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흥복전
景福宮 興福殿
1. 개요
경복궁의 대비전(大妃殿) 중 하나로 교태전의 후원인 아미산의 북쪽에 있다.
2. 역사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1868년(고종 5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처음 세워졌다. 완전히 새 건물을 지은 건 아니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창의궁의 함일재를 옮겨 지었다고 전한다. 경복궁 중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강녕전, 교태전 등 내전의 주요 건물들이 2차례에 걸쳐 불타 없어지자(...) 임금이 사용하면서 경연, 신하들과 외국 공사를 만나는 등 공식적인 업무와 행사를 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후 효명세자의 부인이자 고종의 양어머니 신정왕후 조씨가 머물렀고 1890년(고종 27년) 4월 이 곳에서 승하하였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헐려 사라졌다. 1917년 화재로 사라진 창덕궁 내전을 복구하는데에 자재로 쓰였다고 하나 옮긴 이후 어떤 건물이 되었는지는 모른다. 흥복전 자리엔 일본식 정원이 들어섰다.
문화재청은 <경복궁 복원 2차 계획 사업>의 일환으로 2015년 9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총 174억원을 들여 약 3년 3개월에 걸쳐 복원 공사를 진행하였고 2019년 7월에 공개하였다. 정식 개방은 2020년 예정.# 단청은 아직 칠하지 않았는데, 계획대로라면 2020년대 초중반에 모두 마칠 예정이었지만 거의 2021년이 다 되도록 칠해지지 않고 있다.
3. 특징
- 기단은 4벌대의 장대석으로 쌓았고, 역시 4벌짜리인 계단을 정면에 3세트, 뒷면에도 3개를 놓았는데 뒷면 계단의 둘은 기단의 측면에 놓여있다. 주춧돌과 기둥은 사각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용마루와 추녀마루, 내림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취두와 용두, 그리고 4개의 잡상과 토수를 놓았다.
- 정면 9칸, 측면 4칸의 총 36칸으로 정면 기준 양 끝 칸은 누 마루가 1칸 씩[1] 구성되어있으며 누 마루 밑의 기둥 사이마다 나무 판문으로 막아놓았다. 서쪽의 누 마루 이름은 만의루(萬宜樓)이다.# 누 마루 안쪽에 온돌방 2칸을 두었고[2] 양 온돌방 사이에 대청 3칸[3] 을 두었다. 정면의 가장자리 칸은 툇마루이나 뒷면의 가장자리는 온돌방으로 되어있다. 단, 대청과 연결된 뒷면의 칸은 툇마루이다. 그리고 건물 동북쪽에 4칸짜리 온돌방을 두어 ‘」’ 자 형태를 띄게 하였다. 덧대인 온돌방의 동쪽, 북쪽 면에는 가퇴가 설치되어 있다.
- 바로 남쪽에 아미산이 있기 때문에 남쪽 행각은 없으며 흥복전 영역의 정문 수인문(壽仁門)도 남쪽이 아닌 서쪽에 세웠다. 대신 행각을 동, 서, 북쪽으로 갖추었으며 흥복전 본전과 각 행각 사이마다 작은 담과 문이 설치되어 영역을 분리하였다. 이 중 북쪽 행각은 현재 복원이 안 되어있다. 서쪽의 행각은 남북으로 길고, 지금 존재하지 않는 북쪽의 행각은 옛 그림이나 배치도를 보면, 동서로 길었으며 4겹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행각들은 궁인들이 머무는 처소와 음식을 만드는 소주방 등으로 구성되었었다.
- 궁궐 복원 역사상 처음으로 현대식 화장실과 빔 프로젝터, 전기 시설을 설치하여 화제가 되었다. 단순히 보존만 하는 게 아닌, 회의, 교육, 공연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기 위함이라고. 사실 예부터 보존 된 건물을 건드린 것도 아니니 큰 문제는 없고, 박제된 궁이 아닌 시민들의 살아있는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전기 시설 등 화재 위험 요소와 관련하여 보다 철저한 관리 방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4. 여담
- 복원공사 도중 전통 건축에 쓸 수 없는 시멘트(...)를 썼다가 적발되어 재공사한 적이 있었다. 문화재청은 당초 이 사실을 모르다가 공사에 참여한 한 기능인이 폭로해 알게 되었다고.#
[1] 정면, 측면을 합친 실제 칸 수는 총 4칸,[2] 이론 상 4칸이나 남북축으로 방을 트여 실제로 2칸이다.[3] 이론 상 6칸이나 공간을 전부 트여 1칸으로 사용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