 대한 인기를 바탕으로 B라는 사람도 C라는 사람도 정감록이라는 인지도를 바탕으로 흥행을 노리고 다른 내용이 담긴 '정감록'을 작성했다. 결국 시간이 갈수록 '정감록'의 내용과 판본은 계속 증가했다.
  • 머리 작고 발 없는 것(小頭無足)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도 해석이 다양하다. 불 화(火) 자를 아래위로 반씩 잘랐다든가, 미사일의 형상이라든가, 심지어 외계인이라든가.
가장 그럴듯한 풀이는 이곳을 참고바란다. 링크 누르기가 귀찮을 이들을 위해 옮겨 적자면 '小頭無足'은 그냥 削(깎을 삭)의 파자(글자 쪼갬)다. 형벌로써 발꿈치를 벤다(≒발[足]이 없게끔[無] 한다)는 뜻의 刖(월)이라는 한자의 머리[頭]에 小(소)를 얹으면 削(삭)이 된다. 그리고 해당 예언이 돌았을 연대(1890년대 후반)와 "殺我者誰(살아자수) 小頭無足(소두무족) 神不知(신부지)"라는 원문 문맥까지 고려하여 해석해 보면 "머리 깎는 단발령 때문에 온전한 내가 죽게 되어 조상신께서도 못 알아보실 것"이라는 내용이 된다. 즉 단발령으로 대표되는 급격한 근대화로 인한 아노미적(?) 분위기를 이야기한 것에 불과하다.
  • 대부분의 도참서가 그렇듯 내용이 모호하다. 따라서 독자가 대충 시대 상황에 맞춰서 내용을 해독한다. 조선이 멸망했으므로 정감록이 참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다 건너 섬나라의 진인이 백성을 구할 것이다'라는 내용[19]을 미국[20]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해서 광복을 맞이하게 했다는 사실 때문에 당시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이 트루먼이 진인(True + Man)이다라고 여겼다.
  • 기묘하게도 정감록에 나오는 정씨 왕조의 도읍지로 꼽히는 계룡산이 한때 대한민국 제4공화국(박정희 유신 정권)이 행정수도 이전을 구상했던 공주시나, 현재 행정중심복합도시가 들어선 세종특별자치시와 굉장히 가깝다. 심지어 계룡대도 있다. 세종시 이전 당시에는 계룡산 아래 신도안이 최종 4개 후보지 안에 들었으나, 세종시는 연기군 남면 지역에 들어섰다. 신도안이 탈락한 가장 큰 이유는 조선시대라면 몰라도 현대 도시가 들어서기에는 입지가 좁고 교통도 불편하다는 것.


4. 같이보기



[1] 정여립의 난 전에 정여립이 '목자망 전읍흥'(이씨는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을 퍼뜨리고 반란군의 최고 수장이 길삼봉, 차장이 정팔룡이라 칭했다고는 한다. 다만 정여립의 난이 아직도 논란이 분분한게 흠[2] 김귀주쪽 사람인 이율, 홍국영의 사촌동생 홍복영이 가담했으며 훗날 구선복 역시도 난을 일으킬 때 앞장설 장군의 운세가 좋은지 문양해에게 물어봤다고 한다.[3] 이 정조 시기에 정감록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문양해라는 자가 가상의 신인을 만들고 사람들을 선동하며 반란을 일으키려다가[2] 처형되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 때 그는 사람들에게 장차 이씨가 망하고 나라가 세쪽으로 갈라지다가 끝내는 정씨가 통일하게 될 것이라고 선동했다. 아래의 정감록 모반 사건인지는 의문[4] 조선 후기로 가면 양반들이 모이는 사랑방에서 가장 인기있는 화제거리가 바로 정감록에 적힌 예언에 대한 토론이었다고 한다. 비록 정감록이 조선 왕조 내내 반정부 불온문서로 분류되어 금서로 지정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감록이 토론의 대상이 될 만큼, 무척이나 인기있는 책이었던 것.[5] 眞人은 도교에서는 수행을 마친 선인의 의미로, 불교에서는 바른 인간이란 뜻으로 쓰인다.[6] 그러나 본문 중에 정도령이란 말은 나오지 않는다.[7] 정씨의 나라가 건국된다는 내용은 앞서 언급한 정몽주, 정도전, 정여립의 예를 통해서, 당시 백성이나 조선 왕조 반대 세력들이 정씨를 이씨 왕조의 대체재로 여겼다는 점을 알수 있다.[8] 한 판본에서는 진인의 사주까지 서술하였다. 기사년 무진월 기사일 무진시로 가운데, 즉 왕을 상징하는 土의 천간이 4개나 있으며 사(뱀)가 진(용)이 된다는 뜻이다.[9] 십승지 중에서도 어느 땅이 좋은지는 해석이 다양하다. 군사적 요지인 곳이 좋다는 해석도 있고, 땅이 기름진 곳이나 풍수적으로 좋은 곳이 좋다는 해석도 있다. 자세한 것은 이중환의 택리지를 참고.[10] 다만 정감록의 판본이 워낙 많다보니, 십승지도 정감록마다 다 다르다.[11] 단 이쪽은 이론(異論)이 많다.[12] 단, 본문에선 북쪽 땅은 전부 불모지 취급이니 심히 안습. 단적인 예로 십승지 안에 북쪽 땅이 한 군데도 없다. 실제로 6.25 전쟁 당시, 이북 출신들 중 정감록을 접하고 남쪽 십승지 일대로 피난온 피난민들이 다수 있었다고 한다.[13] 그래도 하천 하나씩은 끼어서 거주 자체는 가능하겠지만 많은 피난민을 한꺼번에 부양할 만한 지역은 아니고, 척박한 내륙 산악지역이라 겨울을 넘기기 어렵다는 평도 있다.[14] 마애(磨崖)라는 단어가 절벽이나 큰 바위에 새겼다는 뜻이다.[15] 정감록 어느 판본에 몸을 보전하기에 양궁(兩弓)만큼 좋은게 없다 라는 구절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해석은 불분명하다. 정감록에 영향을 받은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는 궁을부라는 부적을 그렸고, 부적을 궁궁이라 일컫기도 했다. 동학농민항쟁 당시에도 이 문구를 부적삼아 총탄을 막으려는 믿음을 가졌다.[16] 심지어 정씨가 아닌 노태우의 선전 만화에는 정씨가 당나귀 정씨로 불리기도 한다면서 귀가 큰 노태우와 관련이 있다는 식으로 연결하기도 했다.[17] 마침 정운찬 당시 총리 재임시기(이명박 정부)에 행정수도(현 세종 행정중심복합도시) 이전 논란이 이슈가 되기도 했다.[18] 출처: 정감록이 예언한 십승지마을을 찾아 떠나다/ 남민 저/ 소울메이트/ 2014년 3월[19] 이 대목이 최근 학자들이 정도령의 모델이 정성공이라고 추정하게 된 큰 근거이다.[20] 신대륙을 섬나라로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좀 애매하지만... 바다 건너에 있음은 사실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