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숭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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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 1등 개국공신'''
'''시호'''
'''개국장절공(開國壯節公)'''
'''삼사'''
'''태사(太師)'''
'''본관'''
평산 신씨(平山 申氏)
'''이름'''
숭겸(崇謙)
'''초명'''
능산(能山)
'''형제'''
신능길(申能吉)
'''아들'''
신보(申甫)
'''출신지'''
신라국(新羅國) 광해주(光海州)[1]
'''사당'''
지묘사(智妙寺)
'''생몰연도'''
882(?) ~ 927
1. 개요
2. 역임 관작
3. 생애
4. 사후
4.1. 허수아비와 도이장가
4.2. 후대의 송(頌)
5. 대중 매체에서
6. 기타
7.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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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초기의 장군이자 개국공신. 평산 신씨의 시조.

2. 역임 관작


'''신숭겸의 태봉 관작'''
'''직위'''
마군장군(馬軍將軍)
'''신숭겸의 고려 관작'''
'''공신호'''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시호'''
개국장절공(開國莊節公)
개국공신이기에 시호에 개국(開國) 미칭이 덧붙여 졌다.[2]

3. 생애


지금의 전라남도 곡성군에서 태어났지만 활동 터전은 강원도 춘천시이다.[3] 궁예 시절에 무장으로 활약하였고 많은 공을 세워 마군장군의 지위에 있었다. 궁예가 막장 테크를 타자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과 손을 잡고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며 고려를 건국한 개국 1등공신이다. 이후 왕건에게서 신(申)씨를 사성받고 숭겸(崇謙)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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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숭겸의 활솜씨가 뛰어났는지 함께 황해도 평산으로 사냥을 나간 왕건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가리키며 "저 기러기 떼 중 앞에서 세 번째로 가는 기러기를 맞춰 보라."라고 명하자 화살을 쏴서 기러기를 떨어뜨렸다는 일화가 남아 있는데 이 이야기가 평산 신씨의 본관이 평산이 되는 유래이다. 일화는 드라마 태조 왕건에도 잘 나와 있다.
신숭겸 이전에는 성씨가 없었고 출신은 미천했을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당시에는 신라 중앙의 왕족, 귀족층이나 장보고처럼 중국물 먹은 사람이 아니면 지방 명문가 출신들도 성씨가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비록 후백제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찬이었던 능환조차 성이 전해지지 않는다.[4] 그 외에도 정2품 대광이었던 만세나 매곡성주 공직 등 고위층이나 유력가이면서도 성씨가 전해지지 않는 사례는 많다. 고려사 태조 시기를 살펴보면 성씨가 없는 관료나 호족들이 수도 없이 등장하는데 동일 시기에 성씨가 전해지는 박지윤, 유천궁 같은 유력 호족들 역시 당대에 자칭하고 세보를 꾸몄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수많은 성씨들의 시조가 후삼국 시대 호족들이다.[5]
고려 개국에 기여한 무장들 중에서는 일찍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왕건이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전했던 공산 전투에서 후백제견훤에게 참패하고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신숭겸은 자신이 왕건의 투구와 갑옷을 빌려 입고 미끼가 되어 후백제군을 유인했으며 왕건은 일반 군졸의 옷을 입고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신숭겸의 희생 덕분에 왕건은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6] 후백제군은 신숭겸이 왕건인줄 알고 쫓았고 결국 신숭겸은 전사했으며 함께 유인 작전에 나선 김락, 김철, 전이갑전의갑 형제, 전이갑과 전의갑 형제의 사촌동생인 전락, 개국공신 평장사 호원보, 대상 손행을 포함한 8명의 장수가 전사했다.[7] 훗날 참수된 신숭겸의 시신은 왼쪽 발 밑에 북두칠성 모양의 사마귀가 있다는 것을 근거로 찾았지만 머리가 없었기에 왕건은 황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같이 매장했다. 신숭겸의 무덤은 원래 왕건이 미리 정해놓은 왕건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인데 왕건이 신숭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를 양보하였다. 신숭겸의 무덤은 봉분이 3개인데 머리를 대신한 황금 두상을 지키고자 이렇게 했다고 전한다.

4. 사후



4.1. 허수아비와 도이장가


고려 16대 왕 예종이 서경(평양)의 팔관회에 참관하였을 때 허수아비 둘이 관복을 갖추어 입고 말에 앉아 뜰을 뛰어다녔다. 이상히 여겨 물으니, 좌우에서 다음과 같이 그 경위를 설명하였다. 그 둘은 신숭겸과 김락으로, 태조 신성대왕견훤과 싸우다 궁지에 몰렸을 때 대신해 전사한 공신이다. 그 공을 높이고자 팔관회에서 추모하는 행사를 벌였는데 태조께서 그 자리에 두 공신이 없는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그래서 풀로 두 공신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복식을 갖추고 자리에 앉게 하였더니, 두 공신은 술을 받아 마시기도 하고 살아있을 때와 같이 일어나 춤을 추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듣자 예종이 감격해 신숭겸과 김락을 추모하는 노래인 '도이장가'를 지어 두 사람의 넋을 기렸다.[8] 다음은 전문.[9]

主乙完乎白乎(주을완호백호) 을 완전하게 하신

心聞際天乙及昆(심문제천을급곤)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고

魂是去賜矣中(혼시거사의중) 넋은 갔지만

三烏賜敎職麻又欲(삼오사교직마우욕) 내려 주신 벼슬은 또 대단했구나

望彌阿里刺(망미아리자) 바라다보면 알 것이다

及彼可二功臣良(급피가이공신량) 그 때의 두 공신이여

久乃直隱(구내직은) 이미 오래 되었으나

跡烏隱現乎賜丁(적오은현호사정) 그 자취는 지금까지 나타나는구나

-

도이장가(悼二將歌), 김완진 해독본 기준


4.2. 후대의 송(頌)


고려를 이은 조선왕조도 충절의 본보기로 삼았기 때문에 신숭겸의 후손은 혜택을 입었다. 신숭겸의 평산 신씨는 조선의 무반 명문가 중 하나로, 신사임당, 임진왜란 직전까지 활약한 신립, 임진왜란 때 해유령전투에서 임진왜란 첫번째 승리를 거두었으나 행정 오류로 처형당한 신각, 그리고 구한말 최초 평민 의병장이었던 신돌석 등도 평산 신씨다.
대구 지묘동에 사당이 있고, 파군재 삼거리에 크고 아름다운 동상이 있다. 그리고 역시 대구 파군재 삼거리 근처에 표충단이 있으며[10]묘는 춘천에 있다.[11] 참고로 춘천의 신숭겸 묘에 가면 정말로 봉분이 세 개가 있는데 그것은 위에 언급된 황금으로 만들어진 머리가 도굴되지 않기 위함이라는 설과 그냥 부인을 함께 안장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오늘날 신숭겸이 묻힌 곳은 원래 왕건 자신이 묻힐 곳으로 봐 둔 명당 자리 중 하나였는데 자신의 목숨을 구한 신숭겸을 위해 양보한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이 묘자리는 풍수지리가들이 명당중에 명당이라고 극찬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신숭겸의 위왕대사는 기신의 고사에서 착안한 것인데, 별 다른 녹훈을 못 받아서 유방을 까는 빌미가 되기까지 하는 오리지널 격의 기신과 달리, 신숭겸은 두 왕조에 걸쳐 무려 천년이라는 시간동안 받을 수 있는 모든 대접을 다 받고 있다는 것.[12]
신숭겸의 묘는 '''총 열 개'''인데, 도굴을 두려워하여 구월산과 팔공산에 각 세 개의 가묘를 지었고, 두 개의 도굴방지용 가묘를 포함한 세 묘가 있는 춘천에는 신숭겸의 몸이 묻혀 있고, 전남 곡성군 태안사에는 신숭겸의 머리가 묻혀 있다고. 정말이지 관우와 비슷한 셈이다.[13] 여담으로 춘천에 있는 신숭겸 장군묘는 풍수지리학적으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당 중에 하나라고 한다. 태안사에 몇 가지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신숭겸의 애마가 신숭겸의 목을 들고 여기까지 와서 3일을 울다가 굶어 죽었다고 하며(...적토마?), 목과 말을 묻고 장군단이라 하여 매년 3월 16일에 제사를 지냈는데,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호환이 일어나는 등 사찰에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고.

5. 대중 매체에서



5.1. 드라마 태조 왕건



KBS 대하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관우와 같은 이미지로 나왔다. 배우는 김형일.[14] 긴 수염에 애용하는 무기도 언월도다.[15][16] 무진주 관내의 곡성 출신이며, 처음에는 성씨 없이 능산으로 부르다가 132화 말미에 평주 부근의 산길[17]에서 기러기를 신묘하게 쏨으로써 왕건으로부터 '신숭겸'이란 성씨와 이름을 받게 되었다. 박술희와 함께 여행을 하다가 송악에 들어왔고, 그들을 눈여겨 본 왕건에게 대접받고 의형제가 된다. 이건 영락없이 유관장의 포지션인데, 다만 여기에 유금필이 끼어들어 4형제가 되었다.[18]
문무겸비의 유금필이나 맹장 스타일인 박술희와 달리[19] 직접 싸우는 장면은 적고 논리적이고 냉철한 분석으로 전황을 파악하여 브리핑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다만 싸우는 장면이 적을 뿐 싸움도 잘 하는 장수로 나온다. 웬만한 일기토에서 진 적이 거의 없다. 양길과의 전투에서 양길의 동생 명길을 한 칼에 벤 것도 이 사람이다. 수달을 생포했던 나주 2차전투에서 방장군을 언월도를 사용하지 않고 검으로 수급을 취할 정도였다. [20]
잘 알려진 대로 공산 전투에서 김락, 전의갑, 전이갑 등의 동료 장수들과 함께 백제군을 유인한 뒤 전사한다.
이 때, '''이들 3인과 함께 주군인 왕건에게 마지막 하직 인사를 올리는 장면은 차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명장면'''.
실제로 태조 왕건 방영 당시 공산 전투편이 방영될 때 평산 신씨 종친회에서 단체로 모여서 TV를 시청하였으며, 신숭겸이 전사한 씬에서 단체로 TV를 향해 절을 올렸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적들이 앞에서 활로 겨눌 때, 잠시 말을 멈추고 김락과 손을 잡고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에 말을 타고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에는 그 어떠한 망설임이나 두려움이 없었다. 전사 후 신숭겸의 수급을 본 최승우조차 "자신이 모시는 주군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이 신숭겸의 충성에 하늘이 감복한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신숭겸은 그 목숨을 다하는것에 그 어떠한 억울함이나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렇게 눈 앞의 백제군을 향해 김락이 먼저 출발하고 먼저 전사했으며, 신숭겸은 마지막까지 돌격한 후 수많은 화살을 맞고 언월도에 의지한채 숨을 거두었다. 수많은 장수들이 죽는 이 작품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화살을 맞고 전사하게 되는 장수들이 이 공산전투에서 나오게 된다. 장수들의 죽음은 장수들간의 1:1 싸움에서 전사하게 되는 부분이 많이 나왔음에도 김락과 신숭겸은 화살로 전사를 하게 되는 연출로 더욱이 안타깝고 슬프게 감정을 뒤흔들게 되었다. 더구나 그 장수가 신숭겸이었기에 더더욱 늘 조용히 왕건만을 위하여 헌신해온 장수였기에, 그 이전의 왕건의 사람들의 죽음보다도 더욱 슬피 연출되었다. 후에 신숭겸 역을 맡은 배우 김형일은 평산 신씨 명예 종친에 선정 되기도 했다. 2020년 10월 15일부터 KBS Drama Classic 채널에서 200회까지 무료 스트리밍을 할 때 신숭겸이 최후를 맞는 공산 전투 에피소드 당시의 시청자는 화요일 밤임에도 시청자가 1만명을 넘는 모습을 보였다. 여담으로, 원래 평산 신씨 문중에서 관련 영상을 만들긴 했지만, 언제부턴가 제공이 되지 않아서 아래의 KBS Drama Classic 채널에서 가져온 영상을 대체하였다.

(백제군 군졸로 변복한 왕건 앞에 희생을 결심한 네 장수가 변복을 마치고 왕건 앞에 나타나자 왕건 깜짝 놀란다.)

'''왕건''': 뭐가 어떻게 된 일인가? 숭겸 아우는 그게 무슨 일인가? 왜... 왜 이 형의 갑옷을 입었는고? 전이갑 장군은 왜 복 장군의 갑옷을 입었는가?

(말없이 굳은 표정으로 네 장수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복지겸도 차마 그들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돌린다.)

'''신숭겸''': 형님 폐하, 오늘의 이 곤경을 도저히 피할 길이 없어 신들이 꾸민 일이옵니다. 무사히 가시오소서.

'''왕건''': 무슨 소리인가? 이...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김락''': 폐하! 부디 이 곳을 빠져 나가시어 사직을 보존하시오소서!

'''전이갑''': 신들을 용서하시오소서... 폐하! 부디 이 곳을 무사히 나가시오소서!

'''전의갑''': 사직을 보존하시오소서, 폐하!

'''왕건''': 나를 속였구나. '''모두들 나를 속였어!''' 나를, 나를 속였어! 이제 보니, 아우가 나로 위장하여 적진으로 가는 사이에 이 형보고 도망가라는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이 아닌가?!

'''신숭겸''': 용서하시오소서, 형님 폐하. 형님 폐하를 위해 목숨을 다할 수 있게 되어 이런 기쁨과 영광이 없사옵니다. 바라옵건대, 부디...부디 대업을 이루시오소서, 형님 폐하.

'''김락''': 대업을 이루시오소서, 폐하!

(그 말을 듣던 전이갑도 말없이 눈물을 흘린다.)

'''왕건''': (좌절하며) 이... 이럴 수는 없다. 내 목숨 하나 살자고 아우와 제장들을 다 죽이다니, 이럴 수는 없다! (군졸복을 벗으려 하며) 나는 아니 갈 것이야, '''나는 아니 갈 것이야!'''

'''신숭겸''': 무엇들 하시오? 어서 폐하를 뫼시시오!

'''복지겸''': 폐하... 용서하시오소서!

'''박수문''': 폐하!

'''박수경''': 폐하!

'''왕건''': (복지겸 등을 뿌리치며) 놔라! 이것들 놓지 못할까?! 나는 아니 간다! 나는 아니 가!

'''신숭겸''': 형님 폐하, 가셔야 하옵니다. 형님 폐하의 어깨에는 대 고려제국 의 명운이 달려있사옵니다. 신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시오소서. 부디, 부디 강건하시고 대업을 이루시오소서...

'''왕건''': 아니 되네... 아니 돼... 아니 돼!

(그러나 왕건의 오열을 뒤로 하고 그들은 서서히 일어서며 하직 인사를 올린다.)

'''왕건''': 아니 돼... 아니 된다, 아니 돼... 아니 된다, 아니 돼! 아니 돼! 숭겸 아우! 아니 돼!!! 아니 돼...

'''신숭겸''': (잠시 뒤를 돌아보더니) 무사히 가시오소서, 형님 폐하... (말을 마친 후 다시 고개를 돌린다.)

'''왕건''': 아니 된다... 아니 돼..! 아니 돼! 숭겸 아우! 숭겸 아우! 아니 돼!!! 아니 돼!!! 숭겸 아우...!! 아니 된다! 아니 돼!!!![21]

[22]

아니 된다..! 아니 돼! 아니 돼!! 숭겸 아우! 아니 돼!

'''신숭겸''': (후시)형님 폐하... 대장부들이 가는 길이옵니다. 슬퍼하지 마오소서... 사내들의 의리가 다 이와 같은 것이 아니옵니까? 형님을 위해 아우가 감은 당연한 것이옵니다. 부디, 부디 대업을 이루시오소서!

'''왕건''': 아우야! 숭겸 아우야!! 김락 장군! 전이갑 장군! 의갑 장군! 장군들! 이것들 놓아라... 놓치 못하겠는가? 이것들 놔! 놓지 못하겠는가! 내 어찌 아우와 장수들을 죽이고 이 한 목숨 연명하랴. 놓아라, 이것 놓치 못할까?

'''복지겸''':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이미 장수들이 떠났사옵니다. 폐하를 위하여 그리고 국가 사직을 위하여 장렬한 선택을 한 저들이옵니다!

'''박수문''': 그러하옵니다. 폐하, 저들의 큰 뜻을 받으시오소서.

'''왕건''': 아니다..이건 아니야. 한 나라의 황제가 할 짓이 아니야.

'''복지겸''': 폐하, 폐하께오서는 바로 국가이시며 제국의 주인이시옵니다! 만 백성의 어버이께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벗어나 백성의 안녕을 찾는 것은 당연한 본분이시옵니다! 그들의 뜻을 받으시오소서! 그리하셔야 하옵니다, 폐하!

'''왕건''': 이 일을 어찌할꼬..? 내 아우와 저 장수들을 어찌할꼬? 아니 된다...! 아니 된다!!!!!!(왕건은 통곡한다.))

왕건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리고, 이후 전투에서 백제군을 맞닥뜨린 신숭겸과 김락은 치열하게 전투를 치르고 나서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긴다.

'''김락''': 장군, 폐하께서는 충분히 이곳을 빠져나가셨을 것이오.

'''신숭겸''': 그러셨을 것이오. 이제, 앞에는 길이 없소이다.

'''김락''': 그렇소이다. 이제, '''갈 때가 된것 같구려...'''

(그리고 두 사람은 손을 맞잡으며 서로를 쳐다본 후에 백제군한테 진군한다.)

'''신덕''': 쏴라!

(김락이 화살을 맞고 낙마하면서 죽고, 다음에 신숭겸이 화살에 맞았다.)

'''신덕''': 고려 왕이 맞았다! 고려 왕이 맞았어!

(신숭겸이 화살은 맞은 후에 말에서 낙마했다. 그리고 백제군 군사들이 다가오기 직전에 '''장렬히 전사했다.''')

공산 전투에서 혈투 끝에 전사한 후, 견훤이 눈을 부릅 뜬 그의 목을 보자 식겁하는 장면은 아무리 봐도 삼국지연의조조가 관우의 수급을 보는 장면의 패러디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특히 중증 삼국지빠인 작가가 작품 내내 신숭겸의 이미지를 관우 비슷하게 잡아놓은데다가 제2차 나주 공방전에서는 아예 대놓고 태평의 입에서 제갈공명과 동남풍 드립까지 치게 한지라 더더욱. 물론 대강의 이미지나 분위기만 그렇고 세세히 살펴보면 상황이 많이 다른데, 조조가 관우의 목을 보고 놀란 것은 관우의 목이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견훤이 신숭겸의 목을 보고 놀란 것은 틀림없이 '왕건 아우'의 목일 거라고 여겼던 것이 실은 전혀 엉뚱한 사람의 목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적국의 왕이나 장수를 베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목을 베어오는 것이고 예상과는 달리 전혀 엉뚱한 사람의 수급이 도착하여 놀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기야 수십년을 벼른 서라벌 공략에 이어 이제 왕건의 목까지 앞에 두고 삼한일통의 그 순간을 만끽하려 했는데, 왕건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했으니 얼마나 분통이 터지겠는가? 그런데 무언가를 패러디할 때 반드시 모든 상황이 디테일하게 100% 일치할 필요는 없으며, 대부분의 경우 그럴 수도 없다. 포인트는 이런 연출을 택한 의도가 어떤가를 생각할 때 금강의 하후돈 드립이나 최승우의 삼고초려 제갈량 이미지, 태평의 동남풍 운운으로 삼국지 내용을 노골적으로 가져온 전적이 있는 작자가 신숭겸을 관우의 이미지와 매우 흡사하게 연출했고, 결국 대군의 공세를 못 당해 죽어 참수되어 그 목이 보여지는 일련의 과정까지 볼 때 심증적으로 사실상 노린 게 확실하다는 느낌을 적지 않은 시청자가 받았다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공산 전투 이전 자신의 왼쪽 발에는 북두칠성과 같은 7개의 점이 있어서 전장에서 무운을 세울 수 있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 말은 훗날 서글픈 복선으로 돌아온다. 패전 이후 김락, 전이갑, 전의갑 등 전사한 장군들의 시신을 수습할 때, 신숭겸은 이미 목이 잘리고 의관도 뺏긴 상태라서 제대로 찾질 못하다가 왼쪽 발의 점이 있었다는 배현경의 말을 토대로 확인해서 겨우 목이 없는 신숭겸의 시체를 수습할 수 있었다.
왕건은 수도에서 신숭겸을 비롯한 장수들의 장례를 치르고 복수를 반드시 하겠노라 맹세하나 몇 차례 더 패전한다. 하지만 고창 전투에서 드디어 이겨 복수에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백제가 분위기 전환 및 신검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예성강을 통해 고려의 수도를 기습할 때 왕건은 순행을 나가있다가 꿈을 꾸는데 신숭겸이 애타게 부르자 침대에서 일어났으나 정작 신숭겸은 없고 견훤이 나타나 왕건을 겁박하였고, 왕건은 잔뜩 기겁하며 깨어났다. 얼마 안 지나서 백제가 수도를 기습했다는 비보를 전해듣게 된다.

5.2. 천년의 신화


그런데 천년의 신화(왕건 미션)에서는 언월도는 수달에게 주고 흑선풍 이규마냥 쌍도끼를 투척하는 식으로 공격한다. 여담으로 4기장(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과 의형제들 중 유일하게 극중에서 처음부터 신숭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능산이라는 초명으로 불리다가 나중에 왕건으로부터 신숭겸이라는 이름을 하사받는 것으로 나온다. 물론 고증대로라면 이게 정확하다.

5.3. 첫사랑


사극이 아니라 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이니만큼 직접 나오지 않으나 26화에서 그의 무덤이 나온다. 이때 무덤을 둘러보는 사람이 성찬혁을 연기한 최수종으로, 훗날 그가 태조 왕건에서 신숭겸의 주군인 왕건으로 나와 공산 전투에서 자신으로 위장하고 백제군을 유인하여 희생하러 떠나는 신숭겸을 보고 대성통곡하는 점이 배우 개그로서 작용한다.

6. 기타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신숭겸 사성 일화와 위왕대사 부분은 워낙 극적이고 스토리의 고증이 잘 되어 있어 평산신씨 종친회에서 영상교육자료로 유튜브에 업로드해서 두고두고 잘 써먹었지만 현재 저작권 때문에 평산신씨 대종회에서 올린 영상은 날아갔다. 직접적인 접점은 없지만 왕건의 아버지 왕륭을 연기한 신구는 바로 신숭겸의 후손이다. 공산 전투 에피소드 방영 당시에는 평산 신씨에서 TV 앞에 모이고, 신숭겸이 전사하자 모두 절을 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 고대 무장 병종 정보에 데이터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병종은 궁기병계. 하지만 이후 게임이 종료되어 볼 수 없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최강의 맹장이라 불리던 기병 전문가 신립은 이 신숭겸의 후손이다. 방식은 다르지만 둘 다 명장이라 평가 받았고, 패전으로 전사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태조왕건의 신숭겸과 징비록의 신립 둘 다 김형일이 연기하여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신숭겸의 후손들은 대대로 충신들이 많다. 임진왜란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행적오류로 처형당한 신각,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싸웠던 신호, 나선정벌의 지휘관이었던 신류, 그리고 개화기 일본군을 상대로 의병활동을 전개한 평민 의병장 신돌석 등이 신숭겸의 후손이다.

7. 같이보기


[1] 현재의 전라남도 곡성군 목사동면. 그러나 초기 활동 지역은 강원도 춘천시.[2] 고려사 예지 태묘조 기록.[3] '차현 이남, 공주강 밖(外)' 사람을 쓰지 말란 구절의 차현을 차령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지만 실제 차현과 차령은 전혀 다르고 공주강 밖(外)의 해석도 생략하거나 공주강 이남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지만 공주성 기준 공주강 이북으로 봐야 한다는 해석 차이가 있다. 딱히 고려 왕조호남 출신 인물을 차별한 사례가 없고 왕건의 혁명 직후 궁예 정권의 인물인 이흔암이 죽임을 당하자 왕건에게 저항하던 청주 같은 지역이 있기도 했다. 오히려 신숭겸, 최지몽, 박영규 등 왕건에게 호남 출신 최측근이 있었고 대우받았다.[4] 능환이 상주에서 견훤을 따라다니던 패거리였다는 이력은 이환경의 창작이며 호남 지역의 호족 출신이라는 추측이 우세하다.[5] 한반도의 성씨 개념은 일부 고위 귀족을 제외하면 고려시대 문종 9년(1055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문종이 성씨가 없는 사람은 과거에 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을 내리게 되면서 귀족들이 성씨를 사용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문종이 그런 법령을 내린 이유는 그 전에는 명문가 출신들도 중국에서 유래한 성씨 사용의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에 성씨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호족 출신인 태조 왕건의 경우도 어떠한 기록에도 선대의 성에 대한 기록이 확실치 않다. 문종 9년 이전에도 김씨나 박씨 같은 왕족, 백제 대성팔족, 가야계 김해 김씨, 신라삼최와 같이 중앙의 일부 귀족은 성씨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귀족들이 본격적으로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왕건이 각 지역의 토착 세력인 호족들에게 본관과 성씨를 지정해주는 ‘토성분정’을 실시하면서부터였다. 이를 보완한 게 문종 9년 과거 응시자의 본관과 성씨를 응시 자격으로 하는 ‘봉미 제도’이다. 동생인 신능길의 경우를 볼 때 능산, 능길로 형제끼리 돌림자를 써서 이름을 지을 정도면 성을 칭할 정도의 유력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문자를 쓰는 집안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중국으로부터 성씨의 개념이 도입되기 이전에는 이름에 같은 글자를 넣어 성씨의 기능을 대신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6] 한나라 고조 유방의 심복이었던 기신의 고사에서 착안했다고 한다.[7] 이 때 4명을 포함하여 모두 8명의 장수가 전사하였다 하여 공산의 이름이 팔공산이 되었다고 전해진다.[8] 두(二) 장군(將)을 애도하여(悼) 노래(歌)하였다고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9] 이 시가는 국문학사에서 하나의 떡밥이기도 하다. 바로 갈래의 문제 때문. 향찰로 표기되어 있는데, 신라가 망한지 한참 지난 후에나 나온 노래임에도 낙구를 비롯해 그 형식이 8구체 향가와 같아서 그 시대에 맞는 고려가요로 보기보다는 광의의 향가, 최후의 향가로 보는 이들이 많다. 비슷하게 향가의 흔적이 남아있는 고려가요로는 이보다 사반세기 후인 의종대에 정서가 지은 <정과정>이 있다. [10] 이전에는 대구에 묘가 있다고 적혀 있었으나 사실 이것은 신숭겸이 전사했다는 곳에 만든 가묘이다. 조선시대에 신숭겸의 후예인 신흠이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11] 공교롭게도 태조 왕건에서 왕건 역을 맡은 최수종이 1996년 방영된 주말연속극 첫사랑에서 이승연과 함께 춘천의 신숭겸 묘를 둘러보는 장면이 나온다.[12] 기신의 경우 그 공을 받을 가족조차 없었을 확률이 있는데 비슷하게 유방을 탈출시키고 항우에게 죽은 주가의 경우 그의 아들이 보상을 받았다.[13] 중국 허창에는 관우의 목이, 당양에는 관우의 몸이 묻혀 있다.[14] 훗날 드라마 징비록에서 신숭겸의 후손인 신립 역할도 맡게 된다.[15] 가끔 평범한 검을 쓸 때도 있다. 후백제 진영의 맹장인 방희를 벨 때에도 검을 썼다. 참고로 언월도는 신숭겸 외에는 홍유가 사용.[16] 작중에선 이 점이 공산 전투에서 왕건인 줄 알고 베었던 목이 사실 신숭겸의 목이었음을 견훤으로 하여금 깨닫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정확히는 다른 사람의 목이 라는 걸 알게 된 견훤이 목을 베어 온 애술에게 제대로 확인을 했냐고 닦달하자, 최승우가 '원래 고려 왕은 언월도를 안 쓰는데, 그 날은 웬일로 언월도를 들고 있었고, 전투에서 신숭겸이란 장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니 이 자는 분명 왕건의 의제 신숭겸이다.'라고 말했다. 캐릭터에 모티브가 된 관우가 살던 시대에는 월도가 없던 것과 달리 태조 왕건은 월도가 나온 당나라가 존재하던 후삼국 시대였으니 오히려 무기 고증은 됐다.[17] 왕건, 최응, 복지겸과 함께 평양으로 가던 중.[18] 애매하게 4형제라 관우 포지션은 유금필도 가지고 있다. 둘째라든지, 무력에 있어서는 대적할 자가 없다든지. 왕건 없이 유금필, 신숭겸, 박술희 세 명이 움직이는 경우 유금필이 유비 포지션으로 이동하고, 신숭겸이 비로소 온전히 관우 포지션을 잡는다. 후에 삼년산성 전투에서 단 기로 애술을 제압하고 성을 공략한 유금필을 보고 함께 있던 장군 윤신달이 조자룡의 무예를 보는 거 같다고 말하며 은근히 조운으로 밀어주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이문열계 삼빠들에게 조운은 그야말로 관우, 장비 이상가는 무패장군 취급이기 때문에(이문열 본인부터가 조운빠라고 커밍아웃하기도 했고) 고려사 최강의 인간흉기인 유금필이 조운 포지션인것도 이상할건 없다. 여담으로 한참 뒤에 나온 중국 드라마인 삼국에서는 조자룡을 사실상 유비, 관우, 장비와 함께 4형제 취급한다는 걸 생각해보면...[19] 물론 이쪽도 아자개와의 대면에서 알 수 있듯 학식은 굉장히 높다.[20] 첫 등장시에도 박술희가 "저희 능산형님(신숭겸)이 검이 아닌 언월도를 사용했다면 난처하셨을것입니다."라고 할 정도였으니, 주 무기가 아님에도 백제의 맹장을 쓰러뜨렸다.[21] 여기까지가 160화.[22] 여기부터가 16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