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흥정당

 



1. 소개
2. 역사
3. 정문
4. 특징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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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정당 사진
그래픽으로 재현한 흥정당[1]

1. 소개


慶熙宮 興政堂
경희궁의 편전이다. 편전은 평상시 임금이 나랏일을 보고 경연을 하던 곳이다. 공식적인 편전은 자정전이나 일상적으로는 흥정당을 더 많이 활용하였다. 기능적으로 창덕궁 희정당, 창경궁 숭문당과 유사하다.

2. 역사


1620년(광해군 12년) 경희궁 창건 때 지었다. 침전인 회상전, 융복전의 바로 남쪽에 있어서, 언덕을 타야하는(...) 자정전보다 접근성이 훨씬 좋았다. 더군다나 조선 후기에는 자정전을 빈전[2]으로 주로 사용하였기에, 자연히 평상시에는 흥정당을 편전으로 사용하였다.
1829년(순조 29년) 10월에 회상전에서 화재가 일어났을 때 같이 불타 1831년(순조 31년)에 재건하였다.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가 8살에 즉위한 헌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여기서 하였다.
고종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대부분 경희궁 건물들을 공사 자재로 쓰려고 철거하였다. 그러나 흥정당 건물은 숭정전 · 회상전 · 정심합 · 사현합 · 흥화문 등과 함께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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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건물로 쓰이던 당시의 흥정당
광운사 이건 이후 흥정당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일제가 경희궁 터에 경성중학교[3]를 지으면서, 흥정당 건물은 1915년 4월부터 1925년 3월까지 임시소학교 교원양성소 부속 단급소학교의 교실이 되었다. 이후 1928년 3월에 지금의 용산 지역에 있던[4] 광운사(光雲寺)에서 건물을 사서 뜯어갔다. 1950년대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3. 정문




4. 특징


  • 정면 4칸, 측면 3칸의 1층 목조 전각[5]으로 구성되어 있고, 지붕은 팔작지붕에 공포는 이익공[6]양식이다. 기단을 뒤로 물리고 정면에 돌기둥을 놓아 누각 또는 다락집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는 17세기에 지어진 궁궐 건축의 특징이다.
  • 정면 기준 2칸은 대청이고 좌,우로 온돌을 두어 사시사철 편하게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동쪽 측면에는 가퇴를 두어 공간을 보다 넓게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 흥정당 남행각에는 세자도서실인 존현각(尊賢閣)과 주합루(宙合樓), 관문루(觀文樓), 동이루(東二樓), 홍월루(虹月樓)가 있었다. 존현각은 읽고 공부하는 기능을, 주합루를 비롯한 ‘누’가 붙은 건물들은 책을 보관하는 역할을 하였다.

5. 여담


  • 세손 시절 존현각을 자주 이용하던 정조는 즉위 후에도 많이 찾았는데, 1777년(정조 1년) 7월에 이 곳에서 독서하다 자객의 습격을 받은 일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다룬 영화가 바로 《역린》. 이후 정조는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다.

[1] 정면 4칸인데 여기선 3칸으로 잘못 재현했다.[2] 빈전(殯殿): 상여가 나갈 때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곳.[3] 현재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경성중학교와는 전혀 다르다. 그 곳은 1967년 개교하였으며 한자가 ''''景''''城으로 다르다.[4] 장충동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5] 보통 전통 건축의 경우 1층보다는 단층(單層)으로 말한다.[6] 창방과 직접 만나 보를 받치는, 쇠서(소혀 모양의 자재)를 두 겹으로 낸 공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