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유화문
1. 소개
景福宮 維和門
경복궁 흥례문의 서쪽 행각에 있는 문이다. 기별청의 남쪽에 있다.
경복궁 서남쪽에 있는 궐내각사로 가는 정문이었다. 흥례문 일곽은 정전 근정전 영역과 바로 붙어있었기 때문에 조회뿐만 아니라 국문이나 교서 반포 등 여러 중요한 행사들이 이루어진 곳이었다. 그래서 궐내각사에서 근무하던 관리들이 원활히 움직일 수 있는 문이 필요했고 유화문이 바로 그 역할을 했다.#
‘유화(維和)’ 뜻은 ‘온화(和)’, ‘조화(和)’이다. 여기서 ‘유(維)’는 어조사라서 뜻이 없다.
현판의 글씨는 서예가 소헌 정도준 선생(紹軒 鄭道準. 1948 ~ )[1] 이 쓰고 각자장 철제 오옥진 선생(鐵齋 吳玉鎭, 1935 ~ 2014)이 새겼다.
2. 역사
창건 시기는 모른다. 다만, 1867년(고종 5년)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영건도감에서 건물들의 이름을 지어 올렸는데, 이 때 유화문의 이름도 있는 것을 보아 저 때 처음 지은 듯하다.#
이후 유화문은 임금이 공식적으로 궁궐 밖을 오갈 때 지나는 문으로 기능했다. 정확하게는 수정전에서 숭양문[2] 과 유화문을 거쳐 흥례문을 지나 광화문으로 나갔고, 돌아올 때는 그 반대로 들어오는 코스였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가 경복궁에서 열리면서 흥례문 및 주변 행각과 같이 헐렸다. 그리고 공진회 개최 1년 뒤인 1916년에 일제는 흥례문, 영제교, 유화문, 기별청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었다.
8.15 광복 후인 1990년대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했고, 2001년 10월 26일에 흥례문과 같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3. 특징
- 현재 일반 관광객은 이 문으로 드나들 수 없다.
- 북쪽에는 기별청이 있고, 남쪽에는 흥례문 서쪽 행각이 있다. 유화문과 남쪽의 행각 사이에는 협문이 있다. 협문은, 인방 위에 안상의 모양대로 위, 아래 6개 씩 총 12개의 풍혈을 뚫은 궁판이 놓여있고[3] 그 위에 홍살을 놓은 형태이다.
- 임금이 공식행사가 있을 때 사용했던 문이기 때문에 정면 가운데에 어도가 깔려있다. 그리고 어도의 양 옆에는 신하와 관리들이 평상시에 다니던 길이 있다. 이 길들은 박석으로 포장해놓았다.
- 정면 3칸, 측면 2칸의 1층[4] 목조 건물이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는 다포식으로 화려하게 구성되어있다. 용마루와 추녀마루, 내림마루는 양상바름을 하고 그 위에 취두와 용두, 잡상을 두었다.
- 창방 위에 평방을 두었는데 다른 전각들과 비교했을 때, 창방에 비해 평방의 높이가 두드러져 보일 정도로 짧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창방과 평방의 단청은 같게 칠하는 게 대부분이나 유화문의 경우는 이 부분도 다르다. 창방의 단청은 모루단청[5] 이지만 평방의 단청은 소박한 긋기단청이다. 다만 초록색으로 된 계풍[6] 에 연한 녹색의 무늬를 화려하게 그려넣었다.
- 문짝은 나무 판으로 중앙 열 3칸에 달았다. 가운데 왕이 다니는 어칸(御間)을 조금 더 높게 만들었으며, 양 측면의 칸 마다 중인방을 끼우고 위, 아래 를 붉은색 나무 판으로 마감했다. 뒷면의 남쪽 측면에는 초록색 쪽문이 달려있다. 이 쪽문은 유화문 남쪽의 협문과 연결된다.
4. 여담
- 1887년(고종 24년) 3월에 충청도 회덕군[8] 에 살던 군수 송명로의 노비 월이(月伊)란 사람이 광화문의 서쪽 협문으로 들어와 유화문을 두드린 일이 있었다. 원통한 일이 있어서 두드렸다는데, 아무리 그래도 궁궐에 무단침입한 것은 잘못이었다. 그 벌로 월이는 곤장 100대를 맞았다.# 뿐만 아니라 6년 뒤에는 전 사과[9] 강홍(姜苰)도 월이와 똑같은 행동을 하여 의금부에 잡혀갔다.# 다만 강홍은 엄한 벌을 받지 않고 바로 풀려났다.#
5. 매체에서
[1] 경복궁 흥례문과 창덕궁 진선문 및 숙장문의 현판과 숭례문 복원 상량문을 썼다.[2] 수정전 일곽의 정문이다.[3] 윗 궁판의 경우, 5개는 온전히 뚫었으나 1개는 반으로 나누어 배치했다.[4] 보통 전통 건축에선 단층이라고 표현한다.[5] 부재 끝 부분만 화려하게 칠하는 단청.[6] 수평 부재의 위, 아래 선 사이의 공간.[7] 좌, 우 칸 궁판의 경우, 6개는 온전히 뚫었으나 1개는 반으로 나누어 배치했다.[8] 현재의 대전광역시 중구, 동구, 대덕구 일대.[9] 司果. 조선시대 5위에 있던 정6품 무관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