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우

 



'''후백제 파진찬 겸 대리집정공
(後百濟 波珍飡 兼 代理執政公)
'''
'''성씨'''
최(崔)
'''이름'''
승우 (承祐)
'''본관'''
경주 최씨
'''출생'''
?, 신라 금성
'''사망'''
?, 후백제 완산주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창작물에서
4.1. 태조 왕건의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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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삼국시대의 인물. 신라후백제의 문인 겸 관료.
통일신라 말기 최치원, 최언위와 더불어 신라삼최로 불리며 빼어난 문장력과 학식을 지닌 인물로 알려졌다. 본관은 경주골품6두품으로 추정된다.

2. 생애


890년, 중국 당나라에 건너간 뒤 3년만에 빈공과에 응시해 급제, 현지 관직에 있다가 어느 시점에 귀국했다. 기록이 소략해서 당나라 어디서 어떤 일을 했고, 언제 신라로 귀국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단서가 있는데 동문선에 최승우의 칠언율시 10수가 수록돼 있다. 이 시들은 최승우가 중국에서 자신과 교류하던 인물들에게 헌사한 것인데 이 중 춘일송위태위자서천제회남(春日送韋太尉自西川除淮南)은 당나라 말기에 재상을 지낸 태위 위소도(偉昭度)에게 준 시고, 송조진사송입나부(送曹進士松入羅浮)는 901년경에 70세의 나이로 진사가 된 조송(曺松)에게 준 시다. 최승우의 중국 생활 당시 고위층과도 교류를 해서 명성을 떨쳤고, 특히 조송의 경우를 보면 적어도 901년까지는 최승우가 당나라에서 지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의 강서성 일대를 여행한 이야기를 담은 '억강서구유인기지기(憶江西舊遊因寄知己)'가 전하는데 단순히 여행을 갔다온 것일 수도 있지만 그 근처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
한반도에서 후삼국 시대가 열린 후 어느 시점에 후백제에 임관한다. 최승우가 어떻게 후백제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아마도 망해가는 신라를 보고 대안으로서 후백제의 견훤을 생각해 견훤의 밑에 들어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917년 최언위가 쓴 '태자사낭공대사비(太子寺郎空大師碑)'에서 최언위 자신과 최치원, 최승우를 신라삼최로 묶는 이야기가 나온다.
927년 공산 전투 승리 직후 견훤이 왕건에게 보내는 위협적인 국서를 최승우가 썼다.[1] 이 글은 동문선, 삼국사기 견훤 열전, 고려사 태조세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저서로는 《호본집(餬本集)》이라는 최승우 본인의 문집으로 추정되는 책 5권을 지었다고 하나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조선 시대의 일부 기록에서는 중국에서 도술을 배워 신라에 퍼뜨린 한국 도맥의 시조격 인물로 등장하기도 한다.

3. 여담


  • 최승우가 언제 태어났고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최승우의 생애와 행적에 대한 기록은 대단히 적은 편이다. 아니 적은 수준이 아니라 거의 기록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신라삼최 가운데에서도 최치원이나 최언위와 비교해보더라도 최승우는 생몰연대조차도 알려져 있지 않다. 최치원은 비록 고려에서는 벼슬하지 않았지만 고려 현종 대에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가 추증되었으며 문묘에 종사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의 여러 서원에서 제향되기도 했다. 또한 조선 시대에 와서도 문묘에 배향되는 등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최언위는 고려에 귀부하고 나서 고려에서 벼슬을 하고 천수를 누렸기 때문에 그래도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최승우에 대한 기록은 오늘날까지 거의 전하지 않는다. 아마도 최승우가 보필했던 견훤이 몰락해서 역사의 패자로 남았고 후백제 역시 멸망했기 때문에 고려에서는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았고 이 때문에 기록 또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각에서는 최승우가 후백제에서 임관했는지 불분명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927년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국서를 작성했던 것으로 보아서 후백제의 관리였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서신의 내용이 고려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모욕적이었기 때문에 고려에서는 국서의 작성자인 최승우를 더욱 대접해줄 수 없었을 것이다.
  • 결국 상기한 이유 때문에 최승우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황에 대해서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나름대로 상상력을 더해서 잘 묘사하였는데 최승우가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최응과 마지막 대담을 하는 장면에서 "허망한 것은 이긴 자는 자신의 행실을 기록에 남겨 역사라고 하지만 진 자는 그것마저 다 사라지고 변명의 여지조차도 없다. 도적이나 화적떼의 이름으로 분류되어 오명으로 남을 뿐이다"며 "훗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 구차한 삶이 끝났는지 모를 수 있다"며 그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역사에서 최승우의 운명을 알게 되는 입장에서 본다면 참으로 의미심장한 대사가 아닐 수 없다.

4. 창작물에서



4.1. 태조 왕건의 등장인물



[1] '내 활을 평양성의 문루에 걸고 내 말에게는 대동강의 물을 마시게 할 것이다'라는 구절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