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덕정

 

觀德亭
1. 개요
2. 창경궁 관덕정
3. 제주 관덕정
4. 대구 관덕정


1. 개요


조선 시대의 관아 건물의 하나로 이름의 유래는 예기 사예편에 나오는 "활쏘기란 그의 높은 덕을 살펴보는 것(射者所以觀盛德也)"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관덕당(觀德堂)이라고도 불렀으며, 관덕정이라는 이름 자체는 이미 고려 시대에도 존재하고 있었지만, 조선 시대에 처음으로 지방의 관아마다 활쏘기가 포함된 군사 훈련을 목적으로 세워지면서 관덕정이라고 하면 으레 조선 시대의 것을 가리키게 되었다.
하지만 지방 관아에 설치된 관덕정의 경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관아 건물들과 함께 헐려 나갔다. 건물 자체가 온존하는 것은 제주도에 있는 관덕정이 유일하며, 관덕정이라는 건물로서도 제주에 있는 것이 가장 유명하다.
현재에는 관덕정이라는 이름이 으레 활터에 붙는 이름으로 쓰이며, 창경궁에도 마찬가지로 왕이 활을 쏘던 관덕정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남아 있다.

2. 창경궁 관덕정




3. 제주 관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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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남아 있는 관덕정은 조선 시대에 처음 세워진 이래 현재까지 헐리지 않고 그 자리를 온전히 보존한, 현재 한반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관덕정 건물이다. 대한민국의 보물 제322호.
행정구역상 명칭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 2동. 세종(世宗) 30년(1448년)에 제주목사 신숙청이 처음 지었으며, 처음에는 3칸 건물이었지만, 이후 여러 번 중수와 개축 과정을 거쳐 지금과 같은 정면 5칸, 옆면 4칸의 단층 팔작지붕 양식으로 처마가 길고 건물 높이가 낮은 제주도 건축의 특징을 갖추었다. 당시 지어질 때 현판의 글씨는 제주판관 고득종[1]안평대군에게 부탁해 안평대군이 써주었으나 훗날 불타 없어져 현재 남아있는 현판의 글씨는 선조때 정승을 지낸 이산해의 글씨다. 건물 안에는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과 탐라형승(耽羅形勝)이라는 글씨가 걸려 있다. 각각 '호남에서 제일가는 정자'와 '탐라(제주)에서 가장 뛰어난 곳'이란 뜻이다. 호남이 언급되는 이유는 조선시대의 제주도는 호남인 전라도에 속한 고을이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미문화원으로 쓰인 적도 있는데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탁 트인 것이 아니라 문이 달려 있었다.
관덕정에는 한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제주목사 신숙청이 관덕정을 지을때 전국의 이름난 목수들을 한 데 모아 지었으나, 알수 없는 이유로 인해 다 지으면 무너지고 다시 지으면 또 무너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목수들이 이번에는 무너지지 않고 튼튼하게 지으리라 하고 공사에 열중하는데 한 노인이 지나가다 공사현장을 보고 "또 무너지겠군"하고 중얼거렸고 몇몇 목수들이 이를 들었다.

그렇게 신중하게 지었는데도 무너지자 목수들이 이를 기억하고 수소문하여 노인을 찾아 조언을 들었다. 노인이 "상량식을 할때 닭이나 돼지를 제물로 바치면 안되고 사람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며 조언하고 목수들이 당혹스러워 하자 노인이 한 가지 방법을 알려 주는데 "아무 날, 아무 때 상량식을 준비할때 솥장수가 그 앞을 지나갈텐데 큰소리로 '상량'이라 외치면 솥장수가 죽을 테니 그를 제물로 바쳐라."라고 알려 주었다.

목수들은 그 조언이 황당무계하다고 느꼈으나 달리 방도가 없어 상량식 날 그대로 따라했더니 지나가던 솥장수가 무슨 소리인가 하고 주위를 살피려 머리를 들어올리나 솥들이 무거워 넘어져서 깔려죽고 죽은 솥장수를 상량식 제물로 바치니 공사가 무너지지 않고 원래 목적대로 무사히 끝낼수 있었다 하더라.

관덕정이 위치한 곳은 제주에서 전통적으로 중심지였던 칠성통이 가까이 있고, 제주도 행정의 중심인 제주목 관아(2002년 복원)와 성주청이 있었고, 관아가 헐린 뒤에는 제주도청이나 경찰서, 건너편에는 식산은행이 위치해 있었고, 해방 뒤에는 관덕정 바로 옆에 미군정청이 설치되었다. 덕분에 관덕정 앞에서는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사건들이 줄줄이 일어났는데, 당장 신축민란 때는 제주성에 입성한 이재수가 관덕정 앞에서 악질 봉세관에 빌붙어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고 천주교를 앞세워 제주의 토속신앙을 파괴한 사이비 신자들을 잡아다 처형했고, 4.3 사건을 촉발시킨 3.1절 발포사건이나 한라산 남로당 무장대의 사령관 이덕구의 시체가 관덕정 앞에 본보기로 내걸렸다.[2] 관덕정 앞에서 '산폭도' 혹은 '군경 가족'으로 몰려 공개처형당한 사람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고. 그야말로 '''관덕정 한 곳에서 제주 역사의 물결이 몇 번이나 뒤집히고 요동쳤다'''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제주목 관아의 복원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던 제주의 주요 관공서가 이전되었고, 원래 관덕정 앞에는 제주도 출신 재일교포들이 기증한 분수대도 있었는데[3] 관아 복원을 이유로 철거되었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제주목 관아가 복원된 것은 좋지만 대신 관덕정 앞이 예전만큼의 제주의 중심지 역할을 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에 관덕정을 중심으로 이어져 왔던 제주의 고유한 광장 문화가 퇴색되었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이밖에 주요 흑역사관덕정 살인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다. 관련 항목 참조.

4. 대구 관덕정


대구 관덕정은 대구읍성의 남문이었던 영남제일문 밖 서남쪽 200보 지점, 행정구역 주소로는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2가 245번지로 동아백화점 건물 뒤쪽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제주보다는 늦은 영조 25년(1749년)에 세워져서 무과 시험장으로 쓰였는데, 지금의 대한적십자병원 대구지사[4] 부지 및 동아쇼핑 앞까지 모두 대구 관덕정의 앞마당에 해당했다.
임진왜란 이후 대구에 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대구 뿐 아니라 경상도 일대의 중죄인들 역시 대구에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가톨릭 신자들도 관덕정 앞마당[5]의 「관덕정 말랭이」라 불리던 곳에서 처형되었다. 이곳은 대구감영으로 이송된 죄인들을 처형하던 3대 처형지의 하나였다.[6] 한국 가톨릭에서는 이러한 사연으로 이후 관덕정을 성지로 기념하고 1991년에 원래 위치 건너편에 관덕정순교기념관을 세웠는데, 가톨릭뿐 아니라 천도교(동학)에게도 대구 관덕정이 중요한 성지인 것이 '''교조(敎祖)인 최제우가 이곳에서 처형'''당했기 때문.[7] 천도교에서도 이곳을 성지로서 기념하려고 건물을 사들이기도 했지만, 해방 뒤에 건물이 헐려 버렸다고. 지못미. 현재는 동아백화점 바로 앞 도로변에 이곳이 천도교의 교조 최제우가 처형당한 성지로써 대구 관아의 관덕정이 위치했던 곳임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관덕정이 가톨릭의 순교 성지로서 정비되기 시작한 것은 1984년한국 가톨릭 전래 200주년을 맞아 병인박해순교한 이윤일 요한이 당시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면서부터였다.[8] 천주교 대구대교구는 그가 순교한 관덕정 처형장으로 알려진 대한적십자병원 옆 부지 155평을 확보한 뒤 1985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1991년 5월 31일 개관하였다. 내부 지하에 경당이 있고 경당 안에는 성(聖) 이윤일 요한의 유해가 안치된 돌제대와 영정, 당시 형틀로 쓰였던 황새바위가 함께 전시되어 있다.

[1] 본관은 제주 고씨. 제주목관아의 부속건물인 홍화각의 현판 글씨를 쓴 인물이다. 홍화각 현판의 진품은 삼성혈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고 현재 홍화각의 현판은 그것의 복제품이다.[2] 제주 출신 소설가 현기영의 자전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라는 제목은 그때 관덕정 앞에 내걸렸던 이덕구의 시체를 은유한 표현이다.[3] 오사카 거주 재일교포 가운데 60%가 제주 출신이고 1961년 재일 제주도민협회가 결성될 정도로 재일교포 가운데는 제주 출신들이 많은데, 이들 가운데는 4.3 사건의 무차별 학살을 피하기 위해 달아났거나 혹은 살아남기 위해 학살에 가담하고서 제주에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어 도망치듯 떠난 사람도 있었다.[4] 병원 자체는 2010년에 폐원되었다.[5] 지금 순교기념관이 들어서 있는 것이다.[6] 나머지 2곳은 봉덕동 동북쪽에 있었던 「장대벌」과 비산동 날뫼 뒤에 있던 「꼬부랑개」.[7] 정확히는 지금의 대구 약령시(藥令市) 앞 덕산시장(염매시장)의 한복판, 지금의 계산아파트가 들어선 곳이다.[8] 한국 103위 순교성인 문서 참조. 해당 문서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이는 바티칸성 베드로 성당이 아닌 곳에서 행해진 '''유일한''' 시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