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바 고이치로

 

'''일본 외무대신'''
'''제141대'''
마쓰모토 다케아키

'''제142대
겐바 고이치로'''

'''제143~144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중의원 (후쿠시마 3구)'''
'''제41대'''
아라이 히로유키

'''제42~48대
겐바 고이치로'''

''현직''
'''일본 제142대 외무대신
(けん((こう(いち(ろう
겐바 고이치로
'''
'''출생'''
1964년 5월 20일 (60세)
후쿠시마현 타무라시
'''학력'''
후쿠시마현립 아사카 고등학교
조치대학 법학부 졸업
'''가족'''
배우자[1]
'''정당'''

'''의원 선수'''
'''9''' (중)
'''의원 대수'''
40, 41[2], 42, 43, 44, 45, 46, 47, 48
'''지역구'''
후쿠시마 3구
'''약력'''
후쿠시마현의회 의원
후쿠시마현 제3구 중의원
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
민주당 간사장 대리
중의원 재무금융위원장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외무대신
1. 개요
2. 생애
3. 소속 정당
4. 둘러보기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후쿠시마현 제3구 중의원으로, 후쿠시마현의회 의원, 민주당 간사장 대리,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외무대신 등을 역임했다.

2. 생애


1964년 5월 20일, 후쿠시마현 타무라시에서 태어났다. 후쿠시마현립 아사카 고등학교를 거쳐 조치대학 법학부를 졸업한다. 1987년 4월 마쓰시타 정경숙을 졸업한다. 1991년에 자유민주당 공천을 받아 후쿠시마현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초선한다. 당시 26세였는데, 현의원 사상 최연소였다. 그러던 중 1993년에 현의원을 임기 중에 사임했다.
1993년의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구 후쿠시마현 제2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초선한다. 같은 해 11월,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이 제출한 정치 개혁 법안에 찬성, 다음 달 신당 사키가케에 입당했다. 1996년에는 앞서 탈당한 하토야마 유키오와 간 나오토를 중심으로 결성된 민주당에 참여한다. 같은 해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후쿠시마현 제3구에서 출마하나 자민당의 아라이 히로유키에게 패배하고 석패율제로 부활한다.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출마하여 당선되고, 2003년의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41회 총선거에서 패배했던 아라이 히로유키를 쓰러트리고 4선한다. 2004년 간 나오토의 사임 후 오카다 가쓰야가 민주당 대표로 취임하면서 그는 민주당 선거 대책 위원장에 취임했다.
2005년의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후쿠시마현 제3구에서 5선한다. 같은 해 9월 민주당 대표 선거에서는 마쓰시타 정경숙의 동기였던 마에하라 세이지를 지지했다. 결국 마에하라는 대표로 선출된다. 마에하라가 메일 논란으로 사임 후 후임 오자와 이치로 대표에게 간사장 대리의 연임 요청을 받았지만 거부했다.
2007년 3월에는 민주당 분권 조사 회장, 9월에는 중의원 청소년 문제에 관한 특별 위원장에 취임한다. 2009년 8월 31일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자민당 요시노 마사요시를 꺾고 당선된다. 2009년 9월 정권 교체로 중의원 재무금융위원장에 취임한다. 문예춘추 2010년 3월호에서 비 오자와파와 친 오자와파로 계파 갈등이 심해지자 오자와 이치로를 배울 점이 많다고 하면서도 오자와에 의지하면 안 된다고 발언했다.
2010년 6월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사의를 표명하자 후임 대표 간 나오토는 겐바를 민주당 정책조사회장에 임명했다. 2010년 6월 8일 간 내각에서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에 취임하고 개조 2차 내각 때까지 연임한다. 2011년 4월 29일,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의 복구에 예산안의 성립을 향한 3당 합의 문서를 자민당의 이시바 시게루, 공명당의 이시이 게이이치 정조회장과 나눴다.
2011년 9월 2일에 출범한 노다 요시히코 내각에서 외무대신에 취임한다. 당시 나이는 47세로 전임 마에하라 세이지를 제치고 전후 최연소이다.
이후 46, 47회 총선에서도 당선되다가 오카다 가쓰야에 의해 선거대책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민진당 시기에서도 역임하다가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국민민주당에 참여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활동하게 된다. 2019년 1월 16일 무소속 교섭단체 사회 보장을 재건하는 국민 모임을 설립해, 간사장으로 취임한다.
입헌민주당이 주도하는 신당에 참여한다고 밝혔다.#

3.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91 - 1993
정계 입문

1993
당내 노선 차이로 탈당

1993 - 1996
입당

1996
민주당 창당을 위한 탈당

1996 - 1998
창당

1998 - 2016
합당[3]

2016 - 2017
당명 변경

2017 - 2020
탈당

2020 -
입당

4. 둘러보기



[1] 장인이 일본 참의원, 후쿠시마현지사 등을 역임한 ‘사토 에이사쿠’(전 총리 사토 에이사쿠와는 동명이인.)이다. 효고현지사 이도 도시조와 함께 도주제를 반대했었다.[2] 석패율 비례대표.[3] 민정당, 사회시민연합, 신당우애와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