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숭문당
1. 소개
昌慶宮 崇文堂
창경궁의 편전이다. 편전은 평상시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나랏일을 보고 경연을 하던 곳이다. 공식적인 편전은 문정전이나 일상적으로는 숭문당을 더 많이 활용하였다. 기능적으로 창덕궁 희정당, 경희궁 흥정당과 유사하다.
2. 이름
'숭문(崇文)' 뜻은 '학문(文)을 숭상(崇)한다'이다. 참고로 창덕궁 희정당의 원래 이름 역시 숭문당이었다.
현판 글씨는 영조가 직접 썼다.
3. 역사
성종 시기 창경궁 창건 때는 없었고, 임진왜란 이후 1616년(광해군 8년)에 창경궁을 복구할 때 처음 지었다. 이후 창덕궁 희정당처럼 왕이 좀 더 편한 분위기에서 국정을 돌보고 경연을 하는 공간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창경궁 자체가 공식적인 국사보다는 왕실 구성원들의 거주, 행사에 초점을 둔 궁이라[1] 숭문당을 자주 활용하진 않았다. 조선 후기 들어 공식 편전 문정전을 혼전으로 활용할 때, 숭문당을 곡하는 곳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1830년(순조 30년) 화재로 불탄 후 1833년(순조 33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4. 구조
- 창경궁의 정전, 편전 구역이 다른 궁궐에 비해 작은 편이라 명정전(정전), 문정전(공식 편전), 숭문당(일상 편전)이 다 가깝게 붙어있다. 명정전 뒤편으로 나있는 4칸의 복도를 거쳐 빈양문을 지나면 바로 숭문당이 나오며 문정전과도 담과 문의 구분 없이 바로 뚫려있다.
동궐도》를 보면 조선시대 당시에는 다른 건물 영역과 분리하는 담과 문이 있었다. 하지만 일제 때 헐려 지금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예전에 있던 담과 문도 굉장히 작고 낮은 크기였기에 붙어있다는 표현이 틀린 건 아니다.
그러나 《- 창경궁 중심축을 따라 동향하였다. 정면 4칸, 측면 4칸으로 정면(동쪽 면) 기준 앞면과 뒷면(서쪽 면), 남쪽 측면 가장자리의 바닥은 툇마루이다. 정면부 기단을 뒤로 물리고 대신 앞쪽의 1열을 돌 기둥으로 세워 누 처럼 보이게 하였는데 이는 17세기 건축을 대표하는 양식 중 하나로 꼽힌다. 뒷 부분은 평범하게(?) 기단을 쌓고 주춧돌을 받쳤다.
-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홑처마에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하고 용두와 취두를 올렸으나 잡상은 놓지 않았다. 기둥은 네모나고 단청은 긋기단청을 하여 소박한 느낌을 주었다.
- 정면의 바깥 면엔 창과, 문, 벽을 두지 않아 외부와 통해있다. 그리고 기둥 사이마다 난간을 설치하였으며, 정면과 남쪽 측면이 만나는 툇마루 앞에 사다리를 놓아 통행할 수 있게 했다. 툇마루 안쪽에 벽과 문, 창을 설치하였다. 각 칸의 바깥 면마다 중방을 놓았는데 정면 기준 왼쪽에서 3번째 칸을 제외한 나머지 칸은 중방 위가 벽이다.
- 왼쪽에서 1번째 칸은 중방 아래를 띠살문으로 두었고, 2, 4번째 칸은 문선을 세운 뒤 창을 놓았으며 3번째 칸은 중방 위에 교창을, 아래를 띠살문으로 두었다. 남쪽 측면과 뒷면(서쪽 면)의 외부 역시 교창과 문인데, 문 창살의 경우 남쪽 측면의 동쪽 1칸만 띠살문이고 나머지는 전부 ‘정(井)’자 살이다. 뒷면의 2번째 칸(뒷면에서 봤을 때 기준)의 툇마루는 밖으로 통하게 만들어 출입이 가능하다. 북쪽 측면의 중방 아래는 문이나 위는 교창이 아닌 나무 판이며, 남쪽 측면과 마찬가지로 동쪽 1칸만 띠살이고 나머지는 ‘정(井)’자 살이다.
- 실내는 툇마루를 제외한 남쪽과 북쪽에 각각 온돌방 2칸 씩 총 4칸이 있으며 온돌방 사이에 대청을 두었다. 이렇게 대청을 중심으로 양 옆에 온돌을 둔 구조는 숭문당과 마찬가지로 일상 편전이었던 창덕궁 희정당, 경희궁 흥정당과 비슷하다.
- 대청에 '일감재자(日監在玆)'란 게판이 걸려있다. 사진을 보려면 여기로.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이다. 직역하면 '날(日)마다 보는 것(監)이 여기에(玆) 있다(在)'로,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으니 공경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는 뜻이다. 제멋대로 행동하고 사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걸었다고 한다.# 숭문당 현판과 마찬가지로 영조가 직접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