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승휘전
1. 소개
慶熙宮 承輝殿
경희궁의 동궁으로, 왕세자와 왕세자빈이 머무는 처소이다. 그들도 사람이니만큼 먹고, 자고, 입고 쉬면서 여러 활동을 하는 자신만의 생활공간이 당연히 필요한데 승휘전이 바로 그런 곳이다. 쉽게 말해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집.
이름은 ‘빛(輝)을 잇는다(承)’는 뜻이다.
인조 ~ 숙종 시기에만 존재했다. 즉, 경희궁이 경덕궁[1] 일 때만 있었기 때문에 엄밀하게는 ‘경희궁 승휘전’이 아닌 ‘경덕궁 승휘전’이 맞다.
위치는 정확히 모른다. 1940년에 제작된 《경희사림》에 실린 '경희궁 배치도'에 따르면 융복전 동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
2. 역사
1620년(광해군 12년)에 경희궁 창건 때 건립되었다. 경희궁을 지은 광해군의 세자 이지는 정작 사용해보지도 못한 채 인조반정으로 쫓겨났고,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가 처음 사용하였다.
1655년(효종 6년) 12월에 창덕궁을 수리할 때,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헐려고 했다.# 신하들은 반대하였으나 효종은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고집했다는데#, 효종의 손자 숙종 시기에 승휘전에 대한 기록들이 나온다. 이 때 철거하고 다시 지은 것인지, 아니면 살아남은 것인 지는 확실하지 않다.
1698년(숙종 24년) 11월에 중궁전 소속 주방에서 일어난 불이 승휘전으로 옮겨 붙어 건물이 전부 타버렸다.# 이후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다시 재건하지 않았다. 즉, 80년도 못가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셈.#
3. 여담
- 1693년(숙종 19년) 3월에 승휘전과 그 주변을 수리하다가 사람 뼈가 나왔다. 누구를 저주하려고 묻은 건 아니고, 옛날 이 일대가 매장 터였기 때문에 발견된 듯하다. 숙종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뼈의 주인들을 가엾게 여겨 이들을 위한 제사를 올렸다.# 이에 헌납 이우겸이 공사를 중지할 것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끝까지 공사를 밀어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