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교태전
1. 소개
景福宮 交泰殿
경복궁의 건물로 왕비의 정식 침전, 즉 중궁전이다.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의 북쪽에 있다. 광화문부터 시작된 경복궁 중심축의 제일 끝을 장식하는 건물이다.
현판의 글씨는 고종의 사촌형이자 문신인 완림군 이재원(1831 ~ 1891)이 썼다.# 1990년대 초에 일제강점기에 만든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나온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다. 광화문 현판과 같은 케이스.
2. 이름
이름은 《주역(周易)》의 64괘 중 '태괘(泰卦)'에서 유래했다.
태괘는 위에 음(陰)을 상징하는 곤(坤,땅), 아래에 양(陽)을 상징하는 건(乾, 하늘)이 있는 모양이다. 이것은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내려가고 올라가면서 만나 교통(交通)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왕(남자, 양)과 왕비(여자, 음)가 서로 잘 지내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이다.
3. 역사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이 태조 시절에 처음 지어졌으나 교태전은 세종 연간에 건립하였다. 《세종실록》의 이 기사를 볼 때 1440년(세종 22년) 이후에 지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세조 때에 신하들을 만나 나랏일을 의논하기도 하고# 공적인 잔치도 열었던 것#을 보아 조선 초기엔 편전의 역할도 겸하였던 것 같다.
1553년(명종 8년)에 화재로 불탄 후 2년 뒤 재건하였고 1557년(명종 12년)에는 처마를 보수하여 홑처마를 겹처마로 바꾸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탄 뒤 270여 년간 방치 상태로 놓았다가 1867년(고종 4년)에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73년(고종 10년)에 불타 다시 지었으나 1876년(고종 13년)에 또 불타고(...) 1888년(고종 25년)에 재건하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때엔 귀빈관으로 쓰이다가 1917년 불타 없어진 창덕궁 내전을 재건할 때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내전 건물을 자재로 쓰면서 해체, 이전되어 지금은 대조전 건물이 되었다. 이후 80년 가까이 빈 터로 남아 일제가 전국 각지에서 강제로 옮긴 석탑, 부도 등이 놓여 있다가 1990년대 경복궁 종합 정비 계획 사업의 일환으로 1995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4. 특징
- 영조 때 만든, 조선 초기 경복궁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경복궁전도(景福宮全圖)》를 보면 강녕전과는 한 영역으로 묶여있고 강녕전의 부속 건물 연생전, 경성전과 복도로 이어져있다. 이는 완전히 영역이 떨어진 지금과 많이 다른 모습이다.
- 정면 9칸, 측면 4칸의 1층[1] 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또한 장대석을 높게 쌓은 4단의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각기둥을 세운 뒤, 쇠서[2] 2개를 둔 이익공 공포에 겹처마 양식으로 지었다. 기둥의 경우, 외진주는 네모나게, 내진주는 둥글게 하여[3] 천원지방[4] 사상을 나타내었다. 강녕전과는 달리 중앙에 월대 없이 5단 짜리 계단만 3개를 설치했으며 뒷면에는 계단 한 개만 놓았다. 각 지붕 끝에는 정전 근정전처럼 잡상이 7개 올려져 있다. 교태전 정면에서 볼 때 대청에서 좌, 우로 3번째 칸 밑에 작은 아치 형 문이 있는데 이 문으로 들어가면 온돌을 땔 수 있는 함실 아궁이가 나온다.
- 내부는, 가운데 정면 3칸, 측면 2칸을 대청으로 놓고 칸을 나누지 않고 한 공간으로 뚫어 넓게 쓸 수 있게 하였으며 천장은 우물 반자[5] 로 막고 단청을 아름답게 칠하여 화려함을 부각하였다. 대청을 중심으로 동, 서 양 옆의 정면 2칸, 측면 2칸을 온돌방을 두었으며 앞면의 협칸과 측면의 칸들을 모두 마루로, 뒷면의 협칸은 쪽방으로 구성했다. 온돌방의 경우, 대청 쪽의 칸은 1칸으로 통하여 공간을 넓게 활용할 수 있게 하였고 또한 대청과 온돌방을 연결하는 문은 중앙에만 창호를 두고 그 위 아래로 종이를 바른 불발기[6] 양식으로 설치하였다. 원래 각 방의 장지문마다 그림이 그려져 있었으나 지금은 창호지만 발라져있다. 단, 아미산으로 나가는 대청의 뒷 쪽 출입문에 2010년대 들어 십장생도를 그려넣어 보다 화려한 느낌을 준다. 원래 십장생에 없는 석류가 추가되었는데 이는 다산을 상징한다고.
- 시각적으로 다른 건물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차이점이 있는데 바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다. 이 것을 일컬어 ‘무량각(無樑閣)’이라고 하는데, 교태전 뿐 아니라 다른 궁궐의 왕과 왕비의 정식 침전은 다 이렇게 되어있다. 이유로 여러 가지 가설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왕비의 침전의 경우 새로운 용이 만들어지기에 한 건물에 두 용이 있어선 안 되어서 만들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고, 또 다른 설은 당시 동아시아 최선진국이었던 중국의 건축 양식을 모방했으나 조선에 익숙하지 않은 양식을 모든 건물에 적용하긴 어려웠기 때문에[7] 가장 존귀한 왕과 왕비의 집에만 선진 건축 기술을 적용했다는 설이다. 사실 용마루와 용과 관련 된 전통 기록은 하나도 없으며, 당장 중국만 가도 자금성의 황제와 황후 침전엔 용마루가 있고, 일반 서민 가옥들에 용마루가 없는 집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후자의 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중국 문물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대한제국기에 지은 경운궁의 침전 함녕전은 용마루가 있다.[8]
5. 여담
6. 부속 건물
6.1. 원길헌
景福宮 元吉軒
원길헌은 동쪽에 위치한 부속 전각으로, 이름 뜻은 <주역(周易)>의 '태괘(泰卦)'와 '곤괘(坤卦)'에서 유래했으며 ‘크게 선하여 길하다’는 뜻이다. 조선 초기엔 없었고 1867년(고종 4년) 경복궁 중건 당시 처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의 역사는 교태전과 같다.
출입문 쪽 벽면은 전면창호가 아니라 문선과 중방 사이에 창문을 내었다. 온돌방이 큰 방 3칸, 쪽방 3칸의 6칸, 마루가 대청 2칸, 쪽마루 2칸의 4칸, 다 합쳐 총 10칸 규모로 되어있는데, 동쪽 대청에서 남쪽으로 연결되는 동쪽 행각의 일부를 포함하여 그 부분까지 합쳐 실제로는 온돌방 4칸[9] 을 더 활용할 수 있다. 건물 앞쪽에 쪽마루를 설치해서 교태전 건물 안에서는 물론 건물 밖에서도 신발을 벗고 이동하기 편하게 만들었다. 기단의 높이가 교태전보다 한 단 낮아 건물 서열이 교태전보다 아래임을 확실하게 나타내고 있다.
1890년대 고종이 건청궁에 머물던 시기엔 다양한 용도로 쓰였다. <일성록>엔 약원(藥院)들이 여기서 진료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종이 외국 공사를 접견하기도 했다.# 이후 일제강점기이던 1917년 창덕궁 내전 재건 때 철거, 이전되어 원래의 원길헌은 흥복헌(興福軒)이 되어있다. 지금의 건물은 1995년 복원된 것이다.
복원할 때 현판이 조선시대 원형과 달라 논란이 일었다. 옛 사진을 보면 흰 바탕에 짙은 글씨[10] 로 되어있는데, 복원한 현재 모습은 검은 바탕에 흰 글씨이기 때문이다.
6.2. 함홍각
景福宮 含弘閣
함홍각은 교태전 서쪽에 위치한 부속 전각이다. 이름은 <주역(周易)> '곤괘(坤卦)'에 나오는 ‘함홍광대(含弘光大)’에서 유래했으며 ‘포용하고(含) 너그럽다(弘)’는 뜻이다.
역사와 건물의 구조는 원길헌과 동일하다. 단, 원길헌과 달리 북쪽에도 행각을 두었으며 남쪽 행각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6.3. 건순각
景福宮 健順閣
건순각은 교태전 동북쪽에 위치한 부속 전각이다. 이름은 <주역(周易)>에 나온 건괘(乾卦)는 굳건하고(健: 건)과 곤괘(坤卦)는 순하다(順: 순)는 의미의 ‘건건곤순(乾健坤順)’에서 유래했다. 역사는 원길헌, 함홍각과 같다.
평면이 ‘ㄱ’자로 되어있으며 교태전과 이어지는 쪽은 누각형 마루로 되어있어 아랫쪽에 기단이 없고 돌기둥으로 받쳐져있는데 그렇게 길지 않은 높이이다. 그 옆으로 온돌방을 2칸 놓았으며 그 북쪽에 마루 2칸을, 그리고 마루방 옆에 온돌방을 2칸 놓았다. 건물 앞쪽에 쪽마루를 설치해서 교태전 건물 안에서는 물론 건물 밖에서도 신발을 벗고 이동하기 편하게 만들었다.
현판은 건물의 서북쪽, 아미산을 바라보는 면에 있으며 1995년 복원되었는데 현판이 조선시대 원형과 달라 논란이 일었었다. 옛 사진을 보면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되어있는데, 복원한 현판은 검은 바탕에 흰 글씨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0년대 말에 원래 색대로 복원하였다.
KBS 사극 명성황후에서는 대왕대비전으로 나오는 전각이다.
6.4. 함원전
景福宮 含元殿
교태전의 부속 건물로 창건 연대는 정확히 모르나 세종이 궁궐 내 불당(佛堂)을 설치해 불교 행사를 행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세종 연간에 처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역사는 교태전과 같다.
이름은 ‘원기(元)를 간직(含)한다’는 뜻이다. 참고로 당나라에도 같은 이름의 궁전이 있었다.
장대석을 세 단 쌓은 기단 위에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정면 6칸, 측면 4칸의 총 24칸으로, 이익공 양식으로 지어졌고, 창방[11] 위로 화반[12] 과 운공[13] 을 설치하였다. 남쪽 가장자리 칸 전체를 툇마루로 놓고 중앙의 4칸을 대청으로 둔 뒤 대청을 중심으로 동, 서 양쪽 4칸을 온돌방으로 꾸몄다. 북쪽 가장자리 칸의 경우, 온돌방 쪽은 쪽방으로, 대청 쪽은 툇마루로 두었다.
한 때 중종이 경회루와 근정전처럼 함원전의 지붕도 청기와로 올리도록 하였는데 # 실제로 올렸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현판의 글씨는 1888(고종 25)년에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지낸 문신 이명재(李命宰, 1838 ~ 1895)가 썼으며 1995년 함원전을 다시 지을 당시 예전에 쓰던 현판을 복원하여 걸었다.
7. 아미산
峨嵋山
교태전의 후원에 있는 인공산으로 태종 시절 경회루의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들었다. 백두대간과 한북정맥의 흐름을 경복궁까지 이어 백두산의 기를 받으라는 상징적인 뜻이 담겨있다. 다만, 일반적으로 이 기를 받을 사람을 왕비가 교태전에서 낳는 왕세자와 대군, 공주들로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아미산이 처음 조성될 때는 교태전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 기운을 받으라는 의미로 추측하는 경우도 있다.
이름은 중국 불교와 도교의 성지 중 하나인 아미산에서 따왔다. 그 산이 산둥성(山東省) 박산현에 있는 산인지 쓰촨성(四川省) 아미현의 산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교태전 건물을 따라 동서로 길게 뻗어 있으며 인공산이라 그런지 높이는 대체로 평평한 편이다. 2벌대의 장대석 석축을 쌓아 4단의 화계(花階)를 만들어 괴석과 함같이 생긴 돌 연못 두 개를 놓고 나무와 화초들을 심어 화려하면서도 운치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무는 총 13종이 심어져있는데 그 중 소나무, 회화나무, 감나무, 말채나무가 주를 이룬다.
7.1. 낙하담과 함월지
落霞潭 · 涵月池
아미산에 있는, 마치 함처럼 생긴 돌 연못들로 말이 연못이지 사실상 수조이다. 낙하담이 동쪽에, 함월지가 서쪽에 있다.
낙하담(落霞潭)은 ‘노을이 내려 앉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낙하(落霞)’는 ‘떨어지는 노을’, 또는 ‘저녁 노을’이라는 의미이다. 중국 남조시대 때 양나라의 황제였던 간문제가 지은 ‘등성(登城)’이라는 시에 “저녁 노을은 금방 이어졌다 끊어지고, 저녁 물결은 때마침 다시 돌아오네.”라는 표현에서 유래했다. 또한 초당사걸[14] 중 한 사람인 시인 왕발 이 지은 등왕각서(滕王閣序)에도 “저녁 노을(落霞)은 외로운 따오기와 함께 날고, 가을 물은 먼 하늘과 함께 한 가지 색이로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이 일반적으로 훨씬 유명하기에 여기서 따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함월지(涵月池)는 ‘달을 머금은 연못’이라는 뜻으로, 달이 돌 연못의 물 속에 비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아미산이라는 공간과 연관시켜 보면 이백의 <아미산월가>에 나오는 “아미산에 떠 오른 가을 밤의 반달이여, 달 그림자 평강에 들고 강물은 흘러가네.”라는 구절에서 따온 듯하다.
7.2. 굴뚝
아미산하면 4개의 굴뚝이 제일 유명하다. 교태전의 온돌방에서 나오는 연기를 내보내기 위해 만든 굴뚝이다.
육각형이다. 화강암 받침돌 위에 황토색 벽돌로 30단 정도를 쌓아 몸체를 만들었다. 몸체의 윗 부분은 소로와 창방 · 첨차 형태로 만든 벽돌을 쌓고 기와지붕을 이었다. 맨 위에는 연기가 빠져나가는 연가(煙家)를 점토로 만들어 두었다.
또한 각 면마다 봉황 · 학 · 박쥐 · 해치 · 사슴 · 대나무 · 소나무 · 국화 · 매화 · · 불로초 등의 문양을 구운 벽돌로 집어넣고, 무늬 사이사이에 석회를 넣었다.
굴뚝 4개 중 3개는 나란히 놓여있지만 1개는 동북쪽 끄트머리에 건순각의 출입문인 건순문과 거의 붙어있다시피 있다.
교태전 일곽의 건물들은 전부 1995년에 복원한 것이지만, 이 굴뚝은 1860년대 고종 시절의 모습 그대로이다. 거기에다 미적 가치 등이 뛰어났기에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1호로 지정되었다.
아미산을 둘러싼 담장에도 황토색 벽돌로 격자무늬를 내고 꽃 문양을 장식하였다. 이는 굴뚝과 조화를 이룸과 동시에, 자칫 밋밋할 수도 있는 담장을 예술 그 자체로 승화시키는 미적 감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8. 대중매체에서
- 궁궐 촬영이 비교적 쉬웠던 2000년대 이전 조선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중궁전으로 많이 나왔다. 희한하게 배경이 창덕궁일 때에도 나왔는데, 창덕궁의 대조전이라고 현판을 바꾸거나(...) 아니면 고증을 무시하고 교태전 현판 그대로 달고 나온다. 아미산 쪽 뒷면은 대비전으로 나온 경우가 많았다.
[1]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2] 소 혀 모양의 부재.[3] 정면과 측면이 협칸 이상의 규모를 가질 때 바깥의 기둥이 만들어내는 열을 외진(外陣)이라고 하고, 그 기둥열을 외진주(外陣柱)라고 한다. 또한 안쪽의 기둥이 만들어내는 열을 내진(內陣)이라고 하고, 그 기둥열을 내진주(內陣柱)라고 한다.[4] ‘하늘(天)은 둥글고(圓) 땅(地)은 네모나다(方)’는 동양의 전통적 사고방식을 말한다.[5] 서까래가 안보이게 천장을 가리고 평평하게 만드는 구조물.[6] 종이를 두껍게 바른 장지문의 한가운데에 교살이나 완자 살을 짜 대고 창호지를 바른 문.[7] 실제로 전통 가옥을 용마루 없이 지으면, 서까래를 고정하기 어려워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8] 사실 함녕전은 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였던 만화당(萬和堂) 을 옮겨 지은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황제의 침전인데 용마루를 그대로 냅둔 것을 봐서는 무량각에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게 맞는 것 같다.[9] 1칸은 쪽방.[10] 진한 청색인지 단순히 검은 색인지 알 수 없다.[11] 공포가 구성되는 목조 건축물의 기둥머리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해주는 건축 부재.[12] 공포대의 주간을 구성하는 건축 부재로 주로 주심포식 공포와 익공식 짜임에서 사용한다.[13] 이익공 건물에서 화반 윗 부분에 얹혀 장여와 도리를 가로 받친 건축 부재.[14] 중국 당나라 초기(7세기)의 중국 시단을 대표한 네 명의 시인. 왕발(王勃), 양형(楊炯), 노조린(盧照鄰), 낙빈왕(駱賓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