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강녕전
1. 소개
景福宮 康寧殿
조선시대 궁궐 중 하나인 경복궁의 건물로, 임금의 정식 침전이다. 왕도 사람이니만큼 자신만의 생활공간이 당연히 필요했다. 이 곳이 바로 그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쉽게 말해 왕의 집.
편전인 사정전의 북쪽, 중궁전인 교태전의 남쪽에 있다.
현판의 글씨는 1995년에 서예가 여초 김응현(金膺顯. 1927 ~ 2007)이 쓰고 각자장[1] 철제 오옥진(吳玉鎭. 1935 ~ 2014)이 새겼다.
2. 이름
조선 초 재상이던 삼봉 정도전이 지었다.
'강녕(康寧)'은 말 그대로 ‘편안함’을 뜻한다.[2] 《서경(書經)》의 〈홍범〉편에서 '홍범구주(洪範九疇)'란 원칙[3] 이 나오는데, 그 홍범구주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 복(오복: 五福) 중 세 번째인 ‘강녕(康寧)’에서 따왔다.
‘강'''령'''전’으로도 알려져 있다. ‘寧’을 '령'으로 읽고 쓰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듯 하다.[4] 그러나 그것은 활음조 현상 때문이다. '寧'의 앞 글자에 받침이 없는 경우 '녕'으로 발음하기 힘들어 편의상 그렇게 부르고 쓰는 것일 뿐이다. 강녕전의 경우, '녕' 앞의 글자 '강'에 받침이 있기 때문에 원래대로 강녕전으로 읽는 것이 맞다.
3. 역사
1394년(태조 3년) 경복궁 창건 당시에 처음 지었다. 1433년(세종 15년) 고쳐지었으며 1553년(명종 8년)에 화재로 사라진 뒤 재건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탔고 270여 년 뒤인 1867년(고종 4년)에 중건하였다. 그러나 1876년(고종 13년)에 다시 화재를 입었고 1888년(고종 25년)에 재건하였다.
일제강점기이던 1917년에 불타 없어진 창덕궁 내전을 재건할 때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내전 건물을 자재로 쓰면서 해체, 이전하였다. 그래서 지금은 희정당이 되었다. 이후 80년 가까이 빈 터로 남아있다가 1995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4. 특징
- 정면 11칸, 측면 5칸의 1층[5] 으로 조선 왕궁의 정식 침전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조선 전기에는 정면 7 ~ 9칸이었으나 경복궁 중건 이후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장대석을 높게 쌓은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운 뒤, 쇠서 2개를 둔 이익공 공포 양식으로 지었다. 동, 서 양 측면의 툇마루 부분은 긴 돌 기둥을 세워 마치 누각처럼 보이게 하였는데 이는 17세기부터 유행했던 궁궐 건축 양식의 특징이다. 건물 가운데엔 넓은 월대를 세워 위엄을 돋보이게 함과 동시에 위에 언급한 것처럼 행사 때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 가운데 3칸을 대청으로 놓고 좌, 우 양 옆에 9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건물 4면의 가장자리 칸들은 툇마루로 구성하였는데, 정면의 대청과 통하는 툇마루는 밖으로 드러나게 하여 출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툇간과 대청 사이의 출입문을 위로 올릴 수 있는 분합문으로 만들여 공간을 언제든 개방 또는 분리 가능하게 만들었다.
- 내부는, 대청의 경우 한 공간으로 뚫려있으며 천장은 우물 반자[6] 로 막고 단청을 아름답게 칠하여 화려함을 부각하였다. 온돌방의 경우 양쪽 방 모두 각각 9칸인데, 대청 쪽 방은 3칸을 한 칸으로 통하여 공간을 넓게 하였다. 가운데 방은 왕이 머무는 공간이고 기타 방은 왕을 보조하는 상궁들이 머물렀다. 원래 각 방의 장지문마다 십장생 등 그림을 그려넣어 장식했으나 지금은 창호지만 발라져있다.
- 시각적으로 다른 건물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차이점이 있는데 바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다. 이 것을 일컬어 ‘무량각(無樑閣)’이라고 하는데, 강녕전 뿐 아니라 다른 궁궐의 왕과 왕비의 정식 침전은 다 이렇게 되어있다. 이유로 여러 가지 가설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왕의 침전의 경우, 용(=왕)이 계신 곳 위에 불경스럽게 또 용이 누르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고, 왕비의 침전의 경우 새로운 용이 만들어지기에 한 건물에 두 용이 있어선 안 되어서 만들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고, 또 다른 설은 당시 동아시아 최선진국이었던 중국의 건축 양식을 모방했으나 조선에 익숙하지 않은 양식을 모든 건물에 적용하긴 어려웠기 때문에[7] 가장 존귀한 왕과 왕비의 집에만 선진 건축 기술을 적용했다는 설이다. 사실 용마루와 용과 관련 된 전통 기록은 하나도 없으며, 당장 중국만 가도 자금성의 황제와 황후 침전엔 용마루가 있고, 일반 서민 가옥들에 용마루가 없는 집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후자의 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중국 문물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대한제국기에 지은 경운궁의 침전 함녕전은 용마루가 있다.[8]
- 평상시엔 왕의 침전으로 쓰였지만 이따금씩 주요한 행사가 열리기도 하였다. 왕비가 신하들 및 내, 외명부와 왕족들에게 조회를 받는다던가, 궁중 잔치라던가, 또는 왕실 혼례의 일부 의식 등 여러 행사들이 이 곳에서 많이 열렸다. 이럴 경우, 대청에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월대까지 한 공간으로 묶어 활용하였으며 좌, 우 온돌방은 행사 핵심 인물들의 준비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1890년대 고종 재위 중반에 서양과 교류를 시작하던 시기엔 각 나라 외교관들을 접견하는 장소로도 이용하였다.[9]
- 부속 건물로 연생전(延生殿), 경성전(慶成殿), 응지당(膺祉堂), 연길당(延吉堂)이 있다. 원래 각 건물과 강녕전 본전을 연결하는 복도각이 존재했었는데 그 흔적이 측면 양쪽 가장자리 퇴간 부분에 창문이 아닌 문이 달려있는 것이다. 처음엔 창호문과 기와를 갖춘 일반적인 건물 형태로 있었는데 1873년(고종 10년) 경복궁에서 일어난 화재로 고종이 복도각의 모습을 비만 피할 수 있게끔 바꾸라고 지시하면서 지붕도 철 지붕으로 바뀌고 벽체도 사라졌다. 1876년(고종 13년) 화재 때 없어진 뒤 1888년(고종 25년) 강녕전과 함께 재건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10] 복도각은 다시 복구되지 못했으며 1990년대 후반에 강녕전을 복원할 때도 지어지지 못한 채 현재까지 이어진다.강녕전 복도각에 대해 자세하게 다룬 글
5. 부속 건물
5.1. 경성전과 연생전
景福宮 慶成殿 · 景福宮 延生殿
강녕전 동, 서에 위치한 보조 침전이다. 역사는 강녕전과 완전히 같다. 위에 언급했듯 강녕전과 복도로 통했기 때문에 서쪽에 위치한 경성전은 동북쪽 가장자리 면에, 동쪽에 위치한 연생전은 서북쪽 가장자리 면에 창이 아닌 문이 달려있다.
두 건물은 서로 짝을 이루면서 형태가 대칭으로 되어있을 뿐 똑같기에 건물의 특성 역시 엮어서 설명한다. 정면 7칸, 측면 4칸이며 남쪽과 북쪽에 각각 가퇴가 있었으나 당시 자료의 부족으로 복원할 때 못지었다. 정면 가장자리와 대청 북쪽의 툇간을 제외한 나머지 가장자리 칸은 전부 방이다. 북쪽으로 방이 7칸[11] , 남쪽으로 5칸[12] 이 있고, 그 중 한 칸은 북쪽 방과 남쪽 방 사이에 있다. 대청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총 4칸이다.
경성전의 현판은 우죽 양진니(楊鎭尼, 1928 ~ 2018)가, 연생전의 현판은 구당 여원구(呂元九, 1932 ~ )가 썼으며 둘 다 각자장 오옥진이 새겼다.
5.2. 응지당과 연길당
景福宮 膺祉堂 · 景福宮 延吉堂
강녕전의 부속 건물이다. 조선 전기에는 없었고 고종 때 경복궁 중건하면서 새로 지었으며 이후의 역사는 강녕전과 같다. 당초엔 단순히 경성전, 연생전보다 약간 격이 낮은 보조 침전이나 접견소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2019년 6월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소장중인 《경복궁중건일기》가 번역, 공개되면서 왕의 식사를 데워 수라상에 올려 들이던 중간 부엌임이 드러났다.
보통 짝을 이루는 건물은 보통 대칭인데, 응지당과 연길당은 거의 본뜬 것처럼 비슷하기에 건물의 특성 역시 엮어서 설명한다. 정면 4칸, 측면 3칸, 총 12칸으로 정면에서 볼 때 동쪽 2칸은 대청으로, 서쪽 2칸은 온돌방이다. 앞면에는 퇴간을 두었고 그 중 서쪽의 한 칸을 제외한 나머지 3칸은 툇마루가 건물 밖으로 나오게 하였는데 출입은 동쪽 2칸의 대청으로만 가능하게 하였다. 단, 두 건물의 차이가 있는데 강녕전과 복도로 이어지는 문의 위치가 다르다. 응지당은 동남쪽 측면에, 연길당은 서남쪽 측면에 있다. 이외의 구조는 전부 같다.
응지당의 현판은 운암 조용민(趙鏞敏, 1926 ~ 2017)이, 연길당의 현판은 효당 김훈곤(金勳坤, 1942 ~ )이 썼으며 둘 다 각자장 오옥진이 새겼다.
6. 기타 (매체 등에서의 활용)
궁궐 촬영이 비교적 쉬웠던 2000년대 이전 조선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침전으로 많이 나왔다. 제일 처음 등장한 작품은 KBS 드라마 《찬란한 여명》. 마침 드라마 방영 시기와 복원 공사하던 때가 맞물려 1860년대의 경복궁 중건 장면을 공사 중이던 현장에서 촬영했다. 희한하게 조선 후기 경복궁이 없던 시절에도 나오는데 창덕궁의 희정당이라고 현판을 바꾸거나(...) 아니면 고증을 무시하고 강녕전 현판 그대로 달고 나온다.
2001년 ~ 2002년 방영 된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선 국가의 공식 행사를 하는 모습도 많이 나왔다. 원래는 근정전에서 촬영하려 했으나 하필 당시 근정전을 보수하는 공사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강녕전이 공식 행사장으로 나온 것. 하긴 강녕전에서 행사가 많이 열렸던 것도 사실이니 아주 고증을 어긴 것은 아니긴 하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에서도 나오는데, 이상하게 실제 건물말고 경희궁 숭정전이 강녕전 현판을 달고 나온다.
조선 왕궁을 재현한 전라북도 부안의 부안영상테마파크와 경상북도 문경의 《대왕세종》 세트장에 각각 강녕전 세트가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부안의 강녕전 세트는 사정전 현판을 달고 있다. 반면 《대왕세종》 세트장의 강녕전은 제 모습대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다만 정면이 11칸이 아닌 9칸으로 되어있다.
[1] 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각자(刻字)의 제작 기능을 가진 장인.[2] 편안할 강(康), 편안할 녕(寧).[3] 세상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아홉가지 큰 원칙.[4] 대표적인 예로, 인명으로는 무령왕(武寧王), 효령대군(孝寧大君), 이어령(李御寧) 등을, 이외에는 보령시(保寧市), 고령가야(古寧伽倻), 태령전(泰寧殿)을 들 수 있다. 자세한 것은 '寧' 항목 참조.[5]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6] 서까래가 안보이게 천장을 가리고 평평하게 만드는 구조물.[7] 실제로 전통 가옥을 용마루 없이 지으면, 서까래를 고정하기 어려워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8] 사실 함녕전은 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였던 만화당(萬和堂) 을 옮겨 지은 것이다. 그래도 황제의 침전인데 용마루를 그대로 냅둔 것을 봐서는 무량각에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게 맞는 것 같다.[9] 당시 고종은 주로 건청궁에서 거주했다.[10] 확실한 것은 연생전과 이어지는 복도각이 경성전과 연결된 복도각보다 오래 남아있었다.[11] 5칸은 작은 방, 2칸은 큰 방이다.[12] 4칸은 작은 방, 1칸은 큰 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