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관덕정
1. 개요
昌慶宮 觀德亭
창경궁의 정자이다. 춘당지 동북쪽 야산 기슭에 있다.
주로 활쏘는 곳으로 활용하였다.
이름은 《예기》의 〈사의(射義)〉 편에 나오는 "활쏘기란 그의 높은 '''덕'''을 '''살펴보는''' 것(射者所以'''觀'''盛'''德'''也)"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지방에 있는 관아들에도 관덕정이란 이름의 정자가 많이 설치되었다. 대표적으로 제주도의 관덕정을 들 수 있다. 현재에도 여러 활터의 이름으로 많이 쓰인다.
2. 역사
《궁궐지》에 의하면 ‘관덕정은 영화당의 동쪽 잠원봉 북쪽에 있고 남쪽에는 잠단(蠶壇)이 있는데 바로 성종 3년(1472)에 채상단(採桑壇)을 옛터에 지었다. 공혜왕후 한씨가 항상 잠례를 거행하였다.’고 한다. 이를 보아 조선 전기에는 누에 관련 행사를 하는 공간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 임진왜란 때 불탄 후 1642년(인조 20년)에 그 자리에 관덕정을 세웠다. 처음에는 취미정(翠微亭)이라 부르다가 1664년(현종 5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위에 언급했듯 활쏘는 곳으로 주로 쓰였으며, 이외에도 관덕정 앞 빈터에서 군사훈련과 무과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창경궁이 창경원이 되면서 많은 전각들이 헐렸음에도, 관덕정은 살아남았다. 다만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이후 1980년대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3. 구조
- 1층[1] 목조 건물이다. 네모난 돌 기둥을 놓고 그 위에 사각 목조기둥을 세웠다. 정면 1칸, 측면 1칸이다. 가운데에 기둥이 있어 얼핏보기엔 정면이 2칸처럼 보이지만, 가운데 기둥은 샛기둥이라 하여 구조적 역할을 하지 않는다. 대신 창호가 비정상적으로 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겉면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는 초익공식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하였다. 그 위에 용두만 두고 잡상은 올리지 않았다. 단청은 모루단청[2] 으로 칠해 절제되면서도 화려한 느낌을 주었다. 주춧돌 사이는 삼화토로 마감하고, 가장자리에 둥근 구멍을 뚫어 공기가 통할 수 있게 하였다.
- 관덕정 뒤편으로 숲이 우거져 굉장히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낸다. 특히 단풍이 물든 가을의 모습이 아주 그만이라고. 여러 임금들이 이에 대한 감상을 시로 남겼다. 그 중 정조가 지은 시 ‘관덕풍림(觀德楓林)’을 소개한다.
> 과녁판이 울릴 때면 화살이 정곡을 맞히는데 / 畫鵠鳴時箭中心
> 구름과 안개로 장막이 선경 숲을 에워쌌네 / 雲霞步障擁仙林
> 삼청동(신선이 사는 곳)의 물색은 원래부터 이러하기에 / 三淸物色元如許
> 즐겨 제군과 함께 취하기를 금치 않노라 / 樂與諸君醉不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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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겨 제군과 함께 취하기를 금치 않노라 / 樂與諸君醉不禁#
- 이외 관덕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 포스팅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