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민란
- 관련 문서 : 천주교 제주교구
1. 소개
'''辛丑民亂'''
1901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제주 토착민들의 가톨릭 신자 학살 사건.
주동자인 이재수의 이름을 딴 '이재수의 난'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공식 명칭은 신축민란이다.
가톨릭에서는 "가톨릭 신자가 희생되었다."라는 의미로 '제주신축교난(濟州辛丑敎難)'이라고 부르며, '제주민란(濟州民亂)'으로 불리기도 한다. 다만 단순히 종교적인 문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들이 부린 행패와 엄청난 범죄행각으로 인한 사건이기 때문에 '''교난'''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런 문제제기로 인해 일방적인 피해의 느낌이 강한 '교난'보다 어감이 좀 완화된 '신축교안(辛丑敎案)'이란 용어 또한 쓰이고 있다.
관련 기사
"교인들이 비록 다른 나라의 글을 배웠다고는 하나 본시 우리나라의 신민인데, 한번 교회에 들어가면 관(官)에서도 다스릴 수가 없고, 감히 두려움도 없이 남의 재물을 빼앗고 남의 소송에 간여하여도 감히 누구도 어찌할 수가 없고 심지어 인명을 살상하여도 감옥에 가두지 못합니다. 금번 삼군(제주, 대정, 정의)의 민인들이 세폐를 견디지 못하여 일제히 모여서 호소한 것이 어찌 교인들에게 관계되겠습니까? 그런데 군기를 빼앗아서 성을 함락시키고 발포하니 이게 역적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죽인 것은 역적인 것이요 양민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비록 죽어도 원한이 없습니다."
ㅡ 이재수#s-2 체포된 후.
2. 제주도에 가톨릭이 오다.
19세기말 대한제국 시절, 가톨릭은 제주도에서 자리를 넓혀가면서 탐관오리 및 모리배들과 손잡고 더러운 짓을 자행했는데, 그 사례로 '''외세를 뒤로 한 가톨릭 신자라면 거리에서 행패를 저질러고 약탈을 해도 처벌하질 못했다.'''[1] 이를 막아야 할 프랑스인 신부들은 되레 이들을 처벌하려는 군졸이나 백성을 죄인으로 몰아 구타하는 걸 묵인했고 교인을 빙자한 모리배들을 가톨릭 신자라며 두둔하기에 바빴다. 일단 성당으로 달아나면 관리들도 잡지 못했기에 온갖 행패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가톨릭 신자라면서 마구잡이로 강간을 저지르곤 성당으로 달아난 자들도 적지 않았다. '''살인을 저질러도 체포는 커녕 시체검시조차 하지 못하게 하였고, 천주교인이 유부녀를 강간하거나 처녀를 윤간해도 아무런 항의조차 할 수 없었을 지경이었다.'''
거기에 봉세관 강봉헌이 이전에 사라졌던 민포(民布)를 다시 징수하기 시작했고, 가옥세, 수목세, 가축세, 어장세, 어망세, 염분세, 노위세, 잡초세 등의 온갖 잡세까지 징수해 갔다. 게다가 징수하는 과정에서 천주교인 깡패들을 고용해 강압적으로 징수를 하니 가톨릭에 대한 반감이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제주도는 진상품으로 인해서 극심하게 가난한 지역이었고 그래서 제주도민들은 외세 종교의 평등 사상과 문물 도입으로 생활이 나아지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가톨릭은 제주도민들의 기대를 저버렸고, 제주도민들의 분노는 쌓여갔다.
3. 가톨릭 신자들을 처벌하라!
결국 1901년 2월, 훈장이었던 현유순, 그의 아버지 현규석, 장의(掌議) 오신락이 성당으로 끌려가 고문받다 오신락이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참다 못한 제주도 내 유지들이 4월에 교폐와 세폐를 막기 위해서 상무사(商務社)를 조직하게 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제주도민들이 이곳에 모여서 가톨릭과 교회의 폐해, 지나친 세금 등을 토로했고 이를 제주목사에게 시정해줄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상무사는 민회(民會)를 개최하고 온건적인 방향, 요즘 말로 평화적인 요구와 시위로 전개 되었는데…
같은 해 5월 14일, '''가톨릭 신자들이 상무사의 지도자였던 오대현을 납치해 가는 사건이 벌어지자 이재수를 새로운 지휘자로 추대하고 일본인들에게서 무기를 구입해 제주도 내의 여러 가톨릭 성당들을 불태웠다.'''[2] '''당황한 프랑스인 신부들과 천주교인들은 제주성으로 피난갔지만, 제주성을 지키던 대한제국 주둔군조차 그다지 이들을 지켜줄 마음이 없었고''' 결국 5월 28일, 몰려오는 민군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3] 그렇게 성으로 들어온 민군들은 그동안 악명이 높던 자들을 골라 참수했는데 그 수가 300명에 이르렀고 몇몇 가톨릭 신부들도 한패라고 하여 같이 끔살당했다. 당시 제주도의 고위 관리들도 가톨릭인들이 관리들도 무시하며 저지른 짓에 이를 갈아왔기에 나몰라라 하였고, '''제주도 군졸들은 되레 이들에게 순순히 길을 열어주었으며, 대정군수 채구석은 아예 반가톨릭 단체를 만들어 이들에게 무기를 지급하며 뒤로 돕기까지 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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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해군이 찍은 당시 제주성 부근의 가톨릭 신자 시체들
이들 대다수가 가톨릭을 들먹이며 행패를 저지른 자들이라 증오를 가득 받아서 이렇게 끔살당하고도 묻히지 않고 그대로 바깥에서 썩어나갔다. 나중에 대충 집단 무덤을 만들어 파묻어버렸다고 한다. 이를 봐도 그만큼 가톨릭에 대한 악명이 자자했음을 민과 관 모두가 공감하고 도왔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참수된 신부들이 모두 프랑스인이었기에 프랑스 측이 이를 빌미삼아 제주도에 프랑스군 군함 2척을 파병하면서 일이 커져 갔다.
4. 민란의 끝, 그리고 이재수의 처형
5월 31일, 프랑스 해군 함대가 제주도에 도착했고, 대대적으로 참전할 뜻을 보이자 비로소 대한제국 정부도 급히 제주도 측에 사람을 보내서 자칫하면 외국 군대가 참전하여 무수한 제주도민이 학살될 수도 있다는 것을 전했다.
또한 이는 당시 동아시아 정세에 큰 영향을 야기할 수도 있었던 사건인데 제물포에 주둔중이던 프랑스해군 군함들이 갑자기 어디론가 빠져나가는 것을 본 일본 해군 군함들이 프랑스 군함들을 추격하여 제주도 앞바다로 따라온 것. 당시 일본 해군은 프랑스 함대에 조선의 내정에 개입할 경우 일본군이 사태에 개입하겠다고 통보했고 자칫 제주도 앞바다에서 프랑스 군함과 일본 군함이 교전을 벌일 뻔했다. 당시 세계 정세를 보면 일본은 영국,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였고 프랑스는 영국과 대립 관계였다. 참고로 훗날 러일전쟁의 당사자인 러시아도 영국과 대립하며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고 있었으며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였다. 자칫 한반도를 가지고 열강들이 각축전을 벌인 러일전쟁과 유사한 일이 2~3년 일찍 발생할 뻔한 것이다. 프랑스 함대와 일본 함대가 잇달아 제물포를 빠져나간것을 탐지한 미국과 대한제국은 즉시 미국 외교관과 대한제국 관리들을 탑승시킨 배를 제주로 보냈고 이들의 중재로 프랑스 함대는 살아남은 일부 천주교 신자들을 데리고 인천으로 물러난다.
이미 동학농민운동 당시 일본군이 멋대로 쳐들어와 백성을 학살하던 걸 겪었거니와 이번에는 프랑스가 들어와 간섭할 것을 우려한 정부에선 깊이 우려했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이재수는 "정부가 외국 군대를 겁내고 백성을 지켜주지도 못하냐"면서 비웃었다고 한다.( ) 하지만 그는 이대로 있으면 무수한 제주도민이 학살될 것을 알고 1901년 6월 10일, 1만명에 달하는 제주도 백성의 저항군을 자진해산시켰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가톨릭, 대한제국 정부와 교섭을 통해 요구조건이었던 교폐와 세폐방지를 보장 받았다.
이재수는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지기로 하고 자수했다. 이에 친우인 강우백이 "너만 죽게 할 수 없다"면서 같이 자수했으며, 이 학살을 지지하던 양반 출신의 오대현도 자수했다.[5]
오대현은 "관노 출신의 용기 있는 이가 모든 책임을 다하는데, 내 어찌 양반으로서 가만히 볼 수 있겠는가. 천한 것이라며 그를 얕보지마라. 그의 기개는 대장군감이었다."라며 이재수를 칭송했다. 그리고 "백성들이 괜히 무기를 들고 나섰겠는가? 조정의 무책임과 외세의 약탈로 피해 보는 백성을 생각해 달라."라고 당시 조정과 가톨릭 측을 법정에서 꾸짖기까지 했다.
이리하여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은 1901년 10월 9일,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식 재판을 받고 교수형(영화에선 참수형)을 당하여 삶을 마쳤고, 제주목사 김응석과 대정군수 채구석[6] 은 파직되었으며 몇몇 주동자들은 징역형을 살았다. 또한 또 하나의 원흉이었던 강봉헌은 이재수와 도민들의 요구로 인해 재판을 받고 파직당했다.
하지만 이들 셋이 모든 책임을 졌기에 이재수의 유일한 혈육인 누이동생 이순옥과 오대현의 아우와 강우백의 식솔들은 일체 처벌받지 않았다. 또한 이재수 등이 봉기군을 해산하고 자수함으로서 프랑스 해군 등 외국군은 개입할 명분을 잃었고, 제주 도민들의 피해도 줄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재수 등은 주민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는 죽은 가톨릭 신자들의 묘지를 안장하는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는 1903년말이 되어서야 사라봉(沙羅峰) 아래 황사평(黃沙坪)에 안장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또한 5,160원의 배상금이 프랑스에 지급되었으며, 배상금의 이자인 722원은 제주도민들의 탄원으로 석방된 채구석이 도민들로부터 걷어 지급했다.
5. 평가
외세 종교로 인한 충돌과 서양 군대의 침입, 3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냈던 여러가지로 큰 역사적인 사건이건만 이상하게도 이 사건은 그동안 한국 근대사에서 드러나지 않았다.[7] 한반도 본토에 비해 제주도 향토사에 대한 관심 자체가 미비하고, 다른 항쟁에 비해 파급 효과가 적은 것이 그 이유로 볼 수 있다.[8] 그나마 1961년 이재수의 혈육 이순옥 씨의 주도로 제주도민들은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 세 사람을 기려 삼의사비라는 비석까지 세웠다. 비석의 위치는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있다. 하지만 당시 가톨릭계의 반발로 인적이 드문 곳에 감춰진 이 비석은 1997년 새로운 3의사비가 세워지면서 그 비석 밑에 묻혀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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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만든 3의사비. 새로 만든 비 아래에 이순옥 씨가 1961년에 주도하여 만든 3의사 비가 묻혀 있기에 제주도에서도 이걸 복원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3의사비의 비문에 대해서 논란이 조금 있었다. 비문의 내용 중 “여기 세우는 이 비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식이 될 것이다.", "1801년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그의 아내 정난주(丁蘭珠)[9] 마리아가 유배되어 온 후 딱 100년 만에 일어난 이재수 난은 후세에 암시하는 바가 자못 크다"란 부분에서 가톨릭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 측에서 이에 대해 지나친 내용이라고 반발하였으나 비석의 건립 자체를 막지는 않았다. 비문의 전체 내용은 다음 링크를 참고하기 바란다. #
일본의 영향 등이 잘 나타나 있지 않은데 이 문서 등을 참고. 다만 링크에 나온 내용은 민란을 일으킨 세력들에 대해 너무 부정적으로 묘사된 것에 비해 당시 천주교도들의 만행에 대해서는 적혀 있지 않으므로 걸러봐야 할 것이다.
6. 가톨릭 측 반응
2011년에 가톨릭에서 당시 가톨릭 신자 사망자들을 '''복자'''로 시복 추진하겠다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으나, 이후 한국 가톨릭에서 시복시성을 준비한 124위에는 이재수의 난 관련자가 단 1명도 없다. 상술된 것처럼 가톨릭 측 피살자의 상당수가 가톨릭의 이름을 내세워 강간, 고문 등을 저지른 '''파문되어야 마땅한 엄연한 중범죄자'''들이라, 이들이 시복된다면 다른 제대로 된 순교자들의 얼굴에 먹칠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가톨릭이 정상적으로 심사한다면 탈락하는 게 당연.
가톨릭출판사에서 펴낸 순교의 맥을 찾아서(2009)를 보면 646쪽에 나온 부분이 비가톨릭 쪽으로 보면 굉장히 거슬릴 수도 있다.
다만 이 책은 지은이(신부 및 가톨릭 관계자)가 여럿이라 그런지 반응이 다르니, 무턱대고 "가톨릭이 피해자라능"이라며 징징거리는 불쏘시개는 아니다. 바로 다음 페이지인 648쪽에서는 이 난에 대하여 4가지로 압축하여 쓰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결정타가 된 온건파 지도자 납치는 없다고 침묵한다."지방관리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들의 비리를 가톨릭 쪽으로 넘겼으며 무당 및 토착 세력이 도왔다"고 나오면서, 오대현과 이재수에 대하여 그저 반란자, 폭도로 묘사하고 있으며 가톨릭 신자 학살이라고 쓰고 있다.
이 일이 있었다고 제주도에서 가톨릭의 교세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선교사들이 와서 다시 선교를 해서 어느 정도 다시 교세를 세우고 학교까지 만들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선교사들이 자국으로 징병당해서 다시 쇠퇴...1. 일부 가톨릭인들의 비리 및 행패를 저질렀으며, 비리를 저지른 관리들이 가톨릭인을 고용하여 더 행패를 조장했다.
2. 이에 대하여 프랑스인 신부들은 그저 무조건 옹호하면서 외세와 종교에 대하여 제주도민들에게 증오를 받았다.
3. 한국 침탈을 노리던 일본이 무기를 제공하고 서로 분열을 조장했다.
4. 거기에 무조건인 가톨릭적인 믿음을 강요하며 무속 및 토속 신앙 및 불교같이 오랫동안 자리를 한 이들과 갈등이 빚어졌다.
당시(1902년) 선교사가 상부에 보낸 기록에 의하면, 신입 신자들은 그렇게 많은 살인이 처벌받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대정(大靜)지역은 여전히 적의에 차서 도망가는 몇몇 신자들을 놓친 것을 한스러워 하고, 정의(旌義) 지역은 좀 온건하나 가톨릭인을 자처하는 불량배들이 외교인들에게 행패를 부리는데, 이들 대부분은 자신들에게서 쫒겨난 이들로서 주민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으로서 자신의 가족이 학살당했다는 구실 하에 돈을 갈취하고, 이에 선교사는 이들 여러 명을 관아에 보내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10]
이 사건의 발단에 있어서 일본의 영향이 상당했는데, 이런 제주 가톨릭교회와 일본인의 갈등은 이어져서 1902년 6월 양시중(梁始中) 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교회와 제주 향촌 사회와의 갈등은 사라지지 않아. 1903년 초에는 정의군 지역에서 가톨릭교회의 타파를 요구하는 문서가 나돌았으며, 호근리에서는 허 좌수(許座首)라는 자가 가톨릭 결사를 조직한 적도 있었다. 결국 1902년 김명필 사건이 터져 갈등이 드러났다.
그래도 천주교 제주교구는 이 사건에 대하여 유감과 사죄를 표했고 2016년 "신축화해의 길"을 만들어 자신들의 과오를 시인한 다음 화해했다.
7. 기타
- 이재수의 유일한 혈육 이순옥 씨는, 1982년 86살로 작고할 때까지 독신으로 살면서 오빠를 알리고자 노력해왔다. 아쉽게도 3의사가 묻힌 무덤은 일제강점기에 사라져버렸기에 그녀에겐 더더욱 한맺힘으로 남았다. 소문으로 가톨릭 측에서 주도했다는 말까지 있었다. 당시 한국 가톨릭의 지도자가 일제에 부역하고 조선인을 인종차별하던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란 걸 감안하면 상당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이규태의 에세이에 따르면 21살부터 예수를 믿었다고 하며[11]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재수 본인도 압송되기 전 하느님에게 자신의 유명을 빌어달라고 했다고 한다.[12]#
- 한국 교과서는 물론 역사책에서도 잘 언급되지 않던 이 사건은 제주도 출신 작가이기도 한 현기영에 의해 《변방에 우짖는 새》라는 제목으로 재조명되었다.[13] 1999년에는 박광수 감독의 영화 <이재수의 난>으로 대대적으로 세상에 알려졌지만, 영화에서는 이재수가 너무 광기에 찬 모습으로 나와 제주도에선 "이재수에 대한 모욕"이라는 비난이 많았다. 당시 천주교 제주교구에선 이 영화가 가톨릭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알리는 게 아닌가 우려도 했었다. 그러나 이를 두고 가톨릭 여러 고위 성직자들은 "당시만 해도 제국주의 종교로서 세계에서 학살과 차별을 조장한 가톨릭의 역사를 되새기고 반성할 기회"라 하여 "영화에 대한 반대 시위와 같은 일을 저지르면 안 된다"고 주장하긴 했다. 이런 점에서는 일부 타 종교들에 비해서는 확실히 나은 편이 있다. 어찌 됐건 영화는 기대 이하 평과 서울관객 5만이라는 심히 저조한 흥행으로 참혹하게 사라져서 이 사건은 다시 묻혔다. 제작비만 40억원을 들였기에 참패했고, 박광수 감독은 이후로 독립영화를 주로 감독하고 있다. 영화 주연으로는 이정재, 심은하 등 지금 생각해 보면 상당한 배우들이 캐스팅되었지만, 무진장 재미없었다. 2021학년도 수능 대비 수능완성 국어에 해당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의 대목이 수록되었다.
- 2003년에서야 당시 사망자 317명 이름이 담긴 책인 삼군평민교민물고성책(三郡平民敎民物故成冊.1901년 7월)이 공개되었다. 여기에는 정확한 사상자 수와 사상자의 이름까지 나와있는데 그동안 7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벌어졌다는 인식[14] 과 달리 실제로는 그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다. 이 책자에 의하면 가톨릭 신자들은 모두 309명이 희생당했으며, 민군은 모두 8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참고로 절대 다수가 남성이었다.
- 안타깝게도 본토뿐만 아니라 제주도민들 사이에서의 인지도도 높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민들에게 4.3 사건은 남 일 같지가 않아서 알지만, 신축민란에 대해선 그런 사건도 있었냐는 말이 나온다.
[1] 특히나 프랑스인 신부들에게는 고종이 지급한 여아대(如我待), 즉 "나(고종)처럼 대하라."는 특권이 있었기에, 제주에서는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2] 일본이 가난한 섬 사람들에게 꽤 싼 값에 무기를 제공한 점을 통해 동학농민운동 이후 대한제국에서 전쟁을 구실 삼아 간섭하려고 했지만 프랑스가 끼어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일본이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프랑스가 일본에게 제주도민들의 일제 무기 구입에 대하여 일본을 탓하자, 일본은 "일본이 공식적으로 한 게 아니라 몇몇 무기업체들의 짓"이라고 변명했다.[3] 일단 명색이 주둔군이다보니 공격을 하긴 했다. 제주목사 김응석은 일단 공격 명령을 내려 몇 차례 사격을 가하여 몇몇 민군을 사살했으나, 그것으로 할 일 다했다고 주둔군에게 사실상 전투 중지명령을 내리고 성문을 열어주었다. 덕분에 민군 측 사망자는 8명으로 그쳤다.[4] 다만 채구석은 신부들 중 일부를 보호해주거나 이후 프랑스 측이 눈에 불을 켜고 조사해도 그리 큰 문제가 없다고 할 정도로 프랑스인들을 살려주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파직당할때 프랑스 측이 오히려 어이없어 할 정도.[5] 이렇게 백성들이 공권력의 부패에 맞서 무장봉기한 다음, 관과 협상을 하여 받아들이고 타협하는 대신 지도부 몇몇만이 총대를 메고 자수해서 목숨을 대가로 내놓는 사례는, 조선 후기의 '민란'에서는 거의 관례적으로 반복되는 사례이다. 이때 지도부로써 봉기의 모든 책임을 지는 자를 장두(狀頭)라고 하는데, 문자 그대로 정부를 상대로 그 정부 공권력의 비리를 고발하는 고소장의 고소인으로써 맨 첫머리에 이름을 올렸다는 뜻이다. 국어사전에도 '장두를 서다'라는 단어가 실려 있으며 그 뜻은 현대 한국어의 관용어에서 '총대를 멘다'라는 표현의 의미와 같다.[6] 배상금 부담을 조건으로 풀려났다. 이 배상금 때문에 가세가 기울어 힘들게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불가능으로 여겨질 정도로 난공사인 천제연 도수로공사를 완성시켜 5만평 가량의 황무지를 농지로 탈바꿈 시켰다. 참고로 그의 5남인 채몽인(蔡夢印)이 세운 기업이 애경그룹이다. 다만 며느리 장영신 회장이 천주교 신자인데다 제주항공이 누구네 회사인지 생각해보면 참으로 묘하다.[7] 한국사 교과서에서조차 언급이 없다.[8] 또한 1885년 러시아 함대가 일으킨 제주성 위협사건도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9] '정명련'이라고도 한다. 정약용의 큰형인 정약현의 딸이다. 정 마리아가 유배 갈 당시 아들 황경한은 2살이었고, 어머니와 헤어져 추자도에서 자랐다.[10] 교구연보;1878~1940. 362페이지[11] 출처: #. 정황상 개신교일 가능성이 높다. 제주교구에서 그녀의 교적을 확인하지 못하였기 때문. 이순옥 자신은 "정녕 오빠는 하나님의 사자이십니다. 하나님을 팔아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들을 꾸중하러 보내신 겁니다. 오빠는 하나님 편입니다."라고 전했다고 한다. [12] 영화에선 다 큰 처녀로 나오지만, 당시 이순옥 씨는 고작 5살밖에 안 되었다. 현지에서는 '오돌또기 할망'이라고 불렸다는 모양.[13] 재일 출신의 소설가 김석범(본적 제주도)의 소설 《화산도》에서도 일부 언급되기는 하지만 거의 현기영에 의해서 발굴된 사건이라고 해도 좋다. 사건 당시인 1901년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김윤식이 남긴 일기 《속음청사》를 기본 베이스로 황성신문 같은 당대 신문 기사들도 찾아가면서 자료를 모으고 썼다고.[14] 그런데 이 인식은 가톨릭 측 주장이었다. 그만큼 자기들 신자들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다가 이게 공개되면서 이제 300~350명, 이전과 달리 절반 정도로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