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금강

 


<skyblue> '''국적'''
'''백제(百濟)'''
<skyblue> '''삼사'''
태사(太師)
<skyblue> '''성씨'''
견(甄)
<skyblue> '''이름'''
금강(金剛) / 총지(聰智)(?) / 수미강(須彌康)[1]
<skyblue> '''출생'''
후백제 완산주[2]
<skyblue> '''부왕'''
견훤(甄萱)
<skyblue> '''모후'''
불명[3]
<skyblue> '''생몰연도'''
음력
? ~ 935년
1. 개요
2. 생애
3.1. 드라마 태조 왕건


1. 개요


후삼국시대의 인물.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넷째아들.

2. 생애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금강은 본래 외모가 훤칠하고 군사적인 재능이 탁월하여 견훤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견훤은 장남인 견신검을 제쳐두고 견금강에게 자신의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를 시기한 견신검은 동생 견양검견용검, 이찬인 능환 등과 모의하여 935년 3월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빼앗는데 이르렀다. 이로 인하여 견훤은 왕위를 빼앗긴 채 금산사에 유폐당했고 결국 견금강은 견신검에 의해 살해당했다.
견금강의 죽음은 견훤으로 하여금 분노하게 했으며 견훤이 위험을 무릅쓰고 필사적으로 금산사에서 탈출해 고려로 가서 후백제를 멸망하게 한 것도 사건에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이제가기"에는 견훤의 넷째아들이 '태사 총지'라고 되어 있다. 이제가기를 봐도 금강이 총애받았다는걸 추측할 수 있는데 이름부터 좋은 한자인 귀밝을 총(聰) 자, 지혜 지(智) 자를 쓰고 있고 직위가 "태사(太師)'', 최고의 명예 직위 중 하나이다. 그러나 같은 기록에서 견훤의 관직은 국왕이 아닌 상보(尙父)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해당 관직은 후백제 멸망 후 받은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사후 추존된 것으로 보인다.

3. 대중매체에서



3.1. 드라마 태조 왕건


[image]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 등장했다. 배우전현.[4]
용맹함과 총명함을 두루 갖추어 아버지 견훤의 총애를 받았으며 전장에서도 큰형인 견신검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줬다.[5][6] 견신검이 싸움에 나서면 잘 나가다가 고집을 부려 실패하는 것에 비해 견금강은 신중하면서도 총명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
반면 견훤의 끊임없는 갈굼에 시달려온 견신검은 대놓고 아버지의 편애를 받는 견금강을 못마땅해하며 노골적으로 차갑게 대했는데[7] 본격적으로 왕위 계승 문제가 얽히게 된 이후로는 증오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견금강은 이복형들이 자신을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든 우애있게 지내려 애쓰는 모습을 보였지만 세월이 지나도 형들의 태도가 조금도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견금강 역시 형들에 대한 반감을 품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본처 박씨의 등쌀에 오랜 세월 시달리다 견금강을 후백제의 황제로 올려 설움을 보상받으려는 어머니 고비의 부추김까지 받으면서 견신검을 제치고 견훤의 후계자가 될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큰 문제가 있었는데 견금강의 지지 기반이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 가장 큰 버팀목인 아버지 견훤은 등창으로 인해 병석에 누워 앓고 있던 처지였고 견훤의 강권에 못 이겨 금강의 후원자가 된 파진찬 최승우는 중도파였을 뿐더러 별다른 지지 기반이 없었다.[8] 견신검이 군사적으로 무능하다 하지만 인망이 있었기에 후백제의 관료들은 대부분 신검을 따르고 있었다. 자신을 도울 사람이라고는 매제인 박영규 정도 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견금강은 후계자가 된다는 기대감에만 들떠 그동안의 총명함을 무색하게 하는 판단 착오를 일으키는 어리석은 실수를 범한다.[9][10] 결국 견신검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제대로 저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허망하게 최후를 맞게 된다. 대본에서는 정말 안습하게도 생포되어 견신검 앞에 끌려간 자리에서 살려달라고 목숨을 구걸하다가 신검에게 "금강답지 않구나" 소리까지 듣고는 목이 잘리는데 너무 찌질하다고 여겼는지 방영분에서는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 "형님. 이것은 반역이옵니다!"하고 강변하다가 참수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전장에서 화살에 눈을 맞고는[11] 화살에 꽂힌 눈알을 부모님이 주신 것이라면서 씹어먹는 삼국지연의하후돈 짝퉁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본인이 직접 하후돈의 일화를 언급하며 먹는다. 작가 이환경이 삼국지의 팬이라[12] 금강이 실명했다는 기록을 토대로 삼국지를 덧붙였다고 한다. 드라마 속에서 이 사건은 처음으로 전장에 나온 고려의 정윤(태자) 왕무에게 큰 인상을 남겼으며 견훤에게는 그 효성에 감동하게 만드는 역할로 작용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견훤은 금강을 위로한답시고 "예전의 궁예 왕도 한 쪽 눈이 없어도 나라를 잘만 다스렸다"며 순식간에 신료들의 분위기를 갑분싸로 만든다(...). 듣기에 따라서는 금강이 나중에 나라를 다스릴 거라고 해석될 수도 있는 문제발언이었다. 그 외에 조물성 전투를 다룬 145~146화에서 역병에 걸렸을 때 태평과 달리 끈질기게 살아남았다.[13]
결과적으로 보자면, 금강은 신검과 비교했을 때 군사적 재능은 꽤 출중했고 아버지에 대한 효심도 지극했으나, 정치적으로는 혈기왕성함이 오히려 독이 되어 큰 판단착오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분명 누가 봐도 금강의 능력이 신검보다 뛰어났지만, 대다수의 신료들이 신검 편에 선 것을 보면, 금강은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할 정치적 역량이나 인망이 한참 부족했다[14]. 비록 신검이 장자이고 정통성 면에서 우위에 있기에 신료들을 포섭하기가 쉬웠다고 하지만, 금강이 보여준 군사적 능력 정도면 조금만 정치적 입지에 신경썼을 경우 자신이 태자가 되었을 때 그리도 허망하게 제압당하고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15] 이렇게 보면, 금강이 왜 자신이 후계자로 낙점되자 자신의 취약한 지지기반을 전혀 고려하지 못했는지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군사적으로는 총명하기 그지 없었으나 정치적 안목은 너무 부족했고, 맏이가 아닌 아들이 권력을 성공적으로 이양받기 위해서는 그만큼 그에 걸맞는 입지가 더더욱 필요하다는 사실을 애당초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 조선의 3대 임금인 이방원도 자신이 장남이 아니라는 약점은 이방석과 마찬가지라 그만큼 입지를 확보하는데 신경썼음을 알면 금강은 그야말로 안이했다.
별개의 이야기지만, 2014년사극 드라마 정도전에서 전현은 조준의 역을 맡았는데... 여기서 신검역을 맡은 이광기하륜 역을 맡았다.(...) 거기에 견훤을 연기한 서인석은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 최후의 보루이기도 한 최영을 맡아서 삼부자가 다시 재회하는 격이 됐다. [16]무인시대에서는 이의방의 동생이자 이성계의 6대조인 이린 역할을 맡았는데, 여기서는 견훤 역할을 맡은 서인석이 이린의 형인 이의방을 맡았다.

4. 조선일보


아동용 학습만화인 "맛있는 한자"에 출연. 작중 견훤이 2미터는 족히 넘을듯한 거구의 장사로 나오는데 마찬가지로 그를 빼닯은 거구의 초월적인 무인으로 나온다. 문약하고 비리비리한 인물로 왜곡된 신검과 완전히 대비되는 모습으로[17], 무력도 뛰어나지만 군사적 재능도 출중하여 견훤의 총애를 받는다. 특히 후반부에는 견훤과 함께 무력 투톱을 달리던 유금필과 일기토를 떠 승리함으로서[18] 명실상부 작중 무력 1인자로 올라선다. 이런 인상적인 모습과 문약한 신검의 모습이 대비되어 결국 견훤은 끝내 금강을 후계자로 낙점한다.
그러나 이런 인상적인 모습과는 별개로 반란을 원치않는(?) 신검을 앞세운 양검과 용검 및 능환 일파의 쿠데타에 그 엄청난 무력이 무색하게 아무것도 못하고 참살당한다. 심지어 죽는 모습도 나오지 못하고 견훤에게 소식을 전달하는 병졸의 대사로 쿠데타 세력에게 참살당했다는 언급만 나온다. 그저 안습.
[1] 연개소문의 이름은 기록에 따라 개소문(蓋蘇文) / 개금(蓋金) / 이리카스미(伊梨柯須彌)로 표기된다. 蘇는 쇠를 음차한 것으로서 金에 대응되고, 이 金은 다시 須彌에 대응된다. 수미는 산스크리트어로서 금(金)을 뜻하기 때문.[2]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3] 이제가기에서는 상원부인(上院夫人), 삼국사기에서는 신검, 양검, 용검과 이복형제로 기록됨.[4] 큰형인 견신검 역의 이광기보다 2살 많다.[5] 조물성을 공략할 때 견신검이 지휘했을 때에는 죽는 병사만 늘어나고 별다른 진전이 없었던 반면 견금강이 지휘했을 때는 거의 함락시킬 뻔 했다. 다만 운이 없게도 난전 중에 한쪽 눈을 잃었다.[6] 또한 운주 전투 때에도 견신검, 견양검, 견용검은 공명심 때문에 무리하다가 최필, 종훈, 훈겸 등을 잃고 크게 패배한 반면 견금강은 견훤의 병환을 걱정하여 회군을 주장하였다. 이 때문에 견훤은 후방으로 이송할 때 견금강을 후계자로 확실히 정한 것이다.[7] 형들과 같이 나간 조물성 전투에서 견금강이 선봉에 서겠다고 하자 견신검은 이를 반대하고 예비군으로 남겼다가 자신과 형제들이 지고나자 지면 군령을 적용하겠다는 말과 함께 마지못해 맡긴다.[8] 신검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얼마 전에 최승우는 나라의 앞날을 염려하여 견금강을 찾아가 후계자 자리를 포기할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견금강은 그렇게 되면 자신은 형들에 의해 목숨을 잃을 것이라 장담했기 때문에 거절하였다.[9] 견훤은 자신의 사위라는 명분으로 박영규를 군부의 수장으로 세웠지만 그 이전에 신검파의 신덕이 오랜 지휘 경험을 바탕으로 사실상 군부를 통제하였다. 신검파의 쿠데타는 박영규의 납치 감금에서 시작된 걸 보면 견훤과 견금강은 군부에 대해 너무 안이하게 대처한 셈.[10] 쿠데타 당일 견금강은 내궁을 경비해야 했음에도 황제가 된다는 생각에 들떠 이나 마시고 외궁을 경비하던 상애에게 내궁까지 맡기는 실책을 저지른다. 게다가 쿠데타군이 이미 전날 박영규를 잡아 가두어 군부를 장악했는데도 박영규의 안위를 알아보지도 않았다. 쿠데타 당일 견금강이 보여준 행동은 평소의 견신검보다도 훨씬 무능한 것이었다.[11] 연출에 차이가 있다면 궁예는 왼쪽을 상실한 것으로 만들었고, 금강은 오른쪽 눈으로 연출했단 거다.[12] 이 장면은 방영 직후에 꽤 큰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삼국지연의를 흉내냈다는 것도 그렇지만(삼국지연의는 수백년 뒤 명나라 시절에 나왔다.) 지상파드라마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고어한 연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뽑혀나온 눈알을 (물론 소품이지만) '''모자이크 처리도 안 하고''' 대놓고 내보냈으니... 한 마디로 무리수. 그나마 이후, 같은 작가가 집필한 연개소문에서는 이 부분을 모자이크 처리했다. 현재는 왕건 드라마도 재방영시 눈알은 모자이크에, 먹는 부분을 삭제했다.[13] 후백제의 의원 훈겸이 어느날 아침 늪지대에서 지렁이를 캐고 있는 노인을 만났는데, 그 노인에게 그 괴질엔 열을 내리는 지렁이가 좋다는 말을 듣고 금강에게 이를 처방했는데 과연 효험이 있었다. 문제의 그 노인은 훈겸이 돌아보자 갑자기 사라졌는데, 이에 견훤은 조상신들이 내려온 것이라며 탄복하였다. 훗날 왕건은 지렁이 태몽을 접해듣고 하필 용도 아닌 지렁이 태몽을 주장하냐며 황당해했다.[14] 가령 신검은 능환 같은 정치적 동료들과 어울리는 장면이 여럿 등장하지만, 금강은 그런 장면이 없다.[15] 그러나 금강은 정통성 면에서 신검에게 넘사벽으로 밀렸다. 신검은 엄연히 적장자이지만, 금강은 적자도 아니고 후궁 소생인 서자이다. 500년 후이자 같은 작가가 다룬 전작 용의 눈물이방석조차 어릴지언정 적자였으므로 정통성 면에선 금강에 비할 바가 아니다. 괜히 신료들이 신검을 지지한게 아니기에, 금강이 입지에 신경썼다 한들 신료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을지는 의문.[16] 차이점은 하륜은 최영의 죽음에 이바지를 한 반면 조준은 비록 하륜으로 인해 뒷전으로 완전히 밀려났으나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17] 자세한건 견신검 항목 참고.[18] 다만 이건 유금필이 나이가 많아 노쇠했기 때문이라는 암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