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왕
[clearfix]
1. 개요
백제의 제6대 국왕이자 건길지.
2. 생애
초고왕의 맏아들로 키가 7척[4] 에 풍채가 빼어나 비범했다고 한다. 제7대 사반왕은 그의 맏아들이고 제11대 비류왕은 둘째 아들이라고는 하는데 그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온조(溫祚)계 왕족 출신이며 제6대 구수왕에 이르러 그동안 정권을 잡던 온조계 왕족에 큰 변동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仇首王【或云貴須】肖古王之長子 身長七尺 威儀秀異 肖古在位四十九年薨 卽位
구수왕(仇首王)【혹은 귀수(貴須)라고도 하였다.】은 초고왕(肖古王)의 맏아들이다. 키가 일곱 자(尺)요 위엄과 거동이 빼어났다. 초고가 재위 49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이 무렵의 백제는 아직 부족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연대가 정확하다 해도 국가 체제가 성립된 후의 재위와는 의미가 다를 수 있다.[5]
구수왕의 치세는 말갈, 신라 등과의 전투로 얼룩져있다.[6] 게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구수왕 말기에 들어서는 자연 재해까지 발생. 연맹 체제 하에서 이러한 일들은 구수왕이 속한 초고왕계 세력의 몰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결국 사반왕이 쫓겨나며 고이왕이 즉위하는 계기가 된다.
3. 전쟁 일지
- 216년 음력 8월, 말갈이 백제의 적현성(赤峴城)[7] 을 침범하였으나 성주가 굳게 지켜 막아냈고 구수왕이 친히 기병 8백여 명을 이끌고 말갈을 추격하여 사도성(沙道城) 아래에서 크게 이겼다.
- 217년 음력 2월, 사도성 옆에 2개의 목책을 설치하였는데 동서로 서로 떨어진 거리가 약 10리였다. 적현성(赤峴城)의 군졸을 나누어 보내 지키게 하였다.
- 218년, 왕이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장산성(獐山城)을 포위하자 신라 내해 이사금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여 백제군이 패하였다.
- 220년, 백제 왕성(王城)에 큰불이 나자 말갈이 북쪽 변방을 침략하였다. 하지만 군사를 보내어 막아내었다.
- 222년 음력 10월,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우두진(牛頭珍)을 침범하여 신라 장수 충훤이 이끄는 군사 5천여 명을 웅곡(熊谷)에서 크게 이겼다.
- 224년 음력 7월, 신라의 일길찬(一吉湌) 연진(蓮珍)이 쳐들어 왔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 229년, 말갈이 우곡(牛谷) 경계를 침범해 사람과 재물을 노략질하여 왕이 정예군 300여 명을 보내 막게 하였으나 적의 복병에 걸려 크게 패하였다.
4. 그 외
그의 후손으로는 근구수왕이 있다. 족보상 근구수왕은 구수왕의 증손자이나 사실일 가능성은 적다. 초고왕과 근초고왕의 관계처럼 근구수왕도 구수왕 2세를 뜻한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구수왕 본기'''
一年 구수왕이 즉위하다
三年秋八月 말갈이 적현성을 공격하다
四年春二月 사도성 옆에 두 곳의 목책을 세우다
五年 군사를 보내 신라의 장산성을 공격하다
七年冬十月 왕성 서문에 화재가 발생하다
八年夏五月 동쪽 지방에 홍수가 발생하다
八年夏六月 일식이 나타나다
八年秋八月 한수 서쪽에서 군사를 사열하다
九年春二月 제방을 수축하다
九年春三月 농사를 권장하다
九年夏六月 서울에 물고기와 비가 함께 떨어지다
九年冬十月 신라의 우두진을 공격하다
九年冬十一月 일식이 나타나다
十一年秋七月 신라의 연진이 침입하다
十一年冬十月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다
十四年春三月 봄에 우박이 내리다
十四年夏四月 큰 가뭄이 들어 동명왕의 사당에 제사지내다
十六年冬十月 왕이 한천에서 사냥하다
十六年冬十一月 전염병이 돌고, 말갈에게 대패하다
十八年夏四月 밤알 크기의 우박이 내리다
二十一年 구수왕이 죽다
[1] 맏아들[2] 둘째 아들. 그러나 연대가 맞지 않아 구수왕의 아들이 아닐 것이라고 학자들은 파악하고 있다.[3] 비류왕의 배다른 아우. 마찬가지로 구수왕의 아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4] 7척을 m로 환산하면 2m가 넘는다 한다. 지금도 2m를 넘으려면 굉장히 어려운데다 커도 불편하다.[5] 백제가 중앙 집권 국가로 변모한 것은 고이왕 때이다.[6] 다만 이 말갈은 만주의 말갈이 아니라 말갈 문서 2단락의 일명 가짜말갈이라는 예맥 계통 세력으로 보는 설이 있다. 신라도 경주가 중심지인 우리가 아는 신라가 아니라 나중에 신라로 흡수될 진한 계통의 나라를 신라로 소급해 기록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아직 한성의 백제와 경주의 신라가 서로 국경을 맞댈만큼 영토를 넓혔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7] 적현성은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일대라는 설과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일대라는 설 2개가 있다. 문제는 초고왕 시대에 적성 일대는 신분활국이 있었고 세종시 일대에는 마한의 맹주 목지국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는 것. 초고왕과 구수왕 시절의 백제는 적성이든 세종시든 어느 쪽이든 간에 백제의 영토로 지배하지 못한 상태였다.