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희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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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대한민국의 보물'''
814호

'''815호'''

816호
창덕궁 선정전
'''창덕궁 희정당'''
창덕궁 대조전


[image] '''대한민국 보물 제815호'''
'''창덕궁 희정당'''
昌德宮 熙政堂


'''소재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수량'''
1동
'''지정연도'''
1985년 1월 8일
'''제작시기'''
조선시대, 1405년 창건, 1920년 중건
1. 소개
2. 희정당의 용도
3. 역사
4. 정문
5. 구조
5.1. 조선시대 희정당의 모습
5.2. 1920년 이후 재건한 희정당의 모습
5.2.1. 벽화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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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당 사진


문화유산채널에서 제작한 희정당 동영상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희정당 동영상


1. 소개


昌德宮 熙政堂[1]
창덕궁의 건물이다.
'희정(熙政)'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정치(政)를 빛낸다(熙)’는 뜻이다. 인조 시기 지제교[2] 채유후는 희정당 상량문[3]에 ‘희(凞)’는 ‘밝고 넓다’는 의미를 본 딴 것이라 하면서, “정사를 밝혀 백성을 접하니 백성이 충정을 다하고, 정사를 넓혀 백성을 구제하니 혜택을 입지 않은 백성이 없다는 뜻으로 ‘희정(凞政)’이라 이름했다.”라고 뜻을 풀이했다.

2. 희정당의 용도


희정당의 용도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다. 현재 정설의 침전인 대전이었다가 조선 후기 들어 나랏일 보는 편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며 대부분의 자료들도 그렇게 소개한다. 그러나 처음에도 대전으로 사용했다고 보기엔 석연찮은 부분들이 있다.
건물이름부터 그렇다. 전통 건물의 경우 사용하는 사람의 신분 및 용도에 따라 이름이 정해진다. 높은 위치부터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 순으로 나간다. 즉 ‘전(殿)’이 가장 높으며 ‘당(堂)’이 그 다음 서열이다. 그런데 창덕궁중궁전으로 알려진 곳은 대조전이다. '''왕비의 침전이 ‘전(殿)’을 쓰는데 왕비보다 더 높은 임금의 정식 침전이 ‘당(堂)’이다? 이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물론 도 당을 쓸 수는 있다.[4][5] 그렇다면 적어도 왕비도 그에 맞추어 정식 처소의 이름을 당으로 써야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건물 양식도 그렇다. 보통 일반적으로 정식 침전의 건물은 출입하는 칸의 툇마루가 밖으로 나와 현관처럼 되어있고 온돌방대청을 기준으로 좌, 우에 있다. 그러나 희정당의 경우 그렇지 않으며 지붕에 용마루가 존재하는데 이 역시 메인 침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6]
또한 연산군 때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꿀 당시 신하들이 반대하면서 ‘여기서 '''정사를 들을 뿐만 아니라''' 글을 닦는 의미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란 말을 한 기록이 있다. # 이미 조선 초에 편전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궁궐지》에도 '대조전 남쪽에 있고 '''편전으로 시사를 하는 처소'''”라 적혀있다.
그렇다하여 단순하게 편전 기능만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서는 희정당을 ‘협양문내선정전동(協陽門內宣政殿東) '''연침'''접군신지소('''燕寢'''接君臣之所)’, 즉 협양문선정전 동쪽에 있는 임금신하가 만나는 '''연침'''으로 소개했기 때문이다.
연침은 임금이 일상생활을 하던 공간으로 주로 침전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일련의 자료들을 종합했을 때, 희정당은 ''''일상생활도 영위했던 편전''''으로 보는 편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3. 역사


1405년(태종 5년) 창덕궁 창건 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처음엔 숭문당(崇文堂)으로 부르다가 1496년(연산군 2년) 12월에 희정당(凞政堂)으로 고쳤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8년(광해군 원년)에 복구했으나, 인조반정 때 다시 화재를 입어 1647년(인조 25년)에 인경궁 화정당을 옮겨 재건했다. 순조 때 다시 소실된 것을 1835년(헌종 1년)에 재건했으나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 11월에 또 다시 불타 사라졌다. 1920년에 복구했는데 경복궁 강녕전을 헐어다 지었다. 그 때문에 조선시대 본래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4. 정문



  •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5. 구조



5.1. 조선시대 희정당의 모습


  • 1647년(인조 25년)에 만든 《창덕궁수리도감의궤》를 보면, 정면 5칸, 측면 3칸, 총 15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에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이익공[7]이었다. 또 동 · 서 양쪽에 온돌방이 6칸, 중앙과 전면에 걸쳐 마루 9칸으로 되어 있었고 천장은 봉반자와 지반자[8] 등이 갖춰있었다. 또한 앞 면 한 칸 폭을 긴 기둥으로 띄워놓고 내부는 마루로 마감했는데 그 뒷부분부터는 온돌 설치를 하기 위해 돌기둥을 세우지 않고 바닥 기초를 쌓아 올린 다음 그 위에 건물을 세웠다.
  • 정면 출입문을 서쪽의 1칸을 제외한 나머지 칸 전부에 두고 그 앞에 나무로 만든 계단을 놓아 출입할 수 있게 했다. 1828년 경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동궐도(東闕圖)》를 보면 동쪽 측면에 가퇴를 설치하여 공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후 1833년에 불타고 다시 지은 희정당의 모습은 《동궐도형(東闕圖形)》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평면이 정면 5칸, 측면 3칸, 전체 15칸으로 규모와 겉 모습은 이전과 같다. 하지만 내부는 앞면 5칸에 마루가 깔리고 뒷면 가운데 3칸의 툇마루를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으로 적혀있어 인조 때 지었던 희정당과 내부가 많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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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의 희정당. 왼쪽이 동아대학교 소장본, 오른쪽이 고려대학교 소장본이다.
아궁이와 선례문 및 기타 협문, 그리고 바닥면과 가퇴를 받치는 석축 등 세세한 부분에서 묘사의 차이가 있다.
  • 위 그림에서 보듯 건물 동편에 사각형 모양의 연못 하월지(荷月池)를 만들어 주변을 한껏 운치있게 했다.
  • 대한제국 순종 시기 혹은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앞면 돌 기둥들 사이를 전통 벽돌 장식으로 메꾸었고 그 한가운데엔 무늬로 형상화된 한자를 새겼다. 출입문에 있던 나무 계단도 전부 없어지고 대신 중간의 1칸만 출입이 가능하게 한 뒤 돌 계단으로 변형했다. 바뀐 시기가 순조 이후 재건할 때인지, 아니면 순종이 즉위 후 창덕궁에서 머물 때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순종 시기에 바꾼 게 확실한 것은 희정당 앞에 있던 수많은 전각들을 없애고 정문의 모습을 솟을대문 세 칸으로 개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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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이 살던 당시 희정당.
1907년에서 1917년 이전의 모습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1917년 이전 창덕궁 내전 일곽 촬영사진. 정면에 보이는 솟을대문 뒤에 바로 보이는 지붕이 희정당이다.

5.2. 1920년 이후 재건한 희정당의 모습


  • 앞서 말한 것처럼 1917년 이후 희정당이 불타고 1920년 경복궁 강녕전을 뜯어다 다시 지으면서 본래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우선 마루가 완전히 사라지고 긴 들로 쌓은 5단짜리 기단 위에 건물을 올렸다. 또한 아담했던 15칸 짜리 건물이 정면 11칸, 측면 5칸, 총 55칸의 거대한 건물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희정당 옆에 있던 연못 하월지도 없앴다.
그렇다고 강녕전 모습 그대로 옮긴 것도 아니다. ‘골격은 조선식으로 하되 나머지는 서양식을 참조’하자는 조선총독부의 기본 방침에 따라 이건되면서 크게 변했다. 우선 용마루가 없던 강녕전 건물에 용마루를, 그것도 시멘트(...)를 발라 만들었고 정면 가운데 3칸의 툇간은 원래 밖으로 드러나 있던 것을 변형시켜 전면에 문짝을 새로 달았다. 그리고 동남쪽 측면에 있던, 원래 연생전과 통하기 위해 복도와 이어졌던 문짝도 창호문에서 나무 판으로 바꾸어 달았다. 또한 문에 붙은 창호지를 없애고 대신 유리를 덧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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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당 본채 정면
  • 동, 서, 남 행각과 건물을 하나로 연결했으며 남쪽 행각에 서양에서 쓰던 돌출현관을 두 개를 만들었다. 그 중 희정당 뜰로 연결되는 출입문 현관에 포치(porch)[9]를 두어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낙양각과 조선 왕실(당시 이왕가)의 상징 오얏꽃 문양을 달았는데 포치 하단의 돌기둥은 일본식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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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당 현관
  • 내부 역시 상당히 변하여 원래 대청였던 곳을 응접실로 개조했고, 서쪽의 온돌방을 접견실, 회의실로 만들었다. 접견실, 회의실 바닥은 전부 쪽마루로 바꾼 뒤 카페트를 깔았다.[10] 서양식 가구도 배치하고 천장에 샹들리에까지 설치했으며 이 밖에도 행각에 욕실, 화장실, 이발실까지 설치하여 최대한 서구적인 느낌을 주었다. 2020년대 현재는 카페트를 치웠다.

문화유산채널에서 제작한 희정당 내부 동영상. 360도 VR로 볼 수 있다.

5.2.1. 벽화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239호

'''240호'''

241호
구 목포사범학교 본관
'''창덕궁 희정당 총석정절경도'''
창덕궁 희정당 금강산만물초승경도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240호

'''240호'''

241호
창덕궁 희정당 총석정절경도
'''창덕궁 희정당 금강산만물초승경도'''
창덕궁 대조전 봉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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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 아래는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이다.
응접실 양쪽 벽 문과 천정 사이 벽에 폭 8.85m, 높이 1.8m 크기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동쪽의 그림은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 서쪽은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이다. 희정당이 완공된 1920년 가을순종의 명으로 당대 유명한 화가 해강 김규진(海岡 金奎鎭)이 그렸다.
원래 조선총독부 이왕직에서는 작업을 담당할 화가일본인을 투입하려고 했지만, 순종이 '''내전[11]의 그림만큼은 무조건 조선인 화가에게 맡기겠다'''고 반대했다. 그래서 1911년에 창설된 서화미술회[12]와 서화연구회 소속 조선인 화가들이 각각 대조전과 경훈각의 벽화 4폭, 희정당 벽화 2폭을 맡아 그렸다. 그런데 희정당 벽화 2폭을 맡은 서화연구회 소속 화가 김규진이 윤필료[13]를 챙길 속셈으로 '''희정당 벽화 작업을 독차지했다'''는 의심을 샀고, 김은호는 "윤필료를 500원밖에 받지 못했다"며 '''제작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후에 어찌어찌 사태가 수습돼서 서화미술회에서 중진화가 강필주와 고희동 대신 강습소 출신의 당시로써는 신진 화가였던 이상범과 김은호, 노수현, 이용우, 오일영 등 5명 그리고 해강 김규진까지 총 6명에게 벽화를 맡기기로 결론이 났다.
김규진은 이미 1919년 가을에 금강산을 유람하고 구룡폭포 오른쪽 암벽에 폭 3.6m에 길이 19m 되는 '미륵불'이라는 글씨를 새기고 매일신보에 금강산 스케치를 연재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 벽화를 그리기 위해서 다시 한 번 금강산을 방문했다고 한다.

6. 여담


  • 희정당 남쪽 현관으로는 드나들지 못하고 내부 역시 출입할 수 없다. 다만, 특별관람을 실시할 때에 한해서는 들어갈 수 있다. 2018년 시범개방에 이어 2019년에 내부 특별관람을 실시하여 제한적으로나마 일반에 개방했다.[14] 만 13세 이상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했으며 상반기엔 4월 3일부터 5월 25일까지, 하반기는 9월 4일부터 10월 26일까지 매주 수 · 토요일 오전 10시 30분과 오후 2시에 진행했다. 예약은 29일 오후 2시부터 가능했고 1회 정원은 10명, 관람료는 1만 원이었다. #


[1] ‘熙政堂’ 으로 많이 쓰는데 조선왕조실록 및 기타 당대의 기록들을 보면 ‘凞政堂’으로 적혀 있다. 둘 다 똑같은 ‘빛날 희’자에 모양이 비슷하여 동자이체, 즉 다른 모양이지만 같은 글자로 여겨 혼용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현재 희정당 현판도 ‘熙’로 되어있으니 '熙政堂'도 맞다.[2] 知製敎. 조선시대 왕이 내리는 교서의 글을 짓는 일을 맡아보던 관직.[3] 새로 짓거나 고친 집의 내력, 공역 일시 등을 적어둔 문서.[4] 왕은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 그 어떤 것도 쓸 수 있지만, 반대로 신분이 아무리 높아도 과, 왕비, 대비상왕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전(殿)’은 절대 쓸 수 없었다. 세자도 못쓰는...게 원칙이나 창경궁 저승전경희궁 승휘전의 예를 보듯이 아주 안 쓰지는 않았다.[5] 왕이 기거하던 곳으로 전이 아닌 당을 쓴 대표적인 경우는 고종이 머물던 건청궁 내의 장안당이 있다. 단, 명성황후가 머물던 처소는 '당'보다 한단계 낮은 '합'을 쓴 곤녕합이었다.[6] 침전에 용마루가 없는 것에 대해 여러 설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설은 의 침전의 경우, 용(=왕)이 계신 곳 위에 불경스럽게 또 이 누르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고 왕비의 침전의 경우 새로운 용이 만들어지기에 한 건물에 두 용이 있어선 안 되기에 만들지 않았다는 설이다. 또 다른 설은 당시 동아시아 최선진국이었던 중국의 건축양식을 모방했으나 조선에 익숙하지 않은 양식을 모든 건물에 적용하긴 어려웠고 때문에 '''가장 존귀한 왕과 왕비의 집에만''' 선진 건축 기술을 적용했다는 설이다. 사실 용마루와 용과 관련 된 전통 기록은 하나도 없으며. 당장 중국만 가도 자금성황제황후 침전엔 용마루가 있고, 일반 서민 가옥들에 용마루가 없는 집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후자의 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중국 문물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대한제국기에 지은 경운궁의 침전 함녕전은 용마루가 있다.[7] 창방과 직접 만나 보를 받치는, 쇠서(소 혀 모양의 자재)를 두 겹으로 낸 공포.[8] 반자란 천장을 가려서 만든 구조체를 말한다.[9] 건물의 입구에 지붕을 갖추어 차를 댈 수 있게 한 곳.[10] 응접실은 원래 대청이었으므로 따로 개조하지 않고 예전 그대로 두었다. 물론 여기도 카페트를 깔았다.[11]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 경훈각.[12] 형식상이라지만 회장은 이완용이었다. 총무는 소호 김응원.[13] 제작비. 화가 한 사람당 1,500원 정도였다고 한다. [14] 남쪽 현관 출입은 개방에서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