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흥례문
1. 개요
景福宮 興禮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2. 상세
원래는 1426년(세종 8년)에 집현전에서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으로 이름을 지어올렸는데,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휘 홍력(弘曆)을 피하여 지금의 흥례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1]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1912년 철거되었으나, 문민 정부 때 총독부 건물을 철거한 후 2001년 10월 26일에 다시 흥례문을 복원하였다.
흥례문 중앙에서 경복궁 안쪽을 들여다보면 영제교를 지나 근정문, 근정전이 차례로 일자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근정전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근정문 뒷편의 사정전과 강녕전, 교태전도 모두 일자로 배치되어 있다. 다만 경복궁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은 2006년 12월까지 한쪽으로 틀어져 있었는데,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철거했던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복원하면서 원래의 위치가 아닌 조선총독부 건물에 맞추어 지었기 때문이다. 현재 구 광화문은 철거되었고, 광복 65주년인 2010년 8월 15일에, 기울어졌던 3.75도를 바로잡고 고종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현판의 글씨는 서예가 소헌 정도준 선생(紹軒 鄭道準. 1948 ~ )이[2] 쓰고 각자장 철제 오옥진 선생(鐵齋 吳玉鎭, 1935 ~ 2014)이 새겼다.
3. 기타
- 고려왕조의 만월대에도 한자도 동일한 흥례문이 있었다. 원 이름은 창덕문으로 정전 천덕전으로 가는 사문(四門)[3] 이었다. 경복궁 흥례문과 비슷한 위치의 대문이었지만 정전이 회경전으로 바뀌면서 경복궁 흥례문보단 격이 떨어지는 문이 되었다.
- 고려는 대문이 다섯 개[4] 였기 때문에 중문은 없었다. 궁궐 정문 승평문과 정전 정문 회경문 사이엔 신봉문(神鳳門), 창합문이 있었는데, 두 문 중 신봉문이 집중적인 대우를 받았기에 만월대 신봉문이 경복궁 흥례문 급 대문이었다고 억지로 맞출 수 있다.
- 고려의 별궁인 장락궁에도 흥례문이 있었다.
4. 부속 건물
4.1. 유화문
4.2. 기별청
[1] 고대 동아시아 문화권의 특유한 문화 중 하나로 "피휘(避諱)"가 있는데, 군주나 조상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피하여 그와 의미나 발음이 비슷한 글자로 바꿔쓰는 관습이다. 우리나라의 예로는 대표적으로 고려 혜종의 이름인 '왕무王武'를 피하여 무장武將/무신武臣들을 용맹한 의미의 범 호를 차용하여 호장虎將/호신虎臣으로 불렀다.[2] 경복궁 유화문, 창덕궁 진선문 및 숙장문의 현판과 숭례문 복원 상량문을 썼다.[3] 조선은 정전까지 가는 대문을 3개로 두었지만, 고려는 5개를 두었다.[4] 광화문(황성 정문), 승평문, 신봉문, 창합문, 회경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