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숙장문
1. 개요
昌德宮 肅章門
창덕궁의 문이다.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 중문인 진선문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보인다.
숙장문의 이름은 1475년(성종 6년) 8월에 당시 예문관대제학이던 서거정이 지었다.# ‘숙(肅)’은 ‘엄숙하다’, ‘장(章)’은 ‘아름답게 빛난다’는 뜻이다.
2. 용도
궁궐의 외조 권역에서 내전을 볼 수 없게 만든 문이다. 창덕궁은 자연 지형에 맞추어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배치가 경복궁처럼 질서정연하지 않다. 그래서 돈화문을 지나 진선문으로 들어서면 정전 인정전에 도착하기도 전에 내전 영역이 바로 보인다. 따라서 이를 가릴 담장과 문이 필요하여 지은 문이다.#[1]
위에 언급했듯 서거정이 숙장문의 이름을 지었는데, 이 때 숙장문을 가리켜 좌달문(左闥門)이라 하였다.# ‘좌(左)’는 말 그대로 ‘좌측’이고 ‘달(闥)’은 '밖에서 집안을 못보게 만든 가림막'이다. 즉, 좌달문은 '안쪽(내전 영역)을 가린 좌측 문'이다.[2] 이런 기록 역시 숙장문의 역할을 말해준다.#
3. 역사
정확한 창건 연대는 모른다. 다만, 진선문, 인정문 영역을 태종 시기에 건립한 것을 볼 때, 숙장문도 그 때 처음 지은 듯하다.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광해군 연간에 중건했다. 이후 별다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후 일어난 몇 차례의 창덕궁 화재 때도 무난했던 듯 하다.
대한제국 시기 순종황제가 이어한 직후인 1908년(융희 2년) 탁지부건축사무소에서 시행한 인정전 개수 공사 때 자동차 통행에 방해가 된다며 헐렸다. 광복 이후인 1996년에 문화재청에서 복원 공사를 시작해 1999년 완공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판 글씨는 원래 동래군(東萊君) 정난종(鄭蘭宗)이 쓴 것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사라졌다. 1999년 복원할 때 서예가 소헌 정도준 선생(紹軒 鄭道準. 1948 ~ )이[3] 새로 쓰고 각자장 철제 오옥진 선생(鐵齋 吳玉鎭, 1935 ~ 2014)이 새겼다.
4. 구조
- 정면 3칸, 측면 2칸의 1층[4] 목조 건물이다. 주춧돌과 기둥은 둥근 형태이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는 화려한 다포식이다. 용마루와 추녀마루, 내림마루는 양상바름을 하고 그 위에 취두와 용두, 잡상을 두었다. 단청은 모루단청[5] 으로 칠했다.
- 위에 언급했듯, 진선문 및 인정문과 같은 영역을 이룬다. 이 문들은 서로 행각을 통해 붙어있으며 잇는 행각이 사다리꼴 모양을 만들어 마당을 이룬다. 이 마당도 인정전 마당처럼 국가 행사나 정치의 공간으로 많이 사용하였는데, 인정전 마당에서 주로 무게 있고 좀 더 근엄한 예제(禮制)를 열었다면 진선문 · 인정문 · 숙장문의 마당에서는 좀 더 일상에 밀착한 국사를 펼쳤다. 대표적으로 임금이 죄인을 심문하거나 벌주는 장소로 많이 활용한 예가 있다. 물론 엄숙한 행사를 아예 거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임금의 즉위식을 주로 이 마당에서 열었다.
- 행각엔 내병조(內兵曹), 호위청(扈衛廳) 등 궁을 지키는 관청과 전설사(典設司), 상서원(尙瑞院) 등 왕실과 국가 행사와 관련있는 관청 및 부속실이 있었다. 이 역시 순종 이어 후 철거했으며 1999년에 복원했다. 그러나 내부는 복원못하고 복도로 남았다. 단, 내병조는 내부도 복원하여 현재 창덕궁 관리소에서 사무실로 사용한다.
5. 여담
5.1. 현판 위치의 문제?
조선시대에 만든 《동궐도》를 보면 숙장문 현판(왼쪽 그림 붉은 원)이 동쪽 면에 걸려있다. 그러나 현재는 반대편 서쪽 면에 걸려있다. 이를 두고 복원할 때 위치를 잘못잡은 게 아니냐는 의견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 위치가 맞다.''' 1902년(광무 6년) 일본인 세키노 타다시가 촬영한 사진을 보면 현판의 위치(오른쪽 사진 보라색 원)가 지금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궐도》 화공이 잘못 그렸다는 건데, 그 이유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다. 현판이 잘 보이게 일부러 동쪽에 그렸다는 것과 아니면 단순 실수(...)라는 주장이 공존한다. 오류의 이유에 대해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판단은 알아서.
[1] 창경궁은 원래 대비를 모실 별궁이었기에 논외. 덕수궁과 경희궁도 지형에 맞게 지었으나 구조 상 숙장문 역할의 문이 필요하지 않았다.[2] 여기서 좌측은 동쪽이다. 전통적으로 임금의 시선을 기준으로 좌, 우를 따졌다. 왕은 남쪽을 바라보므로 왼쪽(좌측)은 동쪽이다.[3] 경복궁 흥례문과 유화문 및 창덕궁 진선문의 현판과 숭례문 복원 상량문을 썼다.[4] 보통 전통 건축에선 단층이라고 표현한다.[5] 부재 끝 부분만 화려하게 칠하는 단청.[6] 內司僕. 조선시대 궁궐의 마구간과 임금이 타는 말, 수레를 관리하던 기관.[7] 水口門. 물이 흐르는 통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