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주 전투

 


'''통주 전투
通州戰鬪'''

'''시기'''
1010년(현종 원년) 11월 25일 ~ 12월 초
'''장소'''

고려 통주성 근교 삼교천(現 평안북도 선천군)

고려 통주성 (現 평안북도 동림군 고군영리)

'''원인'''
요성종의 고려 침공.
'''교전국'''
고려 [image]
거란
'''지휘관'''
'''강조'''(행영도통사)
이현운(행영도통부사)
노전(행영도통판관)
노이(감찰어사)
양경
이성좌
노정(행영도병마부사)
서숭(사재승)
노제(주부)
김훈(좌우기군장군)
김계부
이원
신영한
최질(중랑장)
홍숙
이원귀(방어사)
최탁(부사)
양규
최사위(통군사)
최충(수제관)
<^|1>'''요성종'''
야율분노
야율적노
'''병력'''
300,000 명
200,000 명[1]
'''피해'''
고려군 지휘부 궤멸
30,000여 명 사상
피해 규모 불명
'''결과'''
고려 주력군 소멸.
'''영향'''
현종 나주로 몽진, 개경 함락으로 각종 문화재 소실.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삼수채 전투
3.2. 완함령 전투
3.3. 통주성 전투
4. 여파
5.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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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기 1010년, 2차 여요전쟁에서 행영도통사 강조의 고려군요성종이 이끄는 거란군에 크게 패한 전투. 초반엔 고려군의 지속적인 방해 및 선전으로 전세가 팽팽했지만 후반엔 전략 실수로 거란군에게 참패하였다.
한국 전근대 역사상 단일 회전으로는 가장 큰 규모의 회전이며 이전은 물론 이후에도 한국은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때 동원한 만큼의 병력을 단 한번도 동원하지 못한다.

2. 배경


강조의 정변이 일어난 후, 요성종이 이를 구실삼아 고려로 친정을 하게 된다. 이 때 동원된 병력의 수가 40만. 거란군은 1010년 11월 중순 압록강을 도하하여 흥화진을 먼저 공략하였으나 양규 휘하 고려군의 방어로 인해 함락시키지 못하게 되어, 무로대에 20만의 병력을 견제용으로 남겨둔 채 남하하였다. 남하한 거란군의 주력은 통주(현 선천군) 방면으로, 소규모 기동부대가 귀주(현 구성군) 방면으로 이동한다. 귀주 방면으로 남하한 소규모 기동대는 11월 18일 고려군과 충돌, 최사위 휘하 고려군을 패배시키나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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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2차침입

3. 전개



3.1. 삼수채 전투


통주에는 정변의 주역인 강조가 행영도통사로서 30만의 병력을 이끌고 있었다.[2] 11월 25일, 강조는 병력의 대다수를 통주성 서남쪽 청강의 지류 3개가 합쳐지는 삼수채에 배치하였다. 이 때 고려군은 병력을 3분하여, 강조의 본대는 하천이 모이는 합수목에, 나머지 2개 부대는 각각 통주성과 인근 산을 등진 형태로 진을 쳤다.
고려군의 배치는 정석적인 포진이었다. 전쟁과 역사의 저자인 임용한 박사도 오자병법을 인용하며 하천으로 보호를 받으면서 배후 기지를 둔 포진 방식이라 평가했다. 물론 동절기여서 하천 자체가 흐르지는 않았지만 하천에 접한 언덕이 자연 방벽 역할을 해준다는 점을 활용할 수 있었다.
서전에서 고려군은 거란의 주력인 기병을 저지하기 위해 검차(劍車)를 전면에 배치, 거란군의 돌파를 막아내는 전과를 올렸다. 이에 강조는 거란군을 얕잡아보고 지휘를 태만히 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강조는 군사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한 부대는 통주의 서쪽에 군영을 두고 삼수(三水)의 합류점에 웅거하였으며 강조는 그 가운데에 머물렀다. 한 부대는 통주 근교의 산에 군영을 세우고 다른 한 부대는 통주성 부근에 군영을 두었다. 강조가 검차(劒車)를 일렬로 배치하여 두고 거란군이 쳐들어오면 곧 검차로 함께 공격하니, 모조리 물리치지 않음이 없었다. 거란군이 여러차례 물러나니, 강조는 마침내 적을 얕보는 마음이 생겨 사람들과 탄기를 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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兆引兵出通州城南, 分軍爲三, 隔水而陣. 一營于州西, 據三水之會, 兆居其中. 一營于近州之山, 一附城而營. 兆以劒車排陣, 契丹兵入, 則劒車合攻之, 無不摧靡. 契丹兵屢却, 兆遂有輕敵之心, 與人彈棊.

《고려사》 반역열전 1

이렇게 방심한 강조가 탄기를 하는 동안 거란의 장수 야율분노와 야율적로가 삼수채에 주둔 중인 본군을 급습했다. 기병의 치고 빠지기로 고려군의 진을 뒤흔들어 놓은 것. 보초병이 내습을 알렸지만 강조는 "입안의 음식처럼 적군이 적으면 오히려 좋지 않으니 많이 들어오게 놔두라."며 이를 일축, 결국 진을 돌파한 거란군에 의해 강조 본인이 생포되고 만다.[4] 더구나 이 강습돌파로 행영도통부사 이현운, 행영도통판관 노전, 감찰어사 노이, 양경, 이성좌 등도 덩달아 포로로 잡히고, 행영도병마부사 노정, 사재승 서숭, 주부 노제 등이 전사하는 등 고려군의 수뇌부가 일거에 무너지면서 고려의 주력 야전군이 싹쓸이당하게 된다. 대다수의 고려군들은 곽주 방면으로 도주하다가 3만여 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5]

거란 임금이 군사를 동산(銅山) 아래로 이동시키자, 강조(康兆)가 군사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와 싸우다가 패전하여 포로가 되었다. 행영도통부사(行營都統副事) 이현운(李鉉雲)과 행영도통판관(行營都通判官) 노전(盧戩) 및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의(盧顗)·양경(楊景)·이성좌(李成佐) 등도 모두 포로가 되었고, 행영도병마부사(行營都兵馬副使) 노정(盧頲), 사재승(司宰丞) 서숭(徐崧), 주부(注簿) 노제(盧濟) 등이 진영에서 전사하니 아군은 큰 혼란에 빠졌다. '''거란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수십 리를 추격해와 3만여 아군의 목을 베니 버려진 군량과 병장기를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고려사, 양규 열전 ##


3.2. 완함령 전투


곽주 방면으로 도주하던 고려군은 완함령까지 적들에게 추격당했다. 이 때 완함령에는 좌우기군장군 김훈과 김계부, 이원, 신영한 등이 매복해 있다가 도주하는 고려군을 추격해온 거란군을 기습, 더 이상의 추격을 막아내고 병력을 보존한 채 퇴각했다.

3.3. 통주성 전투


삼수채의 승전으로 기세를 탄 거란군은 곧바로 통주성을 공략한다. 공격 전 삼수채에서 생포된 문관 노전 등을 통주성으로 보내 항복을 종용하나, 통주성을 방어하던 중랑장 최질과 홍숙이 이들을 체포해 민심의 이반을 막았다. 방어사 이원귀, 부사 최탁 등과 성을 지켜내었고, 거란군은 12월 5일까지 2주 넘게 통주성을 공격했지만 통주를 점령하지 못하고 다시 남하하게 된다.

4. 여파


통주 전투의 패배로 고려 야전군의 전력 대부분이 증발해버렸고, 이어지는 곽주 전투에서 곽주성이 함락되고 서경 전투에서도 동북면의 병력을 가까스로 동원하여 수성하는 처지까지 몰리게 된다. 이는 결국 현종이 개경의 방어를 포기하고 나주까지 몽진하는 수모를 겪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편 거란 측은 생포한 강조를 이용해서 고려의 내분을 유도하려 해봤으나 강조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죽음을 택하며 전투의 승리를 전략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게 되었다.[6] 게다가 통주성 자체도 점령하지 못하여 남쪽의 곽주를 간신히 점령해 중간 기점으로 삼아야 했고, 결국 흥화진에서 거란군의 뒤를 밟아온 양규 장군이 곽주를 탈환하고 요 성종의 후방을 위협해 이를 신경쓴다고 고려 영토 내에서 장기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어 개경을 일시 점령했음에도 전쟁 자체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려의 역사상 가장 큰 패전이자 한민족의 역사에서도 칠천량 해전과 비견할 만큼의 대패인데도[7], 이상하게 인지도가 없다. 사실 이는 딱히 통주 전투만이 아니라 여요전쟁 자체가 현대에 다소 소외된 감이 있는 주제이기도 하며 칠천량 해전보다는 탄금대 전투에 비유하는 게 더 적절하다. 다른 형태의 주력 병종과 전술을 사용하는 두 세력의 '회전' 형태였다는 점이라거나 지휘관이 전투에서 패해 죽고, 주력군이 궤멸되는 전투의 패배로 왕이 피난까지 가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탄금대 전투와 유사한 점이 많다.[8]

5. 같이보기


[1] 원 40만 명이지만 고려군의 방해로 인해 20만 씩 나누어 남하했다.[2] 강조가 총괄하는 병력의 수가 30만이나 실제로 통주 전투에 동원된 병력은 이보다 적었을 가능성이 있다. 귀주 등 다른 지역들은 물론 수도 역시 방비할 필요가 있었기에 더더욱.[3] 국역본에서는 그냥 '바둑을 두었다'라고 번역했다. 彈棊라는 말이 '누군가와 바둑을 두고 있다'는 의미로도 쓰이기 때문인데, 이 부분은 국역본과 달리 '탄기를 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4] 고려사에서는 이 때 강조가 목종의 혼령이 일갈하는 것에 놀라 투구를 벗고 무릎을 꿇었다고 기록하였다.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강조가 목종을 떠올리며 자신의 실수를 후회한 것을 애둘러 표현한 걸로 보인다.[5] 전근대의 전투에선 진형이 무너지고 나서 사상자가 대거 발생하게 된다.[6] 맨처음에는 회유하나 오히려 '''"나는 고려인이다! 어찌 너의 신하가 될 수 있는가?!"'''라고 일갈했고, 화가난 요 성종이 가한 온갖 고문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중에 자신의 부하 이현운이 요 성종의 꼬드김에 넘어가 투항하겠다고 하자 오히려 박차고 일어나 그를 걷어차며 "너는 고려인인데 어찌 그럴 수 있냐?!"라고 호통을 쳤다. 여러모로 고려의 충신들 덕분에 요 성종의 계략이 차질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7] 배우 최재성은 이 두 전투의 주인공을 모두 연기하였다.[8]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실권자인 강조가 스스로 출전해 어느 정도 장군직으로서의 경력으로 상대했으나 패전했어도 결코 투항하지 않고 죽었으며 양규와 같은 충신들이 배후를 찔러버려 2차 침입은 단기간에 끝나버렸고 3차 침입 때도 아주 통쾌하게 복수해 버렸다. 임진왜란이 꽤나 전쟁이 길어지고 이순신바다에서 선전하기는 했으나 지상에서는 흐지부지해 질질 끌어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까지 지속된 것을 보면 엄연히 차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